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의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법에 대한 주해

 

 

 

  

 융의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법에 대한 주해

VII SERMONES AD MORTUOS*
 
전 철
 
 
 


 
 
 

 
1. 설법 I

죽은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그들이 구하던 것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나의 문하로 들어오기를 간절히 원했고 내게 가르침을 구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을 한 것이다.

융에 의하면,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知에 참여하려 한다. 그 이유는 죽은 자들은 인식의 명석성을 갖고 있지 못 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시공의 차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무시간성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산 자들은 시공의 삼차원 안에 있다. 시공의 삼차원은 좌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 자는 그 좌표를 통하여 知를 소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자의 혼은 최소한 한 가지 점에서만은 사자에 대해서 유리한 점을 지 니고 있다. 즉 생자의 혼이 명석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꿈, 회상, 그리고 사상, p.351.).

知를 가능케 하는 좌표가 없는 죽은 자들은 산자의 세계를 향해 다가간다. 그래서 죽은 이들은 융을 찾아 와서 융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한다.

듣거라, 나는 無에서 시작하겠다. 無란 有와 같은 것이다. 영원한 것 속에서는 충만한 것이 빈 것과 같다. 無란 空 이며 충민한 것이다. 그들은 무에 대해서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그것이 희다든가, 검다든가 혹은 그렇지 않다든가, 그렇다든가, 끝없는 것과 영원한 것은 아무런 성질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융은 無를 근원으로 이해한다. 근원이나 영원은 특정한 성질을 지니지 않는다. 특정한 성질은 근원의 일부가 드 러남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성질은 근원이나 영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근원이나 영원이라 불리울 수 있는 것은 모든 성질을 갖거나 혹은 아무런 성질도 갖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에서부터 과거로 끝없이 거슬러 올 라가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의 근원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이제는 태초가 나온다. 그렇다면 태초는 어떤 모습 인가. 융에게 있어 태초는 無이고 그 무는 모든 변화를 드러내주는 존재론적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無 는 변화 자체가 아니라 변화를 드러내 줄 수 있는 근거이다. 그 無 안에는 모든 변화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모든 성질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無 혹은 有를 우리는 풀레로마PLEROMA라 부른다. 그 속에서는 사고와 존재가 정지된다. 왜냐하면 영원하고 무궁 한 것은 아무런 성질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속엔 아무런 성질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성질이 있다면 그건 플레로마와 구별될 것이고 구별될 만한 성질을 지닌 것이 될 것이다.

크레아투르CREATUR는 플레로마 속에 있지 않고 그 자체에 있다. 플레로마는 크레아투르의 시작이고 끝이다. 마 치 태양의 빛이 공기를 투과하듯이 그것은 크레아투르를 꿰뚫고 지나간다. 풀레로마는 그렇게 철저하게 통과하지만 크레아투르는 거기 참여하지 않는다. 마치 완전히 투명한 물체가 그것을 투과하는 빛으로 작아지지도 어두워지지도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풀레로마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하며 무한한 것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고 풀레로마로부터 끝없이 멀리 떨어져 있다. 공간이나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 고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우리는 시간 공간적으로 제한된 피조물로서 플레로마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융은 플레로마와 크레아투르를 이야기한다. 플레로마는 태초의 세계이다. 크레아투르는 피조의 세계이다. 플레로 마는 영원의 세계이다. 크레아투라는 순간의 세계이다. 플레로마는 초월의 세계이다. 크레아투라는 시공의 세계 이다. 플레로마는 융의 自己Self의 세계이다. 크레아투르는 自我ego의 세계이다. 플레로마는 통합의 세계이다. 크 레아투라는 구별의 세계이다. 플레로마는 진여문(眞如門)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초워적인 것, 보편적인 것, 무한 한 것, 신성한 것, 절대적인 것, 신적인 것이다. 크레아투라는 생멸문(生滅門)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현상적인 것, 특수적인 것, 유한한 것, 세속적인 것, 인간적인 것이다. 위에서의 <우리>는 영원의 일부이기 때문에 플레로 마이다. 그리고 시 공 안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크레아투르이다. 우리는 플레로마이자 크레아투르이다.

그러나 우리가 풀레로마의 일부인 만큼 풀레로마는 우리 안에도 있는 것이다. 가장 작은 점에서도 풀레로마는 영원 하며, 무한하고, 온전하다. 왜냐하면 작고 큰 것은 그 속에 내포된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서나 온전하며 그침이 없는 無이다. 그러므로 나는 피조물을 플레로마의 일부로서 오직 상징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플레로마가 無 이므로 진실로 결코 나누어진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전체 플레로마이다. 왜냐하면 상징적으로 풀 레로마는 우리 속에 있는 오직 가상적인, 실재하지 않는 가장 작은 점이며 우리 주위를 둘러싼 무한한 세계의 지붕 이기 때문이다. 풀레로마가 전체이며 동시에 無라면 왜 우리는 플레로마를 말하는가?

내가 그것을 말하는 것은 어디서든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고 너희들에게 언젠가 바깥이나 안에 처음부터 확고한, 또 는 어떤 정해진 것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거두기 위함이다. 온갖 확고한 것, 또는 분명한 것은 다만 상대적 인 것이다. 오직 변화를 입도록 되어 있는 것만이 확고하며 결정적이다.

그러나 변화될 수 있는 것은 크레아투르 뿐이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확실하며 결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자체가 특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말하는 것은 ... 어떤 정해진 것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거두기 위함이다"라는 문장을 통하여 융이 바라보는 세계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겠다. 세계의 근원적 본질은 <시공>과 <규정>과 <변화>를 넘어선 無 의 세계를 지시하는 듯 하다. 그 無의 세계는 <규정>과 <지시>를 넘어선 세계이다. <정해진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클레아투라의 세계 즉 분리의 세계, 규정의 세계, 구별의 세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묻는다. 크레아투르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고. 피조물들은 생겨났지만 그것은 생겨난 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플레로마 그 자체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창조요 영원한 죽음이다. 크레아투르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죽음도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풀레로마는 구별되는 것이든 구별되지 않는 것이든,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플레로마와 크레아투르의 관계를 창조자-피조물이라는 대립적인 관계로 일방적으로 이해하는것은 무리인 듯 하 다. 오히려 크레아투르는 플레로마라는 원리의 세계의 드러남으로 이해해본다. 플레로마의 성질의 드러남이 크레 아투르이다. 하지만 풀레로마는 구별되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 것을 다 지니는 세계이지만 크레아투르는 구별의 세계이다.

구별성은 크레아투르이다. 그것은 다른 것과 구별된다. 구별성이 그것의 본체이므로 그것은 또한 사물을 구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별한다. 그의 본체는 구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풀레로마의 성질을 그것이 존재하 지 않아도 구별한다. 인간은 풀레로마의 성질을 그의 본체에 입각해서 구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풀레로마의 성질 에 관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말해야 한다.

그대들은 말한다. 거기 관해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풀레로마에 관해서 생각해야 소용없다고, 너 자신도 말 하지 않았느냐고.

나는 그대들에게 그대들이 풀레로마에 관해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 망상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 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풀레로마의 특성들을 구별하면 우리는 우리의 분별성에 입각해서 말하는 것이며, 우리의 분별성에 관해 말하는 것이지 풀레로마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한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분별성에 관해 말하 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로써 우리는 충분히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체는 구별성이다. 만약 우리가 이 런 본체에 충실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충분히 구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성질들의 구별을 해 야한다.

융은 크레아투르인 우리들이 플레로마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음을,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의 전환을 통하여 강렬 하게 드러내준다. 우리는 클레아투르이다. 분별의 세계이다. 분별성을 통하여 플레로마를 말한다는 것은 결국 플 레로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로마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클레아투르>를 말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가다 머의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이라는 저서가 있다. 가다머는, 진리는 방법을 멀리한다는 주장을 이 책에서 전개한다. 다시 말하면 방법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알 수 있다. 플레로마를 진리, 클레아투라를 방법으로 이해한다면, 결코 클레아투라는 플레로마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크레아투라는 구별성을 결코 놓아선 안된다. 구별을 통해서만 비로소 인식의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또 한 크레아투라는 차이를 강조하는 세계이다.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주체와 대상의 차이, 한 대상과 다 른 대상의 차이을 인식하지 못하면 크레아투라의 주체성 정체성은 소멸되기 ?문이다.

그대들은 묻는다. 스스로 他와 구별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엇이 나쁘냐고.

만약 우리가 구별치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본체를 떠나게 된다. 크레아투르를 떠나서 풀레로마의 다른 성질인 무분 별성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풀레로마 그 자체에 빠지고 피조물임을 포기한다. 우리는 無 속에 해소되어 버린다.

이것은 크레아투르의 죽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별하지 않는 만큼 그만큼 죽는다. 그러므로 크레아투르는 자연 히 구별, 태초의 위험한 동시성에 대한 싸움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은 개성화 원리라고 부른다. 이 원리는 크레아투르의 본체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그대들은 왜 무분별성과 구별치 않는 것이 크레아투르(창조물) 에게 커다란 위험인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융의 사상의 개요를 전체적으로 윤곽 지을 수 있다. 융에게 있어서 플레로마는 원형의 세계이고 自己 Self의 세계이고 영원의 세계이고 無의 세계이다. 플레로마는 이 세계의 근원이자 뿌리이다. 그리고 플레로마와 대극Gegensatz의 자리에는 크레아투르가 놓여있다. 크레아투르는 의식의 세계이다. 융은 의식의 기원을, 이해하 고자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충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자서전, p.365). 이해는 知이고 그것은 분별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無의 세계인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分別의 세계인 클레아투르로 나아가려는 것, 그것은 플레로마 자신이 자신을 밝히 드러내어 보이려는 강렬한 의지이고 신념이다. 그렇다면 플레로마는 어떻게 자기인식을 감 행하는가. 그 자기인식은 클레아투라와의 끊임없는 관련성을 통하여 열리게 된다. 플레로마의 자리에서는, 클레 아투라와의 끊임없는 관련성을 점진적으로 넓혀가면서 자신을 밝은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희망을 클레아투라에 서 발견한다. 클레아투라의 자리에서는, 자신의 뿌리이자 원형인 플레로마의 세계를 하나 둘 씩 깨닫게 되는 기 쁨을 플레로마를 통하여 발견한다.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의 긴장적 대극적 운동은 플레로마의 세계인 無 속으로 와해되는 것, 그리고 클레아투라의 세계인 끊임없는 분열상으로 와해되는 것을 동시에 지양한다. 클레아투라를 통하여 플레로마가 승화되어 드러나는 과정, 혹은 플레로마의 중심인 自己Self로 향해 가는 과정이 個性化이다. 이 개성화의 과정은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이라 불리운다. 이 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깨달음이 란 고통스러운 것이며 고통을 거치지 않은 깨달음이란 또한 없기 때문이다(융, 현대의 신화, p.21). 플레로마의 무로 와해되지 않고 또한 클레아투라의 구별로 와해되지 않는 고양의 과정으로서의 개성화는 세계를 배제하지 않고 수용한다(자서전, p.466).

그러므로 우리는 풀레로마의 성질을 구별해야 한다. 그 성질은 여러 가지 대극의 쌍들이다. 즉, 효력과 효력 없음, 충만함과 공허함,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상이한 것과 동일한 것, 밝음과 어둠, 뜨거움과 차가움, 힘과 물질, 시간 과 공간, 善과 惡. 美와 醜. 하나와 다수 등.

대극쌍들은 플레로마의 성질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지양하므로 존재치 않는 것이다. 우리는 풀레로마 그 자체이므 로 우리도 또한 모든 이 성질들을 우리 속에 갖고 있다. 우리의 본체의 바탕이 분별성이므로 우리는 이 성질을 분 별성의 이름과 표지로 가지고 있다. 즉, 첫째, 이 성질들은 우리 속에서 서로 다르고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므로 그 것들은 스스로를 지양하지 못하고 작용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극쌍들의 희생물이나 우리 내부에서 플레 로마는 산산조각이 된다.

둘째, 이 성질들은 풀레로마에 소속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오직 상이성의 이름과 표지로만 소유하거나 체험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특성과 구별해야 한다. 풀레로마 안에서 그것들은 해소된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는 그 렇지 못하다. 그 특성들과 구별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만약 우리가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면 우리는 우리의 분별성이라는 본질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대극 쌍들은 플레로마의 성질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에 도달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동시에 악함과 추함을 얻는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선과 아름다움과 함께 풀레로마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본질을 충실히 지킨다면, 다시 말해서 분별성을 충실히 지킨다면, 우리는 善과 美를 구별하며 그러므로 또 한 惡을 醜에서 구별한다. 그리하여 풀레로마에 빠지지 않는다. 즉 無에 빠져서 그 속에 소멸되지 않는다.

그대들은 異論을 제기할 것이다. 그대는 차이성과 동일성이 모두 풀레로마의 성질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우리가 차이성을 지향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고 만약 우리가 차이성을 지향한다면 우리는 그때도 동일성에 빠져야 하는 건가?

그대들은 풀레로마가 아무런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만들어낸다. 그 러니까 만약 그대들이 차이성이나 동일성, 혹은 그 밖의 성질을 지향한다면 그대들은 이때 풀레로마에서 그대들에 게 흘러나오는 생각들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풀레로마의 존재하지 않는 성질에 관한 생각을 지향하 는 것이다. 그대들이 이런 생각들을 좇아서 달려가는 동안 그대들은 다시금 풀레로마 속으로 빠져들어 동시에 차이 성과 동일성에 도달한다. 그대들의 생각이 아니라 그대들의 본질이 분별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차이성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본질로 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하나의 지향 적 노력이 있을 뿐이다. 즉 자기 고유의 본질을 향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만일 그대들이 이 노력을 하고 있다면 그 대들은 풀레로마와 그 성질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대들 자신의 본질에 의해서 올바른 목표 에 도달한다. 그러나 생각이 본질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대들의 생각의 고삐 를 조일 줄 알게 되는지 그 지식을 그대들에게 가르치겠노라.

플레로마의 성질들은 대극쌍들이다. 그리고 플레로마는 아무런 성질도 없다. 융은 저 대극쌍을 지향하지 말고 자 기 고유의 본질을 향해 접근하라는 요청을 한다. 우리의 전체의 중심인 自己로 나아가면, 플레로마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2. 설법 II

죽은 자들은 밤중에 바람벽에 연해 서서 소리쳤다.

神에 관해서 우리는 알고싶다. 어디에 신이 있느냐? 신은 죽었느냐?

신은 죽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신은 창조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해진 것이며 그러므로 풀레로마로부 터 구별되기 때문이다. 신은 풀레로마의 성질이다. 그리고 내가 창조물에 관해서 말하는 모든 것은 또한 그에게도 해당된다.

신은 그러나 창조물보다 훨씬 불분명하고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이와 구별된다. 그는 창조물보다 덜 구별된다. 왜냐 하면 그의 본체의 근저는 효력있는 충일이요, 다만 그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한 그는 창조물이고, 그러는 한 그는 풀레로마의 효력있는 충일이 묘출이다.

융은 풀레로마로부터 구별되는 창조물로서 신을 말한다. 창조물의 특징은 정해진fixed 것이다. 신 또한 창조물이 기에 정해진 존재이다. 하지만 신은 여타의 창조물에 비해서 비교적 덜 정해진 존재이다. 다른 창조물에 비해 신 이 덜 정해진 존재라는 것은, 다른 창조물에 비해 신은 더 충만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신은 다른 피 조물보다 구체화되지 않고 현실화 되니 않은 존재이다. 구별은 분리를 가져온다. 하지만 신이라는 존재는 비교적 구별이 덜 이루어진 존재이다 : 신 또한 창조물이다. 하지만 다른 창조물보다는 불분명하고 불확실하다.

우리가 구별하지 않는 것은 풀레로마의 소유가 되어 그것의 대극과 함께 폐기된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신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하지 않으면 신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의 충만함은 없어진다. 神 역시 풀레로마 그 자체이다. 마 치 창조된 것이든 창조되지 않은 것이든 가장 작은 점 또한 풀레로마 그 자체이듯이.

분리는 일종의 설정이다. 분리는 일종의 정리작업이다. 분리를 통하여 존재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분리는 크레아 투라의 성질이다. 그래서 신과 다른 것의 분리를 통하여 신과 다른 것의 차이는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신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하지 않으면 신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력의 충만함은 없어진다"고 융은 말한다. 신이 객관의 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실제태라고 한다면, 우리가 신과 다른 것의 분리를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의 영향력은 존재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았을 때 융이 이해하는 신은 객관적 실재태로서의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닌 듯 하다.

힘있는 공허는 마귀의 본체이다. 신과 마귀는 우리가 풀레로마라고 부르는 無의 최초의 표명이다. 그것이 풀레로마 이든 풀레로마가 아니든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 속에서 그것은 스스로 상쇄되고, 지양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조물의 경우는 다르다. 신과 마귀가 피조물이라면 그것들은 서로를 상쇄되지 않고 서로 효력있는 대극으 로서 대립하여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 관하여 아무런 증명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 관하 여 항상 되풀이 해서 말해야 하는 것으로 족하다. 양자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창조물은 그것이 지닌 구별성의 본 체로 말미암아 이 양자를 다시 풀레로마에서 끌어내서 구별할 것이다.

풀레로마에서 구별을 일으키는 모든 것은 대극의 쌍이다. 그러므로 신에는 늘 마귀가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존성은 풀레로마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밀접하고 그대들이 경험한 것 처럼 그대들의 인생에서도 그만큼 분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양자가 그토록 온갖 대극이 그 속에서 해소되고 하나를 이루는 풀레로마에 아주 근접해 있는 까닭이다.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신과 마귀는 서로 상쇄된다. 크레아투라의 세계에서 신과 마귀는 서로 대립하여 존재한다.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신과 마귀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관계의 양극단에 놓여진 대립적 성질이다. 신은 마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향해 무한히 지향하려 한다. 마귀는 신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향해 무한히 지향하려 한다.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신과 마귀는, 존재가 끼어들 수 없는 <관계의 형식>이다. 하지만 크레아투라의 세계에서 신과 마귀는 존재로 규정fix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과 마귀를 구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미미하다.

신과 마귀는 충만함과 공허함, 생산과 파괴로 구별된다. 이들에게 공통된 점은 "작용한다"는 점이다. "작용하는 것" 이 양자를 결속시킨다. 그러므로 작용하는 것은 양자의 위에 있으며 그것은 神 위의 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득 참과 비어 있음을 그것들의 작용 속에 융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대들이 모르고 있는 신이다. 인류는 그를 잊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를 그의 이름, 아브락사스ABRAXAS로 부른다. 그는 신과 마귀보다도 아직 불분명한 것이 다.

신을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우리는 신을 헬리오스Helios, 또는 태양이라 부른다.

아브락사스는 작용이며 작용치 아니하는 것 이외에 그것에 맞서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의 작용하는 성질이 자유롭 게 전개된다. 작용치 않음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리고 저항치 않는다. 아브락사스는 태양 위에 있고 마귀 위에도 있다. 그는 불확정적인 확실성이며 작용치 않으면서 작용하는 것이다. 풀레로마가 하나의 본체라면 아브락사스는 그것의 표명이다.

그것은 작용하는 자체이기는 하지만 특정한 작용이 아니고 작용 그 자체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작용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작용치 않으며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피조물이다. 그것이 풀레로마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태양은 일정한 작용을 지니고 있다. 마귀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규정짓기 어려운 아브락사스보 다 훨씬 강력하게 보인다.

그는 힘이며 내구성이며 변환이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큰 소란을 피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플레로마는 서로 대립적인 극을 갖고 있다. 그 대립적인 극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이 대립적인 극을 관계맺는 작용이 아브락사스이다. 그들은 작용 그 자체이다. 아브락사스는 신보다 더 원초적이다. 아브락사스는 작용인이 다. 아브락사스를 통하여 헬리오스Helios라는 신은 등장한다. 아브락사스는 헬리오스보다 더 희미한 세계이다. 헬리오스는 구별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된 신이다.

3. 융과 화이트헤드

융의 플레로마는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현실적 존재이다. 아브락사스는 궁극자의 범주이다. 神은 신의 원초적 본 성이다. 크레아투라는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선 신의 결과적 본성인 피조된 세계이다.

플레로마의 성질로서 대립하는 것은 현실속에서 정신적 극과 물리적 극으로 나타난다. 융에게 있어서 신과 마귀, 선과 악의 대립항은 결코 가치의 개념이 아니다. 즉, 신과 선은 가치롭고 마귀와 악은 가치롭지 않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의 존재론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극적인 것은 화이 트헤드에게 있어서 정신적 극과 물리적 극으로 나타난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도 정신적 극과 물리적 극은 궁 극적 존재의 구성적 요소로 이해된다. 이러한 정신적 극과 물리적 극이라는 양극의 복잡다단한 결합을 통하여 세계는 구성되어진다.

융은 클레아투라의 속성인 구별을 통하여 자기自己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개성화로 보았다. 우주적이고 영원 한 플레로마를 분리의 세계인 클레아투라의 세계, 시공의 세계에서 발견하며 나아가는 과정인 개성화는, 화이트 헤드에게 있어서는 신의 결과적 본성이 원초적 본성을 향해 수렴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개성화는 모 든 개별 존재의 창발적 자율성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성숙의 과정이다. 화이트헤 드의 언어를 사용한다면, 개성화는 신의 지혜의 변형을 통한, 현실세계의 실현이다. 그리고 개성화는 신의 물리 적 느낌들이 신의 원초적 개념들 위에 짜여들어가는 과정이다. 크레아투라 즉, 만물은 결국 자기실현을 향해 끊 임없이 나아가는 자기실현의 과정이고 성숙을 지향하는 과정이다.

* 융의 "죽은자를 위한 일곱가지 설법"은 아니엘라 야훼(이부영 역), {C.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서울: 집 문당, 1989)의 부록으로 나온 본문이다 (95.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