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구적 위기와 생존의 신학

 

 

 

 

 

 

 The Global Crisis and A Theology of Survival
Cobb/Griffin, Process Theology, pp.143-158.

전  철

 

 1. The Spatiotemporal Scale

1.1. 화이트헤드의 궁극적인 존재분석의 기본 단위는 소립자보다 더 작은 미시세계이고, 자연에 대한 설명의 층위는 무기적인 물리적 활동에서부터 궁극적 비합리성인 신에게까지 다층적이며, 형이상학적 사유를 지탱하고 있는 시공의 범주는 현존하는 우주나, 질서나, 형태 혹은 차원에 대한 우리시대의 측정가능성 마저도 궁극적인 일반성과 거리가 멀다고 판단할 만큼, 다원적이며 장구한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다.

1.2. 화이트헤드의 견해에서 보자면, 일반적인 서양의 사유가 근거하고 있는 시공 범주는 매우 제한적이며 압축되었고 심지어 어두침침한 불안의식을 바탕으로 주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적과 종말에 대한 일원론적 강박감이 서구의 사유에는 흐르고 있다. 또한 이에 비하여 동양의 시공규모는 시종의식(始終意識)의 무한한 팽창에 과도하게 경도된 나머지, 철저히 현재 세계의 의미와, 현재에서 출현하는 목적과 가치에 대한 유일회성이 급격하게 와해되어 버렸다.

1.3. 화이트헤드의 사유를 기저로 한 과정신학은 이렇게 모든 사유의 근본 바탕이 되는 시공의 스케일을 이 양자의 오류를 피하면서도, 서구의식의 감각적 측면과 동양의식의 관념적 측면을 올바로 결탁한 시공지평의 도식을 매개로 하여, 더욱 더 일반적이면서도 적용 가능성이 높은 이해와 행위의 지평을 타진하려 한다.

2. The Human and the Natural

2.1. '자연'과 '역사'는 인간의 사유 안에서 상호 긴장한다. 자연은 그 자체로 온전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자족하는 화원이라고 보는 견해와, 자연이라는 화원의 정점에 결국 인간과 역사라는 꽃이 만개한다고 보는 견해는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성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보다는 역사에 초점을 겨누었다.

2.2. 과정신학은 일단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연의 자족성과 인간 이외의 다른 유기체에 대한 독특한 가치의 잊혀진 의미를 복원하려 한다. 인간은 자연의 정점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 자체로 자족하며 인간의 생존에 독특한 기여를 수행하고 있다.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이분법에서 진행되는 논의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노정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자연에 대한 토론의 합리적인 근거 자체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가치는 향유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화이트헤드는 새롭게 제시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우리의 향유를 통하여 인간적인 가치를 추출해 낼 뿐인 것이다. 인간은 인간 아닌 존재의 향유를 파악할 길이 없으며, 그들의 향유를 통하여 형성된 그들의 고유한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에게는 더욱 요원할 뿐이다.

2.3. 향유와 가치의 문제는 자연과 인간의 긴장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신체(Body)과 마음(Mind), 성성(Sexuality)과 영성(Spirituality)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유용한 착상이 된다. 자연과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이원론은 자연스럽게 신체성과 성의 억압, 마음과 영성의 과도한 강조로 전이되었다. 그러나 향유가 배제된 가치에 대한 논의는 애시당초 잘못된 출발점이라고 보는 과정신학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향유를 바탕으로 한 가치, 신체성의 극점에 피어오르는 마음과 영성의 우주적 깊이를 해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과정신학의 발상은 몰트만의 독특한 주장인, 신체성은 하나님의 최종 사역이다!(Leiblichkeit ist das Ende aller Werke Gottes!)라는 명제와 방향성만 상이할 뿐, 오늘의 신학적 시대정신을 매우 유사하게 공유하고 있다.

3. Ecological Sensitivity

3.1. 단선적인 사고는 철저한 인과율에 근거를 둔 사고이다. 의식은 유기적인 세계를 애써 거부해야만 자생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관이다. 왜냐하면 생존은 이해보다 더욱 절박하기 때문이다. 이는 향유가 가치보다 근원적이라는 점과 궤를 같이 한다. 이렇게 복잡한 세계를 복잡하지 않게 도식적으로 잘라내고, 걸러내며, 유용하게 재편하는 기능은 야만에서 야망을 잉태하였고, 세련된 과학과 공학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문명은 오히려 문명의 틀에서 자신의 근원을 역추적하는 우를 범하였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거나 혹은 있어야만 하고, 이 원인과 결과의 카테고리에 포섭되지 않는 사태는 단지 우연이라는 찌꺼기로 폄하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우주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연만이 모든 혁신의 근원이며, 생물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창조의 근원이라고 보는 자끄 모노의 입장을 전격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단선적인 사고의 오류는 충분히 지적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3.2. 과정사상은 과정이라는 벡터Vector 성격이 우주의 근본적인 맥박이라는 착상을 충실하게 고수하고 재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과정사상이 단선적인 인과적 사고를 직접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심지어 새로운 사건의 출현은 현재 우주의 모든 항목을 포함한다고 보기 때문이다(PR xiii[43]). 선행하는 하나의 사건은 후행하는 사건의 원인이다. 그러나 유일한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과정신학의 생태학적 감수성은, 드러난 사건과 감추어진 배경 사이의 긴밀한 상호연관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새로운 발상이다.

3.3. 우리의 인식에 잡힌 사건은 우리들이 인식이 제기하는 방법에 노출된 사건일 뿐이다(cf. Heisenberg). 그렇기 때문에 인식이 추출해 낸 정보의 배경에 묻어 있는 복잡한 전후맥락을 새롭게 뽑아내는 방법은 첫째, 무한히도 복잡한 사건과 배경의 함수들에 대한 이해의 감수성을 증진시키고, 둘째 나의 사건의 배경인 타자와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타자에 참여하는 길은 타자의 향유를 증진시키는 일이고 동시에 나의 향유를 증진시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결국 타자의 향유는 나로 다시금 정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자와 세계에 대한 성실하며 다양한 참여는 결국 자신의 생존의 창조성과 풍요로움과도 직결되어 있음을 생태학적 감수성은 제시하는 것이다.

4. Responsibility and Hope

4.1. 책임과 희망에 관한 논의를 접근할 때 첫째, 기독교의 가르침은 희망의 영역에 대한 확신을 제공함으로 오히려 책임적인 행동의 장애물이 되었다. 보여주는 것은 존재의 상상력과 창조성을 쇠진하게 한다. 시각은 미지의 세계가 던져주는 불안을 제거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둘째, 현대 기독교의 가르침은 인간에게 책임감을 과도하게 부여한다. 거기에는 희망이 없는 의무감만 존재할 뿐이다. 희망에 기반한 창조적 변화가 상실된다.

4.2. 과정신학에서 미래는 진정 열려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미래를 여느냐에 따라서 미래는 열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기에 미래의 창조나 미래의 파멸도 인간의 손에 달린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하나님의 예정조화의 사건이 아니다. 이는 제2의 아우슈비츠도 얼마든지 인간의 자유에 의하여 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자유는 피조물의 세계와,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자유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로지 피조물 안에서(in) 피조물을 통하여(through) 사역하신다.

4.3. 미래가 열려 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 비합리성인 신은 세계 가운데에서 순간 순간 체현된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완의 가능성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세계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는 만물이 새롭게 됨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이 세계의 희망이 됨을 의미한다. 실로 하나님은 세계의 가능성이며, 세계는 자신이 새롭게 되기를 심히 갈망한다.

4.4. 현존을 향한 열정이 새롭게 되기를 바라는 끈질긴 갈망은 의로운 일이며, 신적인 모험에 동참하는 기쁘고 즐거운 일인 것이다.

1999년 1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