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erwegs zur Theologie








관계성과 시간과 새로움을 통하여 바라본 아름다움의 문제



전 철


1. 서론

한 존재가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 안에는 대상이 왜 주체에 등장하는가? 하는 요소가 삭제되어 있다. 아름다움의 감정은 아름다움이 가능해지는 출발의 자리를 말해주지 않는다(아름다움과 관계성). 또한 과거에는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느꼈는데, 현재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아름다움과 시간). 혹은 과거에는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부조화의 느낌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 아름다움을 경험한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아름다움과 새로움). 나는 여기에서 '아름다움'이라는 정서는 '관계성'과 '시간'과 '새로움'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하려 한다.

2. 본론

우선 우리의 상식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존재를 정태적(static) 존재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아름다운 미모의 왕관을 수여받는 미스코리아 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의심의 시선을 던져본 적이 있었나? 혹은 미스코리아 진의 미모가, 시간의 흐름에 기인한 노화 이상의 변화를 동반한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나? 미스코리아 진의 아름다움은 시간의 변화와는 관계없는, 혹은 세월의 변화만큼만 변하는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는 이해된다.

이러한 우리들의 상식 안에는 아름다움을 내포하는 실재(Reality)는 자명한 것으로 은밀히 전제되고, 그 존재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주체는 수동적인 관계 안에서 그 아름다움을 단지 향유하는 꼴이 되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아름다움을 하나의 실재(Reality)의 술어로서, 혹은 하나의 속성으로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아름다움은 실재 안에 내재된 요소와 성분이라기 보다는 그 대상과 주체와의 관계 안에서 빚어지는 정서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아름다움은 실재의 속성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정태적인 속성이 아니다.

또한 아름다움이 실재의 현상이라기 보다는, 실재와 주체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일종의 현상(presentation)이기에 우리는 아름다움을 시간과의 관계성 안에서 고려해야 한다. 과거의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어느덧 시간이 흐르며 희미한 음영으로 퇴색된다. 결국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매우 일시적이고, 매우 계기적인 정서적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아름다움은 시간과는 동떨어진 정태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입장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아름다움은 유한하다. 시간의 흐름은 아름다움의 강렬함을 과거의 희미한 잔영으로 끊임없이 몰고간다. 아름다움은 시간을 볼모로 영원히 그 자리에 남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나 지금이나 미스코리아 진에 대한 느낌이 동일하다거나, 혹은 세월의 흐름에 기인한 그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의 소멸만큼만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견해를 부정한다. 어느 시점에 느낀 아름다움은 그 때 만큼만은 유효하다. 그 이후의 아름다움에 대한 동일한 감정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에는 불순한 이데올로기가 서로 얽혀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름다움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겠다. 아름다움은 주체가 향유하는 하나의 강렬한 감정이다. 그 향유는 유한하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경험한 개인의, 혹은 집단의 일반적인 감정을 계속 하나의 일반적인 감정으로 강요하거나, 유지하려는 경향에는 분명히 어떠한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름다움과 이데올로기가 서로 관련될 수 있다는 견해의 근거는, 아름다움은 하나의 정태적인 속성이 아니며, 또한 시간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 감정은 확장 혹은 퇴행의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아름다움은 새로움과 관련이 있다. 미스코리아 진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는, 그녀는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은 무화(無化)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자신을 넘어서는 자신의 약동이다. 형이상학에서 무(無)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내포한다. 하지만 유한한 존재에 있어서 무는 죽음을 의미한다. 동어반복은 무한자만이 향유할 수 있는 지성적 유희이다. 유한자에 있어서 새로움은 자기존재의 표징이다. 그리고 유한자의 새로움을 향한 전진 가운데 아름다움의 정서는 등장한다. 미스코리아 진의 아름다움보다, 가난한 소녀의 삶을 살려는 의지의 아름다움은 더욱 우리를 숙연케 한다. 화려한 얼굴을 드러낸 미모의 아름다움보다, 무엇인가 골몰하게 열중하는 청년의 등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지시하고 있다. 나른한 여름, 후끈거리는 전철 안에서 잠을 자는 빨간 립스틱의 아가씨보다, 땀을 흘리며 책을 쳐다보는 중학생의 시선은 더욱 아름답다. 이렇듯 우리가 체험하는 아름다운 정서의 강도는 새로움을 향한 노력에 비례한다. 아름다움은 세계의 사유화이다. 동시에 아름다움은 세계를 향한 초월의 의지이다. 이러한 새로움은 무엇이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다. 즉 무엇이 세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아름다움의 진입에 있어서 낮설음의 정감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이해된다. 낮설음의 감정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조화와 조정이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을 때 부과되는 감정이다. 이후 연속되는 주체의 대상에 대한 조정과, 주체의 대상에 대한 순응은 이제는 아름다움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매년 추운 겨울, 새로운 반편성을 마치고 1년동안 같이 생활해 나아가야 할 국민학교 동료들의 얼굴을 보는 아련한 유년시절의 경험 만큼 낮선 부조화의 경험이 있을까. 처음 사람의 얼굴을 만날 때 느끼는 낮선 감정은 인간의 매우 일반적인 요소인 듯 하다. 이렇게 볼 때 새로움은 우선 낮설음으로 다가오고, 낮설음의 조정과 순응이 아름다움이다. 낮설음의 조정과 순웅이 실패할 때 등장하는 정서가 추(醜)의 정서이다.

우리는 우선 아름다움이 대상의 속성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히려 외부와 내부의 관련성 안에서 아름다움은 빚어지는 것이다. 관계성안에서 아름다움을 논할 때, '대상'과 '대상의 속성'과 '주체'의 삼체(三體)는 '대상'과 '주체'의 이체(二體)로 축소된다. 전자를 이해함에 있어서, '대상'과 '대상의 속성'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범주 i와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범주 ii가 동시에 파악되어야만 한다. 문제는, 범주 i을 주체가 파악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 이 범주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범주 ii를 넘어선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위치가 은밀히 전제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볼 때 상대적 세계관에 있어서, 대상과 대상의 속성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범주 이해의 문제제기는 이미 오류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주객관계에 있어서 이미 주체는 온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체는 대상으로부터 소외를 의미한다. 이제, 이체의 세계관에 있어서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범주 혹은 근거에 관심한다.

3. 결론

첫째, 아름다움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성(Bezueglichkeit)은 아름다움의 자리를 '정태적인 대상'에서부터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옮겨 놓았다. 아름다움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의 잉여'임을 지시한다. 아름다움은 관계성 위에 새롭게 등장하는 정서이다. 또한 관계성은 아름다움의 근거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을 실현케 하는 구조에 관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

둘째, 시간성(Zeitlichkeit)은 아름다움의 생명력에 관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 어떠한 아름다움도 시간과 무관한 아름다움은 없다. 아름다움의 활력과 생명력은 영원하지 않다. 아름다움은 유한한 존재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강렬한 정서이다. 유와 무가 서로 얽힌 유한한 존재만이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다.

셋째, 새로움(Neulichkeit)은 아름다움의 정감적 색조에 관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논의함에 있어서 무엇인가 등장하는 대상의 육중한 현전, 주체의 조정과 순응은 매우 중요한 활동인 것이다. 즉 새로움은 대상과 주체의 상호 영향에 관한 논의를 가능케 하는 매우 유용한 단서이다.

 
1996년 1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