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문화가 만나는 자리를 꿈꾸며

 

 

 

 

두 문화가 만나는 자리를 꿈꾸며

― C.P. 스노우의 <두 문화>를 읽고 ―

 
 

전 철

 

 

1.

내가 스노우(Charles Percy Snow, 1905-1980)의 <두 문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년전 참여했던 연세대 오영환 교수의 형이상학이라는 세미나에서였다. 백발의 오영환 교수는 세미나 진행 도중 과학자이자 문학자인 스노우의 저서 <The Two Cultures>가 차지하는 의미와, 현대를 향한 시사점을 잠시 소개하였다. 스노우에 대한 짤막한 소개가 끝난 이후 강의는 계속되었고, 낙엽이 모두 떨어지는 그 계절, 종강과 함께 스노우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 다음 해, 오영환 교수의 번역으로 스노우의 <두 문화>는 교보문고의 신간서적 테이블에 꽂혀 있었고, 나는 다시 한 번 스노우를 만나게 되었다. 필경 인간은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존재이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신간서적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스노 우의 <두 문화>만이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재회(再會)의 기쁨은 잠시였다. 정작 스노우의 <두 문화>에서 느껴지는 기본 선율은 우 울했기 때문이다. 소설 읽기와 같은 책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스노우의 어조는 사뭇 진지했다. 스노우는 지식문화의 저변에 깔려있지만 우리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여러 쟁 점들을 조심스러우면서도 강렬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당시에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저 <두 문화>는 1959년 5월 7일 스노우의 케임브리지 대학 강연(I. 두 문화와 과학혁명), 그리고 4년 후 <두 문화>에 대한 스노우의 새로운 고찰들(II. 두 문화 : 그 후의 고찰), 마지막으로 스노우의 강연을 계기로 등장하는 다양한 논쟁들의 의미를 개관하는 논문으 로 구성되어 있다(III. 스테판 콜리니의 해제). 특히 이 책은 <과학문화>와 <인문문화> 사 이의 분열과, 이 두 문화간의 상호 긴장에 대한 논의를 중점적으로 전개한다. 그리고 이 두 문화가 어떻게 다시 조화롭게 만날 수 있는가를 전망한다.

2.

우리는 사상사에서 <존재>를 '정신'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관점과, '물질'의 측면에서 이 해하는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이 두 관점이 사상사의 양 기둥이듯이, '정신'과 '물 질'은 존재의 양극(dipolar)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근거로 한 자연과학과 정신 을 근거로 한 인문과학은 근본적으로 상보적이다. 하지만 자연과학은 실재의(actual) 세계 를 다루고, 인문과학은 실재하는 세계의 배후를 다룬다. 바로 스노우의 <두 문화>는 실재 의 세계에 대한 관심에서 형성된 문화와, 실재하는 세계의 배후에 대한 관심에서 형성된 문화를 지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마치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상보적이듯, '보이 는 것을 중시하는 과학문화'와 '보이지 않는 것을 중시하는 인문문화'는 상호조화를 통하 여 특정한 방식으로 인간을 간섭하는 힘이다.

그렇다면 오늘에 있어서 자연과학(과학문화)과 인문과학(인문문화)은 어떤 관계인가. 어 쩌면 오늘의 자연과학은 인문과학에 대하여 실재의 세계를 상실한 자들이라고 매도하고 있으며, 또한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에 대하여 실재의 근본을 따지지 않는 자들이라고 규정 하고 있지는 않았나. 이리하여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은 시간이 점점 흐르며 일란성 쌍생아 의 고향을 상실한 불우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 두 그룹의 갈등을 스노우는 이렇게 그려낸다.

"비과학자들은 과학자가 인간의 조건을 알지 못하며, 천박한 낙천주의자라는 뿌리 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한편 과학자들이 믿는 바로는, 문학적 지식인은 전적으로 선견 지명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네 동포에게 무관심하고, 깊은 의미에서는 반 지성적이 며, 예술이나 사상을 실존적 순간에만 한정시키려고 한다(p.16)."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그룹들은, 과학의 바탕이나 근본 이념에 대한 반성은 등한시 한 채 자신들의 과학적인 연구 성과에만 매달리는 편협한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인문과학을 연구하는 그룹들은, 과학의 바탕이나 근본 이념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하 지만 인문과학자들의 비판은 자연과학을 탐구하는 그룹에게 큰 영향력과 호소력을 행사 하지 못한다. 바로 스노우는 서구 현대가 당면하고 있는 과학문화와 인문문화 사이의 대 립상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의 긴장은 상식적으로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문제이고, 그러하기에 철저하게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 스노우는 역설(力說)한다. 그는 말한다.

"사실, 나는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믿기로는 전 서구 사회의 지적 생활은 갈수록 두 개의 극단적인 그룹으로 갈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지적 생활이란, 우리들의 실생활의 대부분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두개의 생 활이 그 가장 깊은 면에서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p.14)."

3.

자연이 부재한 영혼의 문화, 정신이 부재한 물질의 문화는 결코 온전할 수 없다. 그렇 기 때문에 스노우는 온전함이 상실된 가난한 현실을 향하여 다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다. 왜 이 둘은 헤어졌을까? 왜 이 두 문화 사이의 교감은 단절되었을까? 이에 스노우는 놀랍게도 <전문화된 교육>(p.30)이 양자 사이의 분명한 경계를 그은 주범이라고 진단을 내린다. 우리의 시선이 스노우의 저 대답을 주목하는 긴 시간의 노력과는 달리, 대답의 진의를 우리는 쉽사리 포착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질문한다.

' 오히려, 전문성과 깊이를 상실한 교육이 과학문화와 인문문화의 분열을 조장하지 않는가? 또한 전문성의 부재는 급변하는 현대성에 대한 면역력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 은 아닌가? '

우리의 이러한 판단은 결코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20세기의 문명이 공 유했던 <전문적인 지식의 예찬>이었던 것이다(pp.29-30). 또한 두 문화 사이의 경계를 분 명히 함으로써 얻게 되는 <사회관리의 효과에 대한 예찬>이었던 것이다(p.30). 이 두 예 찬론에서 볼 때, <지식의 전문성>이 가져다주는 결과들은, 전체적인 조화의 중요성을 보 상하기에 충분한 매력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회관리의 효과>가 가져다주는 체제의 안정 성은, 사회변혁이라는 모험을 회피하기에 충분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 덕분에 열역학 제2 법칙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 문화(p.27), 책읽기의 진수를 알려줄 수는 있지만 질량과 가속도를 정의하지 못하는 문화(p.28)를 잉태하게 되 었다.

이러한 비극의 탄생은 결국 <전문화된 교육>이라는 시원으로 수렴된다. 올바른 지식은 인간을 고결한 존재로 인도한다. 교육의 과제는 이러한 지식의 증대이다. 그리고 교육은 '훈련'을 통하여 인간을 고양시킨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류는 근대에 들어서 특수한 영역 내의 지식을 증대시켜 나아갈 수 있는 <전문화된 교육>을 발견하였다. 근대라는 프로메 테우스는 신의 '비밀'을 인간의 손에 쥐어 주었다. <전문화된 교육>, 그것은 진보의 속도 를 가중시켰다. 그리고 산업 혁명을 꽃피웠다. 또한 사회의 혈액인 <과학 혁명의 기반 >(p.42)을 열어놓았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근대 과학의 르네상스 없이 근대 문명의 발흥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고결한 정신을 꿈꾸는 세대들이 기원하고, 추진하고, 헌신했던 지배의 순간은 축복이 저주로 옮겨 가는 전환점임을 발견한다. 그 결과로써 진보의 '속도'가 인 간의 세계 이해의 '속도'를 추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 신의 것만을 할 줄 아는 모던타임즈의 초라한 광대처럼 살 수 밖에 없다. 보편적 지식의 탐구가 가능했던 19세기의 지적인 전통은 전문화된 20세기의 아카데미즘적인 전통으로 교체되었다. 그러하기에 이후의 인간은 단지 하나 이상의 지식이 없다. 이제 인간에 있어 서 <과학문화>와 <인문문화>는, 여기에서부터 양자택일의 대상으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스노우는 <전문화된 교육>에 의하여 야기된 양 문화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는 대안을 다시 <교육>에서 찾는다. 즉, 영국인 스노우가 미국이나 소련의 교육모델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p.65)는 언급에서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스노우는 <전문화된 교육>에 의하여 <두 문화>의 단절이 야기되었다고 보지만, 그 단절을 극복하는 가능성 또한 <교육>에 두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스노우의 인간 이해를 발견한다. 인간은 산 채로 미이라가 되기를 거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전문화된 교육> 의 폐해에 의해서 문화의 갈등이 야기되었지만, 두 문화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는 인간의 가능성 또한 균형과 조화의 교육을 통하여 열릴 수 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세계는 인간을 구속하지만, 인간은 세계의 구속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이다.

4.

저자의 자리에 충실할 때에만 그것은 진정한 독서가 된다. 살아있는 나를 지우고 죽은 저자를 살리면서까지 글을 읽는 작업은, 마치 모든 책읽기가 그렇듯이, 모험이다. 다행스 럽게도, 마치 대부분의 책읽기가 그렇듯이, 스노우 읽기는 성공적인 모험이었다. 이 책을 통하여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양 날개로 문화의 형세(形勢)를 드넓게 전망할 수 있었던 경험은, 참으로 소중하고 희귀한 경험이었다. 이미 과학과 문학의 깊은 면을 엿본 저자였 기 때문에, 그만큼 독자들의 새로운 전망이 가능할 수 있었으리라.

그는 인류문화의 영원한 두 함수인 <과학문화>와 <인문문화>를 조명함으로써, 이 둘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 미래적 과제인가를 보여준다. 더군다나 사회의 분화에 따른 지식 전문화의 속도는, 당대의 스노우가 예견한 수위를 넘어서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매우 심 각하리만큼 급속해져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벨탑의 신화에 도전하는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전문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거역할 수 없는 요구에, 현대의 인간은 보편적인 교 양을 상실한 존재로 추락해간다. 어쩌면 우리는 맹목적인 진보의 신화에 매몰되어 우리의 중심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맹목적인 진보의 신화, 문화적 보편성을 상실한 인간, 과학 만능주의, 전문성의 맹신, 조화로운 교육의 부재 등등, 스노우는 20세기 말 후기 산업사회의 이면에 쌓인 서글픈 징 후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많은 논쟁을 일으켰던 스노우의 저 예언자적 인 경고는 그 시대를 넘어서서 일반성을 더욱 공고하게 획득하고 있음을 현대의 우리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사회와 문화의 학제적(interdisciplinary) 방향 으로의 점진적인 전환은 우리 시대의 반쪽짜리 진리(half-truths)를 극복하는 유용한 대안 이 될 것이다. 구분할 수 있지만 분리할 수 없다는 파피루스 향이 나는 옛 구절은 오늘의 <두 문화> 사이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과학은 기름이 묻어나오는 천한 자리로 경시되었고, 오로지 문학과 법이 신성한 가치였 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문학의 손끝에 의해 어렵게 만들어진 고결한 인간을, 과학은 단번에 복제해버릴 수 있는 시대가 <모던 타임>이다. 과학은 혁명을 제공하나 낭만을 꿈 꾸지 못한다. 문학은 조화를 선사하나 기계를 만들지 못한다. 오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둘 중의 하나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문화적 기능은 이 양자를 균형있게 성찰 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 균형과 조화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또한 그것을 꽃피우는 것이 진정한 문화이다.

내면과 외면, 마음과 물질, 사물과 여백이 서로 가까이 닿아있음을 동양문화는 잘 안다. 어찌보면 <과학문화>와 <인문문화>의 관계를 배중률로만 이해하려는 서양의 논법이 우 리에게는 전혀 무의미할 수도 있다. 특수한 영국의 자리가 어째서 서구 문명을 대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의 씀씀이가 없는 스노우의 비약도 아쉽지만, 스노우의 자리를 여과없 이 우리의 자리로 착각한 나머지, 쉽게 끌려만 다녔던 나 자신의 시선에게도 아쉬울 따름 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읽기는 결국 <우리 문화> 안에 깔려 있는 <두 문화>의 긴장 을 우리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 <두 문화>가 만나는 자리를 나 자신에서부터 몸소 직조하는 삶이어야 함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제5회 한신 독후감 수상작

한신학보, 1997.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