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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의 신학동네 | http://theology.co.kr
시간이란 무엇인가
- 우주론의 문제를 중심으로 -
전 철
1. 들어가며 : 시간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
이진경은 시간에 대한 이해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탐구한 책을 내었다. 이진경은 이 책에서 역사마다 보여지는 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해는 삶의 형태를 주조하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됨을 강조하였다. 예를 들자면, 서구 산업화의 심층에는 시간에 대한 요소환원론적 이해가 깔려있었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매 순간순간 주어지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은 바로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진다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루 24시간은 얼마든지 분할 가능하고, 규칙적인 속도로서 어느 누구에게나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질료가 되었음을 이 시대상은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진경의 지적 작업은 시간에 대한 이해와 삶의 방식은 매우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시간을 영원의 타락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삶은 언제나 지옥이 되고, 은총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삶은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계기가 된다. 또한 근대의 정신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어느 누구에게나 거부할 수도 없이 동일하게 소여되고, 또한 하나의 자본 축적의 가능태로서 여겨질 때는 삶은 자본을 축적하려는 무대로서 이해될 것이다. 이진경의 지적 탐구는 시간 이해와 사회구성체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과의 연관성만을 부각시켰지만, 시간에 대한 이해는 그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실로 시간에 대한 이해는 삶에 대한 이해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렇게 볼 때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본질적인 코스몰로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적 요소가 우주론의 체계에 있어서 목적인의 국면을 제시한다면) 시간은 우주론에 있어서 작용인의 국면을 제시하는 매우 중요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2. 몸말 : 시간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제기
시간을 둘러싼 문제제기는 매우 다양하게 전개된다. 시간은 관념인가 실재인가? 시간과 시간의식은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가? 시간은 가역적인가? 시간은 유동인가 영속인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관념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시간과 공간은 어떠한 관계인가? 시간과 시계는 어떠한 관계인가? 시간의 태초와 종말은 존재하는가? 시간의 동시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간의 상대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억과 희망은 무엇인가? 시간과 인과율은 어떤 관계인가? 시간과 제논의 역설은 어떤 관계인가? 시간과 수학은 어떤 관계인가? 시간과 아이덴티티는 어떤 관계인가? 시간과 타자는 어떤 관계인가? 시간과 자유는 어떤 관계인가? 시간과 신은 어떤 관계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소박한 해명에서부터 시간이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열려질 것이라 생각한다.
3. 시간은 관념인가 실재인가?
시간을 관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은 극단적인 관념론자에 의해서 주장되어 왔다. 그리고 시간을 실재로 이해하는 경향은 근대과학에서 주도적으로 주장되어 왔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전자를 우리는 심리적 시간이해, 후자를 우리는 물리적 시간이해와 관련이 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 양자의 대립의 지형은 역사적으로도,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매우 유효한 대립의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시간은 관념인가, 실재인가?"라는 양자택일적인 질문으로 보이는 저 문제제기는, '인간의 상식 가운데 만나는 <시간의식>과, 인간존재와는 비교적 독립적으로 주어져 있는 듯한 <시간>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융화할 수 있는 코스몰로지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숨겨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을 관념으로 이해하는 관점과 그 난제, 그리고 시간을 실재로 이해하는 관점
과 그 난제를 일별해보자. 그리고 이 양자를 매개할 수 있는 우주론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벤트>와 <우주>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해명해보자.
3.1. 관념의 산물로서의 시간이해
시간을 관념의 산물로보는 관점에 있어서 시간은 극복해야 할 요소로서 인식된다. 즉 시간은 관념의 산물이고, 그 유동하는 관념의 배후에는 영속적인 본질이 있다고 이해한다. 우선 플라톤이 이 관점을 견지한다. 플라톤에 있어서 진정한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현상계의 세계는 단지 이데아의 모상일 뿐이고, 현상계의 표징이 바로 시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에게 있어서 시간은 유한성을 예시하는 불순한 요소이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또한 칸트도 이 관점에 서 있다. 칸트에 있어서 시간은 인간의 선험적 형식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러한 관념의 배후에는 물자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물자체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유동하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인간의 인식은 정초된다. 또한 불교의 세계관에서 생멸과 진여의 대립은 결국 시간이 하나의 허상임을 보여준다.
시간을 관념으로 이해하는 관점에 있어서 해명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일 것이다. 즉 이데아가 있다는 것과 없다 것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차이를 보여주는가 하는 점이다. 이데아를 물자체, 혹은 진여의 세계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어짜피 이데아는 현상계를 설명하는 수단으로서 직관적으로 요청되는 관념이다. 만약 이데아가 자명하게 존재하는 실재계라고 증명한다면 이미 현상계에서 이데아계를 만나는 것이고, 거기에서는 이데아에 대한 현상계의 하위관념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옥캄의 면도날, 즉 존재는 필요 없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나,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견해는 분명히 해명해야 할 지점을 갖고 있다. 또 하나 해명해야 할 점은, 현실은 끊임없는 변화와 운동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을 관념으로 이해하는 관점에 있어서 운동과 변화는 유동의 배후의 불변하는 영역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운동의 시원이 부동이라는 점은 매우 많은 설명이 요구된다.
3.2. 실재적 차원으로서의 시간이해
시간을 실재적 차원으로 보는 관점에 있어서 시간은 유동하는 세계의 근원적인 조건이 된다. 뉴튼의 절대시간은 시간을 실재적인 차원으로 보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내감을 통하여 형성되는 시간의식은 실재시간이라는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다. 또한사건과 운동은 절대시간(절대공간)의 바탕 위에서 전개되는 부가적인 국면이다. 또한 실재적인 시간은 규칙적인 리듬을 갖고 주기적으로 흐른다. 하지만 시간을 실재적인 차원으로 보는 관점은 우리의 시간의식 배후에 또하나의 시간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이러한 배후의 시간이 있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은 인식론적으로 인간의 시간의식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할 때, 또다른 시간의 지평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모든 시간은 인간의 시간의식을 매개로 해서 주어지는 시간이 아닌가 하는 반론을 이 관점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을 관념적 차원으로 보는 관점이나, 실재적인 차원으로 보는 관점이나 우리의 직관을 통해서 볼 때는 매우 많은 설명이 요청되는 관점이다. 오히려 이 양자의 한계를 극복한 관점은 시간을 하나의 이벤트의 계승으로 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시간이 어떠한 본질의 부수적인 국면이나, 가장 본질적인 국면이라고 보는 입장을 피하면서도 이 양자가 이벤트로 매개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우선 이러한 시간 이해에 있어서 우주론에 있어서 이벤트가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를 그려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벤트는 무엇이고, 시간은 무엇인가.
3.3. 우주론에 있어서 이벤트의 의미
이 우주는 유동성을 가지고 전진한다. 우주가 정지해 있지 않다는 사실 만큼 참으로 놀라운 것은 없다. 하지만 애초부터 정지한 우주에 대한 경험이 없는 인간으로서, 우주가 유동하고 어디론가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것이 경이로운 사실이라는 것을 직시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점을 안고 있다. 우주는 전진하고,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자명한 사실은 참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진하는 우주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설명적 도구들이 요청된다. 이러한 완결된 우주론의 구성에 있어서 대부분은 신이라는 우주의 목적인을 중심으로 우주론의 구성물을 채워넣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는 흐른다"cosmos flux는 직접적인 직관을 해명하기에는 마이크로한 설명들이 더욱더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에 대한 논의는 우주론의 구성에 있어서 작용인의 측면을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신의 입김"에 의해서 우주가 흐른다는 개괄적인 구도가 더욱 구체성과 충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문제를 우주론 안에서 유효하게 포섭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우선, 우주가 흐른다는 우주론의 보편명제의 기저를 들어가 본다면, 우주의 흐름은 매 순간 순간 점멸하는 이벤트를 기본요소로 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우주가 이벤트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벤트가 우주를 창출한다. 유동하는 우주의 기본단위는 바로 이벤트인 것이다. 만약 우주가 이벤트의 모태가 된다면, 그우주는 진정한 의미의 전진하는 우주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벤트는 우주의 의존적인 변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벤트의 영향력에 독립하여 불변하는 우주의 영역이 존재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우주의 유동도 아닐 뿐더러 우주 전체의 새로움도 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등장하는 이벤트는 그의 출현 과정에 있어서 과거의 우주가 이미 하나의 질료적 요소로서 이미 간직해 있다. 과거의 우주가 현재의 새로운 국면으로 융화되고 전개되는 과정이 바로 이벤트의 출현인 것이다. 이럴 때 우주는 매 순간 점멸하는 이벤트에 의해서 다시 새로워진다. 그리고 과거의 우주는 현재 생성되고 촉발되는 이벤트에 의해서 자기동일성과 자기창조성을 지켜나간다. 만약 이벤트가 없고 우주만 있다면, 자기동일성만을 확보한 존재이기에 공허한 동어반복의 나락으로 추락할 것이다. 만약 우주가 없고 이벤트만 있다면, 아이덴티티라는 중요한 근거를 상실한 채 부유하는 맹목적인 불연속의 나락으로 추락할 것이다. 전체적인 우주를 자기동일성의 국면이라고 본다면, 새로 발현되는 이벤트를 자기초월성의 국면이라고 대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거적 차원의 전체적인 우주 또한 그의 구성요소는 과거의 계기에 있어서의 수많은 이벤트라고 할 수 있고, 현재적 차원의 이벤트 또한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우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구분하는 우주와 이벤트라는 개념을 대비해 볼 때, <우주>는 이벤트의 총체적인 결합에 의해 연장적으로 확보되어진, 전체적인 이벤트의 과거적 국면이고, <이벤트>는 과거의 연장적인 우주와 '현재'가 맞물리면서 생성되는 우주의 현재적 계승의 국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주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이벤트>인 것이다. 그리고 이벤트는 바로 현재적 자리에서 생성한다. 또한 이벤트는 유동하는 우주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시-공간적인 전후의 폭을 갖는 궁극적인 단위이다. 그리고 이벤트는 어떠한 공간과 시간의 궤적을 지닌 실체개념이라고 하기 보다는 시공적 관계성의 결정체적 단위라고 할 수 있겠다.
3.4. 이벤트와 시간의 관계
이벤트의 생성이 현재적 우주이다. 소멸하는 이벤트는 그 후기 위상에 있어서 우주의 연장적 차원으로 소여되고, 다시 새로운 이벤트의 출현을 향하여 우주는 전개된다. 실로 이러한 우주의 새로운 '맹목적인' 충동을,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신의 호홉을 근거로 한 충동이라고 단순히 설명한다면 어쩌면 생기론vitalism적 설명이 갖고 있는 오류와 한계를 그대로 밟는것은 아닌가. 여전히 우주의 '맹목적인', '무차별적인', '해갈되지 않는' 충동과 약동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와 설명은 참으로 빈약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포리아를 만날 수 밖에 없다. 사실 <이벤트>라고 하는 관념은, 우주의 충동은 어떻게how 존재하는가에 대한 해명은 될 수 있어도, 우주의 충동이 왜why 존재하는가에 대한 해명, 더 나아가서 어디에서from 왔는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해to 나아가는가에 대한 해명에 있어서는 매우 부족할 뿐이다. 이러한 물음은 시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시간은 왜 존재하는가? 시간의 근원과 종말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과 궤를 같이 하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간 이벤트는 매 순간 점.멸한다. 그리고 이벤트의 점.멸은 우주에 편입되고 이럼으로 우주는 매 순간 새롭게 구성된다. 그리고 우주는 전진해 나아간다. 그렇다면 시간은 무엇인가? 시간은 이벤트의 점멸과 그의 계승 그 자체이다. 시간은 이벤트의 출현이 가능한 비어있는 무대(실재적 차원으로서의 시간)도 아니고, 인간의 관념이 주조한 환상(관념의 산물로서의 시간)도 아니다. 시간은 이벤트의 생성, 발현, 마감의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시간은 물리적인 차원의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심리적인 차원의 시간의식이란 무엇인가? 시간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벤트의 생성, 발현, 마감이라는 자명한 우주의 변화 매개로 하여 인간에게 내성적으로 인지되는 의식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물리적인 차원으로서 이벤트의 에포크가 시간임을 직관하기 때문에 내성적인 시간의식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벤트의 출현과 마감에 기인하여 등장하는 세계의 변화를 매개로 하여 인간의 시간의식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인간 존재 또한 이벤트의 생멸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내성적인 직관을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시간의식이 가능하다.
이벤트의 생성과 소멸의 한 구획을 시간으로 보고, 이벤트의 생성 소멸 위에 서 있는 인간의 우주에 대한 직관을 시간의식으로 본다면, 전자만을 강조한 물리적 시간이해와, 후자만을 강조한 심리적 시간이해의 깊은 해리가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린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물리적 시간이해만을 강조할 때 부가적으로 해명해야만 하는 문제, 즉 인식론적 범주의 시간의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의 난제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심리적 시간이해만을 강조할 때 등장하는 문제, 즉 우리가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유동하는 세계의 문제나, 세계의 유동의 근원을 영속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주의 유동의 가장 근본적인구획을 시간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후의 시간을 둘러싼 여러 논의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론의 바탕으로서의 우주론이 어떻게 놓여있느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출발점인 것이다.
4. 시간은 가역적인가?
시간은 가역적인가? 이 질문은 우리의 일상적인 상식에서 볼 때 매우 불필요한 문제제기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은, 적어도, 시간은 비가역적임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명의 전개에 있어서 가역적인 시간을 둘러싼 인류의 호기심과 상상은 신화를 통해서, 문학을 통해서, 심지어 철학과 과학을 통해서 꽃피워 왔던 것도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가역적인가라는 물음이 등장할 수 있는 논의의 수위는 우주론의 성격의 문제를 다룰 때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물리적 국면에서 등장하는 시간의 문제를 논의할 때 시간은 가역적인가라는 문제는 시간의 물리적 성격을 해명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일상적이지 않은 예외적인 경험을 통하여서 우리는 시간은 가역적일 수도 있음을 직관적으로 만나게 된다. 미래를 예측하는 점이나 예언이나 꿈이나, 융의 동시성 현상과 같은 경험은 시간은 가역적이라는 가설을 직접 증명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도, 간접적으로 시간은 가역적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유용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또한 가역적 시간을 둘러싼 논의는 인과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시간이 가역적이라는 명제가 내포하고 있는 우주론적인 문제를 우선 짚어보려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가역적 시간관과 관련이 있는 현상들을일별하려 한다. 그리고 이벤트로서의 시간의 관점에서 가역적 시간관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전개하려 한다.
4.1. 스티브 오딘의 <과정 형이상학과 화엄불교>
스티브 오딘의 저서 Process Meaphysics and Hua-yen Buddhism은 가역적 우주론과 비가역적 우주론의 성격과 그 의미를 일별한 책이다. 이 책의 표지에는 A Critical Study of Cumulative Penetration vs. Interpenetraion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책은 화엄 불교의 구조와 화이트헤드 철학의 구조에 대한 상호 유형적 비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오딘은 화엄 불교를 동시적 상호융합의 우주론으로서 이해하고,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시간누적적인 우주론으로서 이해한다. 상호융합의 우주라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우주는 대칭적이라는 것이다. 대칭은 교환을 의미하고 가역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과거와 미래는 상호 침투하고 상호 대칭적이기 때문에 시간은 가역적이다. 이러한 우주론은 완전한 결정론의 견해를 담지하고 있다.
그리고 대립적인 자리에 오딘은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을 일향적으로 누적되어 새로운 계기를 형성하는 우주론으로 제시한다. 화엄의 우주론이 시공적으로 모두 대칭적인 방식이라고 한다면,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은 누적적 일향의 흐름을 나타나는 계기적이고 비대칭적인 사태이론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은 결코 가역적일 수 없다. 오늘은 내일을 낳지만 내일은 다시 오늘로 귀환될 수 없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에 있어서는 결정론적인 화엄의 우주론과는 달리 창조적 행위의 개방성이 전제된다. 물론 스티브오딘의 대칭적 우주론과 비대칭적 우주론의 비교 관점은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역적 시간관>과 <비가역적 시간관>의 의미를 파악하려 하는 우리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요소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딘의 논의와는 별개로 가역적 시간관과 비가역적 시간관의 특성과 차이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4.2. 시간의 가역성과 과거로의 여행
가역(可逆)은 역방향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역방향은 교환을 의미한다. 교환은 교환주체와 대상이 상호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시간적 의미의 가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어제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간의 가역성을 전제로 하여 온갖 상상을 다해보자. 물론 민코프스키 공간에 있어서 광속(C)이 시간의 기준이고 광속을 넘어서는 물리작용은 없기 때문에, 과거로의 역행이라는 상상은 정말 말도 안되는 상상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가역적 시간관>을 이해함에 있어서 되든 안되든 상상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어제 나는(i1) 결혼을 하였다. 오늘 나는(i2) 이혼을 하였다. 어제의 상황(s1)은 기쁨이고. 오늘의 상황(s2)은 슬픔이다. 만약, 오늘의 나(i2)가 어제의 상황(s1)로 돌아간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어제의 나(i1)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오늘의 나(i2)가 어제의 나(i1)를 밀치고 들어가야 할 터인데 말이다. 만약 오늘의 나의 슬픈 아이덴티티를 그대로 밀고 어제로 들어가버리면 어제의 기쁜 나의 아이덴티티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이러한 가정의 전제는 오늘에서 어제라는 과거로 가는 것이고 오늘 나의 입장에 있어서 어제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의 나에 있어서는 어떤 일로서 일어날까. ".... 평생 못할 것 같았던 결혼을 해서 좋아하던 중에, 나와 똑같은 얼굴(정체성)을 가진 타인이 저 멀리서 대상으로 드러나다가 어느덧 나의 정체성과 모종의 동일화의 경험을 하면서, 결국은 나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나는 사라진다..." 결국은 이러한 논리일 수 밖에 없겠는가?
실재 어 제 / 오 늘
여행
어 제 / 어제의 나(i1) / 오늘의 나가 어제의 나로 변함 (i2→i1)
어제의 상황(s1) / 오늘의 상황(s2)
오 늘 /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로 변함(i1→i2) / 오늘의 나(i2)
어제의 상황(s1) / 오늘의 상황(s2)
우리는 시간의 가역성을 둘러싼 생각을 하다가 황당한 상상을 해보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쥐어짜서 가역적 시간에 대한 상상을 해보니 자연스럽게 절대적 시공간이라는 전제를 깔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과거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과거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전제를 깔 수 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서 절대적 시공간의 전제를 사용하지 않고 가역적 시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물음이 등장한다. 다른 문제는, 절대적 시공간의 영역에서 시간의 가역성을 가정할 때 아이덴티티의 문제를 처리하기가 매우 곤란해진다. 오늘의 나가 어제의 나로 진입할 때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로 변한다." 그럼 어제의 나의 아이덴티티는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리고 어제의 나가 그냥 어떠한 세계의 시점에서 정체성이 상실되었다면, 오늘의 나의 근거인 어제의 나가 없는데 오늘의 나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제와 오늘이 대칭적이고 거기에서 시간적 가역이 가능할 수 있음을 아무리 사변을 동원하여 헤아려보아도 쉽게 이해가 안되는 면이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대칭적 우주론과 가역적 시간론이 이렇게 조야한 타임머신류의 의미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의미에서 가능하거나, 아니면 실재로 불가능한 우주론, 이 둘중에 하나가 아닐까.
4.3. 한스 라이헨바하의 열려진 세계선
라이헨바하는 {시간과 공간의 철학}의 제2장 시간에 관련한 논의에서 열려진 세계선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열려진 세계선은 대칭적인 우주론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절대시공간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는 현재의 유일성과 개인의 아이덴티티의 문제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논의를 전개한다.
어느날 당신은 당신이 젊은 시절의 자신과 같다고 주장하는 한 사람을 만난다. 그는 당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까지도 말한다. 그는 또한 당신의 미래에 대해서, 즉 당신이 언젠가는 그의 입장에 서게 되고 그래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만날 것에 대해서도 예언한다. 물론 당신은 그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걸어간다. 당신의 친구도 당신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 낯선 사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면서 자신의 길을 간다. 당신은 그 사나이와 그리고 친구와도 멀어지고 그들에 대해 잊어버린다. 몇 년 뒤 당신은 한 젊은 청년을 만나게 되고 돌연 그가 젊은 시절의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당신은 그에게 옛날 그 사나이가 당신에게 말했던 것을 그대로 그 청년에게 말해준다. 청년은 당신을 믿지 않고 당신이 비정상적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당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우면서 사라져 간다. 다시 당신은 옛날의 친구를 - 그를 마지막 보았을 때의 나이에서 변치 않은 - 만난다. 그러나 그는 당신을 모른다고 말하고 (젊은 시절의) 당신과 함께 당신이 비정상적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만남 뒤에는 그 친구와 나란히 걷게 된다. 당신의 젊은 날의 자아는 멀리 사라지고 그때 이후로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라이헨바하, {시간과 공간
의 철학}, p.174)
라이헨바하에 의하면 이 사건은 매우 이상하지만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이 사건의 논리적 의미는, 우리는 더 이상 현재라는 순간의 유일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점과, 자아를 시간의 과정 중에서 하나의 동일한 개인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논리적 추론은 시간의 가역성, 혹은 대칭성의 우주론을 옹호하는 듯 한 분위기이다. 하지만 라이헨바하는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물리적 실재를 조절하는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를 이후에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시간 질서에 대한 중요한 공리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공리가 유일한 시간 질서와유일한 현재점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는 시간의 경과중에 동일하게 남는 개인의 개념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논리적으로는 순간의 유일성의 근거나, 개인의 아이덴티티의 근거가 없음을 지시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물리적, 경험적 공리는, 저와 같은 사건이 단지 선험적으로 배제되지 않을 뿐 경험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여주고 있다.
4.4. 동시성의 문제와 시간의 가역성
동시성의 문제가 시간의 가역성과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중요한 출발점일 것이다. 우선 동시성은 물질의 세계와 마음의 세계의 의미있는 일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성은 시간적인 동시성과 공간적인 동시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 모두 시간의 가역성과 관계가 있다.
우선 시간적인 차원의 동시성은 다음과 같다. 오늘(t1) 내가 등산에서 추락하는 꿈을 꾸었는데 한달 후(t2)에 꿈을 꾼 그 산에서 그 포즈로 추락하여 죽었다(오늘의 사태와 미래의 사태가 의미있는 일치가 아니라 우연의 일치이고 말짱 황이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공간적인 차원의 동시성은 다음과 같다. 스웨덴보그는 집에서(s1) 현재 수천킬로미터 멀리 떨어진 어느 나라(s2)가 불이 타고 있는 모습을 환상속에서 보고 있다. 스웨덴보그의 현재의 자리와, 불이 타는 어느 나라의 자리는, 민코프스키시공좌표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동시적이다. 서로 인과적으로 무관하다. 그러나 스웨덴보그는 그 불에 타는 정보(s3)를 자신의 세계선 안에서 파악하였다. s1과 s2의 세계선이 만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달이 걸려야 할 인과적으로 독립된 사태(s3)임에도 불구하고 스웨덴보그는 그 사태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1달 이후 스웨덴보그의 세계선에서 파악되어야 할 사태가 1달 이전의 스웨된보그로 역행한 시간의 가역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시간적인 차원의 동시성이든, 공간적인 차원의 동시성이든 시간의 가역성은 동시성의 구조 안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또한 미래의 사태(t2)가 현재의 사태(t1)로 진입해 들어오는 경우나, 동시적인 사태(s2)가 주체(s1)에게 와서 하나의 의미를 생성시키는 이 양자 모두 미래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으로 가역하였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시간질서를 기반으로 흐르는 외부의 세계와는 별도로 시간이 의미를 발하지 못하는, 혹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혼융해 있는 <정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설이 더욱 의미가 있는 듯 하다. 이럴 때 인과적인 외부의 세계와 인과의 끈이 없고 가역적이고 대칭적인 내부의 원형적 세계라는 이분된 세계를 이 가설은 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개인의 자유의 근거가 희박해진다. 이러한 현상의 인과적 세계관과 본질의 원형적 세계관의 구도는 시간을 하나의 관념으로 보는 경향의 계보나, 혹은 본인이 이해한 상호혼융의 우주론인 화엄의 우주론의 계보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렇다면 동시성 현상에 있어서 이벤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짜피 다 원형에 다 프로그램 되어있는 이벤트가 발현되었다고 한다면 새로울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사건의 전개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시간은 원형의 부수적인 구현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환상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원형적 세계와 인과적 세계의 간극은 상호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이 이질적인 두 세계는 어디에서 동일하고 어디에서 차이가 있는가? 아니면 단지 원형적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인과적 세계의 위험에 대한 조짐과 기우를 표현하는 그러한 소극적인 방식을 보여주는 차원뿐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동시성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닌가.
5. 나가며
어느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유동하는 시간의 문제는 인간 지성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에 다가오는 절박한 문제라고 말이다. 나는 저 고백을 뼈저리게 공감한다. 사유는 시간적 계기속에서 진행되는 정신의 운동이다. 그러나 사유는 다시 시간을 '사유'한다. 어쩌면 사유의 끈을 완전히 해체시키기 이전에는 여전히 시간의 문제는 '신비'로 남는 영역일런지 모른다. 실로, 정말 끈질긴, 혹은 놀라운 메비우스의 띠가 아닐 수 없다. 사유와 시간의 길항, 영원의 구유와 시간의 소멸의 긴장에 우리의 지성은 여전히 아포리아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시간의 문제 앞에 서 있는 우리는 세상의 지혜가 건넨 시간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헤아리는 것만이 우리가 가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라는 생각일런지도 모른다. 현자들의 시간에 대한 지혜가 우리에게 드러나기를 바란다.
어디론가 하염없이 사라지는 시간 앞에서
1999/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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