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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합리성


전 철







신학은 여러 과제가 있다. 우선 교회의 신앙 경험에 대한 합리적 해석을 통하여 교회의 의미와 미래의 방향을 조명하는 일이다. 이 일은 교회 자신을 위한 과제이기도 하고,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한 과제이기도 하다. 오늘 내가 생각하고자 하는 점은, 이 <합리적 해석>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신학의 합리성은 신앙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합리성이다. 이는 얼핏 보면 과학의 합리성과는 다른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신학의 합리성은 말하자면, 신앙과 믿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와 설명인 것이다. 신앙과 믿음이 개인적 차원에서 출발하였다면 이해와 설명은 집단적이며 공동의 가치체계를 암시하고 있다. 한편으로 신학의 합리성은 과학의 합리성과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더욱 포괄적인 의미에서 바라보면 과연 그 차이가 얼마나 크게 존재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을 가져볼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을 생각하면서 <영원한 자연에 관한 유한자의 자리>를 바탕으로 그 답들을 헤아려보고자 한다.

신앙은 자연의 영원성에서 만나는 하느님에 대한 개인경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자연의 영원성에서 만나는 유한한 존재의 물음에 대한 소박한 대답의 시도를 의미한다. 만약 신학의 합리성이 개인적인 신앙경험에 대한 이해와 심화의 사회적 행위라면, 과학의 합리성은 자연의 영원성에 대한 인간 지성의 소박한 이해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과 신학은 무한한 자연과 신에 대한 물음과 겸허함에서 출발하는 근원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서양 근대과학의 발아들을 지켜볼 때 미시적으로는 과학이 당시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항하는 새로운 변혁이 그 내용으로 주조되었다고 하더라도, 거시적으로는 자연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종교의 세련된 변화임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심판에 관한(마 12:36) 당대 서양의 신학적인 물음이 자연과학의 창출에 한 기여를 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서양의 과학정신을 소위 바벨탑의 욕심으로 치부하려는 종교적인 전선은 과학정신에 감추어진 본질을 성찰해 내지 못하고 있다.   

과학은 자연의 합리적 질서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전물리학에서부터 초끈이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자연의 사실에서부터 개별적인 과학적 탐구 사이의 모순들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이해를 심화할 수 있을 것인가를 철두철미하게 탐구한다. 거기에는 엄청난 시도와 처절한 실패, 그리고 매우 희박한 성공위에 핀 확실성의 장미를 거두게 된다. 적어도 자연과학에 있어서 거대담론에 대한 열의와 열망은 여전히 과학적 탐구의 중요한 동기로 기여하고 있다.

신학은 그의 합리성을 논하고자 할 때, 합리성이라는 단어를 둘러싼 아주 다양한 갈래의 맥락들이 놓여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단순화 하여 두 가지로 구분하고자 한다. 하나는 신학의 한 기능을 신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가설임을 감추지 않는 정직한 태도의 경우가 있다. 다른 하나는 신학의 합리성에 대한 기준을 다시 무한성과 직결된 신앙의 입장에서 검열하는 경우가 있다.

신학은 신에 대한 학이다. 이 신은 신앙의 경험에서 드러난 실재이며, 그 경험을 기반으로 학문작업을 행한다. 그러므로 신학 자체는 이미 신앙경험을 그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로 삼고 있다. 신앙이 없는 신학은 추상에서만 가능한 언어의 기교이다. 종교철학은 신앙이 없는 신학이 아니라, 그 자체의 종교철학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신학은 신앙경험에 관한 궁극적인 관심을 기반으로 하여 진행하는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학이 신앙세계를 설명하려는 일종의 요청이라면, 그것은 가설적 성격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의 가설적 성격을 신학자의 진정성에 관한 태도로 문제 삼을 때 많은 교회-신학적 갈등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의 가설적 성격을 신학자의 진정성에 관한 태도로 문제삼는 경우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는 바로 신학의 합리성에 대한 기준을 다시 무한성과 직결된 신앙의 입장을 가지고 검열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은 여러 입장들이 존재한다. 그 각각의 입장은 당대의 개인적 신앙경험이 특수한 문화적 정신적 사회적 상황과 결부된 그 자체의 충실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의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는 것은 그만큼 구체적인 종교 문화적 양식들이 각각의 신앙경험에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설들이 취하고 있는 신학의 합리성을 신앙의 입장을 가지고 다시 검열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는 마치 저 먼 곳의 자연 경관을 더욱 가까이 감상하기 위하여 망원경을 구입하여 사용하다가, 그 망원경의 영상이 자연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혹은 전체 경관이 아니고 시야각이 좁은 두 원형에 좁혀지기 때문에 다시 망원경의 의미를 아주 쓸모없이 평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학의 합리성에 기반한 가설들을 어떻게 정당하게 평가하고 인식해야 하는가? 이미 신학의 기원에는 신앙경험의 근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신학의 가설들이 얼마나 다른 가설들에 비하여 신앙경험의 세계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학은 소통을 위한 궁극적 설득력의 모체가 되는 학문Wissenschaft과 관련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신학이 가설이라면, 그 가설이 얼마나 신앙경험의 영역을 새롭게 비추어주느냐에 관한 경합을 시도할 때에는, 설득력과 논리의 검열이 요구되지, 다시 신앙경험을 기반으로 한 검열로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은 가설들 사이의 체계내적이고 논리적인 경합으로 인하여 그 정당성 여부를 논해야 하지, 직접적으로 경험과 가설의 상관관계가 그 정당성의 여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가설에는 적어도 당대의 신학 혹은 그 신학자들의 경험과 결부된 가설이며, 그 자체로 당대의 신학-정신사가 가미된 완고한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수천년의 신학사에 있어서 신학 가설들 사이의 체계내적인 합리성으로 인하여 신학의 흐름이 바뀌어 왔는지 아니면 다른 체계외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신학의 흐름이 바뀌어 왔는지 그에 대한 안목이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지금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학사와 - 다른 요인이 아닌 - 신학의 합리성이 긴밀하게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아야 한다는 점이며, 또한 신학은 신앙경험의 교회적 세상적 소통과 이해를 위한 가설적 성격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두 인식은 이 시대의 신앙을 경험하는 오늘 우리들의 신학 작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식일 것이다.




2004.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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