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erwegs zur Theologie








관념, 감각, 시간


전 철






1. 감각-관념의 언어와 클래스 이론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언어를 만나면서 모종의 당혹스러움을 한 두 번쯤은 경험하였을 것이다. 광범위 한 형이상학적 사유를 축조하는 화이트헤드의 시도 가운데서 등장하는 언어는 매우 감각적이고, 동시에 매우 시적(詩的)인 측면을 갖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잠시 주춤거리게 된다. 예를 들자면 그의 언어 가운 데에는 느낌(feeling), 향유(enjoyment), 만족(satisfaction) 등 심리적이면서 감각적인 정서를 유발하는 언어 개념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어는 관념적 측면이 매우 안정적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맥 락에서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이트헤드의 언어 는 감각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이 상호 조응된 언어이다. 언어의 기능은 상식을 교란하는 데 있다. 동시 에 언어는 새로운 정서를 유도한다. 이런 맥락에서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사물이나 상황을 기술하는 감 각적인 측면과, 사물이나 상황의 근저를 형성하는 기하학적, 관념적 측면을 동시에 밝힌다고 할 수 있 다. 예를 들어보자. 화이트헤드의 존재의 범주 가운데 하나인 actual entity라는 개념은 구체적이고 개별 적인 사물을 구성하는 궁극적 존재로서 이해되면서, 동시에 모든 사물의 가장 기본을 형성하는 일반적 관념을 그 안에 담고 있다. 그렇다면 화이트헤드의 언어세계가 감각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을 동시에 포 괄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우선 그는 클래스(class) 개념을 럿셀과 함께 발견한 수학자였다. 화이트 헤드가 하나의 개별적인 언어와 그 언어의 언어군(言語群;class)의 관계를 분명히 규정할 수 있었던 근거 는 바로 클래스 개념을 깊이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가 얼마나 개별적인 사물이나 상황을 구 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언어의 감각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그 언어가 얼마나 분명한 언어군(言語群) 안에서 관계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언어의 관념적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와 언어군의 관계가 모호하지 않은 언어는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추상적인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는 언어이 다. 감각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을 동시에 만족하는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바로 클래스(class)에 대한 확고 부동한 이해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매우 구체적인 측면을 포괄한 언어이면서 동 시에 광범위한 일반성을 바탕으로 한 매우 정합적인 언어이다.

2. 양극단을 동시에 안고 있는 나의 문제

관념과 감각, 삶과 죽음, 자유와 구속, 말과 사물, 언어와 존재, 사유와 삶, 생성과 소멸, 영원과 현재, 초월과 내재 등등, 결국 우리의 물음의 궁극적인 대상은 바로 위와 같은 대립쌍의 관계가 아닌가 생각 한다.[1] 저 대립의 양극단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저 양극단의 관계를 분명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 운 일이다. 그러나 저 두 양상이 지금 여기의 나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 이다. 그렇다면 김용옥의 말마따나 결국, 저 두 대립의 양극단을 이해하는 것과, 저 양극단의 관계를 분 명히 파악하는 것은 나 자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화이 트헤드는 철학적 사유의 여건을, 우리자신을 포함한 현실세계로 말하였다(cf. PR, p.51.). 화이트헤드의 "우리 자신을 포함한"이라는 문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저 화해할 수 없는 존재의 양 극단을 해명하는 작업은 바로 그 양극단을 안고 있는(cf. mental pole & physical pole) 존재에 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을 배제한" 체 현실 세계에 대한 사유를 전개현 것이 기존의 형이상학이었다면, 화이트헤드는 "자신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자신 조차도 하나의 현실세계의 여건으로 파악하는 그러한 출발점을 시도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이 자신을 파악하며, 혹은 자신이 자신 에게 파악되면서 동시에 그 구조가 유지될 수 있는 측면이야말로 - 적어도 나에게는 - 비의(秘意)의 차 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하간 이 맥락에서도 화이트헤드의 클래스(class) 개념에 철저함에 기인한 자연 스러운 시도를 발견할 수 있겠다.

3.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신학의 두 전통

한 관념 두 감각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설(cf.jjiipp)은 매우 유용한 차원을 제공해 준다. 정신적 극과 물 리적 극이라는 가장 궁극적인 대립의 양극단의 출발점은 신과 세계이다. 도대체 신은 무엇이고 세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쩌면 저 '신'과 '세계'라는 실재 자체도 언어의 유희는 아닐까? 이러한 물음을 접어 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물음은 남는다. 신학은 신과 세계의 관계를 해명하려는 일련의 시도이다. 신학 은 이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해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세계는 신을 포함한다는 주장 (cf.루터, 틸리히)과 세계는 신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주장(cf.칼빈, 바르트)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렇 다면 이 두 주장과 위에서 등장한 감각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 클래스, 한 관념, 두 감각에 대한 논의와 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는 신을 포함하지 못한다. 세계는 감각이 요소로 구성된다. 신은 관념이 요소로 구성된다. 그것은 감각적 측면과 관념적 측면은 상호 상이한 역할을 수 행하고 있다는 맥락과 닿아있다(cf.관념의 영역과 감각의 영역). 또한 상위의 클래스는 그 클래스의 구체 적인 집합 개별자들을 배제하지 않지만 그 집합의 개별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논리계형을 점유한다는 클래스 이론과도 닿아있다(cf.럿셀, 화이트헤드의 클레스 이론). 그리고 우리는 한 관념과 두 감각이 동 시에 포개어진 자리에 놓여져 있다는 한 관념 두 감각이론도 세계는 신을 포함하지 못한다는 차원의 계보에 놓여져 있다. 관념은 오로지 하나만의 감각으로 변환되지 못한다. 신은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 변환되지 못한다. 언제나 관념과 감각은 엇갈려 있다. 신과 세계는 서로 엇갈려 있다. 한 관념 두 감각 은 관념적 신과 감각적 세계가 빚어낸 하나의 실제적인 결과이다(cf. 한 관념 두 감각).

4. 시간 : 문제해결의 출발점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의 양극적 측면'만'으로는 도대체 해명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게 되었다. 왜 세계가 신을 온전히 품을 수 없는가? 왜 관념의 영역과 감각의 영역은 서로 엇갈리는가? 이러한 물음의 해명은 바로 '시간'과의 관련성 속에서 전개해야 하지 않을까. 이 엇갈림의 근원과 시간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서는 존재의 범주와 궁극자의 범주의 관계성의 문제 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문제를 논리와 시간의 관계성의 문제[2]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학적으로도 신과 시간의 관계성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시간에 대한 논의는 이 '양극의 문제'와 양극을 안고 있는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다.

각주

[1] 화이트헤드는 경험이 갖고 있는 양극적인 측면에 대하여 누누히 강조하고 그의 형이상학 안에서 포괄적인 해명을 시도한다. 특히 화이트헤드는 정신적인 극의 출발은 신(神)에서부터 비롯되고 현실적 계기의 성립은 물리적 극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또한 의식, 사고, 감각지각이라는 요소들은 모두 정신 적인 극과 물리적인 극의 중간지대에서 빚어지는 합생의 <불순한 국면>에 속한다고 말하였다. 화이트헤 드의 사유를 나름대로 이해한다면, 양극적인 측면을 동시에 안고 있는 인간존재는 <불순한> 존재이다. 결국 <불순한> 존재가 <순수한 극>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바로 시지프스와 같은 인간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Cf. PR, p.105.

[2] 이것과 관련해서 다양한 문제제기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제기를 논리론과 시간론이라는 개념으로 일 단 정식화 시켜보자. 논리론은 시간에 대한 논리의 근원을 출발점으로 한다. 시간론은 논리에 대한 시간의 근원을 출발점으로 한다.

첫째, 논리론은 시간의 문제를 논리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시간론은 논리의 문제를 시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우선 시간에 대한 논리의 우위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선 논리에 있어서 시간은 하나의 불 순한 양상이다. 논리는 시간을, 시간이 있음(a)과 시간이 없음(-a)의 토톨로지로 해소해 버린다. 이러한 시간은 논리에 의해 포섭된다. 시간의 문제를 논리적 토톨로지로 무화시켜 버릴 때 '시간'은 논리적 토톨로지를 수행하는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여기에서 시간에 대한 논리의 명제는 항진명제이다. 또한 논리에 대한 시간 의 우위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선 논리는 시간성(Zeitlichkeit)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베이트슨에 서 볼 수 있듯이, 논리는 인과관계를 반영하지 못한다. 논리는 인과관계를 포착하지 못한다.

둘째, 논리론은 현실세계가 연속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시간론은 현실세계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논리론에 있어서 현실세계는 연속적이기 때문에 분할할 수 있다. 시간론에 있어서 현실 세계는 불연속적이기 때문에 분할할 수 없다.

1997년 2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