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어 분석과 분석의 유모어
 

전철

1.들어가며

웃음이 놀라운 것은, 그것은 아무 것도 놀라운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누군가의 언술을 생각한다. 웃음은 우습기 때문에 웃음을 좋아한다는 감칠맛도 생각한다. 우리에게 웃음을 제공해 주는 유모어는 일견 단순하지만 거기엔 탁월한 내장질서가 흐르고 있다. 여기에선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유모어의 실례를 통하여 논리 적 구조와 유형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2,3,4,5). 3-1에서는 사회문화적 지형과 관련된 유모어에 대하여 잠시나마 짚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웃음의 생리적 메카니즘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한다(6-1). 그리고 웃음의 '정서적 논 리적 자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6-2). 마지막엔 논리적 측면과, 서사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이라는 세가지 지류를 통하여 결론을 내려보고자 한다(7).

이 글의 행간엔 두 가지의 목적이 오롯이 고여 있다. 하나는, '웃음'은 그 누군가 선물한 이 세상의 어느 기제보 다 소중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바보짓'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의(秘 義)로 가득한 이 세상을, 파스텔같은 웃음의 촉수로 읽을 때가 열리길 바래보는 옹골찬 오기이다.

 

2.유모어의 논리적 구조

 

준거의 틀 A

(frame of reference)

 

Text

충돌-매개

 

준거의 틀 A

(frame of reference)

 

 

 

 

 

 

3-1.박홍과 덩순이

덩달이는 여행 도중 예견치 않게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방을 들어가 보니 덩달이의 부인 덩순이가 박홍 신부의 팔에 안겨 있는 것이었다. 덩달이는 잠시 주저하더니 조용히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상체를 창 밖 으로 내밀면서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향해 두 손을 들며 축복하는 행동을 취했다. "덩달씨, 지금 뭘 하고 있 죠?" 고뇌에 찬 덩순이가 외쳤다. "신부님께서 내가 할 일을 대신 하 고 있으니 나도 그가 할 일을 대신 하고 있는 중이지."
 

덩달이가 취한 행동은 예상 밖이면서도 완벽히 논리적이다. 여기에서 덩달이의 유모어를 분석해 보자. 우린 일 반적으로 덩달이에게 다음과 같은 기대를 걸 수 있다. 덩순이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성도덕의 규범 을 파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덩달이가 덩순이의 행동에 대하여 윤리적 범주를 가지고 반응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덩달이는 덩순이와 신부님의 '행동'을 '성도덕'이라는 준거의 틀과 역할의 분담, 즉 '분업'이라는 준거의 틀로 동시에 보았던 것이다. 바로 덩달이는 덩순이와 신부님의 행동을 보고 '성도덕'과 '분 업'이라는 서로 다른 두가지 사항 사이의 묘한 관계를 포착하였고, 이 둘을 "신부님께서 내가 할 일을 대신 하 고 있으니 나도 그가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중이지"라는 한마디를 통하여 서로 충돌시켰던 것이다. 단지 덩순 이와 신부님의 '행동'을 '성도덕'이라는 윤리적 범주로서만 보았다면 거기엔 유모어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유모어는 서로 배타적인 두 규칙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앞에 펼쳐지는 하나의 사태 안 에서, 제각기 일관성은 있지만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준거의 틀을 얼마나 빨리 간파하느냐의 문제가 유모어 창조 의 우선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3-2.여배우의 가슴

어떤 가난한 미군 장교가 유명한 여배우에게 홀딱 반해 공연이 끝날 때면 늘 무대 뒤로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 곤 하였다. 이를 귀찮게 여기던 여배우는 장교에게 흥미가 없다는 말을 멋있게 할 생각으로 말했다. "저의 가 슴은 장교님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답니다." 그러자 장교가 정중하게 대꾸하였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 게 높은 데까지 바라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 유모어에서는 여배우의 말 가운데 '가슴'이라는 한 기표(記票)에 흐르는 서로 다른 기의(記意)를 장교가 간 파하였다. 그리고 장교는 '가슴'이라는 말의 애매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엉큼한 생각을 교묘하게 나타내었다. 여 배우가 사용한 '가슴'의 기의는 '정신적인 공간'을 뜻하고 있고, 장교가 사용한 '가슴'의 기의는 육체의 특정한 부위를 가리키고 있다. 상호 배타적이고 단절적인 '가슴'의 기의가 논리적인 충돌을 야기하면서 우리에게 웃음 을 일으키는 것이다.
 
 

정신적인

공간

 

여배우의 한 마디

(Text)

 

육체의 특정한

부위

 

 

 

 


 

3-3.덩달이 유모어

90년대를 건너오면서 한국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것은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시 대, 해체와 상실의 시대, 진리의 황금율이 사막의 하얀 모래에 묻혀 사라져버린 시대, 선과 악의 세계를 가르는 양심의 칼날에 눈금이 그어져 1회용 30센티 잣대로 유폐되는 혼돈의 시대로 다양하게 규정되어질 수 있다. 이러 한 시대규정의 이해를 전제로, 우리는 덩달이 유모어 안에 투영된 시대적 서사물(敍事物)로서의 의미를 규명하 고자 한다.

또 하나의 전제는, 유모어를 당시의 인간들과 사회의 의식을 반영하는 산물로 규정하는 것이다. 유모어가 배 태하는 시대의 사회문화적 지형은 그 유모어에 내재하는 의미에 베어 있고, 또한 그 유모어는 사회문화적 지형 의 형성에 부분적으로 참여한다. 왜냐하면 유모어는 사회문화적 지형에 대한 세계인식의 경험적 적첩물(積疊物) 이면서 동시에, 유모어 안에 투영된 시대적 지형이, 그 지점을 넘어서는 '공유'를 통하여 다시 전파되기 때문이 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떠날 차비를 한다면 그 순간 터보 달린 유모어는 이미 만리를 멀다하지 않고 도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모어는 일정한 사회문화적 구조 내에서, 시대적 음영의 지형적 구조를 반영하면서, 구조 와 더불어 소통하며 확대 재생산하는 담화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구조언어학에서는 기표(signifiant,시니피앙)과 기의(signifie,시니피에)라는 두 개념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Saussure). 기표는 '표시하는 것'이고 기의는 '표시되는 것'이다. 기의라는 알몸은 기표의 옷을 입어야만 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꿈틀거리는 기의는 영원히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사장되어 버리기 때 문이다. 기표의 형식 또한 기의의 내용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기표라는 존재의 기반이 사라진다. 기표는 기의의 표현이고 기의는 기표의 실체이다. 기표는 기의에 의한(!), 그리고 기의를 위한(!) 참여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표 라는 실재는 기의가 처소하는 미지의 세계와 관계하는 유일한 접촉점이다.

우리의 덩달이에게 숙제로 주어진 기표(signifiant)는 '발명품', '불안감', '삶이란', '서울대', '성희롱', '연세대', '우 리집 만세', '자신감', 등과 같은 짤막한 단어이다. 문제는 이러한 기표가 정당한 기의(signifie)와 결합되지 못하 고 가상적인 기의(signifie')와 엉성하게 결합한 체 허공에 부유한다는데 있다. 우린 여기에서 덩달이의 기표를 희 화화된 기의와 결합하게 하는 연관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덩달이가 자기 앞에 놓여있는 기표의 발음과 음 소나 형태소의 결합을 살짝 '뒤틀어 놓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덩달이의 유모어는 마치 "아버지 가 방에 들어가신다"와 같은 띄어쓰기의 '뒤틀음'과, 앞의 받침이 뒤 음절의 첫소리와 붙어서 일어나는 연음법칙의 '뒤틀음'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덩달이 유모어의 생명력은, '음운'의 허술한 빈틈을 미세하게 포착하여 엽기적으로 활용한 '의미'의 급격한 반전 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 의미의 급격한 반전을 통하여 기표와 기의의 정당한 연결이 끊어지고 전혀 새로운 기의가 기표에 접붙혀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기표는 새로운 기의와 결합하여 희화화되어 버리면서 저 망 각의 강으로 바람을 타고 건너가 버린다.

 

기의

signifie

(context)

 

기표

significant

(text)

 

기의

signifie

(anti-context)

 

 

 

 


가치가 전복되는 시대는 기의와 기표가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의 자욱마저 희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가치 로운 것에 대한 망각은 곧바로 기의에 대한 망각을 잉태한다. 왜냐하면 가치로운 것과 가치롭지 못한 것에 대한 판단 기준은, 기의가 기표로 올바로 삼투해 들어갈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덩달이는 그의 숙제로 주어진 기 표와, 그에 상응하는 올바른 기의를 연결할 수 있는 판단이 정지되었다. 우린 덩달이를 통하여 '참다운 가치'를 찾으려 하는 진지한 <판단정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단지 덩달이의 <판단정지>는 참다운 가치에 대한 회 의에 불과하다. <판단하지 않음>이 아닌, <판단하지 못함>이라는 덩달이의 슬픈 정조가 그의 떨떠름한 '말놀이' 의 배면엔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표에 정당한 기의의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색이 망각되어 버린 이 시대의 암울한 표 징이다. 덩달이의 망막에 비추어진 세계는 진실과 허위의 실타래가 얽혀서 판단의 거점이 무너져버린 일차원적 세계이다. 또한 이 구릿빛 동전과 같이 평면화된 세계에 대하여 일정한 비판의 거점을 두기보다는, 그 세계를 대변하는 야심찬 헤르메스의 전사로서 충실히 복무한다. 그는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을 은폐하고 망각하게 하는 가공의 현실 축조자이다. 그에게 있어선 "나는 가공의 현실을 생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제1명제 가 존재근거가 된다. 물론 우린 하나의 기표에서 하나의 기의만을 희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기의가 단지 오래된 마분지 마냥 희미하게 잊혀져선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의의 잊혀짐'은 밖으로는 기의를 담 아내는 세계를 포기함이요, 안으로는 기의를 담아주는 나를 포기함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음영적

지형

(centext)

 

덩달이 유모어

(text)

 

새로운 세상

꿈꾸기

(anti-context)

 

 

 

 


 
어쩌면 덩달이의 질곡된 '세계인식'의 밑변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뜬금없는 소망이 깔려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대위에서 그가 현란하게 유혹하는 '언어의 몸짓'에 우리는 "하하!"라는 웃음보다는, "아아!"라고 하 는 냉혹한 세계인식의 자성을 그에게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덩달이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4-1.개미와 지네

1. 모처럼 개미가 지네를 점심식사에 초대하였다. 개미가 음식을 만들려다 보니 달걀이 집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식사 준비에 바쁜 개미는 지네에게 슈퍼마켓에서 달걀을 좀 사가지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나 5분이 되어도 10분이 되어도 지네와 달걀은 오지 않았다. 궁금한 개미가 슈퍼마켓에 가보러 문을 열어보는 순간이었다. "백 하나, 백 둘, 백 셋....." 지네는 신발을 열심히 신고 있었다.

2. 이번엔 지네가 개미를 점심식사에 초대하였다. 지네가 음식을 만들려다 보니 식초가 집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식사 준비에 바쁜 지네는 개미에게 슈퍼마켓에서 식초를 좀 사가지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나 5분이 되어도 10분이 되어도 개미와 식초는 오지 않았다. 궁금한 지네가 슈퍼마켓에 가보러 문을 열어보는 순간이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개미는 자기 신발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이 유모어는 '기대'와 '일탈'의 두 준거의 틀을 양 축으로 한다. '기대'와 '일탈'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준거 의 축을, 전혀 뜻하지 않은 '매개'를 통하여 연결시켜 놓음으로서 우리에게 웃음을 던져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 다. 이러한 유모어의 구조는 양립할 수 없는 축이 무엇이고, 또한 맞닿을 수 없는 두 축이 어디에서 매개 가능 한지를 찾아보는 것이 우선적인 관건이 된다. 우선은 우리의 상식선에서 유모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위의 유모어의 일차적인 문제는, 개미의 부탁으로 슈퍼로 향한 지네가 10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반적인 '심부름'은 출장이나 여행과 같은 장기적인 부재가 아니기에 우리는 개미가 바로 돌아오리라 는 '기대'를 갖는다. 그러나 그 기대는, "그러나 10분이 되어도"라는 급격한 문맥의 전환을 통하여 여지없이 깨 지고 만다. 즉 '일탈'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유모어가 될 수가 없다. '기대'와 '일탈'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준거의 틀을 이어주는 다리, 즉 '매개'가 틀림없이 유모어의 구조 안에는 부비트랩과 같이 숨어 있다. 우선 위의 유모어는 '개미'와 '지네'라는 의인화된 동물을 등장시킨다. 이 두 동물의 등장을 통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질문할 수 있다. 우선 이 질문을 통하여 '매개'를 찾도록 해보자.

⑴ 하필 '개미와 거미'나 '지네와 송충이'가 아닌 '개미와 지네'를 설정하였는가?

⑵ '점심식사의 초대'나 '달걀'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동물을 의인화시킨 이유가 무엇인가?

이 두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아래와 같은 대답을 열어 낼 수 있을 것이다.

① 이 유모어의 매개는 개미와 지네의 '유사점' 내지는 '차이점'에 관계되어 있다.

② 또한 이 매개는 '인간'과 관계된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과 밀접한 물건과 같은 것에 관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①을 추리하여 보건데 개미와 지네의 '다리수'의 현격한 차이점을 우린 발견할 수 있고, 그러한 논리적 연장선 속에서 ②를 연관시켜 본다면 우린 '신발'이라는 매개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기대'했 고 그 기대가 '성취'되었다면 거기에는 아무 갈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엔 웃음과 울음이 고여 있을 만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유모어는 '기대'와 '성취'의 정당한 결합을 뒤틀어 놓는다. 그 '뒤틀 기'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하지만 그 뒤틀기의 작업이 타당한 매개를 통하여 우리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와 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린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웃음의 각질을 미분해 들어가면 그 자리엔 논 리적 타당성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4-2.유모어 구조의 유형적 특성

신부의 유모어(3-1)와 개미와 지네 유모어(4-1)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의 덩달이는 덩순이가 보여준 '행동'을 '성도덕'과 '분업'이라는 두 개의 배타적인 규준으로 분리시킨 구조를 가진 반면, 후자는 '기대' 와 '일탈'이라는 배타적인 규준을 '신발'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통합시킨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배우의 가슴(3-2)와 덩달이 유모어(3-3)도 전자와 같은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는 하나의 사태 속에서 두개의 상호 배타적인 의미를 날카롭게 '뒤틀려는' 경우이기에 분리의 측면이고, 후 자는 '뒤틀려진' 두 배타적인 규준을 하나의 매개로 연결시키는 경우이기에 통합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 만 이 둘 모두 배타적인 두 규준(성도덕/분업, 기대/일탈)을 양 축으로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선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단지 하나의 매개에서 두개의 규준을 '뒤틀어' 분리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두개의 '뒤틀어 놓은' 규준이 하나의 매개를 통하여 통합하는 것인가?의 차이일 뿐이다.

⑴ 하나의 행동(기표)을 이용하여 두개의 준거의 틀로 '뒤틀어 버리는' 분리의 구조

 

성도덕

 

덩순이와 신부님의행동

Text

 

분업

 

 

 

 


 

⑵ 두개의 '뒤틀어놓은' 준거의 틀이 매개를 통하여 하나로 통합되는 구조

  

가대A

(심부름)

 

개미와 지네의

신발 (매개)

 

일탈

늦음

 

 

 

 


 
 

5.두 교수님의 유모어

⑴ 노래방 이야기

92년에 민중신학회 창립 기념회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안병무 교수님, 그리고 참가자들의 다양한 발제와 질의가 오고 갔다. 방청객에게 질문의 시간이 주어졌다. 연대 부총장(現 상지대 총장)님이신 김찬국 교수님이 손 을 들어 안병무 교수님께 질문하려 했다. 그곳에 참여한 많은 이들은 김찬국 교수님을 향해 모든 시선을 주목 했다. 김교수님의 육성만 가지고는 모든 이들이 질문을 공유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교수님은 앞으로 나가서 마이 크를 들고, 긴장을 풀려고 헛기침을 두 번 정도 하였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으시고 하시는 말씀. "전 언제나 마이크를 잡으면 노래방이 생각나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놓치지 않을 것 같았던 긴장이 깨지며 이윽고 장 안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⑵ 바늘구멍 이야기

1994년 제2회 한신 철학 심포지움이 '신 인간 그리고 자연' 이라는 주제 하에 중강의실에서 열렸다. 철학과 장 일조 교수님의 발제가 있었다. 발표가 끝난 후 질의시간에 김광수 교수님께서 발제내용에 대한 질의를 하셨다. 상당히 무거운 듯한 질문이 다 끝난 후, 장일조 교수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시며 "바늘구멍으로 세 계를 보니까 언제나 답답하지"라는 답변을 하셨다. 그곳에 있었던 학생과 교수님들은 배꼽을 잡으며 웃음을 감 추지 못하였다.
 

 

위의 두 유모어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혹자는 얼핏 보기에 위의 내용이 어떻게 유모어의 부류 에 속하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도 있겠다. 그것은 당연스러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위의 글만을 통하여 기독 교 회관과 중강의실에 관류했던 구체적인 분위기(정서적-논리적 자장)를 추적하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은 두 유모어의 형태를 논리적 구조만을 통하여 분석하는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없으리라는 견해를 확 인하는 것이 된다.

사실 김찬국 교수님과 장일조 교수님의 유모어는 논리적 구조의 지평만 가지고 이해할 땐 그리 성공적인 유모 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두 분의 유모어는 그 장소에서 흐르는 고유한 상황 안에서,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상황과 더불어 웃음을 짓게 하는 유모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모어가 아닌 것 같은데?" 하 며 고개를 설레설레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유모어가 가지고 있는 정서적 논리적 자장 의 구조를 읽어보면 상당히 세련된 유형의 유모어임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은 유모어가 일어나는 '생리적인 구 조'에 대하여 짚어보고자 한다(6-1). 그 다음으로 위의 두 유모어를 '정서적-논리적인 자장'을 통하여 이해하고자 한다(6-2).

6-1.감정과 이성의 부조화

하나의 상황이나 생각에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맥락을 간파하여 충돌을 일으키면 '사고의 흐름'은 한 맥락에서 다른 맥락으로 급작스러운 전환을 겪게 된다. 정해진 고속도로를 아무 문제없이 달려가는 '감정'이라 는 초보 운전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낭떠러지 앞에서 판단력을 잃고 부유하다가 웃음에 의해 해방되는 것 이다. 덩달이가 창문으로 달려가 거리를 오고 가는 주민들을 축복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이성'은 이미 급제동 을 걸고 새로운 게임을 즐기게 된다. 하지만 '감정'은 새로운 변화엔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뒤집어서 말하 면, 우리가 웃는 이유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과정'보다도 더 큰 관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 정이 관성과 지속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감정이 그만큼 변화에 반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이성은 '박남정'이고 감정은 '김세례나'라는 비유를 하여도 그리 큰 문제가 없으리라.

감정은 이성과 보조를 같이 할 수 없다. 또한 이성과는 달리 번득이는 '방향전환'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감정 의 정서는 생리학적으로 오래된 대규모 신경계통과 호르몬 선을 통해서 몸 전체에 작용하는데 반해, 언어나 논 리적 사고는 뇌 바깥에 있는 신피질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래 된 뇌와 새로운 뇌, 즉 '구피질'과 '신피질' 사이의 부조화가 유모어를 일으키게 하는 생리학적 요인이 되는 것이다(Koestler). 간단히 말하면 "웃음이란 사고 에 의해서 버려진 감정의 정서"다. '정서'는 그 관성이 '사고'보다 크기 때문에 '사고'가 급작스레 다른 논리로 전환하는 것을 따라갈 수 없다. 정서는 사고를 짝사랑 하지만 사고의 민첩함이 둔감한 정서에게 관심을 가져준 다는 것은 너무 곤혹스러운 일이다. 유모어는 사고가 바삐 가려다가 엉겁결에 땅바닥에 내버린 정서의 유출이 다.

6-2.정서적 논리적 자장-욕망과 충족의 변증법

인간은 기본적으로 세계와 타자, 더 나아가서 자신에 대한 모종의 '공포'를 갖고 있다. 인간 주체는 세계와 타 자, 그리고 자아와의 관계속에서 내-외적으로 통합되고 일관된 주체가 아니라 끝없는 결핍과 욕망의 존재라는 견해가 타당한 요지라고 이해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특히 정신분석이론과 구조언어학의 조우를 통하여 인 간이 결핍과 욕망의 존재임을 언어적 분석을 통하여 밝혀짐(Jacques Lacan)으로서, 이젠 '언어'의 처마 밑에 은폐 하였던 분열적 자아까지도 숨을 곳이 없게 되어 버린 시대가 되었다.

'공포'는 외부적인 대상과의 소통을 통하여 '공포'를 해소하고자 하는 욕망을 동반한다.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공포'의 정서는 외부적인 힘을 받아 흘러 나갈 땐 '공격'의 정서로 급격하게 갈음되는 것이다. 공포의 정서가 외부로 유출되면서 공격의 정서로 갈음되는 과정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그 공격의 정서의 한 형태가 바 로 웃음이라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영화보기, 운동, 오락게임, 심지어 독서까지 셀 수 없이 다양한 형태의 일 상적인 행동은 '공포-공격-해소'의 원환운동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선 같은 형태이다.

특히 유모어는 영화보기, 운동경기, 오락게임, 독서와 같은 형태의 원환운동과는 달리 특별한 변별점을 갖고 있 다. 웃음은 오락이나 독서와 같이 물화된 대상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사 람 사이의 역동적이고 쌍방적인 소통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이 동적이고 상호 관계적인 상황은 그 공간에서 고유한 음영의 장(場,field)을 만든다. 이러한 장은 그 공간 안에서의 고유하고 독특한 '정서적-논리적 자장'을 제 공한다. 그리고 정서적-논리적 자장은 고유한 분위기를 제공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그 공간을 이끌어 가고, 심지 어는 규제하기도 한다. 그 정서적-논리적 자장을 지금까지 우리가 유모어의 논리적 구도로 전개해 왔던 도식인 '준거의 틀 A'라고 우선 이름 붙여 보자.    

 

정서적-논리적 자장

A

욕망

 

'마이크'

'바늘구멍'

(Text)

 

정서적-논리적 자장

B

충족

 

 

 

 

 

유모어는 그 공간에서 제공하는 고유한 '정서적-논리적 자장'을 상호 배타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자장과 서로 충돌시킬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⑴에서 김찬국 교수님의 유모어는 기독교회관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형성된 고유한 정서적 자장과 노래방이라는 정 반대의 자장을 마이크라는 매개를 끌어들여 서로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 다. 여기에서 김찬국 교수님은 '마이크'를 '강의'의 정서적 자장과 '노래방'이라는 정서적 자장으로 동시에 파악 했기 때문에 '정서적 자장의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⑵에서 장일조 교수님의 유모어는 헤겔을 전공하신 교수님 의 논리적 자장과 분석철학을 전공하신 김광수 교수님의 논리적 자장이 얼핏 상호 배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 음을 빨리 포착하여 '바늘구멍'이라는 매개를 사용하여 '논리적 자장의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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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작동하는 공포의 정서는 세계와의 소통을 원한다. 그리고 공격과 충족의 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언제 나 소통의 기회를 포착한다. 어쩌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공의 좌표에 점찍혀진 자아는, 내 안에 있는 공 포의 감정을 배출할 수 있는 통로를 끊임없이 어디에선가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욕망은 '창립기념식-심포지 움'이라는 자리에서 형성된 '정서적 자장'을 벗어 던져버리는 것이다. 지금 나의 족쇄로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 딱딱한 분위기(A)를 나는 빨리 탈피하고 싶다. 아! 이 순간 어느 누군가 따른 분위기(B)를 재빨리 포착하고, 기 존의 정서적 자장과 순간적인 충돌을 야기시킨다. 드디어 내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욕망의 덩어리는, 충 돌에 의하여 균열되어 버린 빈틈의 경로를 따라서 밖으로 흐르고 있다. 공포의 욕망은 순간 "깔깔"이라는 웃음 을 매질로 하여 공격의 욕망으로 급격하게 유출된다. 그리고 그 공격은 나에게 화해를 일으킨다. 바로 이것이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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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나가며

논리적 구조의 측면에서 유모어를 본다면, 유모어는 한 규준에서 다른 규준으로 매개를 통하여 급작스럽게 비약 시키거나, 아니면 양립된 규준을 포착하여 하나의 매개를 통하여 화해시킴으로서, 거기에서 얻는 유쾌한 정신적 동요이다. 하지만 이 양자 역시 우선적으로는, 한 규준에서 역동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른 규준을 논리적으 로 간파하여 비약시키는 것이 유모어의 우선적인 생명력이다. 또한 복잡한 정신적 자극을 인지하는 정신적 공명 판의 진동폭은 "두 규준의 빗금을 얼마나 빨리 긋느냐"의 문제(Speed)와, "두 규준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극대화 시키느냐"의 문제(Space)에 상응한다. 마치 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바둑판에 가까이 달려가서 그 위에 놓여 있는 백수와 흑수를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얼마나 많이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문화적 지형이 투영된 서사적 측면에서 유모어를 본다면, 유모어는 그가 발딛고 있는 특정한 사회와 인간의 의식을 담고 있는 음영적 지형이다. 다시 말하면 유모어는 당시의 특정한 시대적 정서 속에서, 시대의 문제를 담고 있고, 시대의 한 부분으로서 작동한다. 하지만 우린 단지 그 지점에서 마침표를 찍을 순 없다. 동시에 더 나아가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꾸기를 그 안에서 비판적으로 갈취하여야만 하겠다. 왜냐하면 유모어는 그 특정 한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적첩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건강한 유모어는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이라는 두 세계를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유모어라 할 수 있겠다.

정서적 구조의 측면에서 유모어를 본다면, 유모어는 해방되지 못하여 좌절된 공포를 외부로 배출시킴으로서 얻 는 돌연한 쾌감이다. 우리의 내면에 고요히 침잠하고 있는 '공격'의 배후엔 세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은밀 히 누적되어 있고 '승리감'은 공격과 방어의 두 칼날 사이에서 거두어들이는 충족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바로 웃음은 공포를 공격으로, 공격을 해방으로, 해방을 화해로 옮겨주는 탁월한 기제인 것이다.

웃음은 암호로 가득한 신비의 세계를 현실세계에서 해독하면서 포획하는 기쁨이다. 그 기쁨은 사물에 담긴 희미 한 음영의 지형을 확연히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는 자에게만 열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해결해야 할 또 하나 의 몫은 여전히 남는다. 그렇다면 웃음은 누구에로부터 우리에게 진입하는 것일까? 웃음은 저 보이지 않는 세계 로부터 보이는 세계를 향해 묻어 나오는 神의 꽃가루(片鱗)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신교지 18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