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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파악


전 철





1.

이미 세상을 떠난 어느 한 사람이 그랬다. 파악에는 긍정적 파악과 부정적 파악이 있다고. 이 [파악]이라는 한국어는 사실 인간이 세상을 파악할 때의 그 파악인데, 그에게 있어 파악은 아예 인간의 범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apprehension에서 ap를 떼어버리고 파악prehension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자신의 사상에 새로 이식하였다. 이를 통해서 모든 존재는 세상을 자기방식대로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넘겨주는 행위를 가하는 것이고, 그 받아들임, 소화함, 넘겨줌의 행위 자체가 대단히 정신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긍정적 파악이야 그저 있는 과거의 사태를 소화하고 계승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지만, 이 부정적 파악이라고 하는 것이 참 묘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음에 잠시 주목하였다. 오늘은 이 부정적 파악을 읽으면서 느낀 단편들을, 나의 [긍정적 파악]을 매개로 해서 잠시 몇 글자 남겨보고자 한다. 물론 이 부정적 파악은 인간의 의식의 차원이 아닌 모든 존재에 관여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행위이기에, 내 의식의 경험과 직관을 매개로 유비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이해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2.

부정적 파악은 말 그대로 존재론적으로는 과거의, 인식론적으로는 자기 앞의 어떤 사태를 수용하지 않고 제거Eliminierung한다. 모든 존재는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파악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엄격한 근거와 자족적 메카니즘을 통하여 진행되는 파악이다. 여기에서 형이상학과 실존론적 해석학은 상호 유사성을 띄게 된다. 무엇에 대한 파악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역사가 이미 각인되어 있다. 존재의 모든 파악에는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성과 걸어온 시간의 단층과 연루되어 있는 산물이다. 즉 세상에 대한 파악은 이미 자신에 대한 파악이 묻어 있다.  

긍정적 파악은 말할 것도 없이 부정적 파악도 어떠한 근거를 통한 파악이다. 즉 다시 말해서 전혀 연속성을 결여한 채 진행되는, 과거의, 그리고 자기 앞의 사태에 대한 제거나 단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신의 통일성을 엄격하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매개로 이 제거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일단 위에서 존재의 우주에 대한 이해는 자기방식으로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파악한다고 말하였다. 그 파악과 받아들임의 과정에는 심지어 우주 전체의 영역이 논리적으로 개입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우주 전체가 개입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존재는 근본적으로 불치의 유한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동시에 있다. 이는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우주와 관여할 때 형성되는 문제는 모순의 문제이다. 이미 논리의 계열이 다른 두 관계가 만날 때 거기에서는 단일하게 해결될 수 없는 지평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우주를 이해할 때 어쩔 수 없이 등장하는 이 모순적 관계, 그리고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우주를 이해할 때 통일적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이 역설적 소망과 더불어 이 부정적 파악은 기여된다. 모순은 모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지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모순은 나에 있어서 내가 이미 관여되어 있는 모순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기여를 한다. 보는 내가 없으면 바로 그 모순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

바로 부정적 파악은 양립 불가능한 요소를 축출하는 기능을 함으로서 통일성을 견고하게 유지하려는 생존의 태도인 것이다. 즉 양립 가능한, 존재 가능한, 이해 가능한 요소만 우리에게 이미 남는 것이고, 그 이외의 것은 다른 방식으로 제거됨으로 우리의 생존에 결국은 기여하는 것이다. 이해는 양립 불가능한 우주를 유한한 존재가 양립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내리려는 생명의 시도이며, 양립 가능의 영역으로 포섭되지 못하는 불치의 영역은 이 부정적 파악을 통해서 다른 방식으로 수용된다.

3.

이런 형이상학적 범주의 논의를 바로 인식과 추상을 매개로 하는 우리의 일상경험과 직접 연결시키는 절차에는 여러 기술적 첨가가 필요하리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적으로 이 부정적 파악을 우리의 인간경험에 관련해서 직접 고려해본다면 그 자체가 흥미로울 것 같아서 생각을 가볍게 이어나가고자 한다. 혹여 반론이 있다면 그 반론은 더 흥미로울 것 같다.

첫째, 외국어를 이해할 때의 과정이다. 외국어는, 모국어와는 달리 들리는 부분은 아주 확실하게 들리고 들리지 않는 부분은 아주 확실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개인적인 경험을 이 부정적 파악과 연결시키고자 한다. 외국어로서의 문법, 논리, 그리고 단어, 이해의 총체적인 언어구조는 언어의 의식에 이미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는 저 하이델베르크 성이 내 눈 앞에 보이는 것보다 더 엄연한 의식 안의 건축물이자 존재이다. 이러한 언어구조의 결합은 아주 분명하게 그간의 외국어를 습득하고 공부한 시간과 역사적인 층적을 통해서 계속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계승되며 확장된된다. 이러한 언어구조는 개인의 역사성에 따라 매우 다층적으로 고유하게 형성되고 이어지기도 한다.

다음을 문제 삼아 보자. 1초(일/월/년) 전에 TV를 보았을 때 들리지 않았던 외국어가 왜 1초(일/월/년) 후에 TV를 보았을 때에는 들리게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여러 해석의 방식이 존재할 것이다. 부정적 파악을 통해서 이 현상을 잠정적으로 해명한다면, 머리에 짜여진 외국어 언어구조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아주 엄격하게 이해하고 그 나머지의 부분은 부정적 파악을 통해서 아주 단호하게 축출해 버린다는 가설이다.

물론 부정적 파악은 이전에는 느껴질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이후에는 느껴질 수 있는, 대단히 불분명한 경계를 그 자체로 갖고 있다. 즉 다시 말해서 부정적 파악은 그 시간의 그 조건에서만 의미를 띄게 되는, 시간과 공고하게 결부된 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는 자신의 통일성을 완고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모순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아주 단호한 방식으로 제거하고 처리해 버린다는 것이다. 어떠한 단어가 부정적 파악을 통해서 제거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면 그 단어가 언어구조로 편입된 순간, 더 이상 그 단어는 부정적 파악을 통한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적 파악을 통한 순응과 계승의 대상으로 자리가 바뀌어진다. 그러므로 부정적 파악은 존재의 역사성과 연루된 요소인 것이다.

4.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 한다. 여기에서의 이 무관심은 어찌 보면 부정적 파악이 보여주고 있는 제거의 특성이 인간학적 범주를 통해서 구체화된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무관심은 증오보다 훨씬 부정적 파악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정적 파악의 특징은 대상화 자체를 제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무관심은 그저 모든 존재가 대상을 향해 기계적으로 제거하는 행위의 한 표현이 아니라 그 사랑했던 존재의 고유한 사랑에 관한 개인사로 인해 특정하게 실현되는 하나의 엄연한 사태라는 것이다.

어린이들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부모님의 서재에서 제목 정도는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 제목은 하등의 정서적 감흥과 촉발을 일으키지 않는다. 어른들도 어린이들이 그렇게 재미있게 노는 놀이터가 어린이 만큼의 생생한 감흥과 촉발을 일으키지 않을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이 자신에게 강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는 만큼 생이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도 던져주지 않는 부분이 있고, 그러한 의미 없음, 혹은 모순됨 자체를 통일적으로 자신에게 기여하도록 하는 종합적 메카니즘 가운데 하나가 부정적 파악이다.

5.

의식은 불치의 고도화된 기능이기 때문에 이미 존재의 근본 성격으로서 기능하는 부정적 파악 자체를 의식과 직관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 자체가 추상적 논의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파악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해석학의 범주에서 논의되는 실존의 자리와 존재의 불치의 유한성, 그리고 존재의 유한한 지평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실존의 자리가 어떻게 우주라는 보편적 – 실존의 자리에서 이미 보편은 허위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겠지만 – 지평과 유대를 맺을 수 있을지를 논리적으로 검토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또한 문명의 문제를 우리가 헤아려 본다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문명과 우주는 우리의 방식대로 저 우주를 경험하고 개관하고 있다는 불치의 유한적 자각을 갖게 한다. 끊임없이 우리는 쇄신된다. 왜냐하면 양립 불가능한 부분은 새롭게 양립 가능한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양립 가능이 우주적 진선미와 직접 연결되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하고, 우리 내일의 삶이 더욱 새로워질 수 있다는 그 소망의 근거를 이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에 있어서 생존은 궁극적인 지향이다. 그 생존은 자신의 통일성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유지된다. 그러나 그 생존의 깊이와 성숙으로 인해, 그간 부정적 파악의 영역에 방치되었던 상호 모순의 지평이 새롭게 통일적으로 자신의 생존의 영역 안으로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존재의 생명력에 이미 내함하고 있다.

6.

교육은 이 무시무시 하리만치 그 경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영역 안에 잠겨 있는 이들의 잠재성을 가치 있게 평가하고 그 가능성을 유인하는 효율적 기제이다. 문명은 아직 자연의 깊은 침묵에 잠겨 있는 우주에, 생존을 위한 목적을 부여하고 성취하려는 인류의 노력이다. 사랑은 서로를 향해 존재하려는 사물의 기본적인 그리움의 본성이 유한한 시간의 세계와 삶에서 허락 되고 실현되기를 소망하는 인간 영혼의 진실한 갈구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유한성에 힘입어, 어떠한 교육과, 문명과, 사랑 또한 우리가 불가피하게 동반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부정적 파악을 통해 배제된 영역이 엄연히 있어왔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둠에 남아있는 것들 또한 언젠가는 그에 어울리는 시간이 다시 찾아오면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기대하는 것이다.


22. Oktober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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