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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창조성


전 철



1.

왜 새로움은 이 세상으로 출현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움은 이 세상으로 유입되는가? 그리고 그 새로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화이트헤드의 창조성Creativity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의 근원은 바로 위와 같은 소박한 질문에 기반한다. 새로움에 대한 질문은 워낙 광범위하다. 그러한 이유로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이라는 개념으로 일단 물음의 초점을 정초하고 그에 집중하자. 그러나 저 또한 작은 주제가 아니다.

2.

일단 새로움이 무엇인가를 정의해보자. 새로움은 과거에 없던 것이 ‘새롭게’ 출현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첫째, 전적인 없음의 세계에서의 새로움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새로움과 창조를 이 맥락에서 동등하게 이해한다면, 이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암시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가설에 입각하여 세계의 기원을 믿고 이해한다. 그렇다면 있음의 세계에서의 새로움은 전혀 의미가 없는지에 대한 물음을 시도해 본다. 새로움은 과거에 없는 것의 새로운 출현을 의미한다.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현재의 입장에서의 과거에 사태에 대한 기술이다. 이는 두 가지를 암시한다. 무와 존재에 대한 정의가 시(공)간 축을 따라 새롭게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구석기에는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이미 오랜 시절 사라진 문명이 구가한 제의나 의식은 현재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하간의 이유로 그러한 특정한 제의나 의식의 존재 유무를 이미 알거나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서 있는지 모른다.

3.

세계는 신에 의하여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주장, 그리고 이 세계의 새로움은 신에 의해 유입된다는 기독교적 가설은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지성에게는 별 어려움 없이 이해될 수 있으며, 많은 시간 동안 신앙적 현실적 유용성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왔다. 나 또한 이러한 가설에 적극적인 반기를 들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아래의 두 가지 질문은 여기에서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는, 모든 세상의 새로움의 근원을 적극적으로 신에 두어야 하느냐의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에서 존재에로의 새로움을 우리가 말하려고자 한다면, 그 새로움은 어떠한 방식으로 파생되고 (신과 관련하여 더불어) 어떻게 현실에 유입되는가의 물음이다. 전자는 창조론과 신정론의 영역과 일정한 관계를 보여주는 물음이다. 후자는 현대과학철학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새로움과 창조 이해와 관계된다.

4.

화이트헤드는 수학자이자 자연철학자였다. 후기에는 종교적 관심 또한 꾸준히 간직하였다. 만약 내 물음이 새로움에 대한 과학적 종교적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면, 현재 관심하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체계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답은, 새로움과 창조성의 문제를 다루는 과학적 종교적 접근이 그의 형이상학을 통해서 어떻게 구상되는지에 대한 기술적 절차이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 초기의 자연철학과 후의 종교철학 전 저작을 통해서 새로움의 문제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발생적-지형적으로 이해하고 밝히는 작업이 중요하다. 또한 그의 형이상학 체계 내에서 엄연히 명시되고 있는 창조성 개념이 어떠한 위치와 의미를 점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5.

일단 새로움과 창조성에 관한 나의 문제제기의 뿌리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와 관련한 물음을 일별해보자.

주요 질문

새로움은 무엇인가.
새로움은 없음로부터의 새로움인가 아니면 있음으로부터의 새로운 조직화인가.
자연이 새롭다면, 신은 새로움의 원천인가. 아니면 신과 자연의 새로움은 다른 범주인가.


주요 키워드

새로움, 창조, 신과 세계의 창조, 다자, 일자, 창조성, 신과 창조성의 범주적 관련



이러한 질문에 대한 효과적인 대답을 얻기 위해 여기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개념을 채택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동기는 다음과 같다. 자연철학과 종교철학적 안목이 연계된 그의 형이상학을 통한 창조성 이해는 자연의 영역과 종교 신앙의 영역 이 양자 모두에 관계하는 새로움에 대한 물음에 그나마 통전적이고도 적절한 대답을 얻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개인적 작업은 그러므로 내 가설 채택의 믿음에 대한 검토작업의 일환으로서 다음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밟는다.

첫째, 작업자의 화이트헤드에 대한 이해와 오해를 비판적 검토 없이 기술하고자 노력한다.
둘째,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에 대한 가설을 비판적 검토 없이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셋째, 이러한 검토 작업이 효과적으로 진행이 된다면, 이후에는 작업자의 화이트헤드의 오해와 이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동시에 화이트헤드의 창조성에 대한 가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넷째, 이러한 검토 작업이 효과적으로 진행이 되지 않는다면, 작업자의 개인적 물음의 형식과 내용 및 절차에 대한 수정의 단계를 밟는다.




6.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와 창조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화이트헤드는 자연철학자로서 자연에 대한 관심을 지대하게 가졌다. 그에 있어서 자연은 죽어 있는 사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기술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 있어서의 심각한 문제제기는 자연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이해이다. 자연에 대한 이해는 과학과 철학 및 여러 문화적 형태로 문명 안에서 전개된다. 그 가운데에서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이해와 기술은 인간의 관념을 통하여 표현되는데, 이 관념의 근본적 형식을 주조한 논리학이 실체 속성의 논리학을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즉 자연에 대한 이해와 기술의 재료로서 활용되는 인간의 관념과 언어, 그리고 그 기반인 논리학이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자연에 적합하지 않음을 화이트헤드는 직시하였다. 여기에는 논리학의 깊은 면과 그의 한계를 통찰한 화이트헤드의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화이트헤드가 구체적으로 비판한 논리학은 동시에 언어의 주술구조에 대한 비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속성 개념, 그리고 보편자 개별자 관념이 연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주술구조에 기반한 언어는 신뢰할 수 없는 불신의 대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속성 개념은 관계개념으로 바뀌어야 할 대상이며, 보편자 개별자는 존재의 상대성 개념으로 교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화이트헤드는 일단 인간관념이 동원하는 여러 도구 자체가 생성하는 자연의 영역을 파악할 수 없는 불치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에 적합한 관념과 언어를 그 방식대로 새롭게 구축하고 가공한다. 자연철학에 있어서는 상대성 이론을, 논리학에서는 집합논리학을, 형이상학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경험과 현실을 바탕으로 한 논리 일관적, 내적 정합적, 현실 적합적인 가설의 구축을 시도한다. 특히 그의 여러 방면의 성과와 경험을 총체적으로 집대성한 과정과 실재에서는 4부 연장의 이론을 통하여 기하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새롭게 형이상학적 사변을 전개해 나아간다.

주요 내용을 열거하면, 4부 연장의 이론 제2장 연장적 결합 장에서는, 연장적 결합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규정하고 그에 기반하여 새로운 기하학을 구성해 나아간다. 그는 모든 물리적 존재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그의 기하학을 구성한다. 우선 그는 연장의 이론에서 연장적 결합의 여러 관계 방식을 예시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영역을 추출해 낸다. 이후 이 영역의 추상적 집합을 군으로 만들어서 기하학적 요소를 다시 추출해 낸다. 즉 여기에서 이 기하학적 요소인 점, 선, 면을 새롭게 정의한다. 이렇게 물리적 영역을 바탕으로 기하학적 요소를 끄집어 내며 제3장 평탄한 장소에서는, 영역들의 일반적 도식에 난형의 추상적 집합이 수렴해 가는 장소는 다 평탄하다는 조건을 매개로 평탄함을 도입함으로서 이 세계의 차원성을 해명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4차원 시공연속체를 이 난형과 관련하여 과감하게 연결 시킨다. 물론 이 난형은 근본적으로 사물로부터 발견되는 절차를 밟고 있기에 화이트헤드의 기하학은 유클리트적인 출발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의 영역으로부터 추상된 기하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을 지닌 기하학적 구성과 그를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적 구상은 다른 출발점을 지니고 있다. 제4장 변형에서는 구체적인 사물이 영역을 가짐으로서 기하학적 형식을 지니고 있고, 이러한 기하학적 형식을 통한 영역의 표현이 변형임을 기술하고 있다. 즉 변형은 평탄한 장소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왜곡을 의미한다. 이렇게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자연과 시공간을 구체적인 영역을 바탕으로 추출된 난형과 관련시켜 기하학적으로 이해하는 최초의 시도를 가하고 있다.

그는 모든 존재는 결합관계로 존재하고 그 구체적인 영역을 갖고 있다는 가설에서 기하학을 추출해 내고 그를 근거하여 형이상학을 구상해 내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고도의 추상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추상성의 근저에는 구체적인 기하학적 구상과 자연에 대한 효과적인 이해를 위한 여러 장치들이 이미 포진되어 있다. 바로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여러 기술적 복안의 궁극적인 의도나 요점은, 우주는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은 창조적 사태의 또 다른 모습임을 인간 지성이 갖고 있는 도구를 새롭게 매개하여 구출하려는 데 있다고 판단된다. 그는 자연의 생생함에 비해 인간 지성의 도구가 너무 둔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언어적 조율과 결합을 통하여 자연과 우주의 생생함을 구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초기저작인 자연의 개념(1929)에는 자연의 추이와 존재의 창조적 힘을 등가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새로움이 출현하는 자연 앞에 인간 지성이 경외로움과 신비로움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즉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자연은 지성을 통하여 물리적이나 인과적으로 온전히 판단 불가능한 사태이다. 자연에 대한 파악에 있어서 두 가지 난점은 즉 인류의 도구가 그 자연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걸맞지 않으며, 자연은 이해의 도구의 발전 가능성의 영역 저편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주객도식의 가벼운 이해와는 전혀 다른 문제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의 합리성을 공공성과 사사성을 매개하는 자연안의 고양된 산물로 보기 때문에 합리성을 동원하여 끊임없는 이해의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우선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와 창조성은 추상적으로 형성된 관념이나 범주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연의 기본적인 특징으로서 이해된다. 자연은 그 자체로 창조적이며 생성적이다. 인식은 그 자연에 대한 인식이지만, 자연 그 자체와는 다른 인식이다. 그러나 인식이라는 도구와 또한 자연적이며 내용 또한 여하한 자연에 관한 내용이다. 도구는 자연에 적합한 기술방식을 향해 새롭게 채택해야 하며 자연에 관한 내용 또한 끊임없이 검토되어야 하는 비판적 요소가 된다.

내적 구성에 대한 비판

질문은,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와 창조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였다. 그러나 그 질문의 답을 구성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구를 화이트헤드는 교정하였으며 그 이유는 바로 자연의 창조성을 인간의 도구가 결코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후기 저작에서 보여지는 범주적 분화와는 달리 초기저작에서 자연은 창조적 힘으로 원초적이며 분명하게 서술된다. 그러나 자연 앞의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이라는 정서는, 화이트헤드의 전 체계가 보여주는 합리성에 대한 신뢰와 모험적 요소를 고려해 볼 때, 언제나 그렇게 남겨두어야만 하는 결정적 요소는 아니라고 구성하였다. 질문은 창조성에 대한 물음이었으나 자연의 창조성과 자연을 이해하는 도구의 결함을 구성하였다. 즉 창조성은 개인적으로 두 가지와 매개되어 있다는 믿음을 노출시켰다. 하나는 자연의 영역이며, 다른 하나는 창조성과 대비되는 이해의 도구의 영역이다. 이를 바탕으로 구성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 창조성은 자연의 창조성이다. 그러나 지성적 도구는 자연의 창조성을 포착해 내기 어려운 난점을 갖고 있다. 이럼으로 처음 던진 질문은 다시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 : 자연은 창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그리고 그 창조적 자연을 이해하는 도구는 얼마나 효율적인가?



7. 그렇다면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적 자연은 어떻게 형이상학적으로 자리를 얻게 되는가?


자연은 창조적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본성적으로 창조적이다. 창조적이라 함은 새롭게 존재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존재는 우주의 한 켜에 불과한 지속적 단위일 뿐이며 존재들은 끊임없이 미래로 밀려나고 과거에서 유입되어 들어온다. 사실 우주의 한 켜에 불과하다는 소극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상 우주는 그게 전부이다. 인간의 감각은 지금 현재 존재하는 우주의 한 켜만을 만날 뿐이다. 그 무대는 자연 저편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을 끌어들여 출현하는 한 사건과 그 사건의 동시적 연쇄체인 한 켜일 뿐이다. 그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우주의 전부이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러한 구체적인 현재적 사건을 바탕으로 거기에서 추상화의 작업에 몰두해 들어간다. 즉 동시적 세계의 사건들과 그 사건을 몰고 온 과거로부터의 발생과정들을 사태들을 현재에서부터 역추론해 낸다. 여기에서 잠시 현실적 존재의 추상성에 대하여 언급하자. 위에서 말한 바로 그 구체적인 현재적 사태가 현실적 존재이며 모든 형이상학적 기술은 현실적 존재에 대한 설명의 기술로 전개된다. 현실적 존재는 화이트헤드의 사변에서는 구체적이며 이 구체적 개념에 대한 설명항으로서 그 이외의 범주는 추상적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사변 자체가 추상화의 절차를 밟고 있기 때문에 역으로 현실적 존재가 궁극적으로 가장 추상적인 존재로서의 지위를 점한다.

문맥을 따라 개인적 논의를 이어가자면 역설적으로 현실적 존재는 죽은 사태들이다. 물론 그 죽은 사태를 완성된 사태, 실현된 사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완성된 사태는 거의 우리의 인식으로도 감지하지 못하고 사변적으로만 추상할 수 있는, 현실적 존재의 생성과 종결의 한 에포크일 뿐, 현실적 존재는 그의 새로운 현실적 존재로 끊임없이 생성된다. 현실적 존재는 굳어진 사태이지만 그 현실적 존재의 배후에서 밀려나오는 그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존재의 동일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거의 무시하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현실적 존재 내부에 대한 분석을 이미 감행해 들어가면 이미 현실적 존재의 완결된 에포크 내부에 있어 자연을 넘어서는 시공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에 무시공적이며, 현실적 존재들 사이의 분석을 감행해 들어가면 다른 위상의 시공간과 연계된 현실적 존재들을 비교하기 때문에 동일 시공적이지 않다. 현실적 존재의 내용적 동일성은 이미 파기된다. 물론 현실적 존재는 연속적이다. 그러나 그 연속성의 가능성 또한 분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이상 배후로 들어갈 수 없는 우주의 근본적인 요소로서의 현실적 존재의 특징이 제시된다. 우리는 현실적 존재를 본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는 내부적으로도 자연의 시공간 저편에 있고, 현실적 존재들 사이의 연쇄적 관계를 볼 때도 전혀 다른 시공간 저편에 있다. 단지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에 대한 직관적 표현은, 실재는 표면적으로 소멸하였다는 것이고, 또한 저 실재 배후에 끊임없는 생성의 요소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죽은 것과 살아 들어오는 이 양자적 사태를 더욱 보편적인 맥락으로 연결시키는 표현이 [실재는 과정]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사건화되며 시공에 출현한 한 현실적 존재만을 만날 뿐이다. 그것은 피조물이고 단지 연장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추상적으로 그 현실적 존재를 문제 삼아 그 현실적 존재의 과거-미래적 연속성을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보면 피조물에 대한 분석의 수위가 한층 추상화된 작업이다. 현실적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현실적 변화의 변수를 현실적 존재라는 추상적 동일성에 묶어 둠으로써 생성과 소멸의 구체적 사태와 변화들을 일단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현실적 존재의 형태를 이해하는 태도에서 현실적 존재는 그 피조물의 원자화된 자리를 갖고 있다는 표현으로 시사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시공을 점유하고 있는 그 원자화된 존재는 단 하나이다. 이 현실적 존재들의 점을 기하학적으로 연장하는 우주의 연대적 자리들을 연장적 연속체로 화이트헤드는 구상하였다. 연장적 연속체는 현실적 존재들의 자리들이 연대적 가능성으로 결합된 현실적 존재의 총체적 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장적 연속체도 현실적 존재에서 한층 추상된 개념이다. 단지 현실적 존재의 연대적 시공의 장을 확보하기 위한 사변의 산물이다. 또한 현재의 우주가 감지할 수 없는 과거적 무한성과 미래적 무한성의 그 양자를 양쪽으로 잇대고 있는 시공연속체의 구체적인 장이다.

존재 그 자체는 새로움이 아닐 수 있다. 죽은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 생성의 과정의 입장에서 보면 그 피조물은 새로움의 산물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물리적으로 출현하였다는 것은 결국 생성의 과정을 거쳐 실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새로움의 사태로서 시공에 출현한 저 사태이며, 저 사태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 현실적 사태이다. 우리가 자연을 창조적이라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는 바로 저 출현한 물리적 사태의 배후에는 드러난 사태에 대한 파악으로는 결코 해명될 수 없는 여분의 정신적 혹은 초월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신은 인간 정신이 아니고 초월은 세계을 넘어서는 초월이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저 출현하는 경험의 방울들의 여러 행적과 경로를 설명하기 위하여 수 십 여개의 개념과 범주를 동원한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은 현재 존재하는 이 생성의 우주를 내재적으로 설명하려는 형이상학적 과제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 십 여개의 개념과 추상적 범주를 동원하여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의 사태를 전 우주의 영역과 관계하여 설명한다. 크게 보면 범주의 구성요소는 개별적으로 모두 47개이며 이 범주는 근본적으로 4조의 큰 범주로 묶여진다. 여기에서 3조 44개의 범주 요소의 지탱이 되는 범주가 궁극자의 범주이다. 다시 말해서 궁극자의 범주는 범주의 범주이며, 다른 범주와는 달리 궁극자의 범주의 범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의미한다. 결국 궁극자의 범주는 화이트헤드 사변이 궁극적으로 잇대고 있는 궁극적인 범주이며 어떠한 하위범주의 모순이나 기능도 궁극자의 범주를 통하여 개방적으로 지양해 내어야 하는 범주이다. 바로 그 궁극자의 범주의 내용은 다many와 일one과 창조성creativity이다.

존재하는 것들, 그리고 설명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범주를 통해서 제약될 수 있는 것들이라는 3조의 범주는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설명되지 않지만, 제약되지 않지만 직관에 호소하는 다자 일자 창조성에 의해 그 근거를 확보한다는 것이다. 존재하고 설명하고 제약시킬 수 있는 자연의 모든 영역을 다 범주적으로 해명하여도 결국은 그 해명의 영역이 닿지 못하는 이 우주의 궁극적 사태라고 하는 것은 다자와 일자와 창조성이라는, 자연에서 발견 불가능한 실재이다. 분석의 빛이 닿지 않는 우리 우주의 궁극의 자리에 화이트헤드는 다자, 일자, 창조성이 있다고 직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적 자연은 형이상학적으로 이중적 지위를 얻게 된다. 하나는 형이상학의 분석의 대상 자체가 창조적 자연이다. 사물의 원자적 출현 자체가 창조성을 머금은 물리적 팽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언제나 현재이지만 존재는 새롭게 팽창한다. 그러나 존재는 그 단 하나의 유일한 시공의 연장적 점에 서 있기 때문에 이 팽창의 이미지는 그 점에 존재가 과거에 누적되었고 앞으로 누적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존재와 설명과 제약의 범주라는 3조 44개의 범주요소로 이 생성하는 원초적 우주를 내재적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결국 이 내재적 범주의 기저에 또한 궁극적으로는 다자 일자 창조성이라는 범주라는 보편적 특성과 무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있어 창조성의 다른 지위는 바로 현실적 존재가 구현하는 현재의 시공적 우주에 밀려 들어오면서 실현되지만 내재적으로 분석되지 않는 창조성의 영역을 궁극적으로 정초하는 데 있다.

내적 구성에 대한 비판

창조성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서 어떠한 지위를 차지하는 질문에 대하여 실현된 물리적 우주의 켜에 대한 기술을 시도하였다. 그 시공적 사태의 배후에 대한 해명이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작업이며, 출현한 요소의 분석만으로는 출현하는 영역에 대한 분석이 불가능하기에 그 영역을 과정과 생성이라는 관념으로 대치한다. 그래서 실재는 과정이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변은 실재를 끊임없이 밀어내는 창조-과정적 우주에 대한 내재적 분석이며 3가지 범주를 동원한다. 이 내재적 분석의 범주적 근거가 되는 우주의 보편적 실재는 다자 일자 창조성이라는 궁극자의 범주이며 이는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궁극적 기반으로 기능한다. (200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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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이트헤드는 자연을 본성적으로 창조적 사태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창조성과 그 자연에 대한 인식에는 난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난점을 직시하고 그는 새로운 구상을 통해서 조화롭게 융화하려 노력하였다. 이 노력은 자연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인식 방법의 구체적인 확보와, 이를 통하여 자연의 실상을 온전히 구제하려는 양가적 동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창조적이라는 사실은 그의 형이상학을 동원하여 얻어내고자 하는 궁극적 직관적 통찰이지, 형이상학 내부의 모든 기술이 자연의 창조성에 대한 설명에 집중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즉,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이 창조성이라는 문제제기를 어떻게 접근해 들어가고 어떻게 내부적으로 설명하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관찰자의 특정한 입장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가 자연을 창조적 사태로 이해하였다는 주장은, 관찰자의 특정한 주목이자 태도에 관련된 해석이기도 하다.

자연은 창조적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창조적 자연에 대한 구성적 해명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현실적 존재의 내적 합생이나 외적 이행에 대한 기술 자체가 창조적인 사태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인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형이상학 체계내적으로 창조적 자연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이 체계가 궁극적으로 근거하는 기반이 창조성에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있어 창조적 자연을 기반으로 한 창조성의 지위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9.

그렇다면 창조적 자연의 근간이 되는 창조성이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이러한 의미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 이중성에 대한 구분을 시도해보자.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체계내적인 지위로서의 창조성을 거칠게 도식화하면, 현실적 존재의 합생과 이행에 개입하는 창조성과, 현실적 존재의 궁극적 기반으로서의 창조성의 문제로 일별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새롭게 출현하는 자연(들)의 발생과정과 연루된 창조성과, 저 자연의 궁극적 근거로서의 창조성 사이의 양극적 특성이다. 편의적으로, 각 현실적 존재의 생성에 개별적으로 연관된 요소적 창조성과 현실적 존재들의 범주를 지탱하는 범주적 창조성으로 구분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소적 창조성은 어떠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독자적인 현실적 존재의 합생과 이행과정에 독특하게 개입하는 창조성의 개별적 성격에 대한 해명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난점이 존재할 것 같다. 즉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철저하게 원자화된, 상대적 독립성을 지닌 완결된 세계이다. 거기에는 특정한 과거와 특정한 주체적 지향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현실적 존재의 생성에 개입하는 창조성은 특별한 다자적 성격을 지니지 않아도 각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개별적 특성을 기반으로 하여 실현해 나아갈 수 있다. 즉 여기에서의 문제는, 철저하게 다자적이고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현실적 존재들은 공통기반으로서의 창조성을 근간으로 하여 실현되는가 아니면, 각자의 현실적 존재의 특성과 유착된 창조성을 근간으로 하여 실현되는가의 문제이며, 관찰자의 판단에 의하면, 창조성은 그 자체로 공통기반을 제공하며 그 공통의 특성을 분유하면서도 각각의 현실적 존재는 그의 개체적 실현을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주적 창조성이라는 구분이 유의미 해질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즉 창조성은 분명하게 3조의 범주들의 궁극적 범주로서 요청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형이상학적 범주와 그러한 기술이 궁극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요소로서 창조성은 요청된다는 점이다. 이는, 창조성이 단지 현실적 존재의 생성의 과정에 개입되는 요소일 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추진력과 추동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3조의 범주가 내적인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우주를 설명하는 중요한 형이상학적 기술이라 하더라도, 그 범주가 궁극적으로 창조성을 기반하지 않는다면, 그 기술이 보여주는 우주는 정태적인 우주에 머무를 뿐이며, 그것은 우주의 한 계기에 대한 잠정적인 서술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성은 우주의 새로움의 근거가 되는, 가능태로서의 지위를 범주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우주의 백터적인 성격에 대한 형이상학적 진술의 요소들는 3조의 범주이지만, 그 백터적 성격의 기반은 궁극자의 범주를 통해서 확보된다.

내적 구성에 대한 비판

구분되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화이트헤드의 창조성 이해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창조성 개념을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접근의 차이. 창조성의 이중적 지위는 현실적 존재의 생성의 근거로서의 창조성, 즉 요소적 창조성과, 3조의 형이상학적 범주의 근거로서의 창조성, 즉 범주적 창조성이다. 요소적 창조성의 논의에서, 불치의 독자적인 현실적 존재는 공통의 창조성을 기반으로 하여도 그 독자성을 실현할 수 있으며, 범주적 창조성의 논의에서의 창조성은, 3조의 형이상학적 진술을 통하여서 확보될 수 없는 우주의 백터적 성격을 제공하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요소적 창조성과 범주적 창조성은 양립 가능한 구분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즉 이 구분은 창조성의 양극적 특징으로서 서로 모순적이지 않은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 물음이 사이비 물음 여부인지 대한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또한 범주적 창조성에 관하여, 창조성은 다자, 일자와 더불어 존재하는 요소이므로 이후의 논의에서는 다자, 일자, 창조성의 내적 관계를 문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10.

궁극자의 범주는 다자, 일자, 창조성을 구성요소로 하고 있다. 우주는 창조성으로 인한 다에서 일로의 진행이다. 그리고 이 다에서 일로의 전진이 사물의 본성이다. 다는 사물의 다가 아니고 일은 정수의 1이 아니다. 이는 사물의 성격과 관련한 관념이다. 이러한 다자, 일자, 창조성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관찰자의 개인적인 물음은 다음과 같다. 다자와 일자는 어떠한 특정한 범주적 구분 - 화이트헤드의 4조의 범주와는 다른 의미에서 - 을 통하여 구별되는가. 우리는 위에서 다자와 일자는 숫자적 사물이 아님을 명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와 일과 창조성에 관한 관찰자적 물음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하여 사물과 관련한 예를 부득이하게나마 사용하고자 한다.

종이와 잉크라는 다자적 요소들은 글자라는 일자적 특성의 새로움을 도입한다. 글자와 글자라는 다자적 요소들은 단어, 단어들의 요소는 문장, 문장들의 요소는 의미의 새로움을 도입한다. 관찰자는 이 예를 통하여 여기에서 세 가지 질문을 가한다. 첫째, 다자적 요소들로 지칭된 계열들과 일자의 요소로 지칭된 계열은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의 물음이다. 예를 끌고 들어오면 종이와 잉크의 위상은 이미 다른 계열로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일자의 요소로 도입되면서 등장하는 새로움이 진정한 새로움인가의 물음이다. 말하자면 이미 (인식자와의 관계에서) 종이와 잉크의 연접을 통한 글자가 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글자라는 범주는 전혀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다자와 일자를 보고 있는 인식자 없이 창조성은 어떻게 도입될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즉 종이와 잉크와 단어라는 관념은 인식자의 전제를 갖고 설명된다. 그러나 인식자 없이 어떻게 다자와 일자와 창조성이라는 ‘관념’이 서로 관계-의미를 형성할 수 있느냐의 물음이다. 첫째 물음은 다자와 일자 사이의 내적 관계의 물음이고, 둘째 물음은 범주론의 문제이며, 셋째 물음은 존재론으로서의 궁극자의 범주는 어떤 방식으로 인식론과 접맥 되는가의 문제이다. (2002.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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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다자, 일자, 창조성 사이의 관계, 범주, 인식의 문제는 그 자체로서 복잡하고 큰 주제이다. 그럼으로 이에 대한 접근은 우선 창조성을 줄기로 한 논의 이후에 시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선다. 여기에서는 저작 과학과 근대세계에 나타난 창조성 개념과 그에 관한 몇몇의 언급을 짚어보고자 한다. 과학과 근대세계는 수학자로서 수학 원리를 출간하고, 과학철학자로서 과학철학 3부작 자연인식의 원리와, 자연의 개념과, 상대성 원리를 출간한 이후, 이를 바탕으로 하여 형이상학의 체계를 종합적으로 형성하고자 하는 출발점에서 쓰여진 저작이다. 화이트헤드는 그 당시에 자연과학의 철학적 기초를 형성하기 위한 과학 철학의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끊임없이 이 삼부작의 작업이 형이상학적 작업으로 표현되기를 희망하였다  당시의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은 약 10여년 후에 과정과 실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구현된다. 다시 말해서, 초기의 과학철학 3부작은 과정과 실재의 주요한 토대로서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자연 인식의 원리와 자연의 개념의 주요 내용들은, 과정과 실재의 4부 연장의 이론에 매우 결정적인 근거로 수용되어 보인다. 물론 이 두 저작에서 전개된 <연장적 전체와 연장적 부분>이 드라구나 교수의 <연장적 결합>이라는 개념으로 4부 연장의 이론에서 보안되어 부분적으로 수정되는 예도 발견할 수 있지만, 과정과 실재에서 펼쳐지는 형이상학적 구상의 주요한 수리 논리학 및 과학철학적 근거는 이미 대부분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표현이 과정과 실재라면 과학과 근대세계는 과학철학과 형이상학의 사이의 사상적 접맥을 헤아릴 수 있는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근대과학의 여러 새로운 발견과 쟁점들을 일목요연하게 전개한 과학사에 관한 저작으로 그 자체로 무게 있는 저작이다. 관찰자의 관심을 가지고 보면, 근대과학의 성과와 난점을 어떤 방식으로 형이상학적 건설을 통하여 새롭게 극복하고 체계화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저작이기도 하다. 과정과 실재에서는 이미 형이상학을 위한 다양한 범주적 구분과 그를 바탕으로 한 적용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과학과 근대세계는 몇몇 범주적 구분과 새로운 구상을 위한 개념은 아직 분명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새로운 개념의 표현만 드러나지 않을 뿐 내용적으로는 많은 부분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관찰자의 관심인 창조성 개념이, 저작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어떻게 논의되며, 그러한 논의는, 이후 과정과 실재에서 전개되는 후기 형이상학의 기초로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2.

창조성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 중요한 맥락은, 과학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에 연결되어 있다. 우선 여기에서는 과학적 유물론의 문제를 짚어보자. 과학적 유물론은 물질을 궁극적인 요소로 전제하고 출발하는 사상이다. 여기에서의 물질은 시공이라는 조건 안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러한 도식이 3세기 동안 근대과학과 그를 기반으로 한 철학의 중요한 도식이었다고 화이트헤드는 보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도식을 비판한다. 그러한 비판의 근거는 이 도식은 일정한 추상의 영역에서만 유효하다는 점이다. 이 비판의 주요한 정신은 단순 정위의 오류 와,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라는 지적으로 표현된다. 기존의 도식은 물질은 시공의 좌표에 위치한 존재이고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으나,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시공은 물질이 위치하며 물질과는 독립적인 불변적 좌표가 아니라, 이미 물질이라고 표현하는 바로 그 사건과 상관된 요소이다. 그러므로 물질은 시공 안에 단순 정위된 사건이 아니고, 시공은 물질의 배경의 역할을 넘어서, 구체적인 계기가 어떤 양상을 띄고 출현하는 일종의 추상적 사태이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을 시공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물질이라 불리우는 사건과 관련해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화이트헤드는 가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시공과 관계 없는 독립적인 사건은 없으며, 그러므로 시공을 그저 물질과 내적 관련이 없는 하나의 좌표계로만 이해하고, 물질의 운동에 대한 기술을 시도하는 일련의 도식은 단순정위의 오류라는 지적을 한다. 그러므로 저 물질은 단순히 저기에 정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밝히는 작업을 시도한다.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오류이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과학적 유물론은 물질을 구체적이며 궁극적인 요소로 전제한다. 그러나 물질은 구체적이지 않으며 궁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물질은 추상적인 사태이며 그 추상적인 사태를 산출하는 구체적인 세계를 해명하는 시도를 한다. 어떤 의미에서 구체적인 세계에 대한 설명을 위한 조건으로 과학적 유물론은 물질을 끌어들였지만, 이 물질 자체가 또 하나의 방대한 설명의 대상임을 화이트헤드는 다시 지적하고, 또한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화이트헤드는 18세기의 과학적 유물론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19세기 관념론도 동시에 지적한다.  이 관념론은 과학적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근원적 정신의 한 관념에 포함된 것으로 처리해 버린다. 이러한 유물론과 관념론의 문제를 거부하고, 과학적 도식을 새롭게 구축하여 [유기체]라는 궁극적 개념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시도한다.

13.

이러한 유기체론의 관념을 담고 전개되어온 사상을 화이트헤드는 진화론으로 보고 있다. 유기체를 자연성립의 기초로 생각하는 방식이 바로 진화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논외로, 몇몇의 개인적인 관심이 있다. 우선 진화론은 유물론 사상적 토대로서 기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유물론의 주요한 근거로서 운용되는 진화론과, 유기체 관념을 기초적으로 보존하면서 전개되는 진화론의 구분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진화론은 생기론, 목적론, 신학적 창조론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자리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진화론과 거리를 두는 관념인 생기론과 목적론과 창조론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이해와는 어떤 대척점을 차지하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14.

우리는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창조성 등장의 중요한 맥락을 해명하기 위하여 과학적 유물론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 유기체적 진화론을 열거하였다. 이 시점에서 이러한 해명의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징적인 점은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창조성Creativity이라는 개념은 어디에도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궁극자의 범주로서의 창조성은 분명히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창조성과 궁극자의 범주로서 후기에 표현되는 초기의 단서가 과학과 근대세계에서는 어떻게 놓여 있는지를 전후 맥락을 헤아리면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해석의 한 가능성으로, 여기에서 논의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유물론의 대안으로서의 유기체적 진화론에 있어서 그 기저에 있는 활동력을 실체적 활동력으로 화이트헤드는 표현한다. 그에 의하면 진화론은 기저에 있는 활동력 – 실체적 활동력 – 을 요구한다. 이러한 실체적 활동력은 여러 문맥에서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라는 이후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도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실체적 활동력을, 후기 개념인 궁극자의 범주로인 창조성으로 구체화되는 한 요소로서 해석하고자 한다.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실체적 활동력은 세 곳에서 인용되고 있다. 10장 추상화에서 인용되는 실체적 활동력은 다음과 같다. 즉 실체적 활동력substantial activity은 형이상학적 상황에 있는 정태적인 요소를 분석해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과정과 실재에서 창조성 개념에 관한 새로운 공재성의 산출은, 구성요소의 분석을 통하여 설명되지 않으며, 직관에 호소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는 점과 유사하다.

15.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창조성이라는 개념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으며, 궁극자의 범주라는 범주적 구분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과학적 유물론의 한계를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유기체적 진화론의 특성들을 그의 형이상학적 체계의 기초로 새롭게 설정한다. 그 설정의 내용에는 진화의 진행을 지탱하는 궁극적 근거로서 – 실체적 – 활동력을 요구한다. 이 실체적 활동력은 유기체의 자기 환경을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내적 기능의 활동적 근거로서 제시된다. 다음으로는 이 활동력의 본성과 특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문에서 표현되는지를 여러 맥락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2002.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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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과학적 유물론은 정신성을 포함하지 않은 물질을 궁극적인 존재로 가정하고, 시간은 그 물질의 독립조건으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판된다. 물질은 그 자체가 유기적 사태이며, 시간은 물질의 배경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사건의 출현과 상관된 조건이다. 물질에 대한 이해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사고방식 이 둘 모두가 추상관념이며 이 추상관념에만 집중할 때 야기되는 문제들을 지적한다. 물론 추상관념 자체가 주는 유용성을 그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추상은 그 추상관념이 의미를 띄는 일정한 수위의 한정된 영역에서는 효과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추상관념으로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에는 지극히 제한적이기 대문이다. 이러한 추상관념에 얽혀서 오랫동안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가했던 과학적 개념의 도식에 반기는 각각의 시대에서 표출되었을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반기의 한 흐름을 과학과 근대세계 5장 낭만주의적 반동에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18세기에까지 풍미했던 편협한 형이상학과 명석한 논리적 지성에 기반한 신과 물질의 메커니즘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 사상에 내포된 어수선한 모습 에 대한 저항은 문학의 낭만주의적 반동을 통하여 전개된다고 화이트헤드는 본다. 이러한 운동은 테니슨, 워즈워스, 셸리의 시와 문학에 나타난 생생한 변화와 지속이라는 자연에 대한 옹호와 낭만적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그는 서술한다. 과학의 메커니즘은 미적 직관을 통하여 발견하는 자연의 생생함과 결코 화해될 수 없음을 이들은 직시하고 과학의 세계를 멀리 벗어나 그들이 지닌 천부적 예술성으로 자연의 본래 모습을 호소하고 찬사한다.

17.

5장 낭만주의적 반동에는, 화이트헤드가 궁극적 실재 혹은 궁극자의 범주를 어떤 의미로 구성하려는지를 예측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는 빛깔과 형상과 같은 영속적인 객체와 구별되는 유동하는 사물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또한 그러한 사물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우주에서 갖는 지위나 의미, 혹은 자연의 질서의 지속적 안정성의 지위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유동성과 영속성,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기반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는 대단히 궁극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인류의 사상사는 이에 대한 대답을 자연의 배후에 있는 어떤 실재보다 큰 실재에 관련시켜왔다는 것이다. 그 실재가 절대자, 브라마, 천도, 신과 같은 신을 가정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태도는 합리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비판을 한다. 오히려 자연이 어떻게 자기 설명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를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태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저 희미한 실재의 일반원리에 충실하게 접근해야 하는 설명의 일반원리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신념과 요구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해명이 사물이 왜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도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심지어 시간, 공간, 물질에 대한 근대과학의 이해도 세계의 기반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자 신을 요청하는 안일함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과학의 안일함과 신학의 안일함이 여기에서는 동시에 지적된다. 이러한 지적을 설득력있게 구현하기 위해 그는 과학의 시간과 공간과 물질 개념을 새롭게 설명한다. 또한 유동하는 세계의 근거를 해명하고자 하는 신학의 신 개념을 새롭게 설명한다. 그 설명의 궁극적인 동기는 어떻게 인간이 저 희미한 실재의 일반원리에 육박할 수 있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그에 있어서 시간, 공간, 물질, 신이라는 추상관념보다 더 근원적인 사실은 무엇일까. 그는 이러한 사실을 [만물유전]Vergehen der Dinge 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만물유전은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실상이라는 일종의 통찰에 기반한 믿음이며, 이러한 믿음의 내용들을 그의 설명의 내적 원리를 통하여 설득력 있게 합리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18.

우주의 영속성과 유동성의 궁극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이라는 개념을 안이하게 요청하는 사상사적인 태도에 대해서 그는 반대하였다. 그리고 신, 그리고 시간, 공간, 물질이라는 추상관념이 독단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에 대한 여러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을 가하기 위한 궁극적인 근거와 대상은, 만물이 유전한다는 사실이며, 설명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에 깃든 원리에 더욱 가깝게 나아가고자 한다. 이렇게 자연의 전체상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는지를 그는 고민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의 전체상은 진화적인 팽창의 상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이라는 추상적 관념들을 구체적인 현실사태의 한 국면으로 융화 시키기 위한 의도로서 사건event을 주장한다. 그 사건은 생성하는 우주에서 어떠한 것이 통일적으로 발현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사건에 기반한 사물은 자신이 속해 있는 전체를 제한된 자신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 자신이 된다. 이는 대단히 완강한 사실이며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엄연한 사물들의 본질이자 우주의 사태가 된다. 여기에서 어떠한 것이 통일적으로 발현한다고 할 때의 이 발현은, 다자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들이 수량적으로 일자적인 종합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지칭한다. 존재하는 요소들의 단순한 융합은 한정성의 결여로 인하여 비존재 로 하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현이라는 자연적 특성에 대한 언급은 후기에 있어서 사물의 출현에 관여하는 궁극자의 범주의 요청을 암시받게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궁극자의 범주의 구성이 신이라는 개념의 요청으로 인한 사상적 오류를 어떻게 체계내적으로 극복하였는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주목은 그의 유기체론이 사상적 오류를 양산한 안일한 신학적 창조론과 대립되는지를 밝히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화이트헤드는 베르그송 류의 엘랑비탈이라는 관념이 새로운 해석의 통찰을 제공해주지 못한다고 이성의 기능에서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서 유기체론이 우주의 본성에 대한 단편적인 답변으로 유지되어 왔던 생기론과는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력인에 설명되어야 할 것을 목적인으로만 과도하게 설명해왔던 사상적인 오류를 화이트헤드는 어떻게 그의 유기체론에서 교정하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창조론과 생기론과 목적론이 안고 있는 세 가지 안일한 사고방식을 화이트헤드가 어떻게 유기체론과 그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궁극자의 범주를 통해서 비판하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200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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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생성하는 우주에 대한 구체적 해명을 위하여 화이트헤드는 생성을 산출하는 활동력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이 분석은 사건화된 영역과 사건화를 이루는 영역, 혹은 존재의 영역과 존재의 근거가 되는 영역이 공통으로 결부된 자리에 대한 분석이다. 저 사건의 기저를 관통하면서 유실되지 않는 그 활동력에 대한 분석은 과정과 실재 1부 제3장 몇 개의 파생적 개념들의 첫 부분에 아주 섬세하게 해명이 된다. 여기에서는 영원적 객체, 신, 창조성이 어떻게 관련성을 맺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범주와 도식을 기반으로 완결된 체계가 이전의 저작에서는 어떻게 문제제기 되었는지 여기에서는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론에서는 이러한 현실화된 요소와 현실화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한 구분이 언급 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분석은 형이상학적 진술이 지녀야 할 논리적 일관성과 적합성와 적용가능성을 충족시키면서 종합적으로 기술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출발점을 바탕으로 그는 종교론에서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우주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하나는, 시간 안에서 진행되는 현실세계이다. 다른 하나는, 그 진행을 형성하게 하는 형성적 요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형성적 요소formative element는 현실적이거나 시간적인 것의 분석에서 나타나지만, 그 자체는 현실적이거나 시간적이지 않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형성적 요소로 인해서 현실세계의 성격이 구성된다. 화이트헤드는 이 형성적 요소를 언급하면서, 이 시간적 세계와 이 형성적 요소 너머의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자각을 한다. 이러한 자각은 형성적 요소라는 진술이, 형이상학적 기술의 노력이 최대한 닿을 수 있는 한계선상에서 논의되는 내용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형성적 요소는 어떠한 것들인가.

첫째, 현실 세계가 그 시간적 추이의 특성에서 새로움을 갖게 하는 창조성이다.

둘째, 그 자체는 현실적이지 않으나 특정한 관련성의 정도에 따라서 현실적인 모든 것에서 예증되는 영원적 객체이다.

셋째, 단순한 창조성의 무규정성을 규정적인 자유로 전환하는, 현실적이면서 비시간적인 존재인 신이다.  

즉 여기에서 형성적 요소는 창조성과 영원적 객체와 신이다.  이 형성적 요소는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형성적 근거가 된다. 그에 의하면 현실세계는 현실화된 계기들의 복합적 사태이다. 그런데 이 각각의 계기는 하나의 획기적 계기epochal occasion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각각의 획기적 계기는 각각의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물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시간적 지속과 공간적 차원에 제한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획기적epochal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모든 계기는 불연속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이 불연속성은 시간과 공간이 어떠한 지속을 통하여 원자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이 시공간보다 근본적인 사태이지, 시공간이 지속보다 근본적이지 않다.  불연속성은 사건의 원자성을 일단 지시한다. 또한 사건의 근거인 지속은 순간이 아닌 폭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지속은 폭의 개념을 직관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사건은 이 폭을 지닌 지속의 부분이며, 패턴적 현시이다. 시간과 공간은 여기에서 더 이상 말끔한 순간의 연속적 좌표가 아니라 이미 내적으로 가분성과 연장성을 바탕으로 한 지속의 한 실현이다. 그러므로 시간화와 공간화는 근본적으로 가분적이나, 시공 자체는 최소한의 어떠한 원자적인 단위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에포크적이다.  이 에포크에 대한 분석은 과정과 실재에서 합생에 대한 분석으로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20.

각각의 우주의 계기는 그러므로 획기적 계기의 연쇄체이다. 우주의 사태는 근본적으로 원자적이고 획기적이며 그 원자성을 기반으로 연속적인 계승을 이루어낸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사건을 획기적 사건으로 규정했다. 동시에 그는 사건을 피조물로 지시하였다. 이 사건을 피조물로 표현한 의도를 헤아려본다면, 그 (획기적) 사건은 지속의 한 패턴적 실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획기적 사건에 있어서 현실세계의 시간화와 공간화에 관여하는 형성적 요소의 역할이 더불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창조성과 피조물의 결속 관계는 우주의 시공적 특성을 산출하는 매개가 된다. 그에 의하면 피조물은 창조성과 더불어 머무르며, 피조물에 대한 창조성은 피조물과 더분 창조성이 된다. 이럼으로 새로운 세계로의 진행이 가능한 것이다. 즉 창조성은 피조물을 형성하는 과제와, 피조물의 전진을 형성하는 과제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창조적인 전진의 행위가 물리적 세계 안에서는 시간적 연속이라는 방법으로 표현된다. 이는 창조성이 지니고 있는 색조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종교적 이해로 보여질 수 있으나, 시간적 연속을 바탕으로 한 현실세계의 전진에 있어서 창조성이라는 형성적 요소가 어떻게 형이상학적으로 뒷받침 하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후기 저작인 사고의 양태에서도 이러한 우주의 과정을 추동하는 가능태로서 창조성에 대한 논의들을 우리는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성은 현실세계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형성적 요소가 아니다. 현실세계, 즉 모든 현실적 존재를 떠난 창조성의 논의는 존재론적 원리를 위배한다. 즉 모든 것이 적극적으로 현실태의 어딘가에 있으며, 가능태에 있어서는 어디에나 있다는 존재론적 원리 를 위배하는 창조성의 자리는 어디에도 자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성적 요소로서의 창조성이 현실세계와 이렇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물리적 세계의 시간적 연속의 근거를 지시하면서, 동시에 물리적 세계가 하나의 제약된 현실세계로 나아가지 않게 하는 형이상학적 원리이다. 생성하는 새로움의 세계를 구제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원리 가운데 하나가 형성적 요소로서의 창조성 개념이다.

형성적 요소를 다루는 종교론에서 그는 획기적 사건을 구체화로 이해한다. 위에서 표현하였듯이 획기적 사건은, 근본적으로 폭을 지닌 사건의 원자성이 현실세계의 기초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여러 계기들이 획기적으로 하나의 패턴을 통하여 자신을 실현하는 의미이다. 그것은 우리 우주의 모든 요소가 갖는 상이한 요소들의 통일적 집결을 특성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창조성은 이러한 여러 계기들의 구체적 종합을 인도하는 요소이며, 이 구체적 종합이 창조적인 종합으로서 실현되도록 하는 근거가 된다. 창조성은 우주의 이접적disjunctive 사태를 연접적conjunctive 사태로 전환시킴으로서 새로운 현실화를 이루어내는 구체화의 동력으로서 기여한다. 이러한 구체화는 확정된 사태의 종합과 더불어, 이전의 사태가 새로운 사태로 출현한다는 의미의 구체화이다.

21.

우리는 종교론에서 정의된 형성적 요소로서의 역할을 헤아려 보았다. 형성적 요소는 현실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의 분석에서 나타나지만 비현실적인 것과 비시간적인 존재이다. 특히 창조성은 그 자체로서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지만 현실적인 것과 관계를 맺으면서 구체화를 구현하는 원리이다. 현실 계기는 연속적이지 않은, 획기적 계기이다. 실현의 장으로서의 지속은 패턴을 현시하고 그 패턴은 사건의 본질을 구성한다. 지속은 공간화 되며 시간화 된다. 창조성은 이러한 공간화와 시간화의 역할에 있어서 형성의 요소로서 기여한다. 그러나 창조성 자체의 성질은 형성되지 않는다. 더불어 현실계기와의 규정과 관련성을 떠난 창조성의 원리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창조성 자체는 형성되지 않으나 창조성은 형성되는 현실에 의존하는 원리이다. 또한 창조성이라는 원리를 통하여 물리적 세계가 지니는 계기성과 시간적 연속성을 얻게 된다. 또한 새로움과 구체성을 향한 현실화의 근거가 된다.

종교론에서는 생성하는 활동력이 산출되는 우주를 형성적 요소라는 개념적 분류를 통해서 이해하였다. 형성적 요소는 이러한 활동력의 산출이 어떻게 현실에 실현되는지에 대한 언급이다. 형성되는 요소와 형성을 야기하는 요소 사이의 상호 연계에 대한 관련적 이해이다. 현실세계는 획기적 시간과 공간을 연속적으로 얻게 되고, 그 물리적 세계는 물리적 여건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피조물적인 실현을 이루어나간다. 그러한 시간적 누적과 피조물적인 실현의 특정한 양태의 기저에는 형성적 요소와 창조성이 관여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이러한 활동력의 본성을 어떻게 창조성과 신과 영원적 객체라는 형성적 요소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분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한다. 이는 영원적 객체와 신과 창조성의 기원에 대한 후기 형이상학 과정과 실재에서의 상세한 분석의 발아로서 기술된 부분이기도 하다.

22.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그는 영원한 활동력에 대한 분석을 영원적 객체의 측면과 결부시켜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사건들의 일반적인 흐름에 대한 고찰을 통해 기저의 영원적 활동력을 분석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이 활동력의 본성 가운데에 모든 영원적 객체들의 영역에 대한 직시가 성립된다. 활동력의 본성 안에서 영원적 객체의 보편적 성격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생성의 근거는 창조성이 되지만 생성의 내용은 영원적 객체를 기반으로 결정된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자연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영원적 객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영원적 객체는 창조적 자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원적 객체는 창조적 자연 안에서 그 자체로도, 그리고 자연과도 결정적인 관계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즉 창조적 자연에서 영원적 활동력과 관련하여 영원적 객체가 출현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과학과 근대세계 6장 19세기에서 이루어진다. 이 논의를 조금 더 주목해보자.

우리는 사건들의 일반적인 흐름을 통하여 그 기저의 영원한 활동력을 분석해 낼 수 있다. 형성적 요소도 이 영원한 활동력과 현실세계의 끊을 수 없는 연관성을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구분이다. 이 활동력의 본성 가운데에 영원적 객체의 영역에 대한 직시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직시의 근거는 현실세계의 개별자들의 복잡다단한 패턴들을 궁극적으로 한정할 수 있는 근본적인 기반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는 영원한 활동력의 본성이 현실세계에서 다양하게 요구되는 일체의 개별자들(간)의 관념적 본질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영원적 객체는 현실 규정의 한 방식이며 가치중립적이다. 현실계기는 목적을 지니는 가치의 실현 과정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현실계기에서 패턴을 형성한다는 것은 지속이 어떠한 방향성과 목적을 가진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적 객체 자체는 무가치적이나, 현실에서 생성하는 목적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어떻게 가치있게 현실세계에 관여할 수 있는지를 문제 삼는다. 즉 이 문제는 그의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질문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유의 관념적 양상과 현상의 과정에서의 현실적인 양상들의 공재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다. 그에 의하면 사유와 현실의 공재는 가치를 산출한다. 공재는 이미 현실세계의 한 존재방식이다. 거기에서 가치는 출현한다. 그렇다면 그 가치의 출현에 영원적 객체는 어떻게 구현되고 관련성을 맺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이러한 논의를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사물이 실현한다는 사실과 별개로 고찰될 수 있는 기저의 활동력은 세 유형의 직시를 갖고 있다. 첫째는 영원적 객체에 대한 직시, 둘째는 영원적 객체들의 종합과 관련하여 본 가치의 가능성에 대한 직시, 셋째는 미래에 실현될 수 있는 상황 전체와 관계를 필연적으로 맺는 현실적 사실에 대한 직시이다.  창조성과 영원적 객체에 관련하여 첫째 부분을 이해해보자. 이 영원적 객체에 대한 직시는 과정과 실재에서는 신의 원초적 본성으로 기술된다. 구체적으로 신의 원초적 본성은 모든 영원적 객체에 대한 완벽한 직시 로 표현된다. 더 자세하게 언급하자면, 원초적으로 창조된 사실은 영원적 객체의 다양성 전체에 대한 무제약적인 개념적 가치평가이다.  즉 영원적 활동력에서 원초적으로 출현하는 최초의 사실은 영원적 객체에 대한 직시이며, 이 자체가 신이라는 것이다. 신은 그러므로 영원적 객체가 지닌 모든 추상적 가능성을 완벽하게 구현한 최초의 사태가 된다. 영원한 활동력 안에서 창조성과 영원적 객체와 신은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규정하며 출현한다.  영원한 활동력 안에서 창조성을 기반하여 신을 매개로 피조된 영원적 객체의 직시는 둘째의 예시인 영원적 객체의 일반적 가능태와 셋째의 예시인 실제적 가능태라는 양자적인 폭을 확보하면서 그 안에서 실현되는 현실세계를 한정한다. 여기에서의 중요한 것은, 과학과 근대세계에서는 형성적 요소로서의 창조성, 영원적 객체, 신이 영원한 활동력이라는 본성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실현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형성적 요소의 내적 관계는 과정과 실재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설명되고 적용된다. 끝. (2002.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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