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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학의 기원과 흐름


전 철





근래에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논쟁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미국의 지식 자본력을 바탕으로 상당히 다양한 토론과 논의의 프로그램들이 추진되었었고 그 성과들이 속속들이 논문과 책으로 발표되었다. 독일 또한 이 방면에 막강한 교의학적 전통을 기반으로 과학자들과의 토론을 진행해 왔었고 특히 당대의 조직신학자들은 최소한 시대가 새롭게 주조한 과학적 패러다임과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신학적 반성의 중요한 재료로 소화해 내었다. 판넨베르크, 몰트만, 크리스찬 링크, 미하엘 벨커와 같은 당대의 신학자들은 과학의 시대적 문제제기를 신학적으로 방기하지 않고 대화를 이룬 신학자 그룹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우리 시대의 중요한 논의로 부각이 되었을까. 물론 이러한 논의의 문화적 기원은 학문 자체가 추구하려는 간학문적인 전통 안에 신학이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신학 또한 대학 안에서의 하나의 학문이기에 학문의 기본적인 성향인 내적인 논리의 구성과 타 학문간의 대화는 중요한 학문적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역사적인 시각에서 과학과 신학의 문제를 고려해 보면 거기에는 더욱 더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들이 신학적으로 내포해 있다고 보여진다.

원래 과학과 신학은 결코 다른 전통이 아니었다. 서양문화의 기본적인 주조음은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전통을 통하여 이어져 내려왔다. 기독교는 막강한 현실적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학문의 여왕으로서 군림하였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학문이라 함은 모쪼록 신의 암호를 푸는 열쇠로 기능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과학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과학의 본격적인 발흥의 시기를 중세로 이해해 볼 때, 이 자연과학은 근본적으로는 기독교적 심판(마 12:36)에 관한 고려에서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신이 거하는 하늘에 대한 연구에서 천문학이 기능하였고, 신이 역사하는 세계의 물리적 원리를 더욱더 인간적으로 풀어내기 위하여 갖가지 자연과학적 도구가 동원되었다. 당시에는 신학자가 과학에도 정통하며 과학자로서 연구하는 것이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신학과 과학의 관계가 금이 간 출발점은 지동설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종교재판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과학과 신학은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마치 신학의 부수적인 분과로서 연구되어왔던 과학의 성과로 인해 신학적 세계관이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종교권력의 과학에 대한 '파면과 출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서 과학은 신학적인 세계관을 옹호할 필요 없이 철저한 연구와 실험의 검증과정을 거쳐 과학의 내재적인 권위를 형성하게 된다.

시간은 많이 흘렀으며 이제 과학과 신학의 관계는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간섭하지 않은 독자적인 언어와 방법론으로 내적인 체계를 쌓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을 한편으로 19세기와 20세기는 과학의 세기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학은 눈부신 성과를 인류에게 보여주었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물리이론은 과학이 지엽적인 언어의 구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바꿀 정도의 엄청난 문화적 파급력, 그리고 과학의 응용을 통하여 핵발전과 핵폭탄이라는 충격적인 현실장악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신학적 세계관은 과학의 기반 위에 형성된 합리적 세계관의 옹호와 확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주요 코드는 종교와 신앙이라고 하기보다는 과학과 합리적 이성으로 주조된다. 이러한 신학과 과학의 냉전기를 거쳐,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하나의 문화적 변화로서 인식하고 신학의 정체성을 문제삼는 시기에 신학은 내적인 자성을 하게 된다. 이는 두 가지 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과학적 발견의 성과들이 결코 신학적 세계관과 충돌되기보다는 어떠한 유사성을 지속적으로 갖을 수 있음에 대한 확신이다. 이는 과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폭이 매우 넓고 깊게 심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신학은 세계에 존재하는 신앙과 신적인 가치에 대한 기술인데, 방법은 다르더라도 그 세계를 기술하는 과학을 하나의 재료와 문화로서 신학이 소화해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세계의 질서를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과 세계의 질서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것 사이에, 신학은 형이상학적으로 그 과학적 해명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신학이 더욱더 사실에 기반하고 세계에 기반한 진술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의 신학이 종교 권력을 향한 진술이었다 한다면, 이제 신학은 세계를 기반으로 한 실사적 진술이 되어야 한다는 어떠한 시대정신의 변화가 가미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정신의 변화는 한편으로는 신학의 새로운 변증론으로의 퇴행을 보여주기도 한다. 즉 과학적 성과를 신학적 주장의 증빙자료로 할용하려는 일각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권력지향적인 신학의 변종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신학은 분명히 과학적 성과와 대면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에 서 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특히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현재 신학이 제공해주고 있는 인식의 품격은 그들의 지성을 훨씬 밑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신학의 위기의식은 현실적으로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도대체 과학과 신학은 어떠한 관계로서 대화가능하고 존재가능한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신학은 신앙경험을 통한 세계인식과 변혁의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은 각 분과의 방법론을 매개로 한 세계 인식, 그리고 변혁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은 궁극적으로는 교회의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진술하는 언어이다. 과학은 그들의 특정한 방법론을 통하여 세계를 각각의 합리적 이성으로 진술하고자 하는 언어이다. 우선 이 양자의 매개를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두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이 양 학문의 재료는 공통으로 현실세계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궁극적으로는 진, 선, 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학의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는/존재해야 하는 진선미에 대한 기술을 궁극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 특히 수학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움직임에 대해서 수를 통하여 더욱 더 완결적으로 표현하려는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즉 신학과 과학의 진술은 이 양자가 모두 가치지향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학자가 떨어지는 사과라는 현실적인 사태를 수학적 진술에 포함시키기 위하여 그는 엄청난 노력과 열정으로 어떤 수학적 진술을 구현해 낸다. 신학자가 세상의 역사 가운데 펼쳐지는 희망과 절망의 파도를 경험하면서 우주의 사랑과 인간의 죄의 대극적인 관계를 해명하기 위하여 신학적 진술을 구현해 낸다.  여기에서 신학과 과학의 언어는 그 특징들과 차이들을 떠나서 가치중립적일 수 없으며, 진선미, 특히 아름다움과는 아주 긴밀한 관계를 공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은 아름다운 가치에 의해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차이가 있다. 아무리 신학과 과학이 동일한 현실을 공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각기의 언어가 해명할 수 없는 언어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학언어의 다양한 방법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희망'이라는 가치와 관념을 그 수학언어의 체계에서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럴 때 수학언어는 그 언어로 인지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도출하게 될 것이다. 역으로 신학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죄 많은 인간과 죄 없는 인간을 구분하는 신학의 방법론적 장치를 한 인간과 또 다른 한 인간이라는 수량적 제한의 영역에 쉽게 내팽개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학과 과학의 기원과 그 역사적인 흐름을 지적해 보았다. 특히 과학을 파면한 신학의 내적인 반성과 요구, 그리고 신학과 과학이 만나는 매개가 되는 그 현실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 매개의 가능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는 가치, 또한 매개 불가능한 양 학문의 사각지대에 대한 부분을 지적하였다. 신학과 과학이 걸어왔던 길은 공통의 모태에서 각자의 운명을 열어나갔다면 이제 우리 시대에 있어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을 탐구해야 할 새로운 과제에 맞닥뜨려졌다. 인간의 삶에는 분명하게 신이라는 관념을 품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진실함, 선함,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지향적인 태도가 있으며, 또한 그러한 태도는 바로 우리의 세계가 진실함, 선함, 정의로움, 아름다움과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전제하는 바와 같이, 과학은 바로 그러한 가치를 우회적인 방식으로 기술하는 또하나의 언어적 진술이라고 한다면 이 신학과 과학의 대화는 아직 걸어가보지 않은 길이고 또한 갈 길이 멀지만, 분명히 우리 세상에 존재하고 우리가 삶에서 체현하는 진리를 더욱 더 효과적으로 발견하게 하는 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4.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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