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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과의 인터뷰



대담자 : 김혜순 (시인) 전 철 (신학동네)

장소 : 2005년 10월 22일 프랑크푸르트 로만파브릭 까페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신 선생님을 이렇게 독일에서 직접 만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참 반갑고 좋네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행사 이전에도 올해 독일의 여러 곳에서 독일의 시인과 문학을 자주 만나신 것으로 압니다. 그러한 경험 속에서 독일과 한국의 시의 차이가 선생님에게는 어떻게 느껴졌는지 궁금하군요.

독일은 우리나라처럼 시인이 명망가가 되는 현상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지난 9월 베를린에서 독일 시인들과 번역 워크샵을 했었어요. 독일에는 숨어있는, 훌륭한 시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의 시는 본질적이며 깊이가 있었어요. 물론 그 시인들은 독자가 상대적으로 없어도, 그렇게 독자가 없는 만큼 시가 나쁘지 않았어요.

한국 시의 특징은 현실의 자리에서 시작한다는 것이겠죠. 우리가 역사적으로 정치적 질곡을 겪었기 때문에, 시가 항상 현실에서 출발해요. 그러나 한국의 시는 그 현실을 바탕으로 저 우주의 안드로메다까지 나아갑니다. 예를 들어 황지우 시인의 시를 읽어 보면 그의 시에 한국의 현실적 상황이 촘촘히 박혀 있잖아요. 시인은 삶의 자리, 구체성의 자리를 바탕으로 상상력의 언어로 비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독일의 몇몇 시들은 현실을 지우고 상상력 그 자체만, 그리고 어떤 부재의 공간에 자기가 꾸민 이미지를 펼치더라구요. 저는 그것대로 멋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독일의 현대시는 어떠한 방식의 특정한 환타지의 구성원리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당시 세 명의 시인과 워크샵을 했는데 세 명의 시인이 다 그랬어요. 동독에서 온 시인도 그랬어요.

저는 베를린에서 집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았어요. 환타지만의 아름다움 속에도 어떤 현실과의 끈이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상상적 경험의 내용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보기엔 참 이색적이었고 재미있었어요.

한 가지 흥미로운 예를 들어볼께요. 아까 저희들이 좌담시간에 한국의 3명의 시인과 독일의 3명의 시인이 즉석으로 각각 하나의 문장을 쓴 후 그를 종합하여 하나의 시를 완성했었잖아요.* 거기 “마인 江가 벤치에 한 사람이 문득 자신의 뺨을 때린다. 그는 깨달았는가? 모기소리!”는 황지우 시인의 글이지요. 그리고 “게으른 네 얼굴이 날 부를 때”는 허수경 시인의 글이예요.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내 눈에서 담배의 불빛을 긁어내라”와 “검은 벨벳 꽃봉오리가 공장 굴뚝에서 올라오네”는 두 독일 시인들의 글입니다. 이 둘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한국과 독일이 얼마나 다른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선생님의 ‘불쌍한 사랑기계’라는 시집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어요. 시는 그 내용과 메시지를 떠나서 시적 이미지의 선명성, 상상력의 역동성, 문학적 공명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선생님의 시는 이러한 것들이 실감나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 부분에 대한 고민들을 특별히 하시나요.

사실 시의 말은, 도형으로 그려보면, 직선으로 나가지 않고 여러 소리가 한꺼번에 나아가지요. 우리 마음의 목소리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다보니까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공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제까지의 한국시는 제 언어가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내 언어로 시를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몸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특히 여성의 몸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시가 되도록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 남자는 여자를 향해 “너는 엄마이니까”, “너는 마녀이니까”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부과하죠. 이러한 부과된 정체성에 대한 항의를 하려면 언어와 문체가 달라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을 할 때 어떻게 하면 이러한 고정된 표현이 아닌 새로운 언어, 구조를 쓸까 그런 것을 점점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선생님의 감수성으로 단지 표피에만 맴도는 다른 시들을 접할 때의 인상은 어떤가요?

아마추어라는 인상을 받게 되죠.


그러한 시를 읽을 때에는 그럼 어떻게 하시나요.

잊어버리죠.


그럼 반대의 시를 읽으실 때에는.

너무 좋죠.


삶은 그리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가치가 섞여버린 뒤죽박죽의 세상 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떠한 분명한 가치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매우 무형의 논리 속에서 언어이든 윤리이든 지혜이든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투명한 피라미드와 같은 가치가 이 삶에 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요.

그 말에 동의를 해요. 사실 시는 통용되는 관습적인 가치, 의미를 말로 지우는 행위 같아요. 언어유희의 시라든지 해체시 조차도 그런 것을 지우는 것이지요. 사실 그렇게 지워나가는 시가 좋게 보여요. 시인들은 하늘의 별처럼 자기 자신 자리에서 언어유희나 해체를 통하든, 이미지를 새로 창조하든 간에 지우는 행위를 하는 것이겠지요.


시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분명 시적인 시간을 경험하겠지요. 그런데 시인은 그 시적인 시간을 일상 가운데 전면적으로 대면할 텐데, 그 시적인 시간이 시인의 일상 전부를 차지할 때에는 피곤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시인이라는 존재는 일상인과 똑같이 일상을 살지만 사로잡힌 사람이거든요. 그들은 세상에 없는 어떤 것에,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어요. 시인은 자고 먹고 해도 결국은 세상에 없는 그 어떤 것의 세계에서 늘 죽어야 하죠. 그 사로잡힘의 시간들에 뭔가 있어요. 그런 사람은 시를 쓰지 않아도 시인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에는 시라는 무용지물이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이렇게 무용지물에 혼신을 두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무용지물을 하려면 스스로 고독과 가난을 선택해야 해요. 그러기에 굉장한 삶의 손실이 있겠죠. 시인은 돈도 많이 벌고, 책도 많이 팔고 하는 것도 포기해야 해요. 고독하지 않으면 시가 나오지 않아요. 스스로 선택해야 해요. 스스로 무용지물의 삶을 선택해야 해요.

그나마 저같이 직업이 있는 사람은 조금 행복하다고 할 수 있어요. 시인들의 직업은 참 다양해요. 소 기르는 시인, 포도밭 하는 시인, 일본 같은 경우는 신문의 ‘맛 기행’ 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나 여행가이드가 시인이 제일 많이 택한 직업이잖아요.

그런데 독일은 시인에게 월급도 주고 혜택도 많아요. 저번 워크샵에 온 사람들 보니까 다 놀고 먹고 있어요. 독일의 시스템은 ‘너에게 장학금을 줄테니 그동안의 쓴 시를 신청해라’ 라는 제도와 지원이 너무 많더라구요. 선택이 되면 3년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월급을 준대요. 책도 내준대요. 아마도 시인은 우리와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라는 감각이 문화적으로 독일에는 잘 스며있는 것 같아요. 물론 월급 받는 시인을 선택하는 것도 잘하는 것 같아요. 시인을 뽑는 시스템도 참 좋아요.


선생님은 문학과 지성을 통해서 등단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 오늘날 한국의 시와 문학의 검증시스템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한국의 검증시스템은 아직 혼란기인 것 같아요. 물론 편집을 잘하는 잡지들도 있는 반면에 자비로 책을 막 내고 등단하고 등단시키는 경우도 있지요. 검증시스템의 대 혼란이예요. 이런 시스템을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여성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고민과 성찰을 시를 통하여 담아내시는데, 여성에 대한 요즘의 생각들은 어떠신지요.

그래서 제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이라는 책도 내었어요. 시론집을 한권 냈었어요. 왜 내가 글을 쓰고 있는가라는 문제제기가 거기에 있어요. 사실 ’여성‘이란 이름은 부과된 정체성이잖아요. “넌 여자이잖아”라는 소리가 제가 살아오면서 제일 많이 들어온 이야기예요. 그리고 넌 결혼했잖아, 넌 처녀이잖아 그러잖아요. 어떤 남자 소설가가 오늘 아침에 밥 먹으면서 자기가 요리학원에 등록했더니 여자들은 자기에게 허드렛일만 시켜서 결국은 자기가 그만두었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모든 여성이 사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런 대접을 늘 받으면서 사는 것이잖아요. 여성은 또 다른 부과된 정체성 속에서 살기 때문에 내 정체를 내가 몰라요. 확인할 수 없어요.

남자를 분류하는 용어는 별로 없는데 여자는 참 많아요. 여자에게는, 너는 창녀야, 너는 성녀야, 너는 모성이야, 등등 분류가 너무 많아요. 그 분류기준에 맞게 살도록 늘 강요받아요. 그래서 여성은 자기 정체와 욕망이 무엇인지를 몰라요. 자신의 본능이 무엇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살기가 참 힘들어요. 지금 이 나이에도 지하철에서 여성으로서 남성의 시선을 고려해야만 하는 것을 남자들은 잘 모를 수도 있어요. 남자들은 여자들만큼 생각해보지 않을 것 같아요. 여자가 밤거리를 걸을 때, 외국에 나갈 때, 이런 경험 너무 많잖아요.

그러나 그런 것을 즐기는 부분도 있긴 해요. 나는 화장하면서 이것은 강요받았지만, 재미있는 것이야, 남자는 이렇게 꾸미지도 못하잖아? 하고 생각을 해보기도 하죠. 이에 관련해서 자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도 입장을 바꾸어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좋아해요. 남성이 여성의 입장에서 시를 써보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런 면에서 한국은 시가 꿈틀꿈틀하고 참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오늘 여러 시인들의 시낭송과 좌담을 참여하면서 신을 머리에 염두하지 않은 영혼들의 자유로움, 그리고 일종의 따뜻하고 솔직하며 인간적인 열정을 발견했거든요. 이는 신의 엄숙성, 혹은 신이라는 언어의 질감을 전제로 한 생각의 갈래들과는 조금은 다른 것 같아요. 시인에게 있어서 신이라는 존재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요?

물론 시인이 신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을 생각하지 않다고 말할 순 없어요. 시인은 신에 대해서 항의를 하죠. 그러나 그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항의할 수도 있는 것이죠. 저는 시를 쓸 때 항상 온 몸이 ‘눈’인 존재가 항상 제 앞에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것은 신의 모습일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내가 시를 쓸 때 이렇게 하는 것은 저 앞에 있는 큰 눈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저에게 시라는 것은, 현실에서 보지는 못하지만 부재를 끌어안는 것이예요. 동양의 부재는 존재와 겹쳐져 있죠. 바로 시는 그 부재를 끌어안는 것이거든요. 감수성이 있어야 시를 쓴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 감수성은, 바로 자기 죽음을 끌어안고 있는 자의 눈, 영혼이 몸에 들어온 자의 눈으로 보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요. 시인은 자기 죽음을 선취한 자라고 할 수 있죠. 죽음을 선취하지 않고는 신과 대면할 수 없잖아요. 부재와 소멸이라는 것을 자기존재에 끌어안지 않고는, 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신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내 시에 선험적으로 신을 품지 않는 시는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의 대화와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좋은 시와 더불어 더욱 건강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 * *

인터뷰가 끝나고 선생님은 작년에 새로 나온 시집 "한잔의 붉은 겨울"을 사인과 함께 선물해 주셨다. 낯선 땅에 살다보면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모국어가 그리워질 때가 간혹 있다. 그 때 이 시집을 열어볼 생각이다. 몇 년 전 김혜순 시인을 추천해 준 한국에 있는 친구 K와, 시집을 직접 선물해 주신 따뜻한 마음의 김혜순 님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 * *





* 6명의 한국 독일 시인들이 창작한 각각의 문장이 모여 아래의 시가 쓰여짐


마인江가 벤치에 한 사람이
문득 자신의 뺨을 때린다
그는 깨달았는가? 모기소리!
바람 탓이었는지도 몰라
내 눈에서 담배의 불빛을 긁어내라
게으른 네 얼굴이 날 부를 때
검은 벨벳 꽃봉오리가 공장 굴뚝에서 올라오네
이 밤, 벙어리 여자가 저 창틀에다 자수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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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및 시인들과의 좌담 사진


김혜순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등이 있다. '독특한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말의 공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다.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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