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erwegs zur Theologie








절대자와의 원초적 감정의 깊이를 새롭게 연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




전 철


1년 전 여름에 고전이 번역되어 나왔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읽는 감정과는 달리, “왜 우리가 오늘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을 읽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 책은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었기 때문에 그 질문은 더욱 절박하게 다가왔었다.

딱 200년이 지난 오늘, 슐라이어마허의 시대를 훨씬 넘어서는 현대에, 더군다나 종교를 멸시하지도 않고 종교에 평생 삶을 헌신하려는 내가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제일 처음 생각해야 했던 고민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에도 종교의 문제는 절실한 문제이고, 종교를 멸시하는 현대인은 종교에 헌신하는 종교인과 같이 공존하고 있기에 종교론이 지니고 있는 가치의 유효성은 결코 쉽게 폄하할 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는 슐라이어마허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을 이성화시키고 종교의 의미를 도덕적인 가치로 변화시키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진정한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슐라이어마허는 해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이성과 탈신학의 정점에 서 있는 계몽시대의 교양인들에 대하여 종교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혹은 계몽적으로 변호하고 새롭게 돌파해 나아가는 슐라이어마허의 의미 전개와 문장의 변주를 통하여, 매우 신선한 지적 정서적 종교적 감동을 경험할 수 있었다.

실로 그에게 있어서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종교론, 56쪽)고, 또한 그 인식은 이 책의 키워드로서 매우 중요한 의도를 함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은 그의 생존의 책략으로서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기제를 요청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의 가장 건강한 덕목은 어느 순간 이성과 합리성으로 착색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한 시대정신이 종교의 지평까지 계속 연장될 때 종교는 형이상학으로, 혹은 도덕서설로 변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종교는 결코 형이상학이나 도덕서설로 환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절대의존적 감정이며, 경건성을 바탕으로 인간이 내면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가장 고유한 신앙형태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종교이해는 우리 신학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다고 여겨진다. 첫째, 종교성의 깊은 내면을 간직하고 그 절대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인간의 삶과 역사와 우주가 화해되기를 깊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교리나 사변이나 이성적인 신학 작업가설의 그 의의와 한계를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결코 고정된 교리나 사변에 유폐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의 근원 경험인 감정을 중심으로 싹이 틔여지고, 새롭게 그 의미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를 멸시하는 현대와 현대인을 향하여 신학도가 취해야 할 자세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폄하하거나 부정하지 말고, 그의 진정한 의미를 향유하고 음미하고, 그 접촉점에서부터 구원의 길이 연루되어 있음을 적극적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신학도의 과제를 고민하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에서 불현듯 보여지고, 붙잡혀지고, 의존되어지는 그 절대자와의 경건하고도 진지한 고백이 자연스럽게, 혹은 내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999년 7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