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윤리의 상호 관계에 대한 고찰

 

 

 

 

 종교와 윤리의 상호 관계에 대한 고찰
 

전 철
 
 
 

1. 들어가며

종교는 인간의 삶과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깊이 스며든 현대문명에 있어서도 종교가 인간의 삶에 차지하는 역할과 그 무게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가 있겠다. 특히 종교 가 인간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근거는, 종교가 인간 삶의 유용한 요소를 제공하는 측면에 기인한다기 보다는, 인간 존재가 바로 종교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사물의 본성 안에 있는 영원한 것에 대한 인간의 충동과, 정화와, 고양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의 근 거와 기원은 한 개인의, 세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 관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자에 대한 신앙은 제도종교보다 훨씬 앞선 기원을 갖고 있는 것이고, 한 개인의 종교적인 신앙은 그 사회 나 제도의 역사성을 뛰어넘는 근원성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종교가 세계와 사물의 본질에 대한 개인의 호기심에서 출발했다는 점[1]은 종교의 발생에 대한 탐구에 매우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개인의 영역속에서 유효한 의미를 발휘하는 종교와 종교성이 인간생활 속에서 전개될 때 점진적으로 개인적 관심사로서의 종교와 종교성은 집단적 관심사로 전이되어 간다. 이제 개인의 깊은 심연에서 열리는 종교적 정서(情緖)와 의례(儀禮)는 공동체적인 단계로 점진적으 로 전개되어 나아가면서, 사회적 관계 안에서 하나의 조정(co-ordination)을 요청하게 된다. 집단적 의례와 집단적 정서의 공유를 통하여 부족과 공동체는 서로의 결속력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사적으로 볼 때 개인의 종교가 사회적 차원의 종교로 침전되는 과정은 종교가 전개되어가면서 겪게 되는 문명의 매우 혹독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한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행 위로서 발현될 때 빚어지는 여러 국면들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개인의 호기심을 근거로 하고 있는 종교 가 해명해야 될 또 하나의 커다란 과제로 남게 된 것이다. 바로 종교적인 국면과 윤리적인 국면이 서로 ?게 공존하는 그 자리가, 종교와 윤리의 긴밀한 함수관계를 읽어내려 하는 이 논의의 출발점이기도 하 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윤리적 지평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의 문제를 종교의 입장에서만 살펴보 려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윤리학 자체에 있어서도 종교와의 관계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 이다. 실은 윤리학 자체에서도 종교와의 관련성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는 듯 하다. 가치의 문제를 다루 는 윤리학이 그의 근거를 탐구할 때, 그 가치매김의 근거로서 종교적 신념이나 신을 요청하는 입장도, 우 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입장으로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종교와 윤리의 관계의 문제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근원적인 문제로 다가오는 이유는 오늘의 종교다원의 상황인 것이다. 종교다원의 상황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종교다원 상황에서 빚어 지고 있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도 어떻게 보면 종교와 윤리 사이의 상호 긴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종교와 윤리를 둘러싼 여러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특히 종교와 윤리는 개념적으로, 범 주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데 촛점을 맞추면서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필자는 종교와 윤리가 여러 가능성 안에서 만날 수 있음을 허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는 종 교와 윤리가 만나는 여러 가능성들이 어떻게 유형화되는가, 그리고 그 유형이 함의하고 있는 긍정적인 측 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어떠한 내용인지를 다루어 보려 한다. 필자는 이 논의에서 종교와 윤리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이 더 근원적이라거나 가치롭다는 윤리적인 진술을 주장하는 것보다, 종교와 윤리가 관계될 때 전개되는 광범위한 양상을 일별하고 논의하는 윤리학적인 진술의 성격을 지켜내려 한다. 그리고 결국 은 우리 모두가 간취해야 할 종교와 윤리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심화시킴에 있어서 하나의 모색이 되길 바래본다.

2. 종교와 윤리의 개념정의

오늘날의 종교가 다양한 만큼, 종교에 대한 개념정의와 이해 또한 매우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보건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종교를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와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유한한 인간은 세계의 질서, 세계의 실재의 깊이, 전체적인, 부분적 인 세계의 가치, 세계의 아름다움, 생명의 열정, 생명의 평화와 같은 다양한 정감(情感)을 체험한다. 그리 고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는 이러한 다양한 정조는 우리의 세계가 다자의 세계임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세계의 잡다성 안에서 고유한 영속감을 강렬하게 체험한다. 그 절대적인 존재는 만물의 변화의 수레바퀴에 와해되지 않는 궁극적인 존재임을 인간은 어느 순간 체험하고 고백한다. 바로 종교는 일자에 대한 근원적인 체험에서 비롯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철저하게 실존의 자리에서부터 열린다. 바로 종교는 궁극적 일자에 대한 체험이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종교인은 그 궁극적 일자에 대한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사물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우주에 대한 이해를 정초하는 부류라고 할 수 있겠다.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일자는, 철학적 사 유에서 간혹 엿볼 수 있기는 하지만, 우주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요청적 개념이나 수단적 개념이 아니 다. 그리고 궁극적 일자는 일시적이거나 유일회적인 정서나 환상이 아니다. 궁극적 일자에 대한 체험과 그 존재에 대한 확신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고 상대화될 수 없는 신성한 대상이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종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절대적인 존재와 상대적인 인간 사이의 관계 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그 궁극적 일자는 다른 어느 존재와도 교환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 다.

다음으로 윤리라는 개념에 대해 접근해보자. 윤리라는 말은 일찌기 동양에서는 예기(禮記), 악기편(樂記 篇)에서 사용한 흔적이 있었다. 여기에서는 인간이 한 동아리로 서로 의존해 지켜야 할 질서를 뜻하였 다.[2] 또한 윤리(倫理)의 윤(倫)은 무리, 또래, 질서 등 여러 가지 관념이 있고, 리(理)는 이치, 이법 도리 의 관념이 있다. 이런 관념을 보건데 윤리는 집단이 지키고 수행해야 할 의식이나 신념, 태도를 함축한다 고 하겠다. 서구 개념의 기원으로 볼 때 윤리(ethics)는 집단과 사회가 전승받은 익숙한 에토스(ethos)와 깊 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서 윤리라고 하는 관념은 한 사회에 스며든 유산과 특질적 규범을 함축한다고 하겠다. 또한 윤리는 한 개인이나 집단이 그의 고유한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영역이다. 그렇 기 때문에 윤리는 그 자체가 자명하거나 궁극적인 성격을 포함하는 관념은 아니다. 정리하면 윤리는 개인 이나 집단이 그의 관습이나 사상을 더욱 드넓은 관계 안에서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관념이다.윤 리관념의 선험성을 주장하는 규범윤리나, 윤리관념은 관습이나 사상이 적용되는 현실과 맞물리면서 새롭 게 발현된다고 이해하는 상황윤리 양자 모두, 관습과 사상이 실현되는 장(場)을 둘러싼 관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와 윤리의 개념을 나름대로 정의해보았다. 이러한 개념정의를 바탕으로 종교와 윤 리 상호간의 관계성을 도식적으로나마 전개해보고자 한다. 우선 종교는 절대자와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서 열리는 영역이다. 반면 윤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서 열리는 영역이다. 그리고 종교가 지극히 실존의 영역에 그의 근거를 두고 있다면, 윤리는 지극히 사회적인 영역에 그의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종교가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이해의 과정에서 전개되는 국면이면, 윤리는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이해를 구체 적인 현실 속에서 실현하는 과정에서 전개되는 국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종교와 윤리 : 무엇이 근원적인가?

종교와 윤리, 무엇이 더 근원적인가? 종교와 윤리의 관계성의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근원의 문제를 생 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근원의 문제에 대한 이해는, 결국 종교와 윤리가 어떠한 관계속에서 그의 역할을 수행되는가를 예측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나무의 뿌리는 나무의 운명을 가늠케 한다. 우선 이 양자의 관계에 있어서 종교가 더 근원적이라고 이해하는 입장과, 윤리가 더 근원적이라고 이해하 는 입장, 그리고 세번째로 종교와 윤리는 서로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입장으로 유형적으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이다.

3.1. 종교에 더 우위를 두는 견해

종교가 더 근원적이라고 보는 입장에 있어서, 종교는 절대자와 인간의 만남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다. 그 만남은 현실의 생(生)을 넘어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자는 이 생(生)과 사물의 궁극적인 기반이 된다. 또한 이러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종교는 인간만사(人間萬事)를 해 명하는데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창세기로의 상상은 종교와 윤리의 근원적인 관계를 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종교와 윤리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 그 기원과 우위를 구분할 수 있는 분명하고 순수한 자리는 인류의 창세기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성서의 창세기가 아니더라도 상관 없 다. 우선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태초의 인간은 절대자로부터 피조된 인간이다. 거기에는 순수한 여백 위 에 단지 절대자와 유한한 인간만이 홀로 서 있다. 그렇다면 그 무한자와 그 앞에 단독적으로 선 유한자의 관계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윤리라는 관념은 존재하는가?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윤리, 즉 인간관계의 이 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설로 설정하는 창세기에는 진정한 윤리가 없다. 오직 진정한 종교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윤리가 없어도 종교는 가능하다. 로빈슨 크루소우는 윤리 없이는 살 수 있었지 만, 종교 없이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입장에 있어서, 도덕의 관념은 종교적 삶과 제의가 점차 사회화 되고 집단화 되면서 형 성되어지는 파생적 양상이 된다. 건강하지 않은 종교는 도덕의 관념을 요청한다. 그리고 시대 속에서 타 락한 종교는 윤리적 관념과 가치의 정(釘)으로 돌판위에 십계명을 새긴다. 철저하게 실존의 사색과 영성 에 관련되어 있는 종교가 역사 안에서 제도화되었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타락이다. 종교는 그의 부패과정 에 있어서 사회성으로 침전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3] 또한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인류의 사회화와 제도화는 종교가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커다란 과제이다. 여기에서는 종교가 사회적인 지평 안에서 부가 적으로 발생되는 여러 상이한 가치들의 재조정, 특정한 제도와 규율과 관습의 남용에 대한 올바른 평가, 그리고 집단 사이에서 출현하는 여러 정신적 물리적 갈등에 대한 올바른 개선을 바로 윤리라는 차원으로 전개해 나간다고 여긴다.

어찌보면 이들의 입장에서, 종교가 요청하는 윤리는 종교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모든 종교는 구원을 지향한다. 그 구원은 결코 인간의 윤리적인 선과 도덕적인 지고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 시 말해서 종교의 목적은 윤리적 실천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실존적이고 내밀한 구원에 있는 것이다. 오 히려 윤리와 율법의 창궐은 구원과 멀어지는 시대의 궁핍함을 지시한다.

종교를 윤리적 가치나 평가보다 더욱 근원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입장[4]은 윤리적 가치나 규 범에 대한 종교의 비판적 자율성과 종교적 차원의 근원성을 지시하고 있다. 궁극적 일자에 대한 체험과 신앙은 현실 속에서 부가적으로 형성된 윤리규범을 도모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에서 종교는 윤리의 근거로 이해된다. 그리고 윤리는 종교적 신앙과 신념을 가지고 세계 안에서 타자와의 삶을 영위할 때 발생되는 부가적인 범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삶 속에서 생성되어진 하나 의 가치체계이기 때문에 결코 온전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종교는 근원적인 절대자와의 관계 안에서 그의 생명력을 영속성 안에서 전개해 나가지만, 윤리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빚어 지는 가치체계를 그의 근거로 하기 때문에, 유동성의 정조를 고유하게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현실 가운데에서 실질적으로 만날 수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생각한 다. 사실 종교에 귀의하는 종교인들은 종교 자체가 목적으로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들에게 있어서 윤리는 종교만큼 본질적인 함수로서 이해되지는 않는 듯 하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의 종 교적 신념에 근거하여 국민의 일반적인 의무관념인 군대징집을 거부한다.

결론적으로 정리해보자. 이러한 입장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점은, 종교를 인간 내면의 고유한 실존과의 관계속에서 절대자와의 만남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개인의 존엄성과 실존의 가치를 더욱 중시하게 된다. 종교는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영역으로 귀환되고 윤리는 개인의 종교성이 현실과 맞물리면서 전개되는 부 수적인 측면이 된다. 또한 기존의 규범으로 침전되어 있는 윤리 관념에 대하여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는 근거를 종교가 갖고 있기에, 윤리적 가치평가의 독단적 차원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교정하는 가능성이 열 리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종교라는 범주를 어디까지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등장한다. 인간이 종교적인 존재 (homo religious)라는 언명은 종교의 범주를 어디에까지 규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내릴 수 없는, 매우 복잡한 문제가 깔려있다. 그리고 절대자와의 관계로서 종교의 근원성을 일반적으로 지시한다 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폭넓은 양상으로 고등종교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가 전개되고 있다. 다양한 양 상의 종교를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시켜서 윤리와의 관련성을 통하여 종교에 우위를 둔다고 주장하는 입 장은 이미 추상(抽象)에서만 가능할 뿐, 윤리적인 문제를 둘러싼 상호 종교간의 대립적인 지형을 직시할 때,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겠다.

3.2. 윤리에 더 우위를 두는 견해

윤리에 우위를 둔 입장은 종교에 우위를 둔 입장에 정면으로 대립된다. 특히 이러한 입장은 종교가 하 나의 개인과 실존의 영역에서 발현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종교는 근원적이지 않다. 오히려 종교는 윤리적 도덕률과 선험적이고도 윤리적인 규범을, 사회적 의식이나 집단적 의식으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부 수적으로 전개되는 제도이다.[5] 종교는 근원적이고도 원형적인 윤리적 가치규범을 사회적 보존으로 승화 시키고 전개시키는 광범위한 전진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신앙과 신념의 밑변에는 엄격한 도덕률이 스며있고, 그 도덕률은 인간경험과는 무관한 하나의 입법으로 정초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종교적 발현 과는 무관하게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

종교는 윤리적인 규범을 역사적인 차원에서 정식화하고 집단화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신은 존 재하는 것보다, 인간 도덕의 황금률을 근거짓고 유지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요청되는 그 무엇이다. 현실 적으로 사회는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의 장이다. 상호 다양한 가치들의 온전한 통 일은 우리의 마음에 흐르는 윤리의 관념 안에서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이러한 수행의 매개가 종교이다. 우리의 마음에 흐르는 윤리적 황금률은 역사적인 종교를 요청한다.

종교에 대한 윤리에 우위를 두는 입장은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맑스주의와 기독교 의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졌던 80년대 초반에 어느 맑스주의자가 기독교로 전향한 사건이 있었다. 어쩌면 인간해방의 실천적인 지침과 윤리적인 행위를 도모함에 있어서 맑스주의 페러다임보다는 기독교 페러다 임이 더욱 더 긴요한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판단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맑스주의자의 기독교로의 전향은 종교보다 윤리를 더욱 근원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이 보여 준 가장 적절한 사례가 될런지도 모른다. 왜냐하 면 어떠한 이데올로기, 심지어 어떠한 종교라고 하더라도 그 이데올로기와 그 종교가 결과적으로 올바른 윤리적 규범을 제공해준다면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바른 삶과 참으로 윤리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종교에 귀의하는 사례를 우리는 주위에서 자주 경험한다. 어느 이데올로기보다 종교가 더욱 윤리적이라면 그것이 이데올로기이냐, 기독교 냐, 불교나의 서로간의 입장차이는 어떠한 의미도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진정한 윤리는 궁 극적인 가치이고 종교는 그 궁극적인 가치를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가 되는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윤리는 행위의 영역으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종교는 믿음의 영역으로 이해된 다. 만약 윤리와 종교를 행위의 문제와 믿음의 문제로 연결시킬 때는, 결국 윤리가 더욱 근원적이라는 결 론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입장 속에서는, 믿음의 문제는 결국 행위를 통해서 그 믿 음의 건전성이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적인 삶과 종교에 대한 비판과 규범과 기초로서의 윤 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이들의 입장에서는 절대자와의 만남이 한 개인의 믿음의 영역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동시에 사회적인 관계 안에서 정행(正行)을 인도해 낼 수 없을 때, 그 종교의 존립근 거 자체에 대한 회의를 던질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에 대한 건전성의 평가와 종교의 근거가 바로 윤리임을 이 입장에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모든 종교는 윤리적 가치를 도모하는 과정이고 결국은 가장 숭고한 윤리를 지향하는 것이다. 또한 종교는 윤리적 수행의 과정에서는 어쩌면 서로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상이한 양상으로 그 들은 나름대로의 종교의 운명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종교가 지향하는 것은 바로 온전한 윤리의 왕국이라는 점에서만 유일하게 만날 수 있다는 입장을 이들은 갖고 있다. 이들의 입장에서 종교의 최고의 경지는 공동의 선(善)이기 때문이다.

종교보다 윤리를 근원적으로 보는 입장은, 주로 사회의 공약화된 가치나,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이념을 강조하는 부류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또한 이미 문명과 인류의 전개는 종교적 신념이 상호 충돌과 갈등과 반목으로 점철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종교에 대한 평가는 종교적인 주장 자체에 대한 이해 안에서만은 불가능하고, 오히려 그 종교가 현실 속에서 보여주는 행위의 윤리성과 건전성을 기 준으로 종교의 유용성을 평가하려는 입장을 이들은 갖고 있다. 심지어 윤리적인 건전성을 담보하지 못하 는 종교는 이미 종교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여길 수 있기에, 종교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와 비판은 윤리 적 토대 위에서 열린다는 입장을 이들은 견지하고 있다. 사실상 종교의 이단성을 가치평가 하는 기준은 사회 속에서 발현되는 종교의 윤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각 종교가 저지를 수 있는 사이 비적 요소를 비판하고, 그 종교의 역할과 운명을 조정할 수 있는 근거를 그 종교 자체에 맡기는 것보다, 윤리적인 토대에 마련하려는 관심을 이들은 보여주고 있다.

종교보다 윤리를 근원적으로 보는 입장은, 구체적인 인류의 역사에서 전개되었던 붉은 피가 스며들었던 종교의 폐해나, 비 윤리적인 문제를 제어하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올바로 조정하는 가능성을 한층 더 확 보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또한 윤리적인 황금률의 관념을 실현하는 과정으로서 종교를 이 해하기 때문에 역사 안의 종교의 경계를 분명하게 그어 놓음으로서 역사종교의 의의와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유용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역사적이거나 현실적인 차원이나 행위의 범주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역사적 현실이나 행위로 환원될 수 없는,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종교의 핵심적 요소를 간 과하거나 그 역동적인 힘을 놓칠 우려가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지평을 윤리적인 지평으로 환원시킴 으로써 종교가 갖고 있는 절대적 지평이나, 인간 삶에 기여하는 풍요로움을 메마르게 만드는 약점을 가지 고 있다.

3.3. 종교와 윤리를 동등하게 보는 견해

종교와 윤리를 동등하게 보는 입장은 서로가 서로를 요청한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종교의 근원적 정신과 윤리의 근원적 정신을 서로 화해시키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서도 정의하였듯이 종교는 절대자에 대한 유한자의 만남에서 열리는 지평이다. 종교(宗敎)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다. 어떤 것에 의해서도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다. 윤리는 인간 류(類)적인 차원에서 형성된 규범이다. 종교는 인간의 절대자에 대한 올바른 생각(正思)에서, 세계에 대한 올바른 행 동(正行)을 제공한다. 그리고 올바른 생각은 올바른 행동의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종교는 윤리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윤리는 종교의 목적이 된다.

절대자에 대한 한 유한자의 관여는 서로 독립되어 있는 유한자들 사이의 관계를 새로 묶는 힘이다. 다 시 말해서 한 유한자와 다른 유한자는 서로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이 유한자 양자는 절대자를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자와의 진정한 종교는, 다른 인간들과의 진정한 윤리 와 떼어낼 수 없는 깊은 연관을 가진다. 다자로서의 세계는 일자로서의 절대자와 관여하기에, 다자들 사 이의 윤리의 문제는 종교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제가 된다. 결국 진정한 종교는 진정한 윤리의 문제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진정한 종교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절대자를 계시를 통하여 만나고 있 음에 대한 확고부동한 경험이요, 진정한 윤리는 그 계시의 의미를 현실 속에서 실현하면서 검증하는 것이 라고 할 때, 진정한 종교와 진정한 윤리는 결코 양립불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진정 윤리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종교를 배제한 채 윤리적인 규범을 준수할 수 있다고 가정하여도, 결국은 종교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발생한다. 그것은 자신의 윤리적인 규범의 근거를 자신은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윤 리적인 규범의 근거가 자기 자신에게 파생되어 나왔다고 한다면 윤리적인 규범의 적용대상은 자기자신에 게 국한될 수 밖에 없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의 윤리적 요구가 자신 을 포함하여 인간 전체의 삶과 관련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근거가 요청된다는 것이다.[6] 이 미 윤리는 절대적인 영역을 근거로 할 때에만 진정하고 보편적인 윤리로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7]

이들의 입장은 종교와 윤리의 대립적인 측면보다 상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리고 종교의 기능과 윤 리의 기능은 애초부터 근본적으로 맞물린다고 보는 입장이다. 종교없는 윤리없고 윤리없는 종교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입장은 종교가 윤리적인 가치체계에서 독립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파생되는 '율법주 의'의 문제를 진일보 해결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또한 윤리의 근거를 종교에 두지 않음으로서 극단적이거나 상대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 '윤리만능주의'의 문제를 보완하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종교와 윤리를 동등하게 보는 입장과는 달리 종교와 윤리 자체를 폐기되어야 할 대 상이라고 보는 입장을 간단하게 살펴보려 한다. 이 입장에서는 종교나 윤리는 폐기되어야 할 대상이다. 종교나 윤리는 인간에게 어떠한 당위를 요청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을 해야한다는 당위적인 언명은 인간의 자유를 찢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이 입장은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위는 없다 (Nichtmehrsollen).[8] 오로지 결백한 것은 생성일 뿐이다. 오히려 도덕이란 인류의 경험의 축적이나 유전을 통하여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비약(?an)에 의해서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나 도덕은 새로움과 생성 보다는 한 차원 낮은 단계이다. 종교나 윤리보다 더욱 가치있는 것은 생성(Werden)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 라리, 생성은 결백하다(Unschuld des Werdens).[9]

이러한 종교나 윤리를 넘어서는 것이 궁극의 가치라고 이해하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은, 종교나 윤리가 오히려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요소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이 초래할 수 있는 여러 위험 또한 그 안에 놓여있음을 우리는 놓치면 안 될 것이다.

4. 기독교윤리와 그 성서적 전거
 

4.1. 구약성서적 관점 : 헤셸을 중심으로

히브리 철학자 A.J.헤셸은 "예언자들"[10]에서 하나님은 도덕적 원리 이상의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 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이상은 하나님의 영광의 실현과 그것의 체험으로서 우리에게 분할된다. 정의의 문 제는 분명히 종교적 차원이 윤리적 차원으로 실현된 문제이다. 그런데 정의는 그것 자체만이 신격화될 때 죽고 만다. 모든 윤리적 차원의 정의 너머에 하나님의 파토스가 있다. 사랑, 정의, 의는 하늘의 부분이다. 하나님을 감지하는 것, 즉 종교적 차원은 무한한 眞, 무한한 善, 무한한 美를 감지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 러한 종교적 차원이 엄격한 윤리의 틀을 입을 때, 진리 자체를 배반하는 데 이르고 마는 것이 된다.

성서에는 궁극적인 법, 영원한 관념 따위가 없다. 야훼 홀로 궁극적인 분이요, 영원한 분이다. 법은 다 만 그분의 창조물일 뿐이다. 도덕적 관념은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온 실재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분의 관심일 뿐이다. 만일 도덕적 원리(윤리)가 하나님보다 윗자리에 앉는다면 자비, 은총, 회개, 용서가 모두 불가능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관심에 바탕을 둔 에토스(ethos)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파토스(pathos)가 더 높이 있다.

예언자들의 선포의 내용은 인간관계의 윤리를 그 골간으로 한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 말씀의 대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질서, 그의 율법을 선포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선포됨에 있 어 인간 관계의 윤리를 구체적인 주요 내용으로 한다. 하나님의 율법, 진리, 뜻은 그분이 세운 질서와 윤 리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윤리의 근간을 이룬다. 여기서도 분명히 종교가 윤리보다는 우 선한다는 개념이 형성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때때로 예언자들의 활동의 공간은 모든 관계 윤리의 파괴의 곳이었다. 관계윤리의 파괴는 하나님을 향한 반기일 수 있었다. 그들의 예언의 내용이 분 명히 정의와 사랑의 실천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궁극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삶의 실현이 라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예언의 근거가 되었던 율법서에서도 분명히 전제하고 있다. 레위기 19장 13-18절의 예를 들면, 인간 간의 윤리, 즉 정의, 경제 평등, 이웃사랑의 내용을 주요한 율법적 명령으로 내리고 있다. 법은 윤리의 구체적인 실현방법이다. 성서는 이 모든 윤리의 근원을 하나님("나는 여호와니라")께로 소급 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룬 종교적 율법으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적 인간관계에서 형성된 윤리의 근본을 종교적 근원으로 환원하는 것이다.[11]

구약성서의 자리에서 종교와 윤리의 관계성을 고찰하면, 종교가 곧 인간 사회의 질서의 근본이념, 즉 윤리의 역할을 분명히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누구나 종교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고 그 안에서 사회형성, 권력형성, 경제구조 형성 등 다양한 공동체윤리들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4.2. 신약성서적 관점 : 본회퍼를 중심으로

이제 신약성서적 고찰로서 본회퍼의 '그리스도 이해' 중심으로 종교와 윤리의 관계성을 고찰하고자 한 다. 어떤 사람들은 쉽게 종교에 대한 믿음의 이유를 '윤리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으로서 종교'라는 데 두 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체험이 없이 고백된 고백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그보다는 더 근원적인 관계 를 요구한다. 그것은 종교는 체험이며, 체험은 은총이다. 종교를 온전한 가치 그 자체로 보는 경향과 종교 를 윤리적 실현의 수단으로 보는 입장은 대립의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대립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사회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 원적 복음을 "순수한 종교적인 힘"으로서 세상질서와 무관한,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들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강조하여 노예제도나 정치질서 등에 무관심하였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 신학자들 은 가난한자, 부유한자, 정의, 평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이야기하는 예수의 혁명적인 말씀들에 자신들의 신앙의 푯대를 세운다.[12] 사회주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혁명적인 말씀들은 어떤 윤리강령보다 더욱 강력한 근거가 됨을 확신한다.

본회퍼는 바로 이러한 설정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 그것은 이러한 이해의 기저에는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종교와 윤리를 어떤 대립과 대항의 개념으로 상 정하는 것은 하향 수직적인, 또 수평적인 관계로서만 종교와 윤리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러한, 기독교적-세상적, 초자연적-자연적, 성(聖)-속(俗), 계시적-이성적이라는 대립 은 '그리스도의 현실 안에서' 이루는 '근원적인 통일'을 보지 못한 대립이며 분리라고 말한다. 기독교적, 초자연적, 성, 계시적인 것은 오직 세상적, 자연적, 속, 이성적인 것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은 동일한 것, 일치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현실 안에서만 일치한다.[13]

본회퍼는 종교와 윤리의 관계를 어떤 우열의 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대등한 관계로 본다.[14] 그리스도 의 지배 현실이 그저 신앙의 차원, 즉 종교적 영역에서만 의미하는 것이라면 바울이 말했듯,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갈 2:21)이 되고 마는 것이다. 본회퍼 또한 바울의 연장선에 서 있다. 본회퍼가 말하는 종교와 윤리의 관계는 윤리가 종교를 향함이 아니라 종교가 윤리의 세계를 향함에서 비로소 그 의미와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가 화해하는 것을 발 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사건"과 그의 현실은 종교와 윤리간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본회퍼의 입장은 구약적 현실의 재천명일 수 있다. 우리가 오늘 종교와 윤리의 관계성을 다루면서 우리 들의 삶의 자리가 분명히 현실적 윤리의 공간속에 있으면서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중심이념은 분명히 현실적이지 않을 수도 있는 종교적 지점에 두고 있었다. 거기에는 본회퍼가 지적하듯, 선후개념의 정리 동안 우열의 개념과 혼동을 일으키는 경향도 분명히 있었다. 본회퍼가 이해한 그리스도의 현실은 예언자 들의 선포 속에 담긴 의미와 일치한다. 예언자들의 선포의 내용이 하나님의 계시의 실현의 요구, 계약의 재천명이었다면, 그리스도의 현실은 그 안에 통일되는 성속의, 종교와 윤리의 분리가 아닌 통일의 지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현실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향 하여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율법(Torah)과 하나님을 일체로(혹은 법궤와 하나님을 일체로) 보는 이스라엘 종교전 통은 이미 하나님의 계시의 실현으로서 율법, 즉 실현으로서 윤리를 종교적 차원으로 오히려 끌어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발딛고 사는 이 현실은 하나님의 계시의 실현을 전 개하는 현장이요, 오직 이곳만이 본회퍼의 '그리스도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장소이다.
 
 

5. 나가며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적 지평과 윤리적 지평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종교와 윤리는 무엇이 근원적인가 하는 물음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었다. 첫째 종교에 우 위를 둔 입장은 종교는 윤리보다 더욱 근원적인 영역이고 윤리는 종교성의 성숙을 피워내는 차원으로서 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어느 것에도 환원할 수 없는 한 개인의 내밀한 영적인 영 역이다. 둘째, 윤리에 우위를 둔 입장은, 실질적으로 종교가 지향하는 그 정점 또한 선(善)이 충일한 황금 률의 왕국으로 이해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와 윤리를 동등한 가치로 규정하는 입장은 애초부터 종교와 윤 리는 한 군(群)이었으며 종교는 윤리의 근원이고 윤리의 지향임을 상보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종교 와 윤리 자체를 하나의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억압의 요소로 이해하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살펴보았 다. 그리고 성서 속에서는 종교와 윤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종교와 윤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종교는 우선 세계 전체를 아우 르는 절대자에 대한 유한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종교는 철저하게 단독자가 경 험하는 신으로부터의 버림받았다는 고독의 애감(哀感), 혹은 구원에 대한 확신만을 전해주는 비밀스러운 영역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 저편의 절대자와의 관계에서부터 열리는 종교는 한 개인의 신념과 신 앙을 현실화할 때부터 윤리의 문제를 불가피하게 만나게 된다. 결국 종교는 윤리의 문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종교를 통하여 인간-류(人間-類)가 견지해야 할 윤리적인 판단의 근거와 기준을 인간은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종교가 양산하는 오도된 윤리적 가치의 범람이나, 종교와 종교 사이의 분쟁, 그리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참된 윤리적 기준을 종교가 올바로 제시하지 못하는 모습은 부 정할 수 없는 자명한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종교가 모든 윤리의 근거가 되고 윤리의 비판 적인 가능을 수행한다는, 혹은 수행해야만 한다는 입장에 우리는 서야 할 것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현실'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를 화해시키는 작업은 해리된 종교와 윤리를 통합하는 본질적인 행위이다. 종교인의 사명과 삶을 살아야 할 우리에게 있어서 종교와 윤리를 하나로 직조하는 작업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가 된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사회와 인류의 관념에 주조되어 있는 각양각색의 윤리적 규범들 의 의미와 기능, 그리고 그 한계를 종교의 시선으로 우리가 올바로 제시하고 비판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6. 각주


[1] A.N. Whitehead, Religion in the Making (New York:Macmillian Company, 1926), p.21.

[2]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 s.v. "Ethic"

[3] A.N. Whitehead, Religion in the Making, p.23.

[4] 이들의 입장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독교 성서 안의 구절을 통하여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입장은 다음의 성서 말씀을 종교와 윤리 관계의 황금률로서 이해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서는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에게 해주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우선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 해주는 것을 A로 기호화 하자. 그리고 하나님에게 해주는 것을 B로 기호화 하자. 그리 고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A)을 종교적인 차원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잘 것없는 인간에 대한 사랑(B)을 윤리적인 차원을 함축하는 것으로 전제하자. 이러한 전제는 우리가 위에서 시도하였던 종 교와 윤리의 개념정의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주 는 것이 하나님에게 해주는 것이다(A⊃B)는 명제는 진정한 윤리는 진정한 종교이라는 명제와 상응한 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 하나님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다"(-A⊃-B)라는 명제는 얼핏 보기에는 위의 명제와 상응한 듯 하지만 이 명제는 참 명제가 아니다. 기호화된 명제 -A⊃-B는 A⊃B의 역이기 때문에 동치명제가 아니다. 오히려 A⊃B의 대우인 -B⊃-A 즉, "하나님에 게 해주지 않는 사람이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참 명제가 된다. 우 리는 여기에서 형식논리 이상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 하나님에게 해주지 않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틀린 문장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정하지 않은 윤리는 진정하지 않은 종교를 판별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즉 그 종교가 표방하 고 있는 윤리가 진정하건 진정하지 않건, 윤리적 차원의 결과로 그 종교를 판단할 수 없다는 근본적 인 관계성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에게 해주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다시 말해서 윤리는 종교를 온전히 반영할 수 없고 윤리적 척도에 의해 서 종교가 결코 판단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 차원은 윤리적 차원보다 더 선행한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5] 우리는 칸트에게서 종교에 대한 윤리의 우위의 관점을 발견한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종교가 완전히 도덕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칸트에게 있어서 종교는 윤리에서 생겨나고, 종교의 내용과 과제는 윤리를 촉진시킨다는 데에만 있다. 종교는 의무를 신의 계명으로 보야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도덕 법칙의 영향을 강화하려고 애써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발전의 목표는 역사적인 신앙을 순수한 이성의 신앙으로 해소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고백하는 에수 그리스 도에 대한 믿음과 역사적인 신앙은, 결국 이성 안에 반짝이는 도덕률로서 환원될 수 있고 환원되어야 만 하는 것으로 칸트는 이해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역사 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도덕적 원리를 인격화한 이념일 뿐이라고 칸트는 지적한다. 적어도 칸트에 있어서 종교는 윤리와 도덕으로 와해될 운명으로 이해된다. 휠스베르거(강성위 역), {서양철학 사 - 하} (대구 : 이문출판사, 1987), p.503.

[6] 한스 큉은 윤리적 요구의 절대성과 보편성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세계의 근원, 그리고 근본 목표로서 신은 절대적인 근거를 제시한다고 강조한다. 한스 큉(안명 옥 역), "세계윤리구상", pp.115-118.

[7] 종교와 윤리가 상호 동등한 입장에 있다고 할 때 이 입장은, 윤리학의 다양한 조류 가운데 규범윤리 학으로서 전개되리라고 보여진다. 도덕규범의 절대적인 근거를 믿는 입장이 규범윤리학의 입장이다. 그 규범은 역사에 의해 와해되지 않는다. 역사는 규범의 일부만을 소유할 뿐이다. 보편적인 규범의 근 거는 절대적인 근거이기 때문에 규범윤리학에 있어서 절대자는 규범윤리학의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 다.

[8] {서양철학사 - 하}, p.723.

[9] Ibid., p.721.

[10] A.J. 헤셸(이현주 역), {에언자들 상}, (서울 : 종로서적, 1991)

[11] 이것은 본회퍼가 '그리스도의 현실'에서 완전히 화해를 이루었다고 하는 훨씬 이전의 사실이다. 구약 적 자리 또한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인간적 상황의 모든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으 로서, 토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그 권위를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이다.

[12] D.본회퍼(손규태 역), {기독교 윤리}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91), p.280.

[13] Ibid., p.170.

[14] Ibid., p.287.

신학의 미래, 한신대학교 신학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