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erwegs zur Theologie








예레미야 연구


전 철


理想과 現實
-예언자 이해를 위하여-
히브리 예언자는 두 개의 촛점을 가지고 그들의 예언활동을 했다. 즉 한편으로는 그들이 사는 현실적 삶에 깊 이 뿌리를 박고 역사적인 삶에 충실한 사람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서는, 이 현실적인 삶을 초월한 이상의 세계 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역사적 현실이란, 그들이 속했던 국가의 현실, 그 나라의 시대적 현실이었 다. 아모스, 호세아는 주전 8세기, 이스라엘의 역사적 현실, 이사야, 미가는 주전 8세기, 남왕국 유다의 역사적 현실에서 그 현실 세계보다 나은 세계를 꿈꾸고 있었고, 예레미야, 나훔, 하박국, 스바니아들은 주전 7세기, 유 다의 역사적 현실, 에스겔, 제2이사야는 유다의 망국 이후 그 민족이 바빌론 포로로 잡혀간 이국 땅에서 경험 한 신산하고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새로운 세계, 제2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전에 알지 못했던 새 일'(42:9-10;43:19;48:6)을 꿈꾸고 이를 위해 외치는 일을 했다. 제3이사야는 이러한 인상의 세계를 '새하늘, 새 땅'(65:17;66:22)이라 했다.

예언자는 그들이 산 그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무조건 수긍이나 용납 또는 적응하고자 한 사람이 아니고, 그 현실을 항상 비판하고 그것을 개조 내지 혁신하고자, 자기들 나름대로, 원칙과 이상을 말한 사람이다. 여기, 예 언자가현실과 이상 두 전제 아래,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보다 나은 현실을 위하여, 그것을 개조 혁신할 수 있는 이상을 말했고, 그 이상을 말하는 정열로써, 그 당면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이상론자들이다. 정의가 메마른 거치른 들판에서 정의를 외쳤고, 사랑에 메마른 가시밭에서 사랑의 꽃을 심으 려 했다. 올바른 신앙심을 가지지 못한 인간사회에서 참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외쳤다. 희망이 없는 아골골짜 기에 소망이 부풀게 하고 위로가 끊어진 바벨론 하수가에서도,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하고 외쳤다. 예 언자들은 그 나라의 역사가 끝맺고 만 비탄의 장송곡이 들리고, 잿더미가 된 패망의 수도 예루살렘 거리에서 도,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종말적 희망을 메시 아 출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씀의 신학
기원전 제 8세기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특성은 야웨의 말씀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올바로 전하는 것이었다. 이 특성은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등 구약 예언자들의 공통성을 보여주는데, 예레미야는 이러한 예언자의 전통을 물려받아 '말씀의 신학'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의 참 근거를 세워준 사람이다. 예언자 예레 미야의 이해는 그가 얼마나 충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과 그 말씀에 대한 복종에 자기 생활과 목숨을 걸 고 있었나 함을 올바로 밝힘에 있다. 예레미야의 활동은 그 소명감 당초부터 야웨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말 씀에 사로잡힌 자로 그 말씀의 노예로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음에서, 그의 예언과 삶의 특징을 세우고 있다.

예언자가 움직일 수 있는 영양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의 식도락도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고백이다. 기도가 영혼의 호홉이라 하는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산소(Lebensfult)라고 했다. '눈물의 예언자'란 별명을 받 은 그는 결코 감상주의자도 아니요 또 단순한 민족주의 때문에 통곡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눈물의 동 기는 그가 철저히 복종하려고 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말씀 때문에 외로웠고, 그 말씀 때문에 괴로워한 사람이다. 참으로 말씀을 최후 순간까지 전한 예레미야는 기독교 설교자의 원형을 보여준다. 말씀 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지 않고 그 말씀 때문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는 참 설교자의 이미 지를 보여준 사람이다.

고백의 신학
-호소하는 인간-
예레미야의 생애는 수난과 울분의 연속인데, 그가 생각하는 진리와 외치고자 하는 말씀은 호소와 쟁변의 형태 를 취하고 있다. 그의 호소는 한편으로 하나님께 향하고 또 한편은 인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고 있다. 매켄 지의 'Ribh' 연구는 하나님에게 대한 예언자의 고발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을 그 언어학적 의미에서 잘 설명해준다. 히브리 'Ribh'란 말은 시리아어 'Rwb' 아랍어 'Riba' 아카드어 'rabu' 등과 동일한 어근에서 나 온 말인데 그 뜻은 "소요를 일으킨다" "충동을 시킨다" "변상을 시킨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예레미야 에게 있어선 야웨 자신이 원고가 되어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있다. 야웨의 고발은 주로 이스라엘의 배반 함과 그 계약을 지키지 못하고 바알로 돌아간 종교적 간음에 대한 것이다.

검사로서의 하나님의 고발과 원고로서의 소송 재기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새로운 종교적 진리를 깨닫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은 소망이 없다. 교만하고 완약하고 패역하고, 가르침도 경고도 이미 소용이 없을 만치 철면피들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가중한 일을 행하고서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 다. 아니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을 붉힐 줄도 몰랐다"고 한다.(6:15) 예레미야가 그렇게 신 랄하게 또 대담하게 유다와 예루살렘 시민의 죄를 고발할 수 있었던 담력은 그 자신이 자기 내면 생활을 하나 님께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을 만치 그의 종교가 내면적으로 깊은 차원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고백에서 그의 참 신학을 본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생각,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 시대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위치와 그 사명을 밝히 보여준다.

선교의 신학
선교는 자기가 믿는 종교신앙을 자기 속에만 가지고 있지 않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 자기가 가진 바와 같 은 신앙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선교란 말은 기독교의 전용어와 같이 생각되지만, 이미 구약신앙 속에는 강한 선교의 개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선교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볼 수도 있다. 이스라엘 종교는 처음부터 이스라 엘 백성만 믿도록 자기 배겅만 믿을 종교가 아닐, 이 땅위에 있는 모든 민족이 믿을 수 있도록 생각하고 있었 다. 즉 최초부터 선교정신이 철저했음을 본다. 가령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한 다음 드린 봉헌기도를 보면, 그 성전이 외국 사람, 만민의 종교를 위한 것을 밝히고 있다.

에레미아는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역사적 위기에서도 자기 자신의 정의와 진실, 양심과 선한 생활에 대한 관 심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부와 권세에 탐람한 자들에 대하여 침묵을 지킬 수 없다. 도둑촌의 문제, 노인체불의 횡포, 억압과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선교는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 계획에 따 라 나라와 민족의 멸망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마음이 이 같은 나라에 대하여 보수하지 않겠느냐"(5:29) 하신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자는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정치신학
하나님의 역사적 행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역사적 현실과 관련되어 항상 인간의 정치문제에서 자 기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역사상에서 인간이 관여하고 있는 정치는 그것 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에 관련된 것이므로 이런 과업을 하나님의 정치적 참여요 관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언자의 메시지에 있어서는 그들이 속한 나라의 정치문제에 항상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그들 자신이 정치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정치와 종교의 분리란 생각하지도 못했다. 예언운동은 초기 예언자 엘리아에게서부터 정 치적 관심이 그 예언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엘리아는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 역사와 무관한 예언운 동을 하지 않았다. 아합왕이 이끌고 나아가는 이스라엘 국가의 운명을 그의 신앙에서 비판하고 있었다.

에례미아는 이스라엘 민족사 말기에 나타나 민족 수난을 친히 경험하면서 이스라엘의 정치가 하나님의 정치인 것을 말로만이 아니고, 그의 몸으로 산 증거를 보여준 사람이다. 인간의 정치는 하나님의 정치에 관련되고 그 주건 아래서 정치행동이 진행될 때 인간 역사는 참 평화와 번영이 옴을 가르친 사람이다. 그와 반대로 인간의 역사의 불행과 비극은 다만, 인간의 정치가 하나님의 정치에서 이탈되거나 반약했을 때 당연히 오는 결과인 것을 가르쳐 주는 의미에서, 그야말로 참 정치신학자이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가 낳은 최대의 정치신학자이다.

새 계약의 신학
계약이란 말의 뜻은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결속한다는 뜻이며 이 계약관계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야웨 하 나님을 알게 되고 야웨는 이스라엘을 택하고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이러한 계약관계는 역사적으로 모세를 통 한 시내산 경험에서 그 시작을 가지고 있다. 계약에서 야웨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운명을 책임져 주시고 이스 라엘은 그 야웨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계약에 대해 아이흐로트(Eichrodt)는 신학적으로 다 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계약이란 말의 뜻은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결속한다는 뜻이며 이 계약관계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야웨 하 나님을 알게 되고 야웨는 이스라엘을 택하고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첫째, 모세를 통하여 체결한 계약에는 전이 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이 계약을 통하여 이스라 엘에게 알려짐을 말한다. 둘째, 이 계약관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알게 하는 동 시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하는가를 알게 하고 있다. 셋째, 하나님의 의사의 구체적인 표현이 이 계약에 나타나, 인간으로 하여금 이 계약을 지킴으로 그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알게 했다. 넷째, 이 계약관계의 중심점은 신 앙이었다. 그들의 개인 의무와 단체적 공동체의 민족의무는 다만, 그들의 하나님 야웨에 대한 부동의 신앙을 가지는 것이었다. 다섯째, 그들의 계약관은 이렇게 그들의 종교적 신앙과 민족관을 밀착시킨 것이었다. 종교적 관심과 국가 이익은 동일한 것이었다.

구약신학은 이 예레미야의 새 계약이 신약에서 예수의 속죄적인 구원 행동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여기서 구약과 신약이 한 하나님의 계시로 통일되고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가교를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에게는 율법이 사람을 구속하는 힘이라는 사상보다 새 계약관계 수립으 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움직이는 원동력을 알려주고 있다.

고통의 신학
예레미야의 생애는 고난의 삶이었음을 그의 예언에서 우리는 너무도 자세히 볼 수 있고 특히 그 자신의 기록 이라 할 수 있는 전기적 고백 속에 그의 고통의 성격과 그 내용이 시편 탄식시에 못지 않게 명백히 나타나 있 다. 예레미야의 고백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고 있는 그의 마음과 몸이 체험한 모든 고난과 의로움 의 기록들이다. 이런 고백 속에 예언자 자신이 그가 당면한 그 나라의 역사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기는 하 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내면적 종교적 경험을 상세히 보여주는 것이다. 한 인간이 생의 온갖 험로 와 미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 헤매고, 또 그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바로 할 수 있는가를 보 여주는 기록들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기 선교의 반응이 지극히 소극적이요, 회의적이요, 때로는 직각적인 반 발이요, 부정적임에 대하여 몹시 괴로워한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부정과 항거 속에서 취할 길이란 다만 두 가 지 길밖에 없다. 하나는 그 쇠방망이를 더욱 휘둘러 무서원 파괴력을 나타내어, 현상대로만 지속하고자 하는 역사의 안이주의자와 더불어 대결해 싸워 죽느냐, 아니면 이 부정적인 항거와 더불어 항거한다는 일의 무의미 성을 賁닫고, 쌔끗이 자기의 선교책임을 포기하고 요나처럼 도피의 길을 걸고 마느냐 함이다. 예레미야의 고통 의 신학은 사실 이 두개의 길에서 몹시고민한다.

비록 에례미아는 한 약한 인간으로 역사 속에 묻혀지고만 인간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 여 받은 그 고통은 영화로운 하나님 보좌에서 별과 같이 빛나며, 우리 인간들의 역사를 비취고 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씀 때문에 인류와 역사가 새롭게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끊임없는 탈주
-예언자 예레미야를 만나고-
1.

예레미야는 예언자이다. 그는 주전 8세기 유다와 예루살렘의 패역한 지도자와 백 성을 향해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예언하였다. 예레미야가 직면한 역사적 현 실은 암울하였다. 예레미야는 그 암울한 역사적 현실에서, 역사적 현실을 딛고, 역사적 현실을 넘어선 하나님의 새 언약을 선포하였던 예언자이다.

예언은 무엇인가. 예언은 세상의 어둠에서 헤어나고자 하는 희망의 날개짓이다. 그러기에 예언은 세상의 현실에 기반하면서도 세상의 현실을 넘어선다. 예언은 세상과 하늘을 넘나든다. 예언자는 무엇인가. 예언자는 이 세상에 음험하게 깃들 어 있는 악의 세력을 뚜렷하게 목도한 선택받은 자들이다. 사실 세상의 악을 뚜 렷하게 보는 자의 시선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무한한 희망이 깃들어 있다. 예 언자의 희망은 세상의 악에 대한 느낌을 확보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는 어느 누구보다 악에 민감하다. 아모스로부터 제2이사야까지(이상과 현실, p.145.) 그들 은 악에 민감한 자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악을 회피하지 않고 악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악의 검은 기운은 예언자의 빛 아래애서 소멸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 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진 자들이면서 세상의 악의 한복판에 서있는 자들이다 (이상과 현실, p.146).

2.

쉘러는, 자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순수한 정신은 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세계에 침투해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한다. 나는 며칠전 영화 테러리스트를 보았다. 영화 테러리스트는 쉘러의 생각을 새롭게 현대화시킨 것이다. 영화 테러리스트는, 순수 한 정신이 이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드러내준다. 결국 테러리스트는 세상의 무게를 감내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자신을 마감하였다. 악에 뿌리를 둔 이 어두운 세계를 향하여 백색 테러를 자행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하 나님에 뿌리를 둔 순수한 영혼이 이 세계를 향해 취해야 할 자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세상에 대하여 테러리스트가 된다. 하나님의 예언자는 이 세계가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예언자는 이 세계가 구유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을 향해 백색 테러를 가할 수 밖 에 없는 슬픈 운명을 갖는다(말씀의 신학, p.143.). 투명한 영혼은 투명하지 않은 세계를 향해 투명한 자세를 취한다. 그것이 테러이고, 그것이 예언이다.

풍선은 그 크기만큼 세계에 민감하다. 풍선이 커지면 커질수록 세계와 맞닿는 접 촉점은 팽창한다. 하나님의 호홉이 담긴 풍선은, 하나님의 호홉을 풍선에 담으면 담을 수록 세상의 모든 것을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다. 이 세계의 악의 기운의 가녀린 움직임에도 반응하는 것, 그 반응이 예언자의 고통이고(고통의 신학, pp.148-156.) 눈물(말씀의 신학, p. 143.)이고 수난이고 울분(고백의 신학, p.133.)이 다.

예언자는 암울한 인간과 세계에 민감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세계의 구체적 인 정치(政治)를 외면하지 않는다. 인간과 세계를 구유하려는 예언자들의 열정은 정치를 외면하지 않는다. 정치적 관심 때문에 인간과 세계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 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정치적 관심을 갖는다. 오히려 인간과 정치 의 빗금을 넘나들면서 올바른 인간성의 회복을 촉구하려는 근원적 자세가 예언자 들에겐 놓여 있다(이상과 현실, p.147.). 그렇기 때문에 인간성의 회복과 맞닿아 있는 종교와 정치는 일란성 쌍생아의 운명임을 예언자들은 통찰한다(이스라엘 정 치신학, p.158.).

예언자들은 새 계약을 현실에 심고자 갈망하는 자들이다. 현실은 슬픔과 맞닿아 있다. 미래는 희망과 맞닿아 있다. 현실의 아픔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희망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새 계약을 선사하신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알게 된다(새 계약, p.148.). 그 새 계 약 안에서 보이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의 합일을 경험한다. 예레 미야는 하나님과 인간의 새 계약관계를 놓아줌으로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 을 따라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 예언자였다( Ibid, p.148.).

3.

난 예레미야의 고통에서, 신학하는 자의 고통을 엿본다. 신학하는 자는 세상에 살 면서도, 하나님이라는 비판적 거점을 통하여 세상을 이해하고 조망하는 자이다. 여전히 인간의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 아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면 언제나 고통의 잉여분이 끊임없이 고인다(고통의 신학, p.150.). 하나님은 인간을 대면하 며 동정과 연민의 고통을 느끼시고, 인간은 하나님을 대면하며 자신의 유한성과 근원적 죄성의 고통을 느낀다. 이 고통의 경계선에 예언자는 서있다. 이 고통의 무한한 진동에 예언자는 서있다. 이 고통의 치유를 꿈꾸며 예언자는 서있다. 이 고통을 가슴으로 보듬어 안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불꽃의 삶을 걸어가는 예레미야 와, 신앙의 선조들의 모습에 머리를 숙연히 모으며, 신학하는 자의 옷깃을 다시 가다듬는다.

1995년 9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