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논평

 

 

 

 

 전철 군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논평
 

김경재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 조직신학)



전 철 군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연구논문은 수준 높은 글이면서 동시에 제3의 밀레니엄의 여명을 앞둔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형태변화를 위해서도 시의적절한 주제를 다루었다고 본다. 위 글의 필자는 서론에서 연구의 의의를 언급하고, 글의 2장과 3장에서 에크하르트 신비주의 배경과 그의 생애를 조명함으로써 그의 신비사상이 탄생하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밝혔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가 활동했던 시대, 곧 중세기가 막을 닫고 근세가 열리려던 역사적 카이로스와, 오늘날 우리 시대, 곧 근대정신이 막을 내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에로 전이하는 제 3 카이로스의 정신사적 유사성을 간접적으로 암시했다. 비록 에크하르트와 우리들 사이에는 800년의 시공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화된 직관적 감성 체험과 심원한 이성적 사색이 조화를 이루고, 거기에 더하여 실천적 변혁의지가 하나로 통전된 제 3의 영성시대 도래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에크하르트의 과제가 곧 우리시대의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글 제 4장 본론에서 에크하르트 신비주의 본질 규명을 위해 네 가지 소주제를 설정하였는 바 '부정의 길', '하나님의 신성', '영혼의 불꽃', '가난'을 택하여 심도 깊게 논술하였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에크하르트 신비주의가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교회의 갱신과 정화를 위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를 날카롭게 천명함으로서, 항상 현실과의 의미연관성을 추구하면서 신학해야 하는 신학도의 바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논찬자는 필자가 글에서 밝힌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을 요약하거나 다시 언급하는 일은 그만 두고 필자가 글 4장에서 에크하르트 신비주의 사상의 본질적 핵심으로 선정하여 논구한 몇가지 신학적 주제들을 재음미함으로서 우리들의 학문적 자세에 대하여 스스로 돌아보려 한다.

첫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일반적 특성이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강조한다는 점을 재음미해 본다. 우리가 대학원에서 신학수련을 쌓고, 교회에서 예배, 교육, 영성수련 하는 그 모든 길은 '부정신학'이 아니고 '긍정신학'이다. 심지어 신비체험 그 자체는 '부정의 길'을 방법론적으로 택하는 '부정신학'일 지라도,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행위는 '긍정신학'이다. 왜냐하면 언어와 개념과 논리와 상징적 표현을 통해서 신비가 자신이 비매개적 직접성 안에서 하나님과 구원의 신비를 체험한 바를 언표하고 설명하는 모든 행위는 이미 '부정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의 진정한 위대성은 그가 '부정의 길'을 통해 체험한 구원의 신비, 영혼의 불꽃을 접촉점으로 한 신성과 연합 일치 등 신성의 심연과 영혼의 깊이를 글과 강론을 통해 '긍정신학'의 광장으로 이끌어내어 전달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새 시대의 성숙한 시대와 제 3의 밀레니엄의 영성은 바로 에크하르트가 행했던 것과 같은 '반대일치'의 신학함의 자세와 그런 신앙유형을 요청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부정의 길'과 '긍정의 길'의 상호 보완과, 한 걸음 더 나아가 양자의 역설적 일치를 요청한다는 말이다. 노자 도덕경 1장에서 말하는 대로, '이름 없음'과 '이름 있음', 또는 무(無)와 유(有)는 도(道)에서 함께 나온 다른 이름이며 둘 다 현묘하고도 현묘한 것이며 만물의 문이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의 '신성'(Godhead)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넘어서 그 뒤에 있는 또 다른 제 4의 궁극적 실재를 설정한다기 보다는 '삼위일체론'이라는 신학적 언설이 아무리 정교한 이론으로서 말하고 또 말해도 다 해명되지 않고 여전히 신비와 다함 없는 무궁함으로 남아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이와 일체의 언설이 끊어지는 신비의 차원을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신성'이라고 틸리히는 이해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학도로서 우리가 수업하는 모든 신학 체계들이 겸허해야 하고 자기를 상대화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엄숙한 간접적 경고를 듣는다.

둘째,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지닌 특징으로서 '영혼의 불꽃과 가난'에 대하여 음미해본다. 에크하르트에 있어서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성의 일부이다. 비유하건데 바다 위에 물결파도가 일어나면서 오색영롱한 색깔을 반사하면서 충일하는 물방울들과, 바다 그 자체와의 상호관계성과 같다. 바다는 항상 검푸르고 말이 없지만, 파도와 물방울은 색깔이 있고 모양이 있고 가변적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면 바다 그 자체와 파도의 물방울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영혼의 본질을 그렇게 해석한 것이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의 견지를 넘어섰기 때문에 그의 신비사상이 이단적이라고 의심받게 된 직접적 원인이기도 하다.

에크하르트의 '영혼의 불꽃'이라는 광학적 상징에서 '불꽃'이라는 상징적 은유를 바르고 심도 깊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말하려는 상징성은 빛이 지닌 진리의 현현적 성질, 빛이 스스로 밝음과 열기를 발산하는 역동적 능동성, 순간적으로 온 세상을 밝히며 하나로서 통섭하는 원융회통성,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영원성과 대비하여 인간영혼의 불꽃이 지닌 비지속적인 찰나성과 계시 접촉점으로서 카이로스 성격을 상징하고 있다.

'영혼의 불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영혼의 불꽃'이 발산하는 빛은 순수 백광이지 검붉은 연기를 내면서 타오르는 횃불과 같은 것이 아니다. 흔히 종교적 광신주의와 거룩을 빙자한 영적 탐심이 발산하는 불꽃과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더 나아가서, 에크하르트의 '영혼의 불꽃'은 현대의 인간학이 자기도 모르게 생물학적 기계론으로 오염되어 인간의 사유와 영적 영감마저도 두뇌 세포구조의 활동에서 울어나온다고 생각한다거나, 현상학과 해석학적 이론에 의하여 너무나 침윤당한 인간학적 자폐증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다. '영혼의 불꽃'이라는 어휘가 지나치게 실체론적 개념으로 변질되어서 에크하르트가 본래 말하려는 의미를 충분히 전달받기 어렵지만, 인간성의 근원적 본래성 그것을 진리자성(眞理自性)이라고 부르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부르던, 혹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던, 진실로 맘과 영혼이 가난해짐으로서 그 진면목을 회복하고 체험해야 한다는 성찰을 요청받고 있다.

필자의 글 내용중, 독자가 오해하기 쉬운 두 가지 점을 지적하는 것이 논찬자의 기우일런지 모르겠다. 그 한 가지는 논문 서두에서 필자는 말하기를 "일단 기독교 신비주의는 헬라사상을 그의 기원으로 하고 있다"라는 표현은 신비주의 본질에 대한 개념규정을 어떻게 하느냐의 일과 직결되는 문제이지만, 그 표현은 너무나 단언적이다. 그리고, 다자와 일자, 창조자와 피조자의 합일을 추구하되 '일치'(unity)인가 '연합'(union)인가에 따라서 동서 신비주의 전통이 유형적 특성이 드러내는데, 그 점도 언급했더라면 더 좋을 뻔 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논문 결론 부분에서 "에크하르트 신비주의는 감정의 신비주의이다"라는 표현도, 말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에크하르트 신비주의의 본질적 특성인 '부정신학'의 특성과 '감정의 신비주의'는 서로 모순당착되기 때문에 다른 표현을 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충실한 각주와 풍부한 문헌자료의 제시는 더욱 이 논문의 깊이와 학문 하는 성실도를 나타내준다. 좋은 논문을 쓴 필자에게 치하와 감사를 보낸다.
 

한신논총 8호 125-127쪽 (1998)

 

참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