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헤드의 인간이해

 

 

 

 

 화이트헤드의 인간이해

현실적존재(actual entity)를 중심으로
 

전 철





Ⅰ. 서론 :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근원적 이면서도 동시에 덧없는 질문일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우리 는 세계를 다 안다고 하여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어쩌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인 간을 보고 온전히 아는 그 때"(고전 13:21)가 오기까지 인간에 대한 저 질문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질문의 수레바퀴 아래서 우리는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를 만난다. 화이트헤드는 초기에는 철저한 수학과 과학의 세례를 받으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수학적 성과와 과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그의 모든 사색을 형이상학으로 집중하 였다. 당시만 하여도 이미 형이상학을 사멸한 공룡과 같은 무용지물(無用之物)로 여기는 풍조였으 나, 그는 당당히 수학, 과학, 철학, 신학이 서로 교차되는 웅장한 형이상학을 새롭게 전개하였다. 이후 그의 형이상학은 '유기체 사상'으로 지성사의 커다란 획을 가른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논 의될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1929)[1]는 바로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새로운 형이상학 의 정수를 보여주는 역저이다.

이 글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인간 이해에 주목하려 한다. 특히 인간은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어떻게 조명되며, 우주 안에서 어떠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지에 관심하려 한다. 우선 화이트헤드가 남겨 놓은 사유의 궤적들을 탐구하면서, 그의 시선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이라는 현상을 더 깊이 이해 하려 한다.

II. 화이트헤드의 관점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워낙 난해하고, 방대하기 때문에 그의 관점을 단 몇 가지로 추려낸다는 것은, 그가 그렇게 비판하는 <단순정위의 오류>fallacy of simple location, 혹은 <잘못 놓여진 구체 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를 야기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의도하는 맥락을 따라 그의 관점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 관점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화이트헤드는 인간의 모든 경험을 총체적으로 해명하려 하는 형이상학적 해석(metaphysical interpretation)을 견지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이 자연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무엇인가 를 생각하고, 꽃내음을 맡고, 맛을 보고, 피부로 느끼고 또 종교적인 체험을 하는 이 다양한 경험 들의 <모든> 요소를 해석해 낼 수 있는 궁극적인 구도에 온 생애를 거쳐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우주의 천태만상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려는 열망에서 그의 형이상학은 꽃을 피웠다. 이러 한 이유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이 배제된 특별한 인간론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화이트헤드를 통하여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기에, 특수한 관점에 국한된 인간 이해를 극복하고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둘째, 화이트헤드는 인간의 경험적 차원과 구체적 사실에 철저하게 집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과 사실에서부터 단절된, 추상화된 관념에 대하여 그는 끊임없이 비판한다. 화이트헤드의 형 이상학의 총체적인 융합인 {과정과 실재}에서 그는 추상적이고도 고답적인 우주론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경험의 다양한 문제들을 자신의 형이상학 안에서 치밀하고 끈질기게 해명 하려 한다. 어떤 방식으로 돌은 생존하는가? 왜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해 움직이는가? 감각은 무 엇인가? 의식은 무엇인가? 언어는 무엇인가? 시간은 무엇인가? 공간은 무엇인가? 운동은 무엇인 가? 왜 악은 출현하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세계에 관여하는가? 하는 일상적인 물음에서 부터 심오한 종교적인 물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양한 물음들을 자신의 형이상학 안에서 치밀하 고 끈질기게 해명한다.

그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의 과제는 일상생활의 모든 경험에 대한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인 해명에 있음을 그는 놓치지 않는다. 지극히 구체적이고 독창적이며 날카로운 사상에 기인한 난해한 화이 트헤드의 언어를 처음에 돌파하기에 어렵지만, 오히려 어느 언어보다 논리적 일관성, 내적인 정합 성, 현실적합성이 매우 높은 언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2]

셋째, 화이트헤드의 관점은 비합리주의와 합리주의 양 계보 가운데에 철저한 합리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 우선 그는 사변(思辨)의 가설적 성격을 전제한다.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인류의 노력 은 천박하고 미약하며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그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는 인간 통찰력 의 한계와 언어의 결함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불가지적이어서 통찰의 섬광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그런 제1원리란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 에 사상을 명석하게 하려는 모험을 인간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합리주의적 모험이며, 끊임없이 나아갈 뿐 결코 멈추는 법이 없는 인류의 전진인 것이다.

III. 화이트헤드의 인간 이해

화이트헤드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총체적인 경험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형이상 학적 구도에 관심을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 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형이상학에 감추어져 있는 고유한 인간론을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 운 작업이다. 오히려 화이트헤드의 인간론은 형이상학이라는 토대 위에서 조명되어야 할 범주이 기 때문에, 그의 형이상학의 전체 구도 안에서 생명, 그리고 '고등의 유기체'인 인간과 인격의 문 제를 중심으로 추적해 들어가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할 수 있겠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꿰뚫으면서 전개되는 근본 정신은 "모든 사물은 흐른다"(all things flow)라는 고대 직관의 합리적인 재해석이다.[3] 그에게 있어서 우주(Reality)는 정태적 구조가 아 니라 그것은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끊임없는 과정(Process)인 것이다. 하지만 흐르는 우 주의 강물을 인간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 사유의 아주 결정적인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분석하는 것은, 마치 사진사가 아름다운 풍경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 것과 유사하다. 분석은 대상을 얼려버릴 때에만 가능하다. 분석하기 위해서는 죽여야만 한다.[4] 거기에는 추상만 있을 뿐이다. 우선 추상을 통하여 시간의 단위는 '순간'(instant)으로, 공간의 단 위는 '지점'(point)으로 파악되기에,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일정한 시공을 점유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5] 이러한 시공의 자리는 추상에서만 가능하다. 문제는 추상에서만 가능한 대상물을 실재적인 것으로 오해한다는 점이다.[6] 그리고 그 실제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이다. 변하는 것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출현하지만, 인간의 분석은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변하는 것이 출현한다고 착각한다. 바로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사유의 착종을 근 이 천년 동안 고스란히 가지고 왔다고 보는 것이다.[7] 마치 지도는 땅이 아니고 이름은 사람이 아니 듯, 우리의 분석과 이해를 넘어서 세계는 유유히 흐르고, 사진에 찍힌 풍경을 넘어서 자연은 끊임 없이 변한다. 근 이천년 동안 추상화를 통하여 단순정위된 '존재' 밑변에 깔려 있는 '생성'이라는 더욱 근본적이고 구체적인 세계를 구제하려는 시도를 화이트헤드는 감행한다.

그렇다면, 만물유전이라는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구도 안에서 생명과 인간은 어떤 지위를 점 하는가? 이러한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일단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의 근원적 단위인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8]에 주목을 하려 한다. 특히 이 현실적 존재가 누리고 있는 다양한 경험과, 그에 관여하는 여러 요소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려 한다. 그리고 이 현실적 존 재는 생명이고,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은 이 현실적 존재가 고도로 결합된 고양된 생명임 을 강조하려 한다. 또한 이 생명을 존속하게 하는 하나님의 두 본성에 대하여 논의하려 한다. 마 지막으로 생명은 결코 소멸하지 않고 세계 안에서 불멸한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그것은 우주 의 전체 과정을 꿰뚫고 생명, 현실적 존재, 인간, 자유, 하나님이 서로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도이다.

1. 현실적 존재의 본성 : "모든 <현실적 존재>는 생명이다."

현실적 존재는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최소단위이다. 대기에 부유하는 하찮은 먼지도, 그 리고 신도 현실적 존재에 의해 구성된다. 이 현실적 존재는 과거의 다수의 여건들(data)이 하나로 통일된 존재이다. 현실적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다수의 여건들을 자기화하여 하나의 고유 한 가치를 획득해 가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적 존재는 <욕구>appetition와 <향유>enjoyment[9]와 창조적인 활동을 통하여 매 순간 자신을 새롭게 여는 일종의 '생명'이 다.[10]

모든 존재가 현실적 존재이기에 모든 존재는 생명이다. 그렇다면 저 바닥에 놓여있는 돌 또한 생 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돌도 생명이다. 힘과 의미와 경험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과거의 현실적 존재는 새로운 현실적 존재의 <합생>concrscence의 과정에 진입한다. 이 합생을 통하여 새로운 현실적 존재가 세계에 출현한다. 또한 이 무수히 많은 현실적 존재가 서로 상호 파악을 통하여 그물망과 같이 결합한 사태가 <결합체>nexus이다. 또한 이 결합체가 자신들의 고유한 질서를 갖 으며 고유한 가치를 유동하는 세계에서 실현한 사태가 <사회>society이다. 이런 의미에서 돌은 당연히 결합체이자, 세계에 와해되지 않으며 자신을 지켜나아가는 고도의 사회이다. 물론 돌이라 는 사회는 일종의 '신비'에 가까운 고등의 유기체인 인간과 같이, 자신을 규정하면서 자신을 초월 하는 적극적인 생명은 없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돌의 자기 동일성을 지켜내고 견고하 게 계승해 나아가는 소극적인 생명이 그 안에 있다. 현대물리학은 돌의 내부에 격동하는 분자들 의 사회를 예증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주는 그 자체로 생명을 갖고 있는 과정이다. 우주는 엔트로피에 와해되지 않는 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작위의 난수표와 같은 무질서의 발산이 아니라, 고유한 목적을 지향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 안에서 <만족>satisfaction[11]을 지향하면서 여건들을 주체적으로 영입하는 특정한 방식이다. 그리고 선택의 가능성이 복잡하고 다양한 만큼 만족의 강 도는 더욱 깊어지고, 더욱 큰 향유를 유인하기에, 우주는 그 자신 안에 더욱 더 많은 관련성을 도 모하며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구현해 나아간다.[12]

2. 현실적 존재의 유기적 구조 : "생명은 우주 전체의 연대성에서 출현한 사건이다."

우주의 본성을 탐구하려는 화이트헤드의 치열한 문제의식은, '생성'becoming과 '존재'being와 '관 계성'relatedness이라는 세 가지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으로 궁극적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 탐구의 결과로서 관계성의 범주가 성질의 범주보다 우위에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13] <현실 적 존재>라는 화이트헤드의 새로운 개념은 이와 같은 관계성을 그 핵으로 하고 있는 우주론의 구도를 예증한다.

우선 현실적 존재는 독립성을 지니고서 따로 떨어진 채 국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의 새로운 <합생>concrscence과정에 우주의 모든 항목이 포함되기 때문이다.[14] 이 미 현실적 존재 자체가 우주의 모든 항목의 응결체이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는 우주 전체의 연대 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먼지 하나의 출현에 전 우주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는 4차원 <시공연속체>time-space continuum라는 우주 안에서 유기적으로 직조된다. 시골 초갓집 굴뚝의 연기무늬에는 전체 우주 대기의 결이 닿아 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 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듯이, <연장적 연속체>extensive continuum라는 우주의 연대 성을 바탕으로 그 한 송이 꽃은 출현한다. 더 나아가 소쩍새의 눈물만이 국화꽃이 출현하게 되는 완전하고도 유일한 원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선행하는 세계 전체가 협력하여 하나의 새 로운 존재를 잉태하는 것이다. 마치 35억년의 험난하고 기나긴 생명의 역사를 간직하며 그 정점 에 인간이 존재하듯이, 각 존재들은 저마다 선행하는 역사 전체를 자신속에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의 출현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온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단순하지 않다. 생명은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존재의 출현에는 그 존재보다 더욱 큰 것이 관여되어 있다. 현대물리학은 우주 전체의 무대 위에서 국소적인 사건이 출현하리라는 막연한 직관을 확인 시켜준다. 그러기에 어떤 국소적인 동요라 할지라도 우주 전체를 뒤흔든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결국은, 일종의 살아남은 <사건>event[15]이다. 모든 존재는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오직 현실적인 것만이 살 수 있다.[16] 인간이라는 사건, 꽃이라 는 사건, 심지어 볼펜이라는 사건 또한 그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가능한 사건이다. 또한 사건이 사건으로 성립하게 되는 까닭은 자신 속에 다수의 관계들을 통일하고 있다는 데 있다. 사건이 다 수의 관계를 통일한다는 것은 과거의 모든 경험들을 보존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창조함을 의미한 다.

우주의 모든 가능성은 다수의 관계들을 통일하면서 그들의 적합한 장소를 찾아낸다. 그것은 현실 적 존재를 통한 연장적 연속체의 원자적 분할을 의미한다. 적어도 우리의 우주에 있어서 비존재 는 결코 경계가 될 수 없다. 존재의 저편에는 언제나 존재가 있게 마련이다. 바로 이 연장적 연속 체는 세계의 과정 전체를 꿰뚫고 있는 모든 가능한 관점의 연대성이다.[17]

이런 의미에서 연장적 연속체는 모든 실재적 가능태가 출현할 수 있는 '여백'이다. 현실적 존재는 이 '여백'을 원자화시키며 이전에는 가능적이던 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사건은 모든 존 재의 가능성이 시공간의 몸으로 특수하게 세계에 새롭게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8] 이렇게 다양한 관계들의 제휴(提携)를 통하여 그 가능성은 그 하나의 시공연속체 안에서 현실화되어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 구현된다.

생명이라는 사건은 우주의 연대성을 통하여 고유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호 의존과 연대성이 결여된 생명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이제 우주의 연대성은 생명의 바탕인 것이다. 또한 생명은 이 살아있는 우주 전체의 연대성을 예증하는 분명한 사건이다.

3. 고도의 구조를 갖는 현실적 존재 : "인간은 고도로 구조를 갖는 사회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society는 질서를 갖추고 있는 <결합체>nexus이다. 사회는 현 실적 존재들의 상호 결합과 계기로 이루어지는 파생적인 존재이다. 사회는 첫째, 그 내부 성원에 공통요소가 있고, 둘째 공통요소를 재생할 수 있고, 셋째, 재생의 조건을 부여할 수 있는 결합체 로서 정의할 수 있다.[19] 이러한 조건에 만족하는 결합체들은 모두 사회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펜도 사회이고, 배추잎도 사회이고, 바이러스도 독특한 사회이다. 그러나 돌이나 책상과 같은 무기적인 사회와는 달리 구조를 갖는 살아있는 사회는 더욱 복잡하다. 그러한 사회 는 이미 무기적인 사회들을 그 자신의 결합체로서 포함한다. 고등의 유기체인 인간은 고도의 구 조를 갖는 훨씬 복잡한 사회이다. 인간 신체는 분자나 전자와 같은 보조적인 무기적 사회들을 세 포에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인격성(personality)과 같은 지배적인 결합체는, 자신의 고유한 주체적 지향의 강도를 높혀가기 위하여 주위환경과의 상호작용 가운데 추종적인 결합체를 활용하 기도 한다. 이렇듯 인간을 구성하는 결합체의 일부는 매우 독창적인 반응을 하는 살아있는 특성 을 보여준다.

인간은 그 자신을 구성하는 '분자'나 '전자'와 같은 무기적 사회에서부터 '감각'이나 '의식'과 같은 유기적 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풍부한 각 결합체들이나 사회들의 위계구조가 체계적으로 통 합된, 매우 고등한 유기체이다. 이러한 고등한 유기체의 특징은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복잡다단하 게 얽혀있는 중층의 사회들 내부의 무관련성을 제거하고, 자신 내부의 상이한 위상들의 결합체와 사회를 일관된 방식으로 통일한다. 즉 신체의 임의의 부분들이 백터적으로 전달되는 상이한 지배 력들을 효율적으로 통합한다. 위장에 통증이 온다는 하나의 판단이 이루어지기 까지에는 미시적 단위에서 출현하는 엄청나게 상이한 물리적 느낌들―갖가지 미시적인 차원의 통증들―이 하나로 통합된 개념적 느낌이다.

결합방식이 고도로 조직화된 유기적인 사회일 수록 개념적 새로움의 창출은 더욱 활발해진다. 특 히 인간과 같은 고등의 유기체의 특징은 의식의 고양된 행위인 집중을 통한 <대비>contrast로 사물들의 잡다성에 기인한 물리적 느낌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서 사물들의 물리적 느낌을 고도의 개념적 느낌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언 어의 출현은 고등한 유기체의 특징인 고도의 추상화 때문에 가능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추상은 주위 환경을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탁월한 기능인 것 이다. 인간은 저 밤하늘의 별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저 별에 '별'이라는 고도의 추상화, 즉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고등한 유기체가 시도하는 고도의 추상화의 기능은 단지 인간의 언어적 인 차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신체 밖의 별을 눈에 집어넣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반짝이는 별을 인간은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신체 밖의 별을 자신의 신체와 관련된 기 하학적인 영역으로 '추상화'시킨다.[20] 돌은 저 별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별을 본다. 이렇 게 본다면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할 수 있고 자연과 사물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가 고도로 구조를 갖는 고등의 유기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고도로 구조를 갖는 사회로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정신이란 신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능으 로 이해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적 견해와는 정면으로 대립된다.[21] 인간은 낮은 유형의 살아있는 사회와 높은 유형의 살아있는 사회가 위계적으로(hierarchically) 결합된 유기체이다. 보 다 낮은 유형의 사회는 훨씬 더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보다 높은 유형의 사회는 그 이하의 계 기들의 풍부함을 자신의 것으로 향유한다. 두뇌는 다양한 사회에서 계승되는 독특한 풍부함을 충 만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조정된 고도의 사회이다. 신체의 절묘한 유기화(organization)에서 출현 하는 다양한 느낌들이 통합되면서 계승되는 새로운 영향력을 두뇌는 통제하고 향유하며 다시 새 로운 방식으로 고양시킨다. 낮은 유형의 사회에서부터 두뇌와 같은 고도의 유형의 사회로의 계승 은 물리적 극에서 정신적 극으로의 백터적 진행을 의미한다.

실로 모든 존재는 <정신적 극>mental pole과 <물리적 극>physical pole의 양극적 특징이 내함되 어 있다. 인간과 같이 고도로 구조를 갖는 사회는 바로 정신적 극의 활동이 현저하게 두드러지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돌의 사회에 비해 인간의 사회는 보다 높은 유형에 속하는 고 양된 사회인 것이다. 인간은 우리의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체계이다. 또한 생명 형태의 차원에서 특히 인간 정신은 그 최고의 단계이다.[22]

4. 소멸하는 현실적 존재 : "존속하는 인간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모든 현실적 존재는 그 과정의 종식 단계에서 소멸한다. 만약 현실적 존재가 '주체적'으로 소멸하 지 않으면, 주체로서의 '현실적 존재'와 세계에 대한 현실적 존재의 '경험' 사이에 결코 만날 수 없는 심연을 남겨놓기 때문이다. 즉 불변의 '나'가 있다고 가정하면, 한신을 통하여 변화하지 않는 '나'와 한신을 통하여 변화된 '나' 사이의 뿌리깊은 해리(解離)는 결코 해명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현실적 존재는 경험의 불변적인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소멸하는 존재의 본성을 직 시한 헬라클레이토스의 "우리는 결코 동일한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는 가르침과 일치한 다.[23]

현실적 존재가 소멸하는 그 계기는 세계의 <이접적 다양성>disjunctive diversity의 국면이다. 하 지만 현실적 존재가 소멸되면서 그것은 <파악>prehension을 통하여 새로운 현실적 존재의 일부 를 구성한다. 새로운 현실적 존재는 선행하는 현실적 존재를 자기 속에 파악하면서, 다(多)가 일 (一)이 되는 방식으로 그 본래의 것으로 된다. 이제 세계는 <연접적 통일성>conjunctive unity의 새로운 국면으로 전진한다. 이렇게 다자의 <공재성>togetherness에서 다자의 어떤 존재와도 다른 새로운 일자가 출현하는 것은 사물의 본성이다.[24] 여기에서 변화를 감내하지 않는 불변적 주체 로서의 현실적 존재라는 개념은 완전히 폐기된다.

인간이라는 고도의 사회 또한 현실적 존재들의 결합체이다. 이러한 이유로 시공의 흐름 안에서 불변의 인격적 동일성(personal identity)을 유지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변 화 속에 부분적 동일성을 한시적으로 유지해가는 존재이다. 인간 존재는 동일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동일성은 비동일성의 특수사례이다. 인간의 신체를 주목해 보자. 신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분자들을 잃어버리면서 또한 분자들을 획득하는 취산(聚散)의 구조를 지니고 있 다. 이럴 때 신체와 자연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 또한 심각한 아포리아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인 간의 인격은 자기를 실현하는 모든 역사적 <계기>occasion들의 <계승>succession이다. 오히려 인격은 인간이 경험하는 불연속적인 계기들이 새롭게 전환되어 개념적으로 통합된 계승의 경로라 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바로 인격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불연속에서 파생되는 연속성의 줄기 들인 것이다. 그리고 인격은 변화 안에서 통일을 구현해 나아가는 변통(變通)의 구조를 지니고 있 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을 변화 안에서 통일을 구현해 나아가는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의 전제는 절대 적 동일성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흐르는 강물을 세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변화무쌍한 세계 안에서 그의 고유한 <주체적 지향>subjective aim을 구현하고 실현해 나아가는 모험의 존 재이다. 흐르는 세계 안에서 변화하지 않고 자기동일성을 지켜내는 붙박힌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흐름 가운데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며 구현해 나아가는 그 모험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기 에 유동하는 세계 안에서 영속성을 실현하는 인간의 모험에는, 청춘의 꿈과 비극의 결실이 서려 있다.

5. 새로움으로서의 현실적 존재 : "생명은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어떠한 현실적 존재도 그 자신의 만족을 의식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와 같은 인식 은 그 과정의 구성요소가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됨으로써 만족을 변경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 다.[25] 이런 의미에서 현실적 존재는 결코 주체적 <만족>satisfaction에 도달하지 못한다. 만족은 항상 객체적이다. 만족은 자기 자신을 느끼는 일이 없다. 그래서 현실적 존재는 끊임없이 <주체 적 지향>subjective aim을 간직한다. 또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적 존재의 최종적 결단 뒤에도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primordial nature은 현실적 존재 안에 남아있다. 이 현실적 존재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은 <비전>vision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은 세 계를 향한 비전의 완전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는 끊임없이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희망'과 '소 망'을 의미한다. 특히 인간과 같이 고도로 구조화된 사회는 현실세계의 물리적 경험 위에 비사회 적 결합체를 파생시킨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같은 고등의 유기체는 외적 자극에 대한 독창적인 반작용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나무는 번개를 맞지만 인간은 피뢰침을 만든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생명은 물려받은 것에 자신의 새로운 사실을 포함하려는 경향이다. 즉 생명이란 자유를 얻 으려는 노력이다.

생명이란 물리적 자극에 대한 개념적 반작용이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이해는, 생명 현상을 불변 하는 실재의 생기(生氣)로서 파악하는 입장과는 서로 대립된다. 생명이란 입자적 사회에 의해 점 유된 공간의 특성이 아니라 <공허한 공간>empty space의 특성이라고 화이트헤드는 강조하고 있 다. 또한 생명이란 단지 현실적 존재가 경험하는 계기들을 물리적 계통으로 묶은 결합체가 아니 라, <개념적 역전의 범주>Category of Conceptual Reversion[26]에 따라 도입된 새로움을 의미한 다.

생명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정의는 문명의 기저에 깊이 스며있는 관념인, 존속하는 영혼불멸에 대 한 일반적인 믿음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그에 의하면 영혼은 일정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영속적인 실재가 아니고, 살아있는 물리적 계기들의 다자성(多者性)을 축출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개념적 반 작용이다.[27]

6. 신의 본성이 관여하는 현실적 존재 : "생명은 하나님의 본성을 주체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현실세계는, 미약한 인간 지성으로서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영원한 관념들이 관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적인 사물들은 영원적인 사물에 관여함으로서 생겨난다. 현실적 존재 는 자기 시간을 갖고 세계에 새롭게 출현한다. 하지만 영원한 관념은 결코 변화하지 않는 불멸의 순수한 가능태이다. 그것은 더 이상 변화를 감내하지 않고 스스로 존립한다. 파랑에서 파랑새가 나오지 역은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현실적 존재의 생성에 <진입>ingression하지만, 그 자신은 결 코 변화하지 않는 순수한 가능태를 화이트헤드는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라고 부른다. 이러 한 최고도의 추상성인 영원적 객체는 최초로 하나님에 의하여 개념적으로 파악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주의 기원(Genesis)에 대한 형이상학적 구성을 발견한다. 즉 우주에 있어 서 원초적으로 창조된 사실은 영원적 객체의 다양성 전체에 대한 무제약적인 <개념적 가치평 가>conceptual valuation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primordial nature이다.[28]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은 모든 영원적 객체를 직시한다. 이제 영원적 객체를 명상한 하나님의 원 초적 본성은 현실적 존재의 합생과정에 진입한다.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이 현실적 존재에 짜맞추 어 들어가는 과정에서, 모든 현실적 존재는 개념적인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을 그 자신 안에 간직 하면서 고유한 가치를 물리적으로 실현한다. 바로 그 현실적 존재가 주체적 지향을 통하여 실현 한 현실세계가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consequent nature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원초적 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은 양극적이다.

첫째,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향해 그들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촉진한다. 이것은 세계를 향해 자신의 뜻을 구현해 나아가려는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이다. 둘째, 세계의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에서 파생되는 주체적 지향을 간직하며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새롭게 실현 해 나아간다. 이것은 하나님의 촉진에 대한 피조물들의 주체적 결단과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의 미한다. 셋째, 피조물들의 창조적 전진의 결과로서 출현한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시 응답한다. 이것은 새롭게 결정된 세계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이다.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은 모든 존재들이 직면해 있는 사멸(死滅)의 숙명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 을 실현하도록 설득하는 욕구의 영원한 충동이다. 이 욕구가 "사랑"이다. 그리고 신은 구체화의 원리이다. 이제 모든 현실적 존재는 그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면서 전진해 나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현실적 존재는 하나님의 흔적들이다.[29]

하지만 모든 현실적 존재는 동시적 세계의 존재이다. 동시적 사건의 정의는 그것들이 상호간에 인과적으로 독립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동시적 계기(A와 A')는 그 어느 쪽도 다른 쪽 의 과거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적 계기는 자기 독립의 절대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동시성은 모든 존재의 동등한 위상을 지시한다. 거기에는 비교도 없고 가치도 없다. 바로 그것은 동시적 존재들의 연대성이 상실됨을 의미한다.

동시적 존재들은 상호 독립하기에 서로 연대할 수 없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부재(Deus absconditus)의 자리이다. 하지만 동시적 세계의 타자성은 이제 세계의 연대성으로 전진한다. 동 시적인 세계가 경험하는 <직접성의 일치>Unison of immediacy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30] 그 자리는 하나님의 현존(Deus revelatus)의 자리이다.[31] 하나님에 의하여 동시적 세계의 현실적 존재들은 세계와의 조화를 구현할 수 있다. 이 본성이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이다. 그것은 하나님 의 결과적 본성에 근거한 모든 현실적 존재의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라질지도 모르는 현실적 존재들의 <이접적>disjunctive 다수성을 <연접 적>conjunctive 통일성으로 변형시키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다양성 안에서의 통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현실적 존재, 즉 모든 생명은 하나님과 닿아있다. 바로 모든 피조 물들은 하나님이 관여하는 세계의 기적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애정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속 할 수 없는 존재들은 이제 연속성을 획득하게 되고, 한 순간의 먼지로 와해될 수 밖에 없는 과거 의 풍요로운 보배들은 결코 사멸하지 않고 현재로 흘러 들어오게 된다. 세계의 피조물은 하나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행 17:28). 또한 세계의 피조물은 그 세계 전체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온전한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서 진리, 아름다움, 예술, 모험, 평화 가 출현한다. 하나님은 대립을 대비로 만드시고, 상실을 상생으로 만드시고, 고난을 구원으로 만 드시는 영원한 비밀이다.

화이트헤드의 하나님은 세계를 향하여 압도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는 초월적인 창조자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 존재들을 향하여 새로운 가능성들을 실현하도록 자극하고 고무하는 동반자이다. 하나님은 세계의 그 어떤 존재도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지 않도록 애정어린 배려를 드러낸다. 화이트헤드의 하나님은 황제의 이미지도, 도덕적인 힘을 의인화한 이미지도, 궁극적인 철학적 원 리의 이미지도 아니다. 하나님은 통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도덕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 나님은 자신을 내어준다. 그는 자신이 품고 있는 개념적 조화의 압도적 합리성을 그의 인내 속에 서 행사한다.[32]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은 피조세계를 '향하여' 그들을 보다 자유롭고, 평화롭고, 고양된 생명으로 촉매한다. 그 행위가 바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은 피조 세계를 '통하여' 세계의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경험한다. 그 행위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세 계의 구원이다.

하나님은 세계를 구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이다. 또한 하나님은 세계를 통해서 구원 을 얻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이다. 그것은 바로 "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신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33]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수난 가운데 하나님은 계신다. 왜냐하면 수난과 고통의 치유 없이는 하나님의 온전한 구 원이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계가 아파하면 하나님도 아파하신다. 그는 피조물의 구원 을 향한 갈망이 마감되고 평화가 온전히 실현될 그 날까지 피조세계와 함께 지금도 구원을 성취 하고 계신다. 동시에 모든 피조물, 모든 생명,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깊고 숭고한 뜻을 간직하며 자신을 새롭게 갱신해 나아간다.

7. 객체적 불멸성으로서의 현실적 존재 : "생명은 불멸한다."

현실적 존재는 자신을 실현해 나아간다. 그것이 생명이다. 인간 생명은 더욱 고도로 복잡하고 고 양된 방식으로 자신을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고등한 유기체인 인간은 여타 생명의 실현방식 과는 다른, 자유와 창조와, 아름다움과 평화를 지향한다. 또한 하나님은 세계의 모든 가능성을 남 김없이 구현하도록 인도한다. 여기에서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은 무엇인가를 성취 하기 위하여 지금도 과거를 잃지 않고 전진하는, 우주의 근원적인 본성이다. 현실적 존재는 그 과 정의 종식 단계에서 소멸한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는 객체적 불멸성을 통하여 객체적으로 불멸한 다. 존재는 소멸하나 객체적 불멸성을 통하여 불멸한다.

비극에 접해보지 못한 생명은 그 청춘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려 한다. 즉 모든 존재는 수고 하고 길쌈한다. 그러나 육중하게 출현하는 세계의 새로움은 존재를 끊임없는 소멸의 한복판으로 밀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존재가 이루지 못한 청춘의 꿈은 비극의 결실로 마감되지 않는다. 존재는 객체적 불멸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으로 수용 된다. 시간적인 피조물은 새롭게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 안에서 보존된다. 구원을 향한 피조물의 열망은 안타깝게도 사멸하지만 이제 불멸하는 하나님의 본성으로 편입되어, 피조세계의 모든 가 능성을 남김없이 구현하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더욱 재촉한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은 소멸하는 세계를 영원한 세계로 전환한다. 그리고 시간적인 피조물들이 쓸쓸하게 남기고 간 미완의 가능성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실현한다. 이러한 미완의 가능성을 최종적으로 실현해 나 아가는 과정이 우주의 '아름다움'이다. 즉 다양한 가치의 궁극적인 조화가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은 최종적으로 '평화'를 목표로 한다. 진실로, 평화는 모든 생명이 자신들의 가치 를 충만하게 구현하면서 조화를 잃지 않는, 불멸하는 생명의 궁극적인 왕관이다. 그것은 바로 하 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 중에 평화이다(눅 2:14).

VI. 결론 : 인간은 새로움이다

화이트헤드는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생명과 인간을 이해하였다. 그는 모든 <현실적 존재>를 무엇 인가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보았다. 그것은 현실적 존재로 구성된 우리 우주 또한 하나의 살 아있는 생명임을 보여준다. 그 생명은 서로가 서로를 관여하는 힘에 의하여 전개된다. 이 우주와 자연이 품고 있는 생명의 본성은 관계성, 자유, 새로움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는, 생명 은 인간만의 전유물이라는 발상에 대한 전면적인 교정을 요청한다. 화이트헤드는 생명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인간 중심'에 대한 모든 정당화를 일단 무효화시킨다. 또한 생명의 형식은 상호의존 적임을 우리는 이렇게 뒤늦게나마 깨닫는다. 바로 '자연의 계층적 질서'를 세운 화이트헤드를 통 해 우리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깊은 골을 극복할 수 있는 가교를 발견한다.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가늠해 볼 때, 어쩌면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근거는 흐르는 자연 에 대한 '약탈'일런지도 모른다. 저등한 유기체의 풍부한 요소는 고등의 유기체에 의하여 유용하 게 전유(專有)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ordinary stubborn facts 일런지도 모른다. 실로 인간은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 해야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우리는 질문 을 던진다. 왜 인간은 자연을 필요로 하는가? 사실 인류는 그 질문에 대하여 성실한 해명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그 대답을 고구(考究)하는 인류에게 큰 빛을 제시해준 다. 자연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길은, 자연에 대한 '약탈'의 대지를 넘어서서 새로운 방식으로 자연과 우주에 대한 '향유'를 그들에게 분유하는 것이다. 자연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를 향하여 왔음을 확증하는 것이 우주에 위치한 인간의 과제이다.

인간의 배후에 자연이 있지만 인간 앞에는 신이 있다. 분명히 인간의 모태는 자연이다. 하지만 인 간은 자연에 의해 환원될 수 없는 그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한다. 특히 신비(神秘)에 가까운 존재 인 '인간'이라는, 비교적 늦게 출현한 고등의 유기체는, 진리, 아름다움, 예술, 모험, 평화를 여는 문명화된 존재다. 현실적 존재의 창조적 본성은 인간의 문명을 통하여 가장 온전히 드러난다. 특 히, 모든 현실적 존재에도 유효하겠지만,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에 관여하면서 인간과 더불어 세계 를 새롭게 창조해 나아간다. 그 과정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짜여들어감을 의미한다.

진정한 창조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을 향해 진입해 들어오는 순간 순간의 새로움에는 악(惡)이 거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는 과거의 풍부한 유산들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미래에서 다가오는 악을 새로운 방식으로 수용함을 의미한다. 바로 하나님은 인간의 과거를 보존 하고 계시며, 인간과 함께 미래를 여시는 장엄한 일련탁생(一蓮托生)의 수난자이다. 이 수난은 결 국 생명의 궁극적인 왕관인 평화를 이룩할 때까지 영원히 진행된다. 피조세계의 모든 요소가 그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실현하면서, 동시에 피조세계 전체가 평화를 구현하는 그 날이 오기까지 세계는 창조의 과정을 멈추지 않는다. 그 과정은 모험이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소멸하지 않고 더 욱 다양해지며 진, 선, 미, 평화, 조화를 궁극적으로 갈망하고 형성하는 미완의 모험이다.

그는 형이상학의 기반 위에서 인간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인간론은 궁극적인 일반성의 기술인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삼고 있기에, 우리는 인간의 지위를 더욱 드넓은 전망 안에서 이해할 수 있 었다. 그의 형이상학은 인간을 변화 가운데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하고 의미를 실현하는 존재로 설명한다. 또한 인간은 매 순간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을 품고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존 재로 탄생하며, 하나님의 결과적 본성에 힘입어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하 나님과 더불어 미래와 융합해 간다. 또한 인간은 결코 사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자체로 구원을 향한 갈망을 마감하지 않는 존재이다. 그는 그가 지으신 피조세계에 깊이 관여하듯이, 인간에게 관여하신다. 특히 이 세계에 새로움과 창조가 출현하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리인 "나"(I, Ich)가 바로 인간과 더불어 수난당하시고 고통당하시고 느끼시는 하나님이 관여하는 자리임을 깨닫게 된 다.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유동하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고유한 <새로움>의 각인(刻印)은 시작된다.
 

■각주

[1] A.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ed by D. R. Griffin and D. W. Sherburne(New York : The Free press, 1978)[A.N. Whitehead(오영환 역), {과정과 실재}(서 울:민음사, 1991)]. 이하 화이트헤드의 신조어나 그의 고유한 개념은 < >표로 표시한다.

[2] 노드롭(F.S.C. Northrop)은 화이트헤드의 언어세계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화이트헤드의 산 문은 역설적이다. 처음에는 손질을 지나치게 한 것 같고,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다가도 계속 해서 읽어 내려가다보면, 어느새 우리의 경험적 사실들이 거의 처음이라 할 정도로 직접적이면서 도 구체적으로 관찰되고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노드롭, "화이트 헤드의 산문과 구체적인 경험", {사람 자연 신}(서울 : 대원사, 1989), pp.141-155.

[3] PR 208(382).

[4] "생명체를 측정하거나 해부하는 데에는 분할의 작용이 필요한데, 이는 생명체의 본성에 대한 부정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본성속에는 개념이나 형식적 패턴 또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완강한 거부, 그러므로 지성에 대한 완강한 거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 통나무, 1997), p.262.

[5]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오류를 <단순정위의 오류>fallacy of simple location라고 불렀다. 단순 정위란 물질이 시간, 공간 내에 단순히 위치를 점한다는 사고방식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한 송이 꽃의 출현은 우주 전체와 얽혀서 풀 수 없는 사건이다. 저 한송이 꽃의 출현 사건을 저 시 간과 저 공간만의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넌센스이다. 사건은 시공에 출 현하지만 시공의 사건 그 자체가 사건의 전체는 아니다.

[6]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오인하는 오류이다. 이 오류는 추상관념을 물화(物化)시키는 오류이다. 즉 어떠한 관념을 정의할 때 요청되는 추상성의 정도를 무시할 때 발생하는 오류이다. <한신대학교>는 추상 관념 이다. 그런데 양산리에 세워진 장공관과 필헌관이라는 건물 빨간 벽돌에서 한신대학교를 찾고, 그 벽돌에는 한신대학교라는 성분이 없기 때문에 <한신대학교>는 없다고 주장하는 오류가 바로 잘 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의 예이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의 사고가 이러한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 음을 매우 강조한다. cf. PR 7(57).

[7] 화이트헤드가 인류의 사고방식 안에서 극복되어야 할 9가지의 사고습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변철학에 대한 불신>이다. 그에 의하면 사변(思辨)은 '공허한 언어놀음'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 을 추구함에 있어서 절실히 요구된다. 둘째, <명제의 충분한 표현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신뢰>이 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직관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는 시(詩)를 요청한다. 셋 째, <능력심리학을 함의하고, 또 그것에 함의되어 있는 철학적 사고의 양식>이다. 경험의 본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심리학에 호소하기 어려운 이유는 심리학의 상당부분이 감각론적 신화라는 가설 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의식과 감각, 정서와 목적, 인과 작용과 같은 매우 추상적 인 관념에 기반한 <능력>이라는 관념과 이에 기반한 사고양식을 그는 거부한다. 넷째, <주어- 술어라는 표현 형식>이다. 주술구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라는 권세의 산물이다. 아리스 토텔레스의 <제일실체설>과 <술어설>은 제일실체들의 이접(離接)과 속성들의 연접(連接)이라는 결과를 그의 한계로 안고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산물인 보편자와 개별자, 다른 개 별적 실체 속에 내재할 수 없는 개별적 실체, 관계의 외재성의 구조는, 하나같이 우주의 <연대 성>을 애시당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천년간을 지탱해 온 착종된 사유의 금형(金型)인 저 논리학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논법(論法)으로 우주를 설명하기 에, 그만큼 그의 언어가 우리에게 생소하고 난해하게 다가올 뿐이다. 다섯째 비판은 <지각에 관 한 감각주의적 학설>이다. 감각주의적 원리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의 주체적 형식 없이 그 대로 마음에 품는 것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사물의 질서에 대한 감각 이상의 무엇인가를 주 체는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서 우리 자신을 사상한다면 다수의 사 물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섯째는 <공허한 현실태의 학설>이다. 주체적인 관계를 결여해도 주 체를 넘어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진정한 사물이 <공허한 현실태>이다. 하지만 화이트 헤드는 그러한 <공허한 현실태>를 거부한다. 화이트헤드가 거부하는 <공허한 현실태>는, 미시물 리학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파악에는 이미 주체가 관여되어 있다는 과학적 발견과 유사성을 보여 준다. 일곱째, <순수한 주관적 경험으로부터의 이론적 구성물로서의 객관적 세계에 대한 칸트적 학설>이다. 화이트헤드는, 의식은 경험을 전제로 하지만 경험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고 본 다. 화이트헤드는 우주를, 객관적 여건이 주체적 만족으로 이행해 들어가면서 주체를 형성하는 과 정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에서부터 세계가 출현한다고 보는 칸트적 학설과는 달리, 화 이트헤드는 세계로부터 주체가 출현한다고 이해한다. 여덟째, <귀류법에 의한 독단적 영역>이다. 귀류법(歸謬法)은 어떤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려 할 때 그 명제의 결론을 부정함으로써 가정 또는 공리등이 모순됨을 보여 그 결론이 성립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귀류법은 수학이나 자연 과학에서 애호되는 논증법의 하나이다. 하지만 수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사상이나 철학에 귀류법을 남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사상이나 철학이 궁극적인 일반성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목표'이지 '출발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류법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거짓으로 판명되는 하나의 전제 때문에 의해 사상이나 철학 전체를 버리는 것은 목욕물과 아기를 모두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 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모순이 선행하는 오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할 수 있다는 신념> 이다. 하나의 사상이나 철학체계에 있어서 <논리적 모순>이란 오류중에서 가장 근거가 없는 것 이고, 대개는 사소한 것이라고 당대의 논리학자인 화이트헤드 자신은 말한다. 특히 이러한 9가지 의 잘못된 사고습성 가운데에 넷째, <주술구조>에 관한 논의는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과 세계를 실체와 속성의 관계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사고를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또한 여섯째, <공허한 현 실태>에 관한 논의는 세계와의 관계성을 배제해도 하나님은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고를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실질적으로, 우주에 관한 궁극적인 해명을 보여주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신 학은 하나님과 세계의 긴밀한 상호 관계로 귀결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다 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하나님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이다. 화이트헤드가 지적 한, 극복되어야 할 인류의 사고방식 9가지는 PR xiii(42) 참조. 신과 세계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논 의는 PR 제5부 2장 신과 세계, pp.342-351(588-603) 참조.

[8] 화이트헤드의 신조어인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인 사물>final thing을 지칭한다. 그러나 <궁극적>final이라는 표현은 틸리히(Paul Tillich)의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ty)와 같은 신적인 대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궁극적>이라는 의미는 현실적 존재보다 더욱 현실화된 존재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궁극적 실재는 유한한 존재와 대비되는 신적 개념이지만, 현실적 존재는 가능성과 대비되는 완전한 현실태의 개념이다. 현실적 존재는 우 주만물을 구성하는 기본단위이며 현실적 존재만이, 가능성이 세계로 드러난 최종적인 현실태라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 조차도 살아계신, 실재적인(actual) 하나님이 될려면 현실적 존재의 옷을 입고 나타나야만 한다. 이 살아있는 우주는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현실적 존재들이 서로 연대하며 전개되는 과정이다. 참조, PR 18(73).

[9] <욕구>appetion와 <향유>enjoyment는 현실적 존재의 실현에 합생하는 두 극이다. 욕구는 개 념적인 극이고 향유는 물리적인 극이다. 욕구는 개념적이기 때문에 본성상 모순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무한이 가능하다. 향유는 물리적이기 때문에 본성상 배타적이다. 이러한 두 극은 신과 세계 의 본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전망을 보여준다. 즉 어떻게 신은 일자(一者)일 수 밖에 없나? 동시에 어떻게 세계는 다자(多者)일 수 밖에 없나? 하는 물음에 대한 해명을 우리는 여기 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신은 개념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보다 우선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향 유보다 욕구가 우선적이다. 신은 그 무한성의 몫을 욕구의 우선성에서 이끌어낸다. 세계는 물리적 인 것이 개념적인 것보다 우선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욕구보다 향유가 우선적이다. 세계는 한정성의 몫을 향유의 배타성에서 이끌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무한한 욕구에 기인하여 신은 일자 (一者)가 된다. 배타적인 향유에 기인하여 세계는 다자(多者)가 된다. PR 348(598).

[10]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는 모든 존재하는 것의 존재구조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으로 정 의한다. 첫째는 개체화와 참여(Individualization and Participation), 둘째는 형태와 역동성(Form and Dynamics), 셋째는 자유와 숙명(Freedom and Destiny)이다. 첫째, 틸리히의 개체화와 참여 는, 모든 존재가 갖고 있는 주체성과 연대성이라는 이 양자적 요소를 지시한다. 화이트헤드는, 모 든 존재는 주체(Subject)와 자기초월체(Superject)라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주체는 존재의 자기실 현의 차원이고, 자기초월체는 존재의 연대적 실현의 차원이다. 둘째, 형태와 역동성에 있어서, 모 든 존재는 그 존재를 규정하고 보존하는 내적인 형태와 그 존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운동성이 동시에 요청됨을 의미한다. 이에 상응한 화이트헤드의 범주는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와 창 조성(Creativity)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원적 객체는 존재에 실현에 진입하는 한정의 형식(Forms of Definiteness)이다. 창조성은 우주를 매 순간 새로운 방식으로 견인하는 우주에 있어서 궁극적 인 개념이다. 존재는 창조성을 통하여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나아간다. 셋째, 자유와 숙명에 있어, 자유는 존재의 필연성을 초월하는 측면이다. 숙명은 자유에 의해 주어졌고 형성된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둘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로운 존재만이 숙명의 존재이다. 이에 상 응하는 화이트헤드의 개념으로는 자유(Freedom)와 결정성(Destiny)의 범주라고 할 수 있겠다. 또 한 현실적 존재의 측면에서 보자면, 현실적 존재에게 가능성을 부여하는 신의 원초적 본성과, 현 실적 존재를 물리적으로 파악하여 현실적 존재를 그에 걸맞게 세계에 등급화(gradation) 하는 신 의 결과적 본성이 자유와 결정성이라는 양대 근거가 된다. 참조, Paul Tillich, Sytematic Theology, Vol. I(Chicago :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pp.174-186.

[11] 현실적 존재는 과정이고, 이 과정은 <만족>이라는 완결된 통일성으로 귀결된다. 완전한 통 일성으로서의 <만족>은 현실적 존재의 소멸이면서, 불멸이다. 즉 현실적 존재는 경험하는 주체인 동시에 그 경험의 자기초월체이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의 상호의존의 관점에서 보면, 한 현실적 존재가 만족을 통하여 '소멸'하는 그 사건은 이미 그를 둘러싼 상호의존의 그물망에서 어떠한 영 향력을 행사하는 '불멸'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으로 소멸하지 만 객체적으로 불멸한다. 또한 현실적 존재가 만족을 실현하는 과정의 성격을 의도한 개념을 <주 체>라고 한다면, 만족을 통하여 후속하는 현실적 존재에 여러 결과를 수반하는 성격을 의도한 개 념을 <자기초월체>라고 할 수 있다.

[12] '생명'은 주위의 환경과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지면서 무수한 가능성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더욱 다양한 관계를 가지면 가질 수록 그 존 재는 더욱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체의 생명에서 볼 때 이 과정은 미완의 자신을 풍 부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이다. 우주라는 생명에서 볼 때 이 과정은 우주의 각 요소들의 관계성과 연대성이 더욱 심화되면서 우주 자체가 깊어지는 과정이다. 샤르뎅은 이러한 생명과 우 주의 본성을 '복잡화-의식의 법칙'(The Law of Complexity-Consciousness)이라고 말한다. 융은 이러한 본성을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참조, 샤르뎅, {인간현상}(서울 : 한길 사, 1997), pp.275-278. 서남동, "떼야르 드 샤르댕의 '오메가 포인트'", {전환시대의 신학}(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76), pp.311-348. C.G. Jung, Man and his Symbols(London: Aldus Books, 1964), p.85.

[13] PR xiii(43).

[14] PR 22(80).

[15]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자연속의 <사건>들은 대충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신체와 정신을 갖는 인간의 존재이다. 둘째 유형은 곤충이나 척추 동물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동물생명체이다. 셋째 유형에는 모든 식물 생명체이다. 넷째 유형은 생명을 지닌 단세포들 이다. 다섯째 유형은 무기접 집합체이다. 여섯째 유형은 현대 물리학의 미세한 분석에서 드러나는 미소한 규모의 사건이다. A.N. Whitehead, Modes of Thought(The Free Press : New York, 1968), pp.156-157.

[16] John B. Cobb, Jr., A Christian Natural Theology(Philadelphia : The Westminster Press, 1974), p.160.

[17] PR 66(156).

[18] 이 피조세계에 출현하는 악(惡)의 문제를 화이트헤드의 신정론(Theodicy)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그에 의하면 악은 어떠한 가능성이 시의(時宜)에 맞지 않게 현실세계로 출현하여 흘러 들어오는 사건을 의미한다. 우선 신은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이 시의적절하게 자신을 온전히 실현 하도록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신의 원초적 본성에 근거를 둔 가능성이 현실화 되는 국면에 서, 일부의 가능성은 부조화를 갖고 태어난다. 이 부조화, 즉 악은 다른 피조물과의 양립불가능성 을 의미한다. 이러한 악의 본성은 피조물의 성격이 서로 방해가 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악은 그 자체로 미미한 비중을 지닌다. 또한 악의 차원에서 보면 그들 자신의 부조화 때문에 어 둠속으로 사라져야 한다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신의 결과적 본성은 아직 다른 피조물 과 양립불가능한 그 세력을 양립가능할 수 있도록 재조정한다. 이에 의하여 피조세계의 존재들은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더욱 풍부하게 직조하는 계기로 삼는다. 결국 세계에 출현 한 악은 선으로 편입되거나 소멸하게 된다. 참조, PR 223(406), 340(586).

[19] PR 34(100-101).

[20]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고등의 유기체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오류중의 하나가 바로 <잘못 놓 여진 구체성의 오류>이다. 우리가 언어로 사용하는 '별'은 결코 구체적인 별이 아니다. 그 '별'은 고도로 추상화된 별이다. 기하학적인 시공의 영역에서 보이는 별은 결코 구체적인 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신체의 계승경로에 의해 해석된 '별에 대한 인상'일 뿐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기하 학적인 동시적인 세계는, 실은 나의 신체에 의해 해석된 일종의 '착각'인 것이다. 지금 1광년 떨어 진 별이 내 눈 앞에서 폭발한다. 그 별은 1년 전에 폭발했는데 나는 그 폭발을 지금 보고 있다. 지금 내 눈 앞에서 펼쳐지는 별의 폭발은 선행하는 1년전의 별의 폭발이 신체적 효과에 의해 변 형되어 현재의 기하학적인 동시적 세계 속에 투사된 개념적 느낌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신체적 삶 속에 반영된 시공적 세계 전체의 여러 양상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 별은 저 기에 단순하게 놓여있지 않다. 실로 화이트헤드의 언어, 상징, 지각, 신체적 효과, 동시적 세계에 대한 분석은 고도로 복잡하고 매우 난해하지만, 기존의 분석과는 분명 궤를 달리하는 매우 구체 적이며 탁월한 분석임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1] PR 108(223).

[22] 생리학자 카렐(Alexis Carrel, 1873-1944)에 의하면 "정신은 인간의 일면이긴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질에 특유한 것이며,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알렉시스 카렐 (이희구 역), {인간, 이 미지의 존재}(서울 : 한마음사, 1986), p.120.

[23] Johannes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I(Freiburg, Basel, Wien, 14, Aufl., 1987), p.27.

[24] PR 21(78).

[25] PR 85(185).

[26] 개념적 느낌은 물리적 느낌에서 파생되는 부가적인 느낌이다. 아주 거시적으로 예를 들어보 면, 한신대학교 신학과 이백여 학우들을 통하여 파악되는 물리적 느낌이 개념적 역전의 범주를 통하여 하나의 새로운 '한신성'으로 출현한다. 인간이라는 고등의 유기체는 원자, 분자, 세포, 내 장, 그리고 뜨거움, 아픔, 슬픔, 사랑, 증오 등등 수많은 감각들과 같은 물리적 위상들의 느낌들이, 개념적 역전의 범주를 통하여 새로운 개념적 느낌으로 통일된 위상이 바로 '나'(I), '인 격'(Personality), '영혼'(Soul)이다. 또한 미시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개념적 느낌은 가장 근본적인 현실적 존재의 합생의 과정에 있어서 자신에게 진입하는 '영원적 객체'의 관념적 극과, 자신의 과 거에서부터 계승되는 '현실적 존재'의 물리적 극과의 대비 속에서 종합되어 발생하는 새로운 느낌 이다. 다시 '한신성'으로 예를 들자면, 진정한 의미의 '한신성'은 과거의 전통을 통하여 전승되는 '한신성'(개념적 느낌)과 현재 내가 오늘의 역사 안에서 만들어나가는 '한신성'(물리적 느낌)과의 종합속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느낌이다. 참조 PR 248-249(448-449).

[27]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변화받지 않고 자신을 동일하게 지켜내며 존속하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당연히 영혼(Soul)도 영속하는 특성을 지니지 않는다. 영속하는 특성을 지니는 존속하는 영 혼을 주장하는 학설에 대하여 화이트헤드는 전적으로 부적절한 답변이라고 일축한다. 왜냐하면 만약 영혼이 존속한다면 영혼은 돌과 마찬가지로 독창적일 수 없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화이트헤드의 영혼에 대한 논의는 더욱 더 조심스러운 재해석을 요구한다. 우리는 "도대체 영혼 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의 물음을 잊고 살지만 지울 수는 없 다. 희랍사상의 전통은 인간 영혼의 절대 불멸성을 말한다. 그 전통은 오늘의 그리스도교에도 깊 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전통은, 구약성서의 다양성과 그 풍부함에 기인하여 체계적인 내용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인간 영혼을 불멸적 존재로서 말하지 않음을 조심스럽게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영혼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보다 현재의 생명에 대한 관심, 그리고 생명의 원천 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관심을 갖는다. 실로 우리는 영혼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서는 분 명한 대답을 발견할 수 없는, 심각한 아포리아를 만나게 된다. 화이트헤드의 인간 영혼(Human Soul)에 대한 논의는 John B. Cobb, Jr., A Christian Natural Theology, pp.47-91. 구약성서에 나 타난 영혼과 죽음 이해에 관한 논의는 김이곤, "죽음과 죽음 저편",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 다}(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79), pp.162-181. 죽음과 영생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학문 적으로 정리한 논의는 김경재,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영성 이해", {그리스도교 신앙과 영성}(서울 :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 1997), pp.217-239.

[28] "The primordial created fact is the unconditional conceptual valuation of the entire multiplicity of eternal objects. This is the 'primordial nature' of God." 여기에서 사실(fact)은 최 초의 신(God)을 의미한다. PR 31(94).

[29]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유비(analogia)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세계에 수육(受肉)하는 신을 기본적인 구도로 삼는 화이트헤드의 자연신학을 바르트와 부르너의 자연신학 논쟁의 구도 안에서 이해하려 할 때 혼란을 겪게 된다.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마이크로 한 개념과 자연신학과 관련한 매크로한 개념 사이의 부조화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19C 자유주의 신학적 결과에 기인하여 기득권자들의 자기합리화로 쓰여진 자연신학에 대한 '바르 트' 류의 비판을 화이트헤드의 자연신학에 다시 투영하는 관점은, 자연의 신학(Theologia naturea) 과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is)에 대한 구분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종의 넌센스라고 여겨진 다. 화이트헤드의 신학은 이런 의미에서 '자연의 신학'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신학의 가장 핵심 중점이 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Ankn?pfungspunkt)에 대하여 화이트헤드의 마 이크로한 개념을 통한 재해석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자연신학 논쟁이 함의하 고 있는 정치사회적인 맥락에 대하여서는 정미현, "바르멘 선언 제1항과의 관련성에서 본 자연신 학의 문제", {조직신학논총 제1호}(서울 : 한국조직신학회, 1995년 4월호), pp.85-101. 자연신학 논 쟁의 교의학적인 논의에 대하여서는 박봉랑, {교의학방법론 II}(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pp.208-223 참조.

[30] 레비나스는 무엇으로도 그를 볼모 삼을 수 없는 홀로 선 '자아'를 말한다. 동시적인 세계 안 에서의 존재는 철저한 독자성을 구현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불현듯이 엄습해 들어오는, 거부 할 수 없는 '타자'를 만난다. 이 자아와 타자의 만남은 신비(Myst?re)이자, 새로운 시간의 출현이 다. 이제 자아와 타자는 새로운 시간 속에 엮어지면서, 초월되며, 구원에 이른다. 레비나스는 <동 시적인 것>contemporaeousness의 철학적 의미와, 결코 영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재성>에 대 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사상을 독창적으로 그려 나아갔다. 레비나스는 미래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방식의 무한자의 이념에 근거하여 주체성을 변호하는 데 모든 관심을 기울인다. 아인슈타 인과 화이트헤드의 동시적인 세계와 레비나스의 동시적인 세계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 로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고유하고 유일하다. 하지만 흐르는 세계에서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신비이자, 구원인 것이다. 임마누엘 레비나스(강영안 역), {시간과 타자}(서울 : 문예출판사, 1996).

[31] 어떻게(how) <동시적 세계>인 하나님의 부재에서 <직접성의 일치>인 하나님의 현존으로 전진하는가? 하는 우주의 본성에 대한 해명은 형이상학의 과제이자, 한계이다. 그러나 실존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인간의 자리에 있어서 왜(why) 하나님의 부재에서 하나님의 현존으로 전진하는 가? 혹은 왜 전진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명은 신학의 과제이다. 성서신학자 김이곤 교수는, 고난당하는 자의 "탄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재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전환된다고 말한 다. 이 모든 전환은 결국 피조세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으로 집중된다. 또한 신음하고 고 난당하는 자의 "탄식"은 신에 대한 불경이나 불신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신에 대 한 강렬한 "신뢰"의 예표라고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탄식은 구원으로 가는 문이다." 김이곤, "버림받은 자의 신학", {구약성서의 고난신학}(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9), pp.180-192.

[32] 헬레니즘의 세례를 받은 전통적 유신론에 있어서 신은 무감각하고 동정심이 없는 존재로 전 승되어 내려온다. 11세기의 신학자 안셀름은 "우리의 경험에서 보면 당신은 동정적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동정적이지 않습니다."(Proslogum)라고 말한다. 13세기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타인의 비참함을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비참함을 추방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다"(Summa Theologica)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이 가장 선한 것을 피조물에게 촉진시키기 위해서 신은 피조세계의 느낌들을 전달받아 야 하며, 그리하여 피조세계에 의해 상대화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결과적 본성>은 피조세계에 대해 수용하고 응답하는, 언제나 피조세계에 의해 상대화되는 신의 본성을 지시하고 있다. 존 캅, {과정신학}(서울 : 열림, 1993), pp.61-68.

[33] PR 348(598).

 

신학의 미래, 한신대학교 신학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