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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의 논문 <Das Problem der Hermeneutik>에 대한 고찰


전 철


Rudolf Bultmann, Das Problem der Hermeneutik,
Zeitschrift fur Theologie und Kirche 47(1950) S.47-69.

 
 


 




1. 들어가며

불트만이 1950년에 발표한 "해석학의 문제"(Das Problem der Hermeneutik)"는 '역사'와 '성서'에 대한 이해 가능성의 문제를 고찰한, 무게 있는 논문이다. 불트만은 여기에서 현대 해석학의 공로자인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에 의하여 새롭게 해명된 해석학의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들에 대한 성찰과 하이데거 사상에 대한 조우를 바탕으로 하여 불트만은 '전이해'의 문제, '본문'과 '물음'의 문제, '주관'과 '객관'의 문제, '신앙'과 '이해'의 문제를 주도면밀하게 고찰해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성서의 실존적 해석에 대한 바르트와의 이견에 대하여 정면으로 응수하며 자신의 논지를 선명하게 제시한다. 이에 우리는 이 논문을 통하여 불트만의 해석학적 관점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 하며, 특히 성서 해석학을 둘러싼 바르트와의 대립 국면을 조명하려 한다.

2. 본문

1.1. 딜타이(W. Dilthey)에 의하면 해석학(Hermeneutik) 즉 그의 말대로 '글에 고착된 생활 표현의 이해술'은 언제나 역사가 크게 움직일 때 크게 주목을 끈다.

1.2. 딜타이는 해석학이 주력하는 과제를 "그러한 인식(즉 개인의 위대한 모습들의 인식)이 가능하가? 그 인식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방법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 보았다. 자세히 말해서 "역사적 개인에 대한 이해가 보편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의미상 이미 주어진 남의 개성적 생활 표현을 보편 타당성 있는 객관적 이해에 도달시킬 수 있을까?" 즉 역사적인 한 인물 혹은 과거를 이해하는 데 객관성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므로 이 물음은 근본에 있어서 역사적 현상, 즉 이 현상이 어떤 개인에 관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현상 일반을 이해하는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학은 역사 일반에 관한 이해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2.1. 문헌 해석을 위한 해석률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발전되었고 그것은 이미 전통이 되었으며 대체로 그것에 이의 없이 따르고 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대로 첫째 요구는 구조와 문체에 따른 문헌의 외형적 분석이다. 해석은 우선 작품의 구성성분을 분석하고 개체를 전체에서, 전체를 개체에서 이해해야 한다. 어떤 해석이나 하나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schen Zirkel)을 돌고 있다는 견해는 이미 여기에서 유래한다.

2.2.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 역사 연구의 발전과 함께 작자 개인의 언어 용법의 문제는 '문헌의 상이'한 시대적 언어 용법의 문제로 발전했다. 그러나 언어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인식에서 차례로 역사적 발전 일반에 대한 인식, 즉 문헌은 모두 시대와 장소, 사정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인식이 얻어졌으며 이 지식은 이미 모든 사리에 맞는 해석에 없을 수 없는 전제가 되고 말았다.

2.3. 쉴라이에르마헤르는 이미, 참 이해가 단순한 기성 해석률을 추종하는데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았었다. 기성 해석률에 의하여 수행된 해석 ― 그의 학술어에 의하면 '문법적 해석' ― 에 '심리적'(psychologische) 해석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본 것은 한 작품의 구성과 통일성이 형식 논리적 문제 분석의 규범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작품은 오히려 일정한 한 사람의 생활 사정에서 이해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외형' 파악에 반드시 '내적' 파악이 와야 하는데 파악되어야 할 내용은 객관적 해석이 아니라, 주관적, '예지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2.4. 그러므로 해석은 문헌 현상에 대한 산 관계에서 '재형성',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해는 '사상의 산 연결을 자기의 것으로 재생산' 시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재생산'은 해석자와 저자의 개성이 비교가 안 되는 두 사실로 서로 대립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둘은 "일반 인간성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었으므로 인간의 공동성이 상호간의 이야기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2.5. 딜타이는 이 사상을 받아들여 더욱 분명하게 밝히려고 힘썼다. 모든 개성의 차이는 결국 개인의 질적 차이에서 오지 않고 오직 심리 현상의 정도 차이에 의한 제약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해석자는 동시에 검토하면서 자기 자신의 생을 역사적 차원에 옮겨 놓으면서 자유로이 한 심리현상을 강조하고 역설하면서 다른 것은 버릴 수 있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 안에 남의 생활상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해의 조건은 "남의 어떤 개성 표현에도, 이해하는 자의 생활체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해설은 개인적 예술 작품이고 그의 완전성 여부는 해설자의 독창성에 제한되어 그 독창성은 친화성에 있어서 작가와 친해지는 생활과 끊임없는 연구에 의하여 승화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2.6. [이해에 대한 쉴라이에르마헤르의 견해는] 다른 문헌에도 적용될까? 가령 수학 의학 문헌에서도 저자의 심리 현상의 재현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외견상으로도 그렇지 않거니와 사실 해석이 문헌에 의하여 직접 보도된 사태의 이해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한 ― 예를 들면 수학적 혹은 의학적 인식 혹은 세계사적 사실과 현상의 보도 같은 것은 그럴 수 없다. 이 문헌을 읽는 독자들의 관심도 바로 이 외적 사실에만 있기 때문이다.

2.7. 하나의 이해와 해석 ― 결과적으로 분명하다 ― 은 항상 일정한 문제설정과 일정한 방향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이해와 해석의 무전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자세히 말하면 해석과 이해는 언제나 문헌에서 찾는 내용에 대한 '전이해'(Vorverstaendnis)에 의하여 유도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문제 설정과 해석 자체가 가능한 것은 이와 같은 전이해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2.8. 딜타이가 문헌에서 찾는 내용은 '삶'(Leben) 즉 문헌에서 '영구히 고정된 생활 표현'으로서의 문헌에서 형태를 갖춘, 개인의 역사적 생활이었다. 또 이것을 '의미가 부여된 그리고 의미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표현'에서 해석을 통하여 객관적인 인식에까지 가져와야 할 심리적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해석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것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관점에 의하여 성격지어진 이해 현상도 해석에서 수행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일 수 없다. 해석 방향의 결정 여하에 따라 이해 현상은 오히려 상이할 것이다.

3.1. 그러나 문제 설정은 묻는 자의 생활에 근거를 둔 어떤 관심에서 나오고 또 이 관심이 어떤 형태로든 해석하려는 문헌에 생생하게 문헌과 해석자 사이에 연결을 세워 준다는 것은 이해를 위한 모든 해석의 전제가 된다. 딜타이가 작가와 해석하는 사람 사이의 친화성을 이해 가능성의 조건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 이해를 위한 모든 해석의 전제를 발견한 것이다. 이 조건은 특별히 쉴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의 문제설정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전통적 해석규칙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수행될 수 없는 모든 해석을 위해서도 해당한다.

3.2. 해석의 가능성은 '해석하는 자와 저자의 개성이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두 사실로 대립하는 데' 있지 않고 둘이 논의 혹은 문제 되는 내용과 같은 생활 관계를 가진(혹은 가진 만큼) 데 있는 바 그들은 같은 생활 연관에서 살기(혹은 그들이 사는 만큼) 때문이다. 문헌에서 문제되고 혹은 물음의 목적이 되는 내용과의 이 관계가 곧 이해의 전제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모든 해석은 일정한 목적에 의하여 수행된다는 것도 이해가 가는 것이다. 어떤 생활 연관성을 조건으로 방향이 어떻게든 결정된 물음이 가능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해석은 모두 일정한 '전이해' 즉 문제의 내용이 소속한 생활 연관에서 자라나는 이해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된다.

3.3. 해석은 항상 문헌에서 ― 직접 간접 ― 문제되는 내용과의 생활관계를 전제한다. 내가 음악을 취급한 문헌을 이용하려면 오직 내가 음악에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그 정도만큼 가능하고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중 많은 부분이 많은 독자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하간 해당 내용과의 생활 관계는 전제임에 틀림 없고 그리고 이 인식은 '관련 없는 영적인'(fremdseelisches) 존재 이해 가능성에 대한 물음 같은 잘못된 물음을 애초부터 막고 있다.

4.1. 내용에 대한 관심이 해석의 동기가 되고 해석의 문제 설정 곧 방향을 제공한다. 만일 해석이 문헌 자체의 의도나 사건을 보도하려는 것으로 이것을 물을 때, 이를테면 내가 수학이나 음악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고 수학 혹은 음악책을 해석할 때는 해석의 방향 결정이 문제 되지 않는다.

4.2. 그러나 과학적 문헌이 과학사를 위한 증거물로 읽혀지면 그의 방향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설화체 특히 사화체 문헌 해석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두 입장을 들 수 있다. 첫째는 그 문헌이 그가 보도하는 것을 위한 증서로 읽혀지지 않고 특히 그가 보도하는 시대에 대한 증언으로 읽혀지는 경우이다. 둘째는 사화적 문헌이 역사 즉 역사 과학의 역사를 위한 증인으로 해석되는 경우인데 여기에서는 문헌의 의도가 완전히 무시된다.

4.3. 철학 문헌의 해석은 순순히 이해된 것이려면 반드시 진리에 대한 물음에 의하여 움직여야 하는데, 이를테면 저자와의 대화에서만 이 해석은 진전될 수 있다는 말이다. 플라톤을 이해하는 자는 오직 그와 철학하는 자 뿐이다. 그 해석이 역사를 현재의 것으로 이해하는 대신 과거에 놓여 있는 사건으로 파악할 때는 참 이해를 상실하고 만다.

5.1. 시와 예술, 종교와 철학 문헌, 기념물 등을 위한 해석의 참된 문제 설정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는 소위 역사주의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문제 설정이 위축된 때문이다. 실로 문헌을 사료로 취급하는 문제 설정의 정당성은 바로 참 해석에 봉사하는 데 있을 것이다. 모든 해석은 반드시 해석학적 순환을 이룬다. 즉 개체 현상은 그 시대에서 이해되는 반면 그 시대 자체를 이해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5.2. 이해하는 자는 '모든 역사에서 영혼(Seele)의 역사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관점에서 자기 개성을 '보충'하고 '이해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진술에서 보여주는 것은, 참 이해가 남의 개성 자체에 도취되어 관망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서 보여 주는 인간 존재의 가능성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

5.3. 이해의 과제를 결정적으로 명백하게 한 이는 하이데거이다. 그는 이해를 실존적인 것으로 증명, 해석을 이해의 완성으로 분석 특히 역사과제의 분석, 그리고 현존(Dasein)의 역사성의 해석 등으로 이 일을 이루었다.

6.1. 이해하는 모든 해석의 전제는 문헌에서 직접 간접 문제되고 논의의 방향을 정해주는 내용과의 선행적 생활 관계(Lebensbeh?ltnis)이다. 문헌과 해석자를 연결시켜주는 이런 생활 관계 없이 어떤 논의도 이해가 불가능하고 논의의 동기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또 모든 해석이 반드시 논의 혹은 문제의 내용에 대한 어떤 '전이해'에 의하여 수행된다는 것을 말한다.

6.2. 해석의 목적은 인간의 존재가 움직이며 그의 가능성을 얻어 성취하고 이 가능성에 대한 자각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얻으며 키우고 자기 자신 즉 특유한 가능성을 얻는 생활 영역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제기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목적은 특유한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를 묻는 데서 얻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물음은 항상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의 잠정적 이해 즉 '하나의 특수한 실존 이해'에 의하여(von einem bestimmten Existenzverstaendnis) 유도된다. 이럼으로 '전이해'와 이것에서 온 물음이 없으면 문헌은 말을 못한다. 문제는 '전이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게 하고 문헌의 이해에서 철저히 비판하며 검토하는 것이다.

6.3. 이러한 견해는 역사 현상 인식의 객관성 즉 해석의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의혹적 물음의 대답이 되기도 한다. 자연과학적 의미에서 객관적 인식이라는 개념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역사 현상 이해와 무관하다. 역사 현상은 자연 현상과 다른 종류의 것이다. 과거의 사실이 역사적 현상으로 되려면 그것이 스스로 역사 속에 살며 역사에 참여하는 주체에 대하여 의미를 가지고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 현상은 역사적 현상을 파악하는 주체에게만 이것을 행한다.

6.4. 문제 설정 자체를 주관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제 설정 자체가 개인적 자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역사 자체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자가 자기 주관성을 침묵하게 하고 자기 개성을 말소함으로써 객관적 인식에 도달해야 한다는 요구는 가장 모순된 것이다. 이 점에서 '극단의 주관적' 해석은 곧 '극단의 객관적' 해석이 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실존의 무제에 의하여 움직이는 자만이 문헌의 요구를 경청할 수 있다.

7.1. 성서적 문헌의 해석도 다른 문헌의 경우와 다른 이해의 조건에 지배되지 않는다. 첫째로 분명한 것은 그 옛 해석학적 규정 즉 문법적 해석, 문장 형식의 분석, 시대사적 조건을 따른 설명이 그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해의 전제가 원문과 해석자의 연결성, 바꾸어 말해서 해석자의 생활 관계 즉 원문에서 매개되는 내용과의 선행적 관계에 의하여 수립되는 연결성이 역시 해당된다. 즉 이해의 전제는 여기에서도 내용에 대한 '전이해'이다.

7.2. 그러나 성서 특히 신약이 말하는 내용은 어떤 전이해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것으로 자연적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선행적 관계를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즉 바로 그의 행위에 의하여서만 그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보일 뿐이다.

7.3. 나는 반드시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전이해'를 가지고 이 사건들에 의미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성격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행위라는 사건에 관한 보도의 이해에도, 가령 인간의 행동 혹은 자연 사건들과 다른 하나님의 행위 일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전이해'가 전제된다. 의식된 신에 관한 현존적 지식은 어떤 식으로든 이미 해석된 것이다. 가령 "내가 어떻게 하여야 축복을 받으리이까?"(행 16:30)라는 물음이 의식되며 그 물음에는 '축복'에 관한 관념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7.4. 그러므로 문제의 적절한 선 해석, 따라서 인간 실존의 적절한 선 해석 여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것을 찾아내는 일이 인간의 자각적 노력인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철학적 자각의 과제요 인간 존재의 실존적(existential) 분석의 과제이다. 이 일이 현실적(existentiell) 자명성을 직접 문제로 하는 신약의 말씀에 단순히 경청하는 데 대한 전제가 아닌 것은 자명한 일이다.

7.5. 해석자가 만일 성경 문헌들을 '사료'로 읽지 않고, 성서를 현재에 즉 현재의 실존에 말을 걸어 오는 능력으로 읽고 그 스스로 말하게 한다면 적절한 개념들에 대한 비판적 재고가 필요하게 된다. 해석의 목적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물음으로 표시한다면, 그것은 곧 인간 실존의 진실에 대한 물음을 의미한다. 그 때에는 그러나 해석은 실존의 실존적 이해의 개념성을 위하여 노력해야만 한다.

8.1.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 신조들은 모두 인간 실존에 관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들은 실존의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근거를 주며 ― 여러 모양으로 ― 인간 실존을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본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본래 사람에 따라 다르게 사람을 만나는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 즉 성부, 성자, 성신의 존재와 행위를 밝힌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인간의 내적 생활에 관한 진술에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바르트는 실존에 대한 자기 생각을 포이에르바하에게서 받은 인간학의 개념에서 확인하고 인간의 존재를 역사적인 것으로 파악하려고 분투하는 헤르만에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8.2. 바르트는, 예수의 부활은 역사과학의 방법으로 파악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는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역사가들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확실하게 시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또 하나,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면서도 역사과학적 사료와 방법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건을 주장하는 데 반하여 신앙을 고조하면 '신앙이 선사'되는(Glauben schenkens) 모양은 무엇일까? 이 사건들이 어떻게 믿는 자들의 시야에 들어오는가? 이러한 신앙이 지성을 희생한 맹목적 수납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신화적 세계상에서 타당한 의의를 찾는 일이 바로 신화에 대한 나의 실존적 해석의 목적으로 이것을 나는 방법론적으로 힘써 다루고 있으나 내가 바르트에게서 보는 것은 임의로 처리되는 주장 뿐이다. 그의 선택의 원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8.3. 주석하는 자더러, 예언자와 사도의 말을 책임지고 '받아들인' 후에 성서를 '해석'하라는 말인가?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해석의 과제는 다름 아닌 이해의 과제라는 것을 알 것이다.

3. 나가며

첫째, 본문에 대한 질문 없이 응답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없다는 불트만의 해석학적 발상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 실존 해명의 지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박제화 되어버린 구태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삶의 요청과 결단 속에서 그에 상응하여 새롭게 열린다는 것을 발견하는 단서이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오늘의 실존지평으로 끌어내리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묻고 결단해야 한다. 침묵의 대지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구출해야 하는 과제는 우리 신학적 실존의 가혹한 운명일런지 모른다.

둘째, 불트만의 해석학에 있어서 <전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인간 존재의 실존적 구성을 감행하는 계기에서 <전이해>는, 거부될 수 없는 명백한 최초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는 발제자에게 양가의 가치를 동시에 제시한다. 즉 긍정적인 면에서는, 인간 실존의 그 모호함과 무한히 열려 있는 낮선 세계에 대하여 실존의 자리인 아르키미데스 점을 확보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에서 볼 때, 우리의 모든 이해는 이미 전이해에 의해 구조지워졌기 때문에 인간의 유한성과 제한적 조건에 하나님과 말씀이 유폐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전선과 불트만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적 전선 사이에 흐르는 영원한 길항관계는 바로 이 지점에 기인한 것이다. 인간 실존에 의해 채색되어지고 조율되어지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 실존을 통하여 온전히 사건화되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진정 가능한가?

셋째, 실존적 해석학이 간직한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실존과 존재 사이의 진동에 관심의 촉수를 기울인 나머지, 실존과 실존 사이의 놓여 있는 영원한 암흑과 같은 자리, 즉 동시성(contemporaeousness)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본인이 보기에 실존의 궁극적인 지향은 동시성의 여백을 실존의 방식 안으로 온전히 포촉하는 데 있다. 불트만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동시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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