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도식의 문제와 해석학의 변화

주객도식의 문제와 해석학의 변화

전철
 

1. 주객구조의 폭력성

세계상은 인류의 세계에 대한 이해방식이다. 이 세계상은 문명의 변화의 과정에서 다양하게 변모되어 왔 다. 그러나 문명의 발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상의 구조는 모두 주객구조의 각주라고 하여도 과언 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는 세계상의 기저에 스며있는 주객구조의 본질을 형성하였던 '객체성의 폭력'과 '주체성의 폭력'의 양 측면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주객구조에 대한 철저한 반격을 시도하는 근자의 과학 적 해석학, 철학적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의 단층들을 그려내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의 신학이 안 고 있는 문제지평을 짚어내려 한다.

1.1. 객체성의 폭력

주객구조는 무엇인가. 주체와 대상이 관계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이 구조는 우선 주체와 대상의 분리 위 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주체와 대상의 분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주체를 주체 되게 하고, 대상을 대상되 게 해야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대상, 즉 객(客)이 객되게 할려면 각자의 주(主)에게 동등하게 가치를 부여 하는 어떤 것을 전제해야 한다. 예를 들자. 일단 우리는 S를 주(主)로 O를 객(客)으로 가정하자.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진다. S에 있어서 O는 진정한 객체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에서 S1은 등장한다. 만약, S에서 진정 순수한 객체(客體)인 O를 관계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그것은 S에게 인지된 O와 S1에게 인지된 O가 동등한 가치로서 인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O라는 존재가 진정한 객체가 되려면 S 와 S1이라는 각자의 주체에게 동등하게 그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S의 O에 대한 전망 perspective - 삶의 전망이든, 가치관의 전망이든 - 과 S1의 O에 대한 전망은 결코 동일할 수 없다. 전망은 관련성을 등급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당연히 주체의 상이한 전망 안에서는 대상에 대한 상이한 등급화 가 진행될 뿐이다. 그렇기에 S의 O와 S1의 O는 결코 동일한 관계가 아니다. 예외는 한 가지 있다. 각자의 주체에게 객체의 동일성을 제공하는 '가상의 실체'를 전제할 때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주객구조는 객 체의 동일성을 제공하는 '가상의 실체'를 전제함을 알 수 있다.

문명을 보건데 각자의 주체에게 객체의 동일성을 제공하는 '가상의 실체'를 자명하게, 혹은 은밀하게 전 제하였다. 아니 전제해야만 했다. 그리고 각자의 주체를 장악하려는 혐오스러운 의도를 품고 있는 그들에 있어서 '가상의 실체'를 매우 자명한 것이라고 뻔뻔스럽게 우겨댔다. 예를 들어보자. 우선 국민을 주체로, 전두환 정권을 객체로 가정해보자. 국민과 전두환은 주객구조이다. 현실적으로, 전두환 정권이라는 객체는 국민들이라는 주체에게 동일한 가치로 인식될 수 없다. 하지만 정권은 무모하게 동일한 가치(구체적이고 역 사적인 다 아는 사실들이니 이는 생략하도록 하자.)를 유포한다. 동시에 전두환 정권에 대한 '주체적 소견' 을 말하는 소신있는 주체가 등장하기만 하면 어떠한 방식으로는 거세한다. 전두환에 대한 동일한 객체적 감정을 이탈하는 자는, 죽음이다. 그 표징이 광주항쟁의 피와 눈물이다.

또한 전두환의 배후를 역순으로 추적하면 미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관여하는 권력을 목도하게 된다. 그래 도 예전에는 자본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본주의의 독주를 견재하는 사회주의라는 구랏발의 살기가 서려있었지만, 어느덧 자본주의와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사회주의의 위상은 역사적으로 매우 급격하게 소 실되어 버렸다. 견제점은 고구마순은 비실비실 말라 비틀어져 버렸다. 이제 자본주의는 싸울 대상조차도 사 라져버린 시대에 사뭇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순간 누가 볼 새라 웃음을 꾹 참는다. 자본주의는 모든 주체 의 객체가 되어버렸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참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자본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 가 아니라 문명의 자명한 원리와 공식으로 인류에게 깊이 각인되어 버린 듯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주객구조가 갖고 있는 폭력성을 이해하고 있다. 실로 주객구조라는 것은 문명 안에서 민족 과 국가와 이데올로기와 정치제도, 심지어, 슬픈일이지만, 신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주체를' 그지없이 약하 고 가련한 존재로 폄하시켰다. 이러한 착종된 주객구조의 널뛰기가 심지어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했다.

이왕 내친 김에 한 마디 더 하면, 우리 주위를 보자. 주체를 모두 싸안을 수 있는 객체의 왕국을 공공연 하게 퍼트리고 다니는, 전체성의 철학의 헤르메스들인 교수님들과 선배들과 친구들은 혹시 없을까? 많다. 그들의 의도는 뻔하다. 전체성이라는 그럴싸한 구랏빨을 가지고 그 소중하고 가엾디 가엾은 주체를 자신의 왕국의 양아치로 만들어볼려는, '양아치'의 이데올로기이다.

정리하면, 주객구조는 주체와 객체가 관계하는 구조이다. 주객구조는 객체가 객체되게 하는 구조이다. 이 것은 각 주체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는 '가상의 실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모든 주체 에게 동일하게 가치매김되는 객체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와 무관한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 만약 있다면 그 객체는 추상된 객체이고 연관성이 사상(捨象)된 객체이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는 존재 하지도 않는 '가상의 실체'가 자명하게 처리되었다. 그 가상의 실체는 국가, 이데올로기, 정치제도, 신학이 라는 이름을 달고 주체들을 옴싹달싹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폭력이 '객체성의 폭력'이다.

1.2. 주체성의 폭력

우리는 여기에서 주객도식의 두 측면이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겠다. 하나는, 대상의 동일성을 주체에게 강 요하는 '객체성의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에서 주체를 분리한 체 대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주 체성의 폭력'을 엿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객체성의 폭력'에 우리의 망막을 집중시켰다면 '주체성의 폭력'에 시선을 옮기도록 하자. 주체성의 폭력은 개체성의 폭력에 비해서 비교적 상식적인 차원이다.

우선 주체와 대상은 짝개념이다. 주체가 없으면 대상도 없다. 즉 주체와 대상은 서로 얽혀 풀 수 없는 실 타래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주객구조는 주체와 대상을 서로 분명하게 가른다. 여기에서의 대상화는 소외를 의미한다. 세계는 신을 대상으로 놓는다(소외한다). 인간은 자연을 대상으로 놓는다(소외한다). 자국은 타국 을 대상으로 놓는다(소외한다). 자아는 타아를 대상으로 놓는다(소외한다). 그리고 지배한다. 즉 소외는 지배 이다. 바로 이러한 주객구조의 빛나는 총아는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divide et impera>의 정신이다.

신에 대한 세계의 우선권은 값싼 자유주의 신학을 잉태하였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선권은 자연을 무 참히 파탄내어 버렸다. 타국에 대한 자국의 우선권은 국가간의 전쟁을 국가 생존의 자명한 원리로 고착시 켰다. 타아에 대한 자아의 우선권은 에덴의 그 화려한 운명을 상실한 서글픈 현대인을 양산하였다. 결국 이 런 의미에서 '소외'와 '대상화'는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추상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대상으로부터 추상된 주체는 이미 주체가 아니다. 인간이 공기를 대상화 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물고기가 물을 대 상화 한다는 것은 곳 주체의 상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물고기라는 주체는 이미 자신이 대상화 하려는 물 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주객구조의 그 이면에는 가혹한 '주체의 폭력성'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객체란 없다. 객체는 환상이다. 단지 주체에 의해 뒤틀리고 주체가 묻어나오는 객체만 존재할 뿐이다.

2. 세계관의 지각변동

음험한 권력의 막강한 기반이 되는 혐오스러운 주객구조의 널뛰기를 보다 못해서일까. 오늘에 와서는 주 객구조의 파산선고를 당당히 선포하는 일련의 신진 그룹들이 등장한다. 주객구조에 대한 확인사살은, 과학 적 해석학을 필두로, 철학적 해석학, 신학적 해석학으로까지의 가열찬 대오를 형성하며, 우리의 대뇌에 녹 아있는 주객구조라는 관념의 "해처모여!"를 강요한다. 다시 말하면 S에 있어서 O는, 민중에 있어서 전두환 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도시의 청년에 있어서 자본주의는 결코 동일한 객체로 다가올 수 없다는 것이다. 손 님에 대한 주인의 손님맞이는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이다.

2.1. 과학적 해석학

과학적 해석학에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객관적 이해는 불가능함을 밝혔다(단 객체적 폭력성과 주체적 폭력성을 전재할 때에는 주체의 객관적 이해는 가능하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관찰 자체가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대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의 관점 자체가 하나의 '에너지'로 변환되어 관찰자에 변형을 가 져온다는 것이다.

주체의 관찰 자체가 대상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과학에 일찍이 담을 쌓은 우리에게는 그냥 이영자의 엉덩이마냥, 펑퍼짐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과학자들에게는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자들 이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짓이 대상에 대한 엄밀한 관찰인데, 양자역학에 의하면 관찰의 정당성의 뿌리 자 체부터 파탄나기 때문이다. 즉 모든 대상에 대한 관찰은 뒤틀린 결과만을 잉여로 남길 뿐이요, 대상 자체의 객관성은 허상이라는 것을 몇몇 안되는 물리학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이를 갈며, 세상에 선포하였던 것이 다.

요즘에 유행하는 과학적 해석학이 카오스 이론이다. 모 기업의 카오스 세탁기와 모 교수의 스테디셀러 카오스와 문명은 그 유행을 반영한다. 이 카오스의 세계에서는 위에서 말했던, 관찰자가 관찰대상의 관측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사건보다 더 엉뚱하게 나아간다. 핵심인 즉은, 내가 지금 썰렁한 글을 쓰기 때문에 십 만년 후에 남극에 펭귄 한 마리가 얼어죽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력이 카오스 이론에서는 아주 자명하 고 탄탄하게 검증되어진다. 카오스 이론은 주객구조의 파탄의 절정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2.2. 철학적 해석학

철학적 해석학에서도 가관이다. 우리는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를 안다. 이것은 세계를 움직이게 하면서(動 者)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不動) 무엇이다. 오늘의 철학적 해석학에 있어서는 움직이지 않는 존재인 이 '부 동'의 존재는 결코 없다고 당당하게 선포한다. 내 눈앞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부동의 동자'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부동'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동자'만 남는다. 영원한 객체는 사라지고 주체 가 현존한다. 전체의 전체성은 사라지고 개별의 독자성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우리시대에 펼쳐지는 포스트 모던이라는 화려한 백가쟁명의 맹아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여하간 과거에 있어서 주체의 지평은 언제 나 전통의 지평의 일부를 점할 수 밖에 없는 셋방살이였으나, 특히 가다머의 해석학에 있어서는 주체의 지 평과 전통의 지평을 일단 동등한 지점에 위치시킴으로서, 주체에 대한 당당한 주체성을 옹호하기 시작한 것이다(여기에서의 주체성은 주체가 대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기존의 '주체성의 폭력'에서 파생되는 주체성과는 논리계형을 달리하는 주체성이다. 그것은 '주객구조에서의 주체성'과 '관계구조에서의 주체성'의 차이이다.).

2.3. 신학적 해석학

신학은 과학적, 철학적 해석학의 세찬 기류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깐깐하게 전체성과 영원성과 부동성을 지켜온 듯 하다. 신학에 있어서 전체성과 영원성과 부동성에 대한 파탄은 신(神)의 파탄으로 이해된다. 다 시 말하면 신의 부동성에 대한 부정 안에는 신학의 존립 자체에 대한 위기가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왜 냐하면 신학의 전제는 (부동의) 신이라는 명제가 비교적 자명하게 신학일반을 지배하고 있기 대문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물리학적 세계상, 철학적 세계상의 변화를 감내하지 못한 채 늙은 여우마냥 뺑끼 치며 모른다고 잡아 뗄 수도 없는 일이다. 신학이야말로 학문의 아크로폴리스이기 때문이다.

결국 과학에 있어서의 대상에 대한 확실성의 회의, 철학에 있어서의 주체의 부활은 신학에 있어서도 모 종의 변화를 동반하게 되었다. 그것은 주객구조를 통해서 신을 이해함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울 수 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고 대체할 수도 없는 구체적인 현실성 위에서 신을 향해 말을 거는 행위이다. 현실 은 주체와 주체가 서로 교차하며 흐르는 수많은 힘들의 어울림이다. 중세의 신학은 현실이라는 보자기의 주름들을 교회권력의 다리미로 판판하게 다려낼 수 있다는 믿음이 기세등등 하였겠지만, 오늘에 있어서 세 계가 안고 있는 비균질의 주름과 겹쳐진 지점들은 결코 간단하게 펴질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세 계는 그만큼 중층적인 지평으로 교차되었고, 우리의 현실은 그만큼 복잡성으로 치달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세계는 하나님을 향해 말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지 신학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Deus dixit>라는 명제만 가지고 현실의 다양한 컨텍스트의 역학관계를 결코 해명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여 기에서 우리는 다시 신학의 프로그램을 재구성하게 된다. 예를 들어 비신화화 프로그램은 주체가 대상으로 서의 역사적 예수를 탐구할 수 없다는 한계, 즉 주객도식의 한계를 인정하며 새롭게 넘어서려는 신학적 프 로그램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신이 세계를 향해 말을 걸었지만, 이제는 세계가 신을 향해 말을 걸 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세계가 신에게 다소곳하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신학에 있어서 혁명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신학은 세계를 향한 신의 비가역적 선포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자연과학과, 보이지 않는 세 계를 탐구하는 철학의 '주객구조'가 '관계구조'로 새로운 혁명을 시도하였듯이, 신학에서도 세계를 신의 서 자로 이해하는 것을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은 세계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려 하며 동시 에 세계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는 세계의 신실한 시인(詩人)이라는 것이다.

신학은 신과 세계가 서로 교호하는 그 자리를 신학의 주제로 삼는다. 신과 세계의 접촉점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치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경제신학, 물의 신학 등등의 모습으로 신학은 상황의 옷을 입고 등장한 다. 신학은 그냥 신학일 수만 없다. 왜냐하면 신학이라는 주어는 구체적 현실이라는 목적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신과 세계의 상호 관계성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하여 더욱 진일보한, 성숙한 관계 로서 새롭게 조명된다.

신은 항구적이고 세계는 유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계는 항구적이고 신은 유동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참이다. 신은 일자(一者)이고 세계는 다자(多者)라고 말하는 것은, 세계는 일자이고 신은 다자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세계와 비교할 때 신이 탁월하게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과 비교할 때 세계가 탁월하게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초월한다고 말하 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참이다.(PR, p.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