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

- 타자의 얼굴에 대한 책임의 철학 -

전 철

 

 

 



0. 들어가며

현대철학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된 주체의 해체와 탈중심화는, 서양문화 전반에 깔려 있는 자아중심적 사고를 반성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흩어진 힘의 다양한 관계를 어떻게 다 시 건전하게 묶어내고, 어떠한 방법으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설계하느냐에 대한 절박한 물음에, 오늘 의 대안들은 부재한 듯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임마누엘 레비나스를 만난다. 그는 새로운 <타자성의 철학>과 <얼굴의 철학>을 우리에게 대안으로 건네준다. 폭력의 근거가 되는 전체성에 대한 백색 테 러, 일상적 삶에 대한 구원가능성의 선포, 타자에 대한 책임과 연대 등등, 그의 사유는 현란한 오늘 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와 희망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옷깃을 여미며 그의 사유 에 시선을 응시해보자.

1. 전체성의 철학

전체와 영원에 대한 인류의 신념은 문명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그것은 철학의 영역 안에 서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헤겔은 진리는 전체(Die Wahrheit ist die Ganze)라고 말하 였을 정도니 말이다. 특히 서구철학의 양상은, 사유에 대한 존재의 우월성을 강조하든, 존 재에 대한 사유의 우월성을 강조하든, 어떻게 보면, 모두 '전체성의 철학'이다. 왜냐하면 양 자 모두에 있어서 사유는 존재의 전체성으로 환원되거나, 존재는 사유의 전체성으로 환원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체성의 철학은 서구철학의 근원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여기 전체성의 철학에 대한 거부를 비판적으로 시도하는 한 에스프리를 주목해본다. 그는 임마누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1995)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어떤 문양으로 전체성의 철학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사상의 지도를 직조해 나아가는가.

2. 존재론에 대한 저항

전통철학에 있어서 존재자의 배후에는 존재가 숨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철학은 존재자 뒤에 은폐된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후 근대에 들어서면서, 존재와 존재자는 어떤 시간적 계기 안에서 만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결국 이 두 물음의 이면에서, 존 재는 자명한 실재로 상정된다. 레비나스는 은밀하게, 혹은 자명하게 상정된 익명의 존재에 대한 본격적인 제거를 감행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존재자의 배후에 놓여있는 존재는 없다고 단언한다. 단지 존재하는 것은 존재자일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자는 시도는 결코 철학에서의 혁명일 수 없다. 그렇기에 기존의 관념론적 철학은 결국 존재에서 나오지 않은 어떤 것에 존재를 근거지우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양철학은 대체로 존재론이었다." 고 일침을 가한다. 존재론에 대한 거부와 존재자의 근거인 존재의 거부는 레비나스의 혁명 이다. 그에게 있어서 전통철학의 '존재론'과 '존재'라는 명사는 '존재한다il y a'는 동사로 새롭게 덧입혀진다.

3. 시간과 무한

전통철학에 있어서 현재의 시간은 영원의 서자 취급을 받아왔다. 시간은 영원의 타락이 자 유한성의 표징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언젠가는 극복되어야 할 순수하지 않은 요소로 인 식되어 왔다. 만약 시간을 영원의 부재의 자리로 이해하고, 단지 현재 흐르는 시간의 총량 을 영원과 등가의 자리로 평가한다면, 현재의 시간 위에 서 있는 현존재는 단지 영원의 파 편에 지나지 않게 된다. 또한 영원의 빛에서 볼 때 과거의 시간은 회상될 수 있고 미래의 시간은 예측될 수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시간을 영원의 결여태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은 '절대로 다 른 것'으로 우리에게 육중하게 다가오는 그 자체 무한한 것이 된다. 즉 시간은 영원이라는 절대형식의 잣대에 의해 상대적으로 측량되어지는 일부분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에게 새 롭게 다가오는 사건이다. 이럴 때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어둠일 뿐이다. 단지 현재의 시간 이 일방적으로 진입할 뿐이다. 현재의 시간만이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것은, 과거 와 미래의 시간적 연속성의 파탄을 선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현재 우리를 향해 침투해 오는 시간은 전적으로 새로운 탄생을 잉태하는 초월의 자리이다. 시간은 매 순간의 깨어짐이다. 전통의 철학이 영원성의 철학이라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철저한 현재성의 철학 이 된다. 레비나스에 있어서 전체성의 철학은 무한성의 철학으로 바뀌어진다.

4. 시간과 타자

전체성의 철학에 있어서 '시간'은 타자의 다양성이 자아의 동일성으로 종속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전체성의 철학을 거부한다. 레비나스에 있어서 타자는 자아의 볼모가 아니다. 타자는 자아로 귀환될 수 없다. 타자는 자아로 와해될 수 없다. 단 지 자아와 타자의 무한한 긴장만 남는다. 그에 있어서 '시간'은 타자가 나의 인식 안에서 결코 온전히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바로 나에게 포촉되지 않은 타자는 '절대 타자'가 되는 것이요, 이 불일치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은 무한히 흐르게 된 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은 타자와 자아의 불일치가 언제나 있음을 뜻하고 또한 갈증과 기 다림의 관계가 언제나 있음을 뜻한다."

시간은 타자와의 불일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가 된다. 시간 의 흐름은 너를 만날 수 없는 나의 유한성의 표징이다. 결국 레비나스에 있어서 시간은 유 한한 존재자의 존재 양태로 고백된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거기에서 쉬지 않는다. 시간은 타 자를 타자로서 인정함이요, 그럼으로서 전체성의 틀이 파괴되고, 결국 전체성의 그늘이 걷 힌 그 자리에서 참된 무한의 이념이 열리게 된다. 시간은 타자의 긍정의 자리이자, 자기의 초월의 자리이다.

5. 일상적 삶과 구원

그는 영원의 왕국을 거부한다. 그는 존재론을 부정한다. 그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유일한 것은 홀로 서 있는 나이다. 여기에서의 나는 타자가 아니다. 나는 자명하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나의 존재함은 어떤 지향성도 어떤 관계도 없는 절대적으로 자동사 적인 요소를 구성한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자(monade)이다. 그리고 그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홀로서기이다. 홀로서기의 사건, 이것은 현재이다. 이 현재를 통하여 희망은 열린다. 그리고 현재를 통하여 열리는 일상적 삶은 구원에 몰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레비나스는 일상적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레비나스는 일상적 삶 의 영역을 구원의 자리로 등치시킨다. 일상적 삶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일 상적 삶에서 추상된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숨쉬기 위해서 우리는 숨을 쉬고 마시기 위해서 먹고 마신다. 숨기 위해서 숨고,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공 부하고 산책하기 위해서 산책을 한다. 이 모든 것은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이 모두 사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있어서 삶 자체가, 곧 향유jouissance의 대상이다.

6. 자아와 타자

레비나스에 있어서 <나>는 완전한 자명성이다. 그리고 <시간>은 타자와의 관계이다. 그 리고 초월의 자리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타자>는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타자를 매우 자 명한 존재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결코 타자는 자명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타자를 향유 할 수 없다. 나는 타자를 나에게 동화(同化)시킬 수 없다. 레비나스에 있어서 나와 타자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관계이다. 이 골과 심연은 끝까지 지울 수 없고 만날 수 없다. 오히려 저 심연의 강 건너편에서 우리를 주시하는 타자의 타자성은 <신비>이다. 그는 말한다. "타 자와의 관계는 신비와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타자는 나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얼굴>로 다가온다.

7. 얼굴의 철학

그의 철학은 <타자성의 철학>이다. 동시에 <얼굴의 철학>이다. 타인은 얼굴로서 나에게 현현된다. 그것은 내가 타인의 얼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존재한다il y a는 것은 내가 저항할 수 없는 자명한 현실이듯이, 타인의 얼굴은 자명한 현현이다. 우리는 타 인의 얼굴을 외면할 수 없다. 마치 아무런 목적도 가치도 없이 흐르는 <나>의 자명성이 그 렇듯이, 타인의 얼굴도 단지 거기에 있을 뿐이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두 가지 긴장을 형성한다. 첫째, 타자의 얼굴은 나의 의지로는 결 코 피할 수 없는 낮선 침입자이다. 둘째, 우리는 타자의 얼굴에 대한 책임감 있는 수용과 섬김을 요청받는다. 이 때 비로소 타인의 얼굴은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니라, 오히려 내면성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유일한 접촉점이 된다. 즉 타인의 얼굴은 초월이다. 즉 타인의 얼굴은 지극히 높은 신의 목소리이다. 이제 나는 '책임 적 주체'가 된다. 타인의 얼굴은 '그리움'의 원천이 된다. 그리고 타인의 얼굴을 향한 강렬 한 에로스는 초월을 향한 나의 숭고한 지향이 된다.

실로 레비나스는 주체성을 '타인을 받아들임(lhospiatlite)' 또는 '타인을 대신한 삶(la substitution)'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면서도 얼굴을 통하여 드러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에 비 친 신의 빛을 직증하는 과정이 주체성의 실현이다. 실로 타자의 얼굴의 현현으로 나에게 '형이상학적인 욕망'이 창조되고, 이 욕망으로 인해 인간은 고유한 존재로서 자리매김 한다 는 것이 그의 겨냥인 것이다.

8. 레비나스의 여운

전체성의 철학에 대한 살해, 무한성의 철학의 새로운 부활, 존재로부터 존재자의 엑소더 스, 구원의 자리로서의 삶에 대한 향유, 나의 자명성에 대한 확증, 나와 타자 사이에 그어 놓은 깊은 심연, 신비의 자리로 추앙된 타자, 그리고 얼굴을 통하여 홀연히 다가오는 신의 빛, 그리고 깊은 여운. 레비나스는 전통철학의 빛나는 세례를 거부하며, 그의 독자적인 에 스프리를 새롭게 구현해 나아간다. 우리는 여기에서 호흡을 다시 가다듬으며 천 근의 질문 을 그에게 건넨다. 도대체,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대관절, 우리는 그를 통 하여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는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자아'와 '타자'라는 고유한 영역의 단층을 그려냈다. 이 둘은 결코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 만날 수 없는 비대칭적 관계의 완성이 '타자의 철 학'이다. '타자의 철학'은 자아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사뭇 진지하게 요청한 다. 왜냐하면, 타자의 현현은 지극히 높은 분으로부터 나에게 책임을 호소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샤르트르에 있어서 타인은 지옥이었다. 그러나 레비나스에 있어서 타인은 신비이다. 타인은 초월이다. 그리고 타인의 얼굴은 영원한 노스텔지어이다.

물론 신비로 가득찬 레비나스의 저 언어들이 궁핍한 우리네의 현실에 얼마나 유용하게 스며들 수 있는가, 하는 의혹의 시선을 우리는 골똘히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레비나스 는 전체성의 철학에 은밀히 작용하는 전쟁의 이념과 폭력의 이념을 떼어 내었다. 그리고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타자의 얼굴을 깊은 시 선으로 응시하여, 타자의 얼굴을 향한 새로운 책임의 과제를 우리의 몸에 동여 메었다.

레비나스의 저 서늘한 사유는, 이 메마른 도시문명의 상흔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자아중 심적 사유의 철회를 강요한다. 그리고 에덴의 시대 이래 '그리움의 얼굴'을 상실한 슬픈 인 류에게, 진솔한 자성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의 감수성이 <타자의 얼굴>을 통하 여 건네오는 초월의 빛을 감지할 수 있기를 진지하게 요청한다.
 

■ 참고 자료

1.Emmanuel Levinas(강영안 역),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1996).

2.Emmanuel Levinas(trans. A. Lingis), Totality and Infinity, (Pittsburgh :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

3.임마누엘 레비나스의 인터넷 홈 페이지는
http://pw1.netcom.com/~cyberink/lev.html이다.

4.임마누엘 레비나스의 자료에 관련된 홈 페이지는 http://www.evansville.edu/~tb2/levbib.htm이다.

5. 김성호의 레비나스 아키브는 http://theology.co.kr/levinas 이다.
 

한신학보, 1997.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