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erwegs zur Theologie








말씀과 하나님


전 철




1장 1절: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NRSV-
1장 14절: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And the Word became flesh and lived among us.
 
 
요한복음의 첫 빗장을 여는 위의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성서본문이라 할 수 있겠다. 많은 이들은 기독교를 "말씀(Logos)의 종교"라고 한다. 여기에서의 "말씀의 종교"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성서적 근거가 바로 요한복음 1장이라 할 수 있겠다. 태초에 말씀은 있었지만 말씀은 그 자체로서 자족적인 독립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것이고,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증언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져보고자 한다.

이 글은 두 가지의 전제를 갖고 열려진다. 나는 말과 언어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렇기때문에 일단 말을 언어로 이해한다. 또 하나의 전제는, 말씀과 하나님의 관계를 "존재"와 "본질"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존재"는 유한적인 속성을 지닌 인간의 지평이고 "본질"은 무한적 속성을 지닌 신의 지평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글이 열려지면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언어에 대한 사려깊은 관심은 하이데거를 통해서 발견할 수가 있다. 물론 언어에 대한 관심은 소쉬르를 위시한 구조언어학이나 초기 비튜켄슈타인류의 영미 분석철학을 통하여서도 발견되어질 수 있다. 또한 이후의 구조언어학이나 정신분석학을 결합한 라깡류의 언어분석학의 관점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를 동심원으로 하여 점차 그 영역을 점진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현상학적-해석학적 언어이해의 지류와 소쉬르에서 라깡까지의 지류는 뚜렷한 변별점이 있다. 이러한 변별점은 다음과 같은 하이데거의 주장을 통하여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사유의 산물인 '언어'를 통하여 인간의 존재는 본질과 관계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휴머니즘에 관하여Brief ueber den Humanismus). 그것은 존재라는 경험적 구조와, 본질이라는 경험을 가능케 하는 구조 사이에서의 언어의 의미를 규명하는 작업니다. 하지만 소쉬르에서 라깡까지의 지류는 '존재와 본질의 양극적인 지평' 사이에서 언어를 규명하는 것보다는, '존재의 경험구조' 안에서 언어의 의미를 규명하는 작업이기때문에 하이데거와는 다른 지류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에 관심은 존재(언어)와 본질(신)의 상호 관계의 이해의 지점에 놓여있기 있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음영적 지형을 통하여 존재와 본질과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사유 안에서 존재는 언어로 된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탈은폐로서 언어는 기능하고, 이러한 탈은폐는 존재가 본질과 관계할 수 있도록 기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언어는 존재의 집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이다. 위에서 우리가 이해하고자 했던 "말씀"과 "하나님"이라는 신학적 지형의 의미망을 철학적 지형의 의미망으로 '도구연관'시켜볼 때 "언어"와 "본질"이라고 바꾸어 이해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본질은 말씀, 즉 언어를 통하여 첫째, 인간(존재)을 근거짓게 하고 둘째, 인간(존재)가 살아가는 지평이 확보되며, 셋째 인간(존재)에서 하나님(본질)로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 즉 탈은폐의 계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첫째의 문제 즉, 인간존재를 근거짓게 하는 것은 본질,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하에서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맞닿을 수 없는 거리가 열린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의미'를 발견할 뿐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몫과 인간의 몫이 갈라진다. 하나님은 인간을 근거짓고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근거 지워진다. 단지 인간은 그 근거 지워짐을 발견할 뿐이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둘째의 문제 즉, 존재가 살아가는 지평이라는 의미는 본질 안에서 존재에게 할애해 주는 '삶의 지평'이라는 것이다. 처음의 문제인 '존재근거'와 둘째의 문제인 '존재지평'의 빗금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서 구분되어진다. 저기 놓여있는 두 아버지와 아들은 삶의 경험속에서 '부자관계'라는 옷을 덧입는다. '부자관계'라 불리우는 이것이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이다. 적어도 그 두 존재가 살아가는 한, 둘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규정하는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지평'의 문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할당하는 '삶의 영역'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마련하신 집이라는 영역에서 처소하고, 또한 처소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처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 처소의 약속을 파기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파기된다. 아니 약속이 파기되는 경우는 단 한가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허상의 산물이었을 때만에 불과할 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올바로 수행된다고 할 땐 아버지가 할당해 주신 영역을 포기할 수 없고 또한 넘어설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처소하는 영역을 제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의 충분조건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필요조건이다. 이것은, 인간의 지평은 하나님의 지평안에 포섭되고, 지평을 통하여, 지평 안에서만 멈추지 않는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의 지평(The horizont of being)'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말씀의 지평은 하나님의 지평 안에서 운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개시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해 주신다. 그것은 언어를 통하여 가능하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유일한 접촉점이 언어이다. 하나님은 언어를 타고 우리에게 건너온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입을 경험한다. 하지만 존재는 언어를 통하여 본질의 도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본질은 언어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존재가 내일의 본질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본질은 오늘의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현재는 미래를 향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는 현재를 향해 유입되는 것이다. 언어는 닫힌 존재가 열린 본질로 변화케 하는 촉발점이다. 또한 존재와 본질을 매개하는 언어의 기능, 그리고 무한한 본질을 향한 유한한 존재의 끊임없는 귀기울임은 존재 안에서 자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근거는 무한한 존재, 즉 하나님이 존재와 언어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존재와 언어는 맡겨진 사명을 숙명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유한한 존재는 언어를 통하여 무한한 본질을 숭고하게 귀기울임으로서 존재는 본질로 다가간다. 이렇게 본다면 적어도 존재가 본질은 선취할 수 없지만 언어, 즉 말씀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Logos)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1994년 10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