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현상학적 이해

 

 

 

 

음악의 현상학적 이해
 

전 철
 
 

"음(音)은 단지 열 두 개 뿐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 파울 힌데미트 -
 
 

 

1. 들어가는 말



1.1. 음악의 신비

음악은 신비이다. 음악은 인간을 성스러움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근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어둠속에서 성스러운 빛을 내뿜는 깊은 원천이다. 결국 음악은 영혼이 가난한 자의 꿈이다. 거기엔 신성한 숲이 침윤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음악은 성스러움의 현전이 된다. 가난과 궁핍은 음악 안에서 탈각된다.

음악은 망막에 포촉되지 아니한다. 손에 쥐어지지 아니한다. 어쩌면 음악은 속절없는 신기루인 듯 하다. 하지만 음악 은 어느 무엇보다 약동적이다. 음악은 강력한 힘이다. 슬픈 운명을 지닌 인간은 다리가 붙박혀 있는 지상을 박차고 그 힘으로 상승한다. 이윽고 가벼운 공기의 부력을 타고 부유한다. 그리고 결핍의 지대를 넘어 끔찍한 환희를 향해 탈주한 다.

모든 인간은 생명의 시냇물을 그리워하고 생명의 원천을 동경한다. 음악은 잊혀진 생명의 원천인 진리를 회상케 하 는 정제된 언어이다. 음악은 인간을 생명 망각의 엔트로피에 끊임없이 저항케 하는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음 악과 만날 때, 생명은 음악을 타고 우리 곁에 길게 드러눕는다. 그리고 어두운 사각지대 한 구석에 처박혀 있는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생명의 고향으로 기나긴 여정을 감행한다. 생명의 대지로 아주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생명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1.2. 음악의 이해

우리는 음악을 이해하려 한다. 음악은 보편적인 체험이다. 음악은 우주적인 체험이다.[1] 그리고 우리에게 음악은, 자 명한 현현(顯現)이다. 그렇다면 음악 자체는 무엇인가? 음악이 인간의 마음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음악이라는 특수 한 현상이 인간의 근본구조 안에서 어떤 힘과 자리를 갖는가? 음악과 진리의 함수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우리 는 던져본다.

하지만 현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악과 음악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는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한 다.[2] 그의 통찰은 수 천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듯 하다. 과거는 기억의 대상이다. 미래는 희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음악은 기억과 희망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영원한 '현재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 악은 영원한 '체험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음악이 인류에게 여전히 낮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사실 음악 안에서 인 류는 살아왔지만, 음악에 대한 탈신화화의 작업은 활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에 대한 혜안이 부재한 가난한 계절을 어김없이 맞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롭게 일어서려 한다. 우리는 음악의 비밀을 향한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왜냐하면 음악의 비밀은 세계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악을 현상학적으로 만나려 한다. 현상학적 작업은 모든 가식과 허위와 허상을 떨쳐버리려는 인류의 적극적 인 공동전선이다. 우리의 소박한 바램은, '현상학적' 결빙의 정신을 통하여 투명한 음악의 세계를 직시하려는데 있다. 응 결의 시선은 진실한 풍경을 잉태한다. 결국 음악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란, 음악에 대한 어떠한 전제와 선입견이든 그 것을 배제하고 <음악>이라는 '現象 그 자체로'를 향한 방법적 접근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글은 네 가지의 전제가 베어 있다. 첫째, '전체 세계의 근본구조'를 바탕으로 이 글은 전개된다. 둘째, '진리'와 '매 개'와 '현존재'라는 관계를 바탕으로 이 글은 전개된다. 셋째, "도대체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내용의 물음에 대하여 일 단 괄호를 치고 침묵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음악이 빈궁한 이 회색도시에 금빛 음(音)들이 화려하게 빛나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2. 몸말 : 음악의 현상학적 접근



2.1. 예술의 지위

2.1.1. 우리세계의 근본구조

우리는 음악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려 한다. 음악에 대한 접근은 음악이 근거한 전체 세계의 근본 구조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근본구조를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존재론

 

윤리학

 

미학

 

 

 

 

 

 

 

 

 

 

사유

 

의지

 

감성

 

 

 

 

 

 

 

 

 

 

사실(기술)

가치(판단)

 
■ 전체 세계의 근본 구조


 

전체 세계는 眞 善 美로 구성이 되어 있다. 또한 인류 문명은 진 선 미로 나아간다. 문명은 존재론에서 출발 하여 윤리학을 거쳐 미학에서 종결한다. 물론 진 선 미를 향한 문명의 관심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동시동작적이 다. 여기에서는 문명의 관심의 방향이 진 선 미로 전진한다는 의미이다. 眞은 존재론이다. 善은 윤리학이다. 美는 미 학이다. 존재론은 <사유>의 문제이고 윤리학은 <의지>의 문제이고 미학은 <감성>의 문제이다. 존재론이 없으면 윤리학 이 없고, 윤리학이 없으면 미학이 없다. 또한 존재론은 <사실>의 세계이다. 미학은 <가치>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어느 세계인가. 음악은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은 미의 범주이다. 그리고 음악을 학(學)의 대상으로서 다루는 학문은 미학(美學)이다. 또한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는 우리의 인식의 접점은 <감성>이 된 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음악이라 하는 것, 그리고 음악을 포괄하는 예술이라 하는 것은 지극히 고도로 추상화된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장구한 흐름 가운데 우리는 어느 곳에 시선을 두 고 있는가. 시간의 추이를 따라 우리의 관심은 진의 관심, 선의 관심, 그리고 미의 관심으로 전환된다. 밥이 해결되면 법이 등장한다. 법이 해결되면 아름다움이 등장한다. 관심의 방향은 성숙의 척도이다.

2.1.2. 보이는 미와 보이지 않는 미

그렇다면 미를 다루는 모든 예술은 동일하게 미학의 범주 안에 놓여질 수 있는 것인가. 우린 일단 미학의 범주 안에 서도 다음과 같은 구별을 가할 수가 있겠다. 눈에 보이는 미를 통하여 드러나는 예술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를 통하여 드러나는 예술이 있다. 눈에 보이는 미는 조각, 미술, 건축 등이다. 하지만 음악은 조각이나 미술, 건축과 같은 외적인 형태를 갖지 않는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미이다. 눈에 보이는 미는 우리들의 신체적 감각을 통하여 인지될 수 있는 미이다. 구체적인 외형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저 에펠탑과 채플실은 우리의 망막의 감각을 통하여서도, 손끝의 감각을 통하여서도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형상은 종이와 물감이라는 질료속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음 악이라는 형상은 미술에서의 종이와 물감이라는 질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악보와 악기를 질료로 가정해 볼 수 있 다. 그러나 음악은 종이와 물감을 통한 미술과 같은 기하학적이고 공간적이고 최종적인 결정체로서의 예술형식은 아니 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간예술로서의 미술과 시간예술로서의 음악의 특징을 볼 수 있다.[3] 공간예술은 보이는 미를 창 출한다. 시간예술은 보이지 않는 미를 창출한다.[4] 공간예술은 그의 자리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있다. 하지만 시간예 술은 그의 자리는 단지 현재일 뿐이다. 영원한 '현재의 예술'이 시간예술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미학적 범주 안에서의 예술은 보이는 미와 보이지 않는 미로 구분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는 보이는 미보다 더 추상적인 미가 된다. 또한 보이지 않는 미는 더욱 더 정신적인 가치와 관련된 미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은 정신적 응시와 안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5] 그렇기 때문에 음악은 가장 완전한 예술이자 가장 최상 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예술인 것이다.

眞의 세계에서 美의 세계에로의 진행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진행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로 서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가치로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의 문제는 있음과 있지 않음의 문제이고, 가치의 문제는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의 문제이다. 그 가운데 중첩되어 있는 善의 범주, 윤리의 범주의 문제는 좋음 과 좋지 않음의 문제이다.

2.1.3. 예술의 원천과 목표

그럼 예술의 원천과 목표는 무엇인가. 예술의 유일한 원천은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요, 예술의 유일한 목표는 이 인식 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6] 그렇다면 유한한 존재는 어떻게 무한하고 영원한 진리를 인식하는가. 유한한 존재가 영 원한 진리를 인식하는 그 경험은 세계 과정과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서, 진리 그 자체를 명증하게 관조하는 것이다. 진리 를 관조하는 행위를 통하여 인간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한층 더 나아가게 된다. 진리의 빛을 통하여 순간은 영원이 된다. 크로노스는 진리를 통하여 카이로스가 된다. 진리의 빛을 통하여 진리를 경험하는 존재는 진리로 변화(變化)하고 자유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자유이다. 또한 진리는 감동이다. 방법의 세계(die Welt der Methode)에서 진리의 세계(die Welt der Wahrheit)로 한 발자욱 더 나아가는 과정속에서 인류는 자유와 경이로움과 환희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한 느낌은 유한한 자신의 몸을 찢을 때에만 다가오는 느낌이다. 또한 자유와 감동은 주관적 환상에 기인한 객관적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느낌은 진리가 우리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면서 우리를 더욱 더 큰 세 계로 유혹하는 진리의 자기운동이다.[7]

여기에서 우리는 음악과 진리의 함수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음악은 세계의 원리이자 세계 안에 내재하는 진리의 형 상화이다. 음악은 이 세계에 편만한 우주의 맥박의 현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은 나와 우주를 이어주는 매개이다. 음악을 통하여 나는 우주로 나아간다. 내가 우주로 나아감은 아름다움과 자유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은 아름다움과 자 유다.[8] 음악이 나와 공명하면 할 수록 나는 우주와 친구가 된다. 음악은 우주의 진정한 계시이며, 더구나 다른 말로 표현되지 않는 그 무엇을 계시하는 것이다.

바로 음악은 삶 가운데 닿아있는 진리를 인식하고 그 인식 경험을 가장 추상화된 고도의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것 이다. 인간은 진리에 대한 인식을 음악을 통하여 승화한다. 그 형상화된 진리는 목소리를 통하여, 악기의 울림을 통하 여 현의 진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의 삶으로 스며든다. 유한한 삶은 영원의 형상으로서의 음악으로 남고 그 불멸하 는 영원의 형상은 어느 시대와 어느 장소이건 다시 현실로 수육되어 삶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유한하지만 음 악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음악은 영원의 결정적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시간을 찾기 위하여 세계를 틈 타고 전진해 들어온다.


 현존재

Methode

<-창작작용

 음악

Vermittelung

<-진리현상

 진리

Wahrheit

관조작용->

 진리인식->


■ 진리와 현존재의 매개로서의 음악


2.2. 음악의 형식

2.2.1. 음악의 변수

음악은 음악의 고유한 형식이 있다. 음악의 형식미는 질서를 근거로 한다. 음악의 형식에는 그 형식의 구성성분인 다 양한 변수가 있다. 그 변수는 ⑴ 음의 고저 ⑵ 음의 강약 ⑶ 음의 색깔 ⑷ 음의 길이 ⑸ 음의 변이 ⑹ 음의 조화가 있 다.

첫째, 음의 고저는 '도레미파솔라시도'와 같은 음의 관계로 드러난다.[9] 둘째, 음의 강약은 음의 볼륨이다. BOSS 스 피커가 같은 '도'의 소리를 내어도 볼륨 10과 볼륨 5와 같은 강약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 차이는 음의 강약이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셋째, 음의 색깔은 보통 음색이라고 부른다. 바이올린의 음색과 첼로의 음색의 차이는 명백하다.[10] 넷째, 음의 길이이다. 4분음표와 2분음표의 차이를 가능케 하는 이유는 음의 길이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 이다. 다섯째, 음의 변이이다. 음의 변이는 강하게(f;forte)와 약하게(p;piano)의 차이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의 조화이다. 1음(도)-3음(미)-5음(솔)의 조화와 1음(도)-2음(레)-4음(파)의 조화의 차이를 통하여 우리는 음 의 조화를 이해할 수 있다.[11]

2.2.2. 변수의 다양함과 표현의 다양함

음악의 형식에 있어서 변수의 다양함은 표현의 다양함을 만든다. 표현의 다양함은 심지어 감각으로 인식될 수 없는 부분까지 조작하기도 한다.[12] 변수 자체는 일종의 불변하는 순수한 가능성의 영역이다. 이 순수한 가능성으로서의 영 역을 어떻게 조합하여 현실화 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 음악의 형식미의 문제이다. 그런데 표현은 변수의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 모든 표현은 변수의 영역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실현의 과정 속에서 음의 질서정연한 공간적 시간적 결합을 질서정연하게 직조한다면, 우리는 그 음들의 최종적 결합체로서의 음악에 대한 질서정연한 느낌을 갖을 수 있다. 또한 진리의 드러남의 강도는 변수의 다양함과 상응한다. 왜냐하면 변수의 다양함은 표현의 다양함을 확보하고, 표현의 다양 함은 표현의 정확함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드러남의 강도는 진리의 정확함을 의미한다.

 

현존재

Methode

 

표현

변수

 

진리

Wahrheit

 

 


■  표현과 변수의 관계



2.2.3. 화성음과 비화성음

그럼 음악의 형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전개하기 위하여 우리는 <화성음>과 <비화성음>의 대비를 통하여 음악의 형식에 대한 이해를 갖기로 하자. <화성음>과 <비화성음>의 차이는 우리가 위에 서 언급하였던 음의 변수 가운데서 다른 변수는 다 동일하고, ⑹ 음의 조화만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이 <화성음>이고 무엇이 <비화성음>인가. 대개 음이 지니는 진동수 사이에 수학적 비례관계가 성립하는 음들을 <화성 음>이라 한다. 고전음악이나 일반적인 팝음악에서는 진동수 사이의 수학적인 정수비가 성립하는 3도 화성을 엄격하게 준수한다. 이러한 준수비가 성립하지 않는 2도, 4도 간격의 음들에 대해서는 그 사용을 반 박자 이내로 금지시키고 있 다. 그와 같은 음들을 긴장음이라 부르며 반박자 이내에 다시 3도 간격의 화성음으로 풀어줘야만 한다.

가령 장조에서 1음(도)-3음(미)-5음(솔)과, 4음(파)-6음(라)-8음(도)과 같은 3도 간격의 음들이 화성음인데 3음(미)-4음 (파)으로 구성된 2도 간격의 음들이 사용되었을 때 반드시 반박자 안에 3음(미)-5음(솔) 또는 2음(레)-4음(파)으로 복귀시 켜야만 하는 것이다. 음의 수학적 비례관계의 질서가 유지되는 음을 <화성음>으로, 음의 수학적 비례관계의 질서가 파 괴되는 음을 <비화성음>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겠다. 이렇듯 모든 느낌은 근거가 있다. 안정감은 안정감을 느끼게 하 여주는 근거 위에서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불안정감은 불안정감을 느끼게 하여주는 근거 위에서만 느끼게 되는 것이 다. 전자가 <화성음>이고 후자가 <비화성음>이다.

그렇다면 <화성음>이나 <비화성음>이라는 관념도 역사적 과정 가운데 인류의 의식이 축적한 경험의 산물이고, 변화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여기서 표명할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보자. 2도나 4도와 같은 <비화성음>이 불안정하게 들리는 것은 감상자의 주관적 감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주관적 감성이 질서나 무질서의 감정을 어떠한 대상에게 입 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드러내는 질서나 무질서가 주관적 감정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나긴 역사의 자기운동을 통하여 <비화성음>이 지양되고 <화성음>으로 통합을 이루어 나가는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고대 그리이스의 종교집단 '오르페우스'나 '피타고라스'가 이미 수학적인 정수비를 지니는 화성을 즐기며 영혼을 정화하는 수 단으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이렇듯 음들이 지니는 진동수 사이의 수학적인 비례관계는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늘 있는 것이고 또한 본질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화성음>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느낌을 준다. 재즈연주자들이 비화성적인 음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들의 귀에 그 음들이 안정되고 편안하게 들리기 때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재즈의 불협화음에 공감하고 그에 깊이 빨려 들어가는 체험은 인간 속에 존재하는 어떤 측면을 말하는 것일까? 안정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불안의 가능성을 최대한 향유하려는 멘탈리티가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모든 불협 화음은 화음으로 수렴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2.2.4. 음악과 수

우리는, 음악을 구성하는 6개의 변수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리고 변수가 다수이면 다수일 수록, 또한 한 변수의 영 역이 크면 클 수록 진리의 인식에 관한 표현의 섬세한 차이와 다양함의 가능성은 확보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화성음>과 <비화성음>의 대비를 통하여 음은 역사적 변천의 부산물이나 의식의 소산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는 명백한 수학적 비례관계의 형식이 있다. 그 비례관계의 정점(point)을 우린 음이라고 부른다.[13] 또한 이러한 음과 음 사이의 근본적인 수학적 비례관계의 질서가 유지되면 그러할 수록 음악을 통한 질서와 아름다움 이 다양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균형이 있는 것을 볼 때, 사람은 기쁨을 느낀다"라고 말하였 다. 저 언명은 이제 "균형이 있는 음악을 들을 때 사람은 기쁨을 느낀다"로 바뀌어야 마땅하다. 여기에서의 균형은 수 의 균형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계의 근원에는 수(數)의 질서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피 타고라스는 수가 만물의 원리라고 말하였던 것이다.[14] 진리는 수로 표현된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의 형식은 수 의 형식이다. 음악은 수이다.[15] 실로 '음악이란 인간 정신이 무의식적으로 수를 셈하면서 만들어지는 것'[16]이라고 말 한 라이프니츠는 음악과 수의 함수관계를 정확히 꿰뚫은 사람이었다.

2.3. 음악의 내용

우리는 위에서 음은 철저한 수학적 비례관계를 그 근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철저한 비례관계와 정 수비를 형식으로 한 음들의 결합은 인간을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임을 알 수 있었다. 음악의 기본 적인 형식이 수가 되는 이유는, 우리의 세계는 數의 世界이기 때문이다. 眞·善·美의 세계는 수의 세계이다.[17] 그리 고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체계의 가장 근원적인 차원으로 내려가면 모든 세계는 수의 세계로 환원된다. 하지만 인간 의 인식이라는 추상화의 극치의 차원에서는, 패턴화된 수의 세계와 관계성의 세계를 인식하고 확증하고 구별하기엔 지 극히 어려울 뿐이다. 곱게 익은 저 설악산 단풍의 색깔은 빨강이다. 하지만 그 단풍을 눈 앞에서 보고, 돋보기로 확대하 고, 현미경으로 분석하면 거기엔 수 없이 다양한 색들이 서로 복잡다단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저 단풍은 빨 강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세계와 음악의 세계가 수의 세계라는 엄연한 사실을 설명하는데 있어 우리의 언어는 너무나 아득하고 우리의 사유는 너무나 모호하다. 단지 미미하게만 느낄 수는 있다. 왜냐하면 수의 세계로서의 진리의 세계는 설명의 세 계를 넘어서 모든 세계에 편만한 존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설명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의 특수사례이기 때문이 다. 설명은 존재의 필요조건이고 존재는 설명의 충분조건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은 설명의 세계로 끌어내릴 수 없는 존재의 세계의 경이로움을 표현하려는 야심찬 시도이다. 우리는 저 음악의 아름다움을 언어의 그물로 포획하지 못하여도,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다. 음악의 본질은 세계의 원리에 대한 그의 직시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음악의 감동도 세계의 원리의 드러남에 상응한다.

2.3.1. 음악가의 정신적 활동

그렇다면 음악의 내용이란 어떤 것일까.

형식은 초역사적 초시간적이다. 상대적으로 내용은 역사적 시간적이다. 형식은 형상과 가깝게 맞닿아 있다. 내용은 질 료와 가깝게 맞닿아 있다. 음악의 형식과 내용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자면 음악의 형식으로서의 '도레미파솔라시 도'를 가능케 하는 음의 수학적 비례관계는 불멸한다. 하지만 그 형식을 통하여 음악의 내용을 형성하고 전달하는 창작 자의 의지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구체적인 삶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변적이다. 형식은 불변하지만 내용은 가변적이 다. 그리고 원리로서의 형식을 사용하여 어떤 내용을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역사적이고 시간적이고 상황적 이고 개인적인 문제이다. 형식에 호홉을 불어넣어 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하여 내용과 형식은 새로운 운명을 창출한 다.

음악은 원리의 세계로서의 '불변하는 형식'과, 음악을 만드는 자의 삶에서 흐르는 '정신적 내용'의 결합이다. 음악은 불변하는 형식의 레일을 타고 전진하는 정신적 내용의 기차인 것이다. 형식으로서의 레일과 정신적 내용으로서의 기차 의 결합이 음악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세계를 바람처럼, 구름처럼, 가느다란 안개처럼 수호하는 하늘의 요정이다.
 

청취가

<-진리현상

음악

<-창작작용

음악가

정신적 내용

관조작용->

불변의 형식

관조작용->

정신적 내용

■ 음악가와 청취가의 관계 : 불변의 형식과 가변의 내용의 관계


2.3.2. 삶 안으로 진리를 가두는 유일한 감옥 : 불변의 형식으로서의 음악

모든 존재는 진리에 대한 경험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진리의 탈은폐이기 때문이다. 땅을 통하여 있는 모든 존재 는 진리의 간접적 자기계시이다.[18] 그렇다면 음악가란 무엇인가? 음악가는 자신의 진리에 대한 주관적이고 상황적이 고 유한한 경험의 내용을 객관적이고 불멸하는 음악이라는 형식과 결합시키는 자들이다. 음악가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 는 존재이다. 세계의 근본은 진리이다. 세계 안의 음악가는 그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는 자들이다. 세계에 깊숙히 침투 해 있는 진리의 흔적을 그들은 발견하고 감지한다. 음악가는 영원한 진리를 믿는다. 그가 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조화이다. 진리는 황홀이다. 완전한 조화와 황홀한 경지를 넘나드는 존재가 음악가이다. 그리고 예술가이다. 그 리고 주관을 통하여 경험한 영원한 빛인 진리의 황홀경에 대하여 싸그라히 박제화 할 수 있는 유일한 접촉점은 바로 음악이라는 '불변의 형식'이다. 예술가의 주관 안에 깃든 진리의 드러남은 불변의 형식인 음악을 통하여 표현된다. 실로 예술가는 온 영혼을 그의 음악 속에 쏟아 넣는다. 이제 진리에 대한 예술가의 체험은 예술로 남는다. 그리고 저 하늘에 영원하게 빛나는 별과 같은 음악은 인류와 문명의 끊임없는 전진 안에서 계속 빛을 발한다. 인류는 음악을 통하여 고도 의 의식과 강렬한 경험에 도달한다. 예술가의 빛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우리의 육신이 소멸한 후에도 영원히 인류의 영혼을 영원으로 인도한다. 음악은 순간을 영원으로 인도하는 빛이고 음악가는 그 빛을 주조하는 연금술사이다.

2.3.3. 음악과 음악가

톨스토이에 있어서 예술은 인간이 도달한 최고, 최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 이다. 그렇다면 가장 순수하게 예술의 본질을 대표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천재이다. 천재라고 하는 것은 가장 완전 한 객관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순수하게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직관에 빠져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원래 삶 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만 있는 인식을 이렇게 삶에 이바지하는 것으로부터 떼어내는 능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즉 자기의 이해관계 욕망 목적 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더 나아가서는 순수한 인식주체로서, 즉 세계의 맑은 눈으로서 남아 있기 위해, 그리고 파악한 것을 잘 생각된 예술을 통해 되풀이 하고, 흔들리는 현상 안에 떠돌고 있는 것을 지속적인 생각속에 고정시키기 위해, 그 눈을 순간이 아니라 필요한 동안 지속적이고 신중하게 유지시키면서, 일정한 시간 동안 자기의 개인됨을 포기하는 그런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19] 천재는 세계에 깊이 베어있는 영원한 형상으로서의 진리를 인식한다. 영원한 형상으로서의 진리에 대한 인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다. 그렇다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무엇 인가. 자기자신이 진리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안에서 진리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자신을 통하여 진리 가 나올 뿐이다.

천재적인 음악가는 진리를 위하여 삶을 투신한다. 그리고 죽음까지 마다한다. 왜냐하면 삶은 유한하지만 진리는 무한하 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프고도 위대한 것은 예술가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진리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무한한 진 리는 그 자체로서는 존립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진리를 좌표화 할 수 있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기 때문이 다. 우리의 세계, 우리의 시 공간은 플라톤의 감옥이 아니라 진리가 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래서 진리는 지금 도 끊임없이 시공간을 틈타고 들어오려 한다. 진리는 시공을 지향한다. 진리는 시공간과 얽혀있는 세계를 지향한다. 시 간과 공간의 옷을 입고 빛나는 진리의 금광석은 구체적인 삶과 역사이다. 태양이 지구를 녹아버릴 것만 같은 이 화염의 세계, 인류 각자가 주체를 지향하며 우르릉거리는 인간사의 갈등의 세계, 하얀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어디론가 비상하는 저 새의 세계, 검푸른 바다가 바람과의 치열한 경합을 펼치면서 하얀 낙조를 일으키며 움직이는 자연의 세계, 이 모든 현란한 세계에 깊이 고여있는 비밀을, 그는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저 어두운 세계의 비밀을 밝은 빛 아래로 인도 하는 천상의 헤르메스이다.

그럼 천재를 탄생시킬 수 있는 존재론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는 관계의 형식, 즉 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세계는 조화의 세계이다.[20] 어떤 사건이건 그 사건은 다른 사건과 관계맺고 있다. 한 사건과 다른 사건과 의 수학적 비례관계의 파악이 이해이다. 그리고 정신은 관계를 파악하는 힘이다. 천재는 자신의 삶의 아련하고 강렬한 경험을 수학적 비례관계를 근거로 하여 수직적 수평적으로 정제하여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이다.[21] 천재는 삶 의 일 순간 들어닥치는 경이로운 경험을 영원의 세계로 접붙힐 수 있는 탁월한 힘의 소유자이다. 음악가의 삶을 통하여 얻어진 진리에 대한 풍경과 장면, 그리고 보이지 않게 미세한 감각을 자극하는 느낌은 순간적이다. 아주 짧은 시간을 틈타고 들어오는 경이로움은, 손에 바닷모래를 쥐듯이, 어느덧 낙조의 포말이 되어 흩어진다. 그렇다면 그 진리의 편린 들을 무엇으로 담아내는가. 우리가 말하였던 수의 세계로서의 형식인 음악을 통하여 포착하고 규정한다.

2.3.4. 음악의 기준과 우리의 느낌

음악가의 모든 음악은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어떤 음악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 거나, 어떤 대상에 대한 매혹스러움을 느끼거나, 특히 어떤 존재에 대하여 경이로움이나 숭고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그 존재가 진리의 외양을 뿜어내고 있고 진리의 빛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진리의 직시에 대한 근거는 느낌이다. 우리는 객관적 인식은 지성(Intelligence)에서만 열린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지성은 느낌의 후기위상이고 느낌의 합리화 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느낌의 합리화이다. 지성과 이성은 그 느낌의 합리화를 도모해 주는 기능일 뿐이다. 느 낌의 후기위상이 지성이고, 지성의 초기위상이 느낌이다. 진리가 그 음악에 거하고 있는가? 혹은 진리의 형상을 그 음 악은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는 판단의 유일한 기준은 우리의 느낌이다. 진리가 베어있는 음악은 우리의 영혼을 감동케 한다. 플라톤은 '보여줌'으로서의 음악과 '봄'으로서의 인간 사이에는 긴밀한 상응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22] 그렇다 면 음악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정서는 결코 주관적 환상에 기인한 허상이 아니다. 음악의 감동은 진리와 정서의 유비를 기반으로 한다는 우리의 결론은 플라톤의 결론으로 합류된다.
 
 

3. 나오는 말



첫째, 우리의 세계는 진 선 미의 세계이다. 예술은 미의 세계이다. 미의 세계인 예술의 원천은 진리인식이다. 예술의 목표는 진리전달이다. 그 미의 세계 가운데에서도 음악은 보이지 않는 가장 추상화된 세계이자 정련된 세계이다. 그렇 기 때문에 음악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예술이 된다. 또한 음악은 진리가 맥박하는 역동적인 운동이다. 음악은 진리의 춤 이다(예술과 음악의 지위).

둘째, 음악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한다. 그 진리는 아름다움의 느낌이다. 자유의 느낌이다. 아름다움과 자유는 우리가 진리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유일한 증명서인 것이다(진리의 현전으로서의 음악).

셋째, 음악의 형식에 있어서 변수는 음의 고저, 음의 강약, 음의 색깔, 음의 길이, 음의 변이, 음의 조화가 있다. 음악 의 다양한 변수의 패턴화된 결합에서 우리의 다양한 느낌이 규정되어진다. 우리의 느낌은 주관적 환상이 아니라 수학적 비례관계에서 파생되어진 부산물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세계는 수의 세계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음악의 근거로서 의 수의 세계).

넷째, 천재적인 음악가는 자신의 삶에 불현듯 날라온 진리의 '새'를 시공의 '새집' 안에 가둘 수 있는 탁월한 자들이 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의 새의 화려한 빛깔과 아름다운 자태를 어느 누구에게든 보여주는 순결한 영혼의 광대이다. 그 만큼 그들의 정신적 삶은 저 우주를 향해 열려있는 삶이고, 진리에 목말라 하는 삶이고, 자유에 숨죽여 하는 삶이다(진 리의 수호자인 음악가).

우리는 지금까지 음악의 현상학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음악이야말로 나와 진리를 매개하는 탁월한 장치임을 우리는 발견하였다. 또한 음악의 근원은 수의 세계임을 발견하였다. 음악은 세계의 신비를 명석하게 드러내는 깊고 투명한 호 수이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진리의 무한한 세계를 인식하고, 한 인간이 저 무한한 세계와 어떻게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음악은 우리를 빛으로 인도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음악은 인간과 진리의 두 지대의 합이다! 음악은 진리의 노스텔지어다!

오늘을 보자. 오늘, 저 우주의 빛이 비추이는 투명한 음악의 창문은 어디에 걸려있는가. 오늘, 음악이 거할 처소는 어 디인가. 우리의 시대는 음악이 죽은 가련한 시대이다. 음악의 상실은 세계의 운명이 되었다. 우리의 시대는 아포리아의 시대이다. 단지 세상에 떠도는 음악은 소비사회의 기호로 값싸게 매몰되어 버린 창백한 기생일 뿐이다. 바로 이러한 음 악의 부재는 인간과 진리의 접촉점의 부재일 뿐이다. 음악의 상실은 진리의 상실이다. 음악의 상실은 진리 망각의 표상 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사멸해 버린 음악에 날개를 다는 존재의 목동이 간절한 시대이다. 음(音)이 순수한 음 (音)이 되도록 우리는 이 시대에 저항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음악이 홀연히 사라진 이 침묵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외양으로 입술을 모두어 시를 읊어야 할 까. 대관절 우리는 어떤 노래를 대지 위에 뿌려야 할까. 우리는 우리의 젖은 시선을 어디에 응시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 의 흐트러진 운명을 어느 가슴에 묻어두어야 할까. 음악이 긴 그림자를 뒤로 하고 자취를 감춘 이 어두운 시대, 이제 우리가 음악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음악을 여는 것, 우리가 음악을 사는 것, 이것이 우리의 어깨에 걸린 숭고한 사 명이 아니겠는가. 마치 태고적 얼음과 만년설의 정상에 응결되어 있는 저 순도 높은 음(音)처럼 말이다.
 

 

[각주]
 

1) Richard Wingell, Experiencing Music (California : Alfred Publishing Co., 1981), p.8.

2)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Music, Art of"

3) 우린 여기에서 음악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음악이 차지한 공간적 위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음악의 자리는 어디인가? 라는 질문 을 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미술과 같은 공간예술은 작품의 공간적 자리가 명확하지만, 음악과 같은 시간예술은 작품의 공간적 자리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다시 <소리의 위치>에 대한 질문으로 일반화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소리는 일정 한 공간에 위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LP에서 "동해물과"로 시작되는 <애국가>의 "동"이라는 소리를 찾기 위하여 LP를 정지시 킨다고 해도 '동'이라는 소리는 결코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리는 한 시간적 계기와 다른 시간적 계기의 관계성 안에서만 등 장하기 때문이다. 소리는 공간을 전제하지 않고 연속을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는 공간적이지 않다. 음은 공간적이지 않다. 다시 말하면 음악은 반드시 시간이 개입되어야 하는 형식이다. 음악이 춤추는 장소는 시간이라는 무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술 은 공간적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일반적으로 음악은 시간예술이고 미술은 공간예술이니, 미술작품은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 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미술 또한 공간적이지 않다. 1초 전의 미술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 우리 눈앞에 보이는 미술작품은 1초 전의 미술작품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인식은 1초 전의 미술작품과 1초 후의 미술작품의 자기동일성을 미술작품 에게 투사시킬 뿐이다. 무엇이 변해도 그것은 변해 있다. 사실 그것은 미술작품 뿐만이 아니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매 순간 새로움을 덧입는 존재이다. 매 순간 변화를 감행하는 연속적 존재이다. 모든 존재의 전제는 연속성과 과정이다. 그래서 과정에 대 한 깊은 면을 엿본 화이트헤드는 <실재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예술을 미술로, 시간의 예술을 음악으 로 상정하는 것은 우리의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서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

4)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반론에 관심을 기울여본다. 히브리적 사유는 시간을 실재로 바라보는 사유이다. 헬라적 사유는 공간을 실재 로 바라보는 사유이다. 히브리적 사유는 사건들의 특수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헬라적 사유는 사물의 특수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히브리적 사유는 동적인 사유이고 헬라적 사유는 정적인 사유이다. 그렇다면, 동적인 예술을 음악이라고 하고 정적인 예술을 미술 이라고 할 때 히브리적 문화와 음악, 혹은 헬라적 문화와 미술간의 역사적 함수관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후자, 즉 희랍문화와 기하학, 그리고 조형미술은 긴밀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듯 하다. 히브리적 사유와 헬라적 사유, 특히 시간-공간관에 대하여는 다음의 책 3부를 참조. Thorleif Boman(허 혁 역),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경북 왜관: 분도출판사, 1975).

5)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에 비해 더 가치롭다. 우리는 여기에서 보이는 예술과 보이지 않는 예술의 차이와 더불어 보이는 '문 어'와 보이지 않는 '구어'의 차이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비는 해석학적인 차원에서 '문어'와 '구어'의 대비와 상응한다. 해석학의 어원은 델피 신탁의 사제를 지칭하는 그리스어 헤르메스에서 등장한다. 헤르메스는 신의 메세지를 인간에게 전해주는 날개 달린 사자신이다. 헤르메스에 있어서 말을 통한 선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 스 시대에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문자는 말에 비해 그의 한계를 갖고 있다. 바로 '말'로서의 구어와 '문자' 로서의 문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문어는 구어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표현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리차드 팔머 (Richard E. Palmer)는 지적한다. 문자는 보이는 것이고 말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미술은 보이고 음악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렇다면 이러한 상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미술을 통한 진리의 드러남의 강도가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미함을 간접적으로 지시한다. 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에 비해 근원적인가. 그 물음은 어쩌면 신비에 속한 물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현상학적 접근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왜 말은 문자에 비해 더 원초적인 가?" 그것은 말이라는 범주가 문자라는 범주에 비해 다양한 변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말의 변수는 음의 고저, 음의 강약, 음색, 음의 길이, 음의 리듬이 있다. 하지만 문자의 변수는 종이와 잉크의 조합인 글자체(font) 단 하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진리의 드러남의 강도는 변수의 다양함과 상응한다는 점이다. 변수의 다양함과 진리의 드러남 의 강도는 정비례한다. 음악은 미술에 비해 다양한 변수의 영역을 내포하고 있는 예술영역이다. 음악의 변수에 대하여서는 아래 < 음악의 형식>에서 더욱 자세하게 논의된다. 구어와 문어의 해석학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 참조. Richard E. Palmer, Hermeneutics (Evanston :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9), pp.12-20 ; 음(音)으로서의 언어의 이해에 대하여는 다음의 책 3부를 참조. Walter J. Ong(이영걸 역), {언어의 현존} (서울: 탐구당, 1991).

6) Johannes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I. Teil (Freiburg, Basel, Wien, 14, Aufl., 1987), p.464.

7) G.W.F. Hegel, Phanomenologie des Geistes (Suhrkamp Verlag Frankfurt am Mein, 1970), p.591.

8) 대중가요는 우주의 맥박의 현현에 대한 '대중화'를 표방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본창출을 향한 엽기적 음모가 도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를 향한 느낌의 유혹으로서의 자격은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삶의 진실을 담은 내용은 희미하게 숨어있다. 문 제는 어떤 대중가요와 음악이든, 그 형식 그 자체는 수학적 형식을 이탈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대중의 귀에 일상화된 수 학적 패턴을 파괴하는 양식을 통하여 자본창출을 극대화하려는 형식 파괴주의자들도 현대에 들어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동시 에 내용 파괴주의자들 또한 증가하고 있다. 삶의 파편화된 스토리, 삶의 가치전복의 스토리가 가사로 편입되어 횡횡하고 있다. 서 글픈 현실이지만, 실로 소비의 사회는 예술의 세계까지도 무차별하게 잠식해 들어간다. 이와 관련하여 장 보드리아르의 대중가요 (Popular Song)에 대한 분석은 궤를 같이 한다. 그에 의하면, 소비의 논리는 예술표현에 전통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최고의 지위 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없애버린다. 그리고 팝은 우리의 예술적 감수성과는 거리가 멀다. 팝은 차가운 예술이다. 아니, 팝은 대 중예술이 아니다.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저 팝의 미소는, 어디까지가 화사한 신뢰의 미소이고 어디까지가 상업주의의 공범자 의 미소인지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다. 그 미소는 바로 공범자의 미소이다. 그의 소비의 예술로서의 팝의 분석은 다음 책 3부 1장 을 참조. Jean Baudrillard(이상률 역), {소비의 사회} (서울: 문예출판사, 1991), pp.163-175 ; 원시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음악 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는 막스 베버의 다음의 책을 참조. 그는 이 책에서 단순한 음악과 사회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에서만 끝 나는 것이 아니라, 음향이론이나 음악의 기초원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Wax Weber(이건용 역), {음악사회학} (서 울: 민음사, 1991) ;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음악과 음악가들의 문화 사회적 지층의 고고학적 탐구에 대하여는 조셉 매클리스의 다음의 책을 참조. 그는 이 책에서 각 시대의 음악과 음악가들의 예술적 아우라를 총망라하여 완벽하고 탁월하게 기술한다. Joseph Machlis(신금선 역), {음악의 즐거움 上中下}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1).

9) 진동수와 음정은 다음과 같은 수학적 함수관계가 있다. 우선 옥타브를 진동수와 음성의 함수관계를 통하여 이해해보자. A라는 진 동수의 음이 있다. A라는 진동수의 음과 옥타브를 이루는 음들은, A×2, A×4, A×8, A×16 등의 진동수이다. 2, 4, 8, 16은 2라 는 수의 제곱이 되는 수들이다. 제곱의 값이 1일 경우 진동수 자신과 같은 음이고, 2일 경우 한 옥타브 위의 음이고, 3일 경우 그 위의 옥타브 음이 된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진동수 비례와 음정과의 함수관계는 지수함수적이다. 그렇다면 한 옥타브 이내의 '도 레미파솔라시도'라는 음은 진동수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우선 '도'의 진동수의 9/8배는 '레'이다. '도'의 4/3배는 '파'이다. '도'의 3/2배는 '솔'이다. '도'의 2배는 한 옥타브 위의 '도'이다. 이렇게 진동수와 음정과 옥타브는 긴밀한 수학적 함수관계가 있다. 서우 석, {음악현상학}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9), pp.84-86 ; 김용운, {인간학으로서의 수학} (서울: 석성문화사, 1983), pp.171-174. 참조 ; 음향학 전반에 대한 개괄적 이해는 다음을 참조. Max Weber(이건용 역), "막스 베버의 음악사회학을 위한 기 초적 음향학 개념", {음악사회학} (서울: 민음사, 1993), pp.189-201.

10) 음색은 두 음이 음고, 강도, 길이가 모두 같으면서 다르게 들리는 모든 성질이다. 우리는 음색을 더 세분된 항목으로 나눌 수 있 고, 이 음색을 세분화 한 것이 악기라고 말할 수 있다. 악기는 음색의 변별적 영역이다. 따라서 악기의 체계는 음색의 체계이다. 우리는 악기에 따라 그 음색적 범위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으며, 한 문화권이 소유하고 있는 악기의 전체적인 모습은 그 문화권 이 지니고 있는 음색의 체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음악현상학}, p.82. 참조.

11) 우리가 구분한 음악의 변수와, 헐버트 제틀(Herbert Zettl)이 구분한 음의 요소는 거의 유사하다. 제틀은 음의 구조를 다음과 같 이 분석하였다. 우선 음의 요소(Elements of Sound)와 음의 기본적 구조(Basic Sound Structure)를 크게 구분한다. 음의 요소는 ⑴ 음의 고저(pitch) ⑵ 음의 강약(loudness) ⑶ 음색(timbre) ⑷ 음의 길이(duration) ⑸ 음의 변이(attack-decay)이다. 그리고 음의 기본적 구조는 ⑴ 선율(melody) ⑵ 단음(homophony) ⑶ 다음(polyphony)이다. 제틀의 음의 요소는 우리의 구분 ⑴에서 ⑸ 까지의 범주이다. 그리고 제틀의 음의 기본적 구조는 우리의 구분 ⑹의 범주이다. Herbert Zettl, Sight Sound Motion - Applied Media Aesthetics (California : Wodsworth Publishing Co., 1990), pp.355-372.

12) 컴팩트디스크(Compact Disk)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오디오가 90년대 초에 대중적으로 보급 확산되었다. 기존의 LP나 자성테이프 는 카트리지나 디스크, 혹은 녹음기의 헤드와 테이프 자성체의 물리적 접촉에 기인한 잡음(Noise)을 해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컴 팩트디스크는 레이저로 디스크의 정보를 접촉 없이 읽기 때문에, LP나 테이프에 있어서 접촉시 일어나는 잡음의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되었다. 오디오의 새로운 장을 연 컴팩트디스크는 보급 이후 막대한 시장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LP나 테잎은 역사 의 뒷전에 사라지리라는 예견을 많은 오디오 전문가들은 던졌다. 하지만 LP나 테잎은 오디오의 주요 기기로서, 약간은 주춤하지 만, 건재하고 있다. 그 건제의 이유는 무엇일까. 비교적 고가인 CD플레이어의 가격 때문일까. 아니면 휴대용 녹음기와 같이 휴대 용으로서의 기능을 CD는 충실히 보완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물론 그러한 이유도 없지 않아 있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우리의 논의 의 관점, 즉 '변수의 다양함과 표현의 다양함'이라는 측면에서 이 현상을 주목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 을 것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특별한 이유 없이 CD보다 LP나 테이프가 "기분이 더 좋다!"는 것 때문이다. 그럼 왜 잡음이 하 나도 없이 세련되고 현대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CD를 마다하고 고리타분한 냄새가 나는 LP나 테이프가 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가. 디지탈의 논리계형으로 작동하는 CD와 아날로그의 논리계형으로 작동하는 LP의 차이는 다 아는 바이다. 그렇다면 왜 아 날로그가 사람을 흥취롭게 하는가. 어쩌면 인간은 아날로그에 친화력을 갖기 때문일까? 인간 귀의 구조는 디지탈이 아니라 아날 로그의 논리계형이기 때문인가? 결론은 이렇게 나왔다. 많은 오디오 연구가들은 LP나 테잎에서 사용하는 음역이 CD에서 사용하 는 음역에 비해 더 넓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날로그 형식의 오디오는 인간의 가청주파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음역까 지도 사용한다. 하지만 디지탈은 인간의 가청주파수 영역에만 한계를 그어서 그 안에 음의 정보를 기록한다. 이것은, 가청주파수 를 넘어서는 음이 우리에게 들리지는 않지만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심지어 어떤 작용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점을 밝 히고 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이후 일본에서는 가청주파수의 경계선인 20,000Hz를 훨씬 넘어서는 40,000Hz까지의 음의 정보를 CD에 기록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고 한다. 물론 가청주파수 이하의 대역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20,000Hz 이상은 귀에 들리지 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에 들리지 않는 영역을 기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들을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영역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의 논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CD는 음의 변수인 <잡음>을 조정하 였을런지는 몰라도 다른 영역의 음의 변수인 <음역>에 대한 설정이 LD나 테이프의 설정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미세한 차이 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음역의 넓이에 따라 느낌은 변한다. 심지어 가청주파수를 넘어서는 음역까지도 느낌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는 것이다. 이만큼 다양한 변수는 다양한 느낌의 가능성과 그에 따라 미세한 차이를 준다. 모든 느낌의 차이는, 심지어 인간이 인 식하지 못할지라도, 변수의 다양한 결합의 차이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세밀한 느낌의 차이라고 하더라도 그 차이 는 명백한 근거를 갖고 있다.

13) 김용옥은 소리가 일정한 비례관계를 갖출 때 그것을 음(音)이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소리 사이에서 질서를 발견했는데 소리간의 질서라는 것은 음악적으로 말하면 배음, 즉 하나의 비율(proportion)인 것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것은 "도"와 "레", "레"와 "미" 사이에 일정한 비율을 가진 소리이다. "도"와 "레" 사이에는 무한한 소리(聲)가 있지만 그 소리는 음으로 취하지 않고, "도"하고 "레"라는 음(音)만을 취한 것이 음이다. 그리고 음과 음이 모인 것을 樂(music)이라고 한다. 김용옥, {도올先生 中庸講義} (서울: 통나무, 1995), pp.19-20.

14) Geschichte der Philosophie, p.24 ; O. poggeller(박순영 역), {해석학의 철학} (서울: 서광사, 1993), pp.229-258.

15) 그래고리 베이트슨의 모아레 현상(moire phenomenon)은 이 세계가 어떻게 수의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탁월한 해명 이다. 모아레 현상은 2개 이상의 다른 패턴이 결합될 때 정보가 어떻게 풍부해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이다. 두 패턴의 결 합은 경이로울 정도로 다양한 패턴을 창출한다. 우리가 감상하는 미술이나, 시, 음악도 이 모아레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베이트 슨은 주장한다. 베이트슨에 있어서 세계의 배후는 수와 논리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미술이나 시나 음악은 수학과 논리의 차원에서 새롭게 전개된다.

16) {인간학으로서의 수학}, p.168.

17) 화이트헤드는 선(善)과 수학 사이의 관계를 최초로 통찰한 사람을 플라톤으로 이해한다. 플라톤은 이미 2,300여 년 전에 '선'에 관 한 강의록을 작성하려고 했을 때 자연스럽게 수학을 머리에 떠올렸다고 한다. 즉 곱셈표와 산상수훈, 즉 수학과 선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수학적인 이해야말로 선의 본성에 대한 최초의 통찰 사 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Alfred North Whitehead(오영환 문창옥 역), {열린 사고와 철학} (서울: 고려원, 1992), pp.94-95 참조.

18) Jurgen Moltmann, Gott in der Schopfung (Munchen:Chr. Kaiser Verlag, 1985), p.226.

19) Geschichte der Philosophie, pp.455-467.

20) 화이트헤드는 그리스인들의 '조화'(harmony)의 발견을 인류 문명의 이정표가 될 만한 발견이라고 한다. 그들은 세계 안의 정밀한 '수학적 관계'를 발견한 현자들이다. 그리스인들은, 현의 소리는 현의 길이에 상응하고, 소리의 아름다운 구성은 현의 길이의 비례 에 상응하고, 건축미는 적절한 비율에 의존한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 발견은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인류의 내장질서를 최 초로 발견한 문명의 꽃이었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그는 그리스인의 발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 우주의 질적 요 소가 수학적 관계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크나큰 발견이었다"

21) 모짜르트는 그 자신이 수학을 좋아해서 그가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수학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피아노는 생활 필수품이다'라고 항상 말하였고, 그 자신도 일류급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베에토벤은, 수학 자체에는 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음악을 구성하는 데는 마치 기하학적인 논리를 전개하는 것과 같은 수학적 재능을 많이 발휘하였다. 음악과 수 학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다음 글 3부를 참조. 김용운, {인간학으로서의 수학} (서울: 석성문화사, 1983).

22) Encyclopaedia Britannica, "Music, Art of"

한신교지 20 (1995)

필자 주

위의 아티클은 3년전이죠, 1995년 제가 대학 2학년때 남긴 '상흔'입니다. 저의 문제의식은 '음악'과 음악 현상'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이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몰라도 당시에 이 분야에 대해 제가 갖고 있었던 자료와 정보는 거의 전무하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아티클은 거의 개인적인 직관에 호소하여 논의가 전개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문제의식이 이미 '음악현상학'이라는 전문적인 분과학문과 자료와 정보 안에서 더욱 심도깊게 논의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이 분야에 관련된 정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인 음악적 공간에 대한 위상적 연구가 있습니다. 또한 최은규 님의 음악현상학의 근본문제와 음악학에 관련된 몇 편의 자료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현재의 개인적인 문제의식은 음악에 있어서의 시공간의 문제입니다. 혹시 이 분야에 관하여 첨가, 보충,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 분은 여기를 눌러주시길 바랍니다. (1998.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