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 타자성, 연대성
Unterwegs zur Theologie











전 철


인간의 삶은 유동하는 세계에 자신을 주체적으로 세우는 과정이다. 삶의 목표는 자신의 성숙한 완성이요 자신의 온전한 구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이 결코 아니다. 나는 남의 볼모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동시에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주체이다. 일단 우리는 여기에서 언급하는 인간의 <주체성>이 동시성(contemporaeousness)이라는 우리 시대의 개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주체는 자아와 타자의 매개를 구현하는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나, 모든 회의의 대상으로 잡히지 아니하고, 오히려 모든 회의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축점과 같은 데카르트의 자아(cogito ergo sum)가 아니다. 만약 피히테나 데카르트의 자아, 혹은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불변의 아르키미데스 점이라고 한다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는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매 순간 타진의 가능성과 운신의 폭을 결정하는 가변의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주체성에 대한 고상한 은유로서 지시되는 아르키미데스의 점은, 우리에게 더욱 적실한 상상력을 던져준다.


자아는 타자와 관계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에 빚어지는 여러 국면들에 대하여 문명의 한 편에서는 관계보다 존재를 더욱 근본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파르메니데스의 전통).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존재를 관계의 부수적인 양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헤라클레이토스의 전통). 전자의 경향은 주체에 대한 과도한 강조를 통하여 타자와의 진정한 연대와 사귐과 공속(公贖)을 가로막는 장애물로서 기능하게 된다. 후자의 경향은 관계와 과정의 과도한 강조를 통해서 주체의 고유한 퍼스날리티가 관계와 과정 속에서 와해되어 버리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지니게 된다.

일단 나는 여기에서 주체의 아르키미데스의 점을 불변하고 영원한 점으로 놓고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주체의 점을 통하여 타자와의 교감이 가능해지고 세계의 풍경이 전개됨을 일종의 출발점으로 삼으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없으면 타자도 없고 세계도 없다. 나에 비친 모든 대상은 아르키미데스의 점에 의해서 조율되어지고 변주되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도 내 눈에 비치는 모든 사물들은 나의 고유한 주체의 입각점(standpoint)에 의하여 기하학적으로 재구성된 풍경임을 우리는 상기할 수 있다. 나의 입각점이 없으면 세계의 풍경은 이렇게, 고유하게, 유일회하게, 영원하게 맺혀질 수 없다. 저 꽃 자체의 성분에는 저 꽃에 대한 나의 인상이 없다. 이에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설을 세우고자 한다. 첫째, 나의 입각점, 나의 아르키미데스의 점은 자명하고 진정한 것이고 실제적이다(real). 둘째, 나의 입각점과 아르키미데스 점에 의해 포촉된 나를 둘러싼 모든 대상은 아르키미데스 점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된, 가상적인 것이다(virtual). 실로 인식의 상대성은 존재의 본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나에게 리얼한 반면 타자는 나에게 버추얼하다.


어쩌면 문명은 태초부터 오늘까지 쉽게 포착이 되지 않는 이 미묘한 영혼의 점을 너무 단선적으로 처리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의 가정 대로 변하지 않는 우리의 중심이 우리 안에 있고, 그 점을 통하여 사물의 모든 질서와 가치와 의미가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된다면, 우리는 그 아르키미데스 점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더욱 관심 깊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모든 변화는 그 점을 매개하여 전개되기 때문이다.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혹은 영혼(soul)이라는 관념, 그리고 근대철학에서의 주체(subject)라는 관념은 이 아르키미데스의 점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이 점에서부터 구원과 심판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로 그 점에서부터 우리는 <연대성>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우리는 변하지 않는 주체의 고유한 아르키미데스 점을 <정체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주체성은 <실제적>이고 주체와 관련된 타자와 세계의 편린들을 <가상적>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타자와 세계에 의하여 주체가 대치될 수 없음을 이 논의는 의도하고 있다. 관계에 의해 주체가 와해되는 구조주의 식의 발상은 애초부터 주워진 존재일원론이나 존재자다원론의 한계를 노정하게 될 뿐이다. 주체는 없고 앙상한 구조에 놀아나는 주체의 정신분열을 양산하게 될 뿐이다. 즉 구조주의 구조가 허용하는 한에서만 운신의 폭을 결정하는 개인을 말한다면, 우리가 논의하려는 바는 그 아르키미데스의 점을 통하여 전개되는 <주체>의 활동 보폭은 결코 어떠한 구조에 의해서도 저지당할 수 없고, 침윤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영역이 바로 리얼한 아르키미데스 점의 운신의 폭이다.


하지만 주체가 타자와 관계하는 한, 내면의 영혼이 외부의 사물에 관여하는 한, 나의 인격이 타자의 인격과 교감하는 한 그 찰나는 버추얼하며 동시에 주체와 타자, 영혼과 사물, 인격과 인격을 최대한으로 견실하게 묶는 <구조>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말하려 하는 구조는 선험적이고 불변적인 형태가 아니라 주체와 타자, 영혼과 사물, 인격과 인격이 만날 때 빚어지는 찰나(刹那)의 형식이며, 이는 본성상 리얼하지 않고 오히려 버추얼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는 인류의 문명에서 출현하는 모든 구조와 기능이 결코 자명하거나 태생적으로 불변의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거부한다. 즉 다시 말해서 사회, 국가, 법, 결혼, 대학, 논리, 성 등 우리가 현실에 진입할 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듯한 구조는 결코 온전하거나 영원한 대상들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것을 가장 근원적인 계명으로 천명한다. 우리는 저 언명을 다시 독해할 수 있다 :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구조도 우상화하지 말라. 또한 그리스도교가 종국은 고백해야 할 가장 숭고하고 최종적인 송영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이다. 역사적으로 이 양자의 정신을 상실하였던 혼란의 시대에 개신교의 정신, 즉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 새롭게 발현하였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여방식에 의해 정초된 개인은 어떤 의미에서든 신적인 성스러움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이마고 데이의 모토가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정조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모든 이들의 평화와 구원의 성취를 구유(具有)하는 구조를 우리에게 직접 제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을 통하여 그 꿈을 이루도록 추동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이 간직한 내밀한 아르키미데스점을 통하여 구현해야 할 나라인 것이다.


이렇듯 주체, 영혼, 인격은 신성하고 고유하고 영원하다. 그리고 그는 <리얼하다>. 동시에 타자, 사물, 타자의 인격은 주체와 '관계'하는 한에서만 자신의 운명을 확보할 수 있기에 <버추얼하다>. 그리고 <주체성>과 그에 기인한 관계성을 새롭게 구축하는 관계의 생멸점(生滅點)이   <구조>이다. 또한 <현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주체성과 타자성의 관계속에서 맺혀진 드러난 '영원'이다. 리얼한 주체와 버추얼한 타자의 미묘한 착상이 우리의 <현재>속에 구조로서 긴밀하게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속에서 펼쳐진 구조는 애초부터 존재하는 운명은 아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주체를 관여하고 제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구조는 버추얼하지만 적어도 그 주체가 타자와 관계할 때 착상되는 구조화에 있어서는 리얼한 제어기능을 어느 누구도 폄하할 수 없다. 구조 없이는 타자와의 관계에서의 연속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강조되어야 할 점은 구조는 개인에 스며들 수 있을 뿐, 개인을 근본적으로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조의 제어는 개인의 주체적인 촉발점에 의하여 언제나 새롭게 재편될 수 있는 잠정적이고 계기적인 영향력일 뿐이다. 그러나 개인의 창조성이 구조의 장악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점이 결코 개인을 더욱 풍요롭게 하거나 자유롭게 하는 면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처절한 책임과 긴장을 요구한다. 동시에 신학적으로 말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지향을 상실한 일방적인 모든 구조에 대한 불신은 결국 주체의 불신과 건강한 연속성의 일탈을 야기할 뿐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지향 아래에서 전개되는 모든 구조에 대한 불식만이, 진정으로 구조를 넘어서는 주체의 진정한 의미를 간취(看取)할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을 기반으로 한 주체의 타자와의 만남은 리얼과 버추얼의 타협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연대성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즉 주체성과 타자성이 성숙한 문양으로 만나게 될 때 그 지점이 바로 <연대성>의 점입가경(漸入佳境)을 연다는 것이다. 연대성은 타자성 보다 더욱 고양된 가치를 지니는 개념이다. 타자성이 주체성과 길항의 양상을 띄고 있다면 리얼한 주체가 버추얼한 타자를 폄하하지 않고 인격적으로, 혹은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을 위한 성실함으로 타자와 관계할 때 거기에서는 연대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전 철, "주체성, 타자성, 연대성, {한신논총 제9집} (한신대학교 대학원, 1999년 12월), pp.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