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erwegs zur Theolog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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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 왜 성서가 교회안에서 침묵을 지키는가


전 철




 
 
들어가며

"성서는 왜 교회에서 침묵하는가?" 하는 진지한 물음은 스마트의 물음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물 음이기도 하다. <왜 성서가 교회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가>라는 책은 저 물음에 대한 원인과 그것 에 대한 해결을 시도하려는 책이다. 책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성서의 점차적 침묵이 다.

제1장 성서의 점차적 침묵

성서는 교회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교회는 성서의 빛을 받아 새롭게 변화하는 공동체이다. 교회 와 성서는 뗄 수 없는 긴밀한 두 관계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성서를 도외시하는 경향 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성서가 교회의 관심을 촉발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래 서 스마트는 다음과 같이 성서와 교회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짐작한다. "우리는 언젠가는 성서로 부터 완전히 이탈된 교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p.13.)

그렇다면 왜 교회와 교인이 성서에 대한 관심을 자꾸만 갖지 않으려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 가? 특히 목사들은 성서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변화해 나아가고 있나. "성서 본문을 토대로 해서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성서 비평의 이전 시대보더 더욱 더 어려워졌다는 것은 분명하게 틀림없 는 사실이다"(p.15)라고 스마트는 진솔하게 고백한다.

사실 성서 해석에 대한 신학의 놀라운 발전은 그 방면에 대한 많은 연구성과와 방법들을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양식비평과 전승비평을 통하여 우리는 성서가 어떻게 우리의 손에 들어 오게 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비교언어학을 통하여 우리는 언어에 스며든 저자의 원 의도를 발굴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발전이 오히려 성서에 대한 올바른 이 해를 갖는데 더욱 큰 장애요소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런 발전의 지수와는 무관하게 성서에 대 한 이해의 지수는 오히려 추락되고 있는 경향이다. 특히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러나 크고 작은 모든 교회들이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부딛치게 되는 곤란한 문제는 성서를 올바 로 이해하고 그것을 누구에게나 알아들을 수 있게 잘 해석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는 점이다(p.17)."

또한 새롭게 등장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구약성서에 대한 관심의 퇴보라고 할 수 있다. 신학 에 있어서도 구약성서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미미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구약신학자의 구약 성서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 오히려 성서에 대한 관심을 적게 만든 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구약학자 짐멀리의 주장을 통하여 우리는 그 현상을 진실하게 엿볼 수 있다. "구약성서가 최근의 개신교 신학 가운데서는 이질적인 요인이다... 구약성서가 존경받고 있고 또한 강단에서 구약의 말씀이 읽혀지고 있다. 그러나 조직신학자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밝히고 그 내용을 본질적인 부분들에 따라 설명하고자 할 때는 구약성서가 주로 골치거리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는 신약성서의 설교 내용을 진지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해석학이 더 이상 구약성서의 말씀과 설 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사태가 생겨날 수 있다"(pp.19-20).

구약성서에 대한 경시 풍조에서 더 나아가서 이제는 성서 전체가 우리의 손에서 멀어져 가는 것 을 발견할 수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만 신약성서만이 교회 안에서 침묵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 전체가 침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p.20).

특히 성서가 독자들에게 기형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경향도 하나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는 성경안에서 성경을 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성경을 보는 경우가 문제가 된다. 성서 가 말하는 전체적인 맥락과 진의 안에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에 다달아야 하는 것이 성서를 읽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단편적으로, 그리고 주 관적으로 성서독해를 행해 나가는 경우가 우리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으로 되어 버렸다. 그 렇다면 성서는 어떻게 기록된 책인가. "성서의 어느부분도(아마도 몇몇 시편을 제외하고는) 본래 는 사사로운 용도를 위해 의도되지 않았다. 성서는 분명히 대중적인 일반인의 책이다"(p.23).

지금까지 성서가 어떻게 교회와 교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모습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았다. 틀림없이 성서는 점차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 자 체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성서의 빛을 발견할 수 없는 우리의 무지와 게으름인 가. 일단 스마트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1장 성서의 점차적 침묵에 대한 논의를 정리한다. "성 서가 교회 생활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인의 생활 가운데서 그 주도적인 위치를 유지하지 못하 게 된 주요 원인은 성서 학자들과 설교 및 교육에 책임을 맡은 자들 간에, 설교자와 교인들 간에, 그리고 또한 신학교의 독립된 학과들 간에 의사 소통이 완전히 막혀 버린 데 있 다"(p.28).

제2장 해석학과 설교학
키보드를 두드리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교수님의 열림배움터를 통한 강의 때문이었다. 하나 님 앞에 진실하고 인간앞에 진실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큰 화두 때문일까. 사실 주석방법 론을 비롯한 이 모든 신학의 과정은 저 화두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나의 신 학적 실존이 고민해야 할 저 큰 물음을 그간 너무나 잊고 살아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의 2장 인 해석학과 설교학이라는 지극히 건조한 논의가 저 화두에 얼마나 빛을 던져줄 수 있는가? 하는 궁핍한 물음을 던져보면서 시선을 책으로 옮겨본다.

기존의 모든 학문은 전통의 현재화를 지향한다. 하지만 해석학은 현재의 전통화를 지향한다. 다 시 말하면 그 전통이 무엇인가?라는 물음보다는 그 전통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그 전통에 상응하는(correspondent) 오늘의 사건은 무엇인가?라 는 물음에 해석학은 주목한다.

해석학과 설교학에서 주장하는 바도 이와 같다. 기존의 설교학은 성서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아니 그 물음에만 주목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재안에 살아 숨쉬는 우리에게 그 성서의 의미는 어떠한가?라는 물음과,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그 성서의 의미에 상응하는 사 건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간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2000년 전의 이야기는 성서의 의미가 불꽃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스마트는 그 부분을 날카롭 게 지적한다. 이 지점은 불트만의 탈신화화 프로그램의 신학적 구조나 현존재와 존재의 실존구조 를 해명함으로서 현재의 의미를 새롭게 밝힌 하이데거, 그리고 그 이후의 가다머의 해석학과 깊 은 연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성서의 의미를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 수록 오늘 우리가 숨쉬는 자리와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더 욱 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스마트의 지적(p.36)이다! 스마트의 통찰이 엿보이는 지점이다. 물론 그 과거와 현재의 간격을 메꾸는 작업이 해석학이라는 이야기를 스마트는 하려는 듯 하다.

해석학은 전통을 현재화 시킨다. 더 나아가서 현재를 전통화 시킨다. 또한 해석학은 죽은 과거에 대한 단순재반복이 아니라 과거를 오늘 이 자리에 심어놓음으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거의 교훈을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하는 학문이다. 설교는 오늘을 위하여 존재한다. 성서의 사건은 과 거의 사건이다. 과거와 오늘의 간극은 해석학을 통하여 메꾸어진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과거의 성서사건이 아주 가까이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해 석학은 설교학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해석학에 대한 스마트의 이해는 신학해석학과 하이데거와 불트만학파,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해석학에만 머무른 듯 하다. 또한 해석학에 대한 논의가 비교적 어수선하게 정리된 듯 하다. 앞으로 이 부분을 견지하며 3장, 4장 읽어나가보는 것도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인간앞에 진실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저 물음을 해석학적인 물음으로 다시 던져보면서 마감하고자 한다. 하나님! 당신앞에 진실하고 인간앞에 진실한 모습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제3장 해석학적 질문의 재개
한 주간에 한 장씩 본문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 책이 부피에 비해서 매우 중요하고 심도깊은 논 의를 진행하고 있는 저서임을 발견하였다. 특히 이 3장에서는 성서해석과, 설교를 행함에 있어서 겪게 되는 해석학적인 딜레마를 논의의 중심에 놓고, 바르트와 불트만의 새로운 해석학적인 대안 을 통하여 그 딜레마의 화해를 시도한다.

사실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라는 틸리히의 언명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 의 생산적 논의가 오히려 교회와의 함수관계 속에서 위축이 되는 경향이 있다. 성서가 신학의 메 스에 찢기는 상황을 많은 교인들과 신앙인들은 일단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마트는 그 현 상에 대한 자신의 단호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압력들과 타협하는 것은 성서 연구의 성실성을 희생하는 것이다"(p.41)

이후에 바르트와 불트만이 전개한 '해석학적인 전환'을 언급한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전통적이고, 많은 문제점을 노정한 성서해석의 울타리를 새롭게 넘는 일이야말로 성서해석의 결함을 피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 두 신학자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주는 말씀 을 올바로 들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바르트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하나님의 말 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트만은 성서의 본래적인 개념을 올바 로 파악하고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새롭게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바르트와 불트만이 같이 의견을 모을 수 있는 지점은 다음 세 가지이다. 하나는 해석 주체가 대상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회의이다. 그것은 해석 주체의 숙명적 한계를 전제 한다고 할 수 있으며, 슐라이에르마하, 딜타이, 그리고 계몽주의적 해석학의 전제인 주체와 대상 의 명백한 구분이 파기되었음을 선포하는 새로운 발상이다. 해석은 결코 사실을 온전히 복원할 수 없다. 관망자적 해석학(spectator hermeneutic)이나 감독자적 해석학(supervisor hermeneutic)은 시 대의 한계이자, 인간의 존재론적인 구조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기인한 결과가 된다. 사실 문서 비평이나, 편집비평, 양식비평의 방법론적 전제는 바로 이러한 관망자적 해석학과 감독자적 해석 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이러한 존재론적 구조에 대한 직시를 통하여, 해석은 결코 객관의 최대치를 향한 지향이 아니라, 해석자의 주체적 해석이 개입되어야 하는 장(field)로 서 새롭게 확보한다.

둘째, 성서의 의미가 무엇이었나(what it meant)의 물음과 성서의 의미가 무엇인가(what it means) 의 물음이 동시에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 시대의 성서비평과, 해석학, 그 리고 정신과학의 대부분을 추동하는 정신사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역사는 현재 (now) 안에 재현된다. 그리고 모든 역사는 현재를 지향한다. 과거는 우리의 손에서 떠났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우리의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실은 현재이 다. 결국 현재의 의미를 담보하지 않은 과거와 미래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셋째, 하나님의 계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계시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이 점 에 대한 바르트와 불트만은 엇갈린 대답을 각기 전개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사 건이라는 저 언명 자체는 이미 깊은 해석학적인 물음이다. 즉 해석학이 하나님의 계시와 사건을 발견함에 있어서 어떠한 기제로서 작용하는가? 그리고 해석학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계시와 사건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조망해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 앞으로 계속 책을 읽어나가 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제4장 해석의 컨텍스트
스마트는 4장 <해석의 컨텍스트>에서 모든 해석은 해석하는 자의 <컨텍스트> 위에서만 가능하다 는 주장을 전개한다. 사실 <해석의 컨텍스트>라는 논의는 철학적 해석학에서 논의된 불트만의 선 이해Vorstandins, 가다머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와 상응하는 개념이다. 해석의 컨텍스트나 선이 해나 영향사의 특징은, 결코 객관적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어떠 한 텍스트이든 그것이 해석 될 수 있는 여건으로서의 컨텍스트가 전제되어야, 텍스트가 우리에게 해석되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컨텍스트는 해석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컨텍 스트의 부재는 해석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학적인 논의가 스마트의 신학적 논의로 수용될 때 어떠한 지형으로 다시 조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 이 4장을 정독하였다. 나 름대로 스마트는 그 해석학적인 논의를 신학적인 논의로 성공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나는 발 견하였다.

우선 어떠한 설교와 선포이든 그 설교를 전하는 자의 컨텍스트와 설교를 듣는 자의 컨텍스트가 결코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을 스마트는 강조한다. "교회의 개개 신자나 청중이 듣고 있다고 생각 하는 내용이 말해 진 내용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p.57). 교인과 청중의 해석의 컨텍스트가 상이하기 때문에 설교와 선포가 얼마나 그들의 컨텍스트 안에서 친화력을 갖을 것인가? 하는 문 제가 바로 해석학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상이한 교인들의 다양한 컨텍스트가 공존하 여 직조되어 있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교인들에게 설교를 선포하는 과정에 있어 서 스마트의 주장은 매우 유용하고 필요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가장 중 요한 문제는 다양한 컨텍스트의 장에서 어떠한 방식의 설교로 최대한으로 그들의 마음에 다가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교자는 자기의 말이 자 기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계속 음미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말이 자기 교인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계속 음미해 보아야 한다."(p.57).

또한 그는 동일한 텍스트도 상이한 컨텍스트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수 있음을 강조하 고 주목한다. 어떻게 성서가 각기의 상황에서 새롭고 의미있게 다가오는가? 하는 물음은 스마트 의 논의 안에서 새롭게 밝혀진다. 그런 의미에서 택스트를 새롭게 복원하는 근거는 바로 해석의 컨텍스트에 있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석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진지한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독특한 역사적 컨텍스트를 가지고 본문에 접근함으로 인해서 같은 본문에서도 아주 다른 의미들이 발견되어 왔음을 알고 있다."(p.59).

특히 해석의 컨텍스트는 우리의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에 이미 베어있는 전의식의 차원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컨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지형을 파악하는 일이 지극히 어려운 일임을 그는 강조한다. 사실 컨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파악이 선행되어야 해석의 목적과 해석의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컨텍 스트의 실재는 의식되기 보다는 흔히 의식되지 못하고 있으며 해석자는 대게 그가 그 컨텍스트 를 의식하지 못할 때 그 컨텍스트의 영향 아래 있게 된다".(p.66). 자신의 컨텍스트를 발견하는 작 업은 텍스트가 허용하는 해석의 영역을 구분하는 작업과 상응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하였던 바 와 같이 자신의 컨텍스트에 대한 발견이 지극히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스마트는 "성서의 메세 지의 축소"와 "성서의 침묵"이 등장한다고 본다.

4장 전체의 내용은, 해석은 해석의 컨텍스트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특히 스마트는 어떠한 텍스트 이든 그 텍스트를 바라보는 컨텍스트에 따라 의미와 해석이 새롭게 열린다는 점을 강조한다. 텍 스트는 고정적일 지라도 컨텍스트는 변한다. 그렇다면 성서 본문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컨텍스트 의 변화에 민감해야 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컨텍스트의 변화는 텍스트의 다양한 목소리를 가능 케 하고 풍요롭게 하는 촉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설교자와 청중 사이의 관계 안에서 컨텍스트 는 큰 의미가 있다. 설교자가 청중의 컨텍스트를 조망함으로서 그의 컨텍스트의 중심에 다가가는 설교를 구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림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스마트는 해석학의 핵심인 텍 스트와 컨텍스트의 함수관계를 나름대로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논의의 구성도와 엄밀함이 비교 적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학의 논의가 성서해석과 교회현장, 그리고 설교현장에 어떻게 적용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해결을 보여주었다고 정리해본다.

제5장 無知의 허용
5장 무지의 허용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과 그 의미 그리고 오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 다. 사실 역사비평연구는 교회의 구속에서 일찍부터 자유로왔던 독일과 영국에서 등장을 하였다. 역사비평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 결코 와해될 수 없다는 신념을 전제로 한다. 또 한 하나님의 뜻은 비평적이고 역사적인 관점 안에서도 비추어질 수 있다는 신념을 전제로 한다. 여기 본문에서는 역시비평과 자유주의신학이 긍정적이며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디어가 교회현실에서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역사비평이나 자유주의신학의 내용을 "50여년전에 배웠다"고 할 찌 라도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목사님에 관한 대목이다. 결국 그 목사님에 대하여 저자는 <무지의 허용>이라고 평가한다.

사실 역사비평이나 자유주의신학의 긍정적이고 풍부하고,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 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향해 그러한 시도를 용기있게 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목 회자 개인의 해석학적인 적용력의 결여가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또한 교인들의 신앙의 침해가 될 수 있으리라는 불안한 염려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소심한 목 사들에 대해 공평하게 말한다면 그들 대부분은 교회가 성서를 순진하게 무비판적으로 읽는 것으 로부터 교회를 이끌어 내어 현대적 자원들을 지성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성서의 영향을 좀더 풍부 하게 만들고 심화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성서를 읽도록 인도할 만큼 충분한 준비 교육을 잘 받 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도 목회자를 꿈꾼다. 그리고 우리도 역사비평연구와 진보적인 신학연구의 과정을 거친다. 스 마트가 비판하는 목회자의 자리에 우리가 제외될 수는 없는 법이다. 특히 우리들의 모습은 바로 스마트가 그렇게 비판하고, 무지를 허용하는 목회자의 자리에 어느 누구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는 목회자 후보생이 아닌가.

신학의 과정을 거쳐가면서 깊은 학문적 신학적 역사적 비판적 연구를 풍부하게 배우고, 동시에 스마트가 지적한, 해석학적 적용의 가능성을 동시에 넓혀가는 작업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해보 았다. 우리가 배우는 학문이 문제가 아니라 학문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우리가 문제가 된다는 반성을 해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스마트의 무지의 허용은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중요한 부 분을 깨닫게 한 귀중한 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제7장 권위의 재해석
성서는 권위를 상실해가고 있다. 성서의 경전성은 시간의 강물을 거쳐가며 희미해져만 가고 있 다. 성서의 빛나는 말씀은 이제 많은 이들의 외면 가운데 어두운 그늘 아래 서글피 놓여져 있다. 그것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를 믿는 신앙인일 지라도 마찬가지 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왜 성경은 자꾸 자신의 권위가 상실되어 가는가. 스마트는 엄연하 고 자명한 이 현실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이유를 들추어 낸다. 그것이 7장 권위의 재해석이다.

스마트는 성서의 권위가 자꾸 추락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는 현대인들이 어린아 이와 같은 순진한 복종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종교라는 이름 하나만 가지고도 인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던 시대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복종에 저항하는 역사이다. 이런 역사적인 엄연한 흐름 앞에서 성서 앞에 무조권적인 맹신을 행해왔던 모습은 점차 사라지 고 만다.

둘째 요인은 인류의 지식의 축적과 발전이다. 지식은 인류를 향해, 결코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가 치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언명을 끊임없이 선포한다. 어쩌면 기독교에 있어서 성서는 그의 독 자성과 그의 절대성을 암암리에 전제하였다. 또한 성서 이외의 세계, 기독교 이외의 세계를 향해 서는 배타적인 감정을 가지고 반응하는 기독교적 자세를 많은 사람들은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했 다. 이것은 결국 세계의 기류는 다원화의 기류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만의 고유한 권위와 독자성을 펼칠 수 있는 무대가 점차로 잠식해지고 있다는 점을 의미 한다.

셋째 요인은 역사비평이다. 역사비평은 성서가 원래 이스라엘의 종교였다는 점을 밝혀준다. 동시 에 이스라엘의 종교가 유대교로, 유대교가 세계적인 기독교로 발전되었다는 점을 밝혀준다. 이러 한 역사비평적인 지식의 증가로 인하여, 성서의 진리가 보편적인 진리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하여 성서의 권위는 자꾸만 그의 세력이 와해되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실로 어려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성서의 권위가 자꾸만 어두운 곳으로 추락해 가는 엄연한 현 실, 대중들의 지식의 무한한 폭발과 맞물려 상대적으로 좁아져만 가는 성서의 자리들. 이러한 상 황에서 우리 신학을 살아가는 신학도들이 취해야 할 자세와 방향은 무엇일까. 무지몽매하지 않는 교인들 앞에, 인류 문명 앞에 상대화되어버린 성서를 가지고 어떻게 그들을 복음의 축제로 인도 할 것인가. 그 물음은 여전히 혼미한 체 우리의 의식에 남아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진정한 성서 의 권위와 성서의 무제를 실려내는 작업이 요청된다. 그 성서 말씀이 진정한 말씀이라면 말이다.

제8장 역사와 계시와의 관계
역사와 계시는 기독교와 성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사와 계시 사이의 또렷한 경계선을 구분하는 행위만큼 어렵고 난해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뜨거 운 감자와 같은 역사와 계시의 관계 문제를 스마트는 전개해 나가고 있다.

스마트는 성서의 권위의 유일한 근거를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인식한다. 그는 말한다. "수 천년 동안에 걸쳐 여러 사람들이 자기들의 말에 대해 주장했던 권위, 그리고 그들과 연관된 말과 행동 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전승들이 계속 주장하고 있는 권위는 하나님 자신의 권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는 성서에서 드러나는 하나님 계시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은 유일하게 신학자를 통해서 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실재에 대한 이해는 실재를 인간적이며 역사적 인 현상들에만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이며 역사적인 것 가운데서 하나님과 인간 간의 근본적 관계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모호한 눈으로 역사와 계시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그 둘을 구분하는 작업 은 지극히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의 성격을 밝히는 작업은 중요하다. 그 는 계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한 가운데서 인간의 삶의 상 황을 조명해 주며, 인간을 그의 과거로부터 해방시키고 그 앞에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면서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이러한 역사와 계시와의 관계 이해에 있어서 스마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강조한다.

"첫볁, 서술적인 역사적 학문이 훌륭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그 학문으로부터 기대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서의 권위를 가시적이고 외면적이며 역사적인 것에 근거시키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인 잘못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셋째, 본문을 그 본래의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들으라고 하는 그 정당한 강조가 우리의 눈을 멀게하여 본문을 그 본래의 온전한 신학적 컨텍스트 가운데서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성서는 그 자체의 해석자"라는 규칙을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그는 성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인 간을 참된 인간으로 만드시는 이야기라고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스마트는 현대에 직면한 성서의 권위의 파편화를 극복하기 위하여 해석학 적인 노력과 장치를 끊임없이 세우려 노력한다. 그것이 오늘 성서의 의미를 더욱 확보하는 세련 된 전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성서의 계시성이나 역사와는 별도로 지평을 확보하고 있 는 계시의 깊은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 장에서 계시와 역사라는 가장 진수가 되는 두 지평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지평이 눈에 띄인 것을 계기로하 여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천착하고 깊이 숙고하는 전환점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 램을 가져보며 펜을 놓으려 한다.

제9장 간격의 확대
스마트는 9장 <간격의 확대>에서 성서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 사이에서 빚어지는 간격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성서는 몇 천 년 전의 시대적 정황과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본문이다. 사실 우 리는 몇 년의 시대의 변화 앞에서도 쩔쩔대며 세대차이를 읊고 있는 상황에서 몇 천 년이라는 시간의 강물은 그렇게 쉽게 이해되거나 쉽게 메워지는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성서가 갖 고 있는 배경과 상황이 오늘의 배경과 상황에 비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성서 이해에 있어 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등장한다. 그것은 성서의 목소리를 오늘 이 자리에서 진실하게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비극적인 점이다. 본문의 컨텍스트와 본문을 이해하는 자의 컨텍스트의 간 격 때문에 본문의 진의가 심히 상실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스마트는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하였다. 성서본문의 컨텍스트와 성서본문을 이해하는 자의 컨텍스 트의 차이와는 별개로 성서본문을 이해하는 자의 컨텍스트가 형성되고 쌓여지는 과정이 교회에 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인의 심적인 정서와 환경을 형성하는 컨텍스트는 교회를 넘어선 세 속세계의 다양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현대인의 정서적 컨텍스트를 고양시키고 배양시키기 에는 그의 위치는 너무 하락되었다. 오히려 교회가 세속인의 컨텍스트에 지배당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 게 오늘의 교회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간 성서의 컨텍스트와 오늘의 컨텍스트의 무한한 간극의 확대에 인하여 교회는 매우 곤혹스 러운 표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교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한다. 하나는 보수주의적인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적인 방법 이다(p.141). 이 두 방법은, 스마트에 의하면, 모두 실패의 쓴 맛을 경험하게 된다. 보수주의적 방 법은 성서의 컨텍스트를 오늘의 컨텍스트에 심으려는 애절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자유주의적 방 법은 성서의 컨텍스트를 오늘의 컨텍스트에 걸맞게 변환하여 새롭게 해석하려는 야심찬 방법이 었던 것이다. 이 두 방법의 한계는 너무 일방적인 방향으로 컨텍스트에 대한 수정을 시도했기 때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보수주의적 방법과 자유주의적 방법의 한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현대인에게 있어서 왜 성 서는 매력을 잃어가고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떠 한 자세로 이러한 '간격의 확대'를 정면으로 방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가야 할까. 참으로 절 실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은 해석학이다. 성서를 오늘에 심어내는 작업이 신학의 작업이다. 그렇 다면 우리가 신학을 행할때 간격이 무한히 확장되어가는 이러한 한계를 똑바로 직시하고 이 망 각의 강을 어떻게 하면 넘어설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면서 대안을 꿈꾸어 보아야만 하겠 다. 틀림없이 스마트도 그러한 대답을 마련하기 위해 9장에서 이렇게 실존적인 고민을 가졌던 것 일게다.

제10장 비신화화의 문제
9장에서는 간격의 확대를 통하여 성서의 컨텍스트와 오늘의 컨텍스트 사이의 거리의 무한한 확 대를 염려하였다. 10장에서는 이러한 간격의 확대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간격의 확대에 대한 전면적인 대응, 그것은 간격을 줄여나가는 작업 즉 비신화화라고 할 수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결국 간격의 확대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대응방식은 비신화화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사실 비신화화(Entmythologiesierung)에 관한 우리 신학도들의 관심은 사뭇 크다고 할 수 있다. 비 신화화를 통해서 과거의 이야기는 현재에 직접적으로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신화 화의 아이디어가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소중한 아이디어를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구체화 해나아 감에 있어서 모종의 오류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비신화화의 작업은 어느 한 신학자의 전유물도 아니요 한 신학자의 독특한 아이디어도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신화화의 방법론을 철저하게 구축해 나아간 신학자를 불트만으로 손꼽을 수 있다.

그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을 통한 새로운 성서해석의 지평과 신학의 지평의 개간은 여러모로 신학 적 역사적 주목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스마트는 그러한 피상적인 차원의 스포트라이 트와 찬사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이 행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한계를 노정하였던 부 분을 날카롭게 제시한다. 불트만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의 좌표는 실존주의적 지평 안에서 움직였 기 때문에 온전한 비신화화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는 점을 스마트는 극구 비판한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실존주의적 해석은 하나님의 은폐성을 너무나 강조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관해 조리 있는 진술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판단의 결과이다"(P.163).

불트만의 비신화화에 있어서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초월자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는 이 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초월자가 인간의 인격 속에 있는 초월적 요소로 변해 가 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트만이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그토록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19세 기와 20세기 초기의 내재주의가 재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p.164). 이러한 비신화화의 과정 에 있어서 매우 큰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이유를 스마트는, 비신화화 프로그램이 실존주의 철학 에 내포된 신학적 가정에서 나온 결과라고 판단한다.

신학은 물론 비신화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것이 신학의 해석학적 과제이자 복무이다. 하 지만 신학의 근거가 되는 신 까지도 온전히 비신화화에 의하여 실존적 재해석되어버리는 대상으 로 몰락한다면 그것을 진정, 神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은 실존적 해석에 언제나 끌려다녀야만 하는가. 언제나 실존은 神에 앞서는 것일까. 불트만의 기획은 바로 이 점을 모호하게 남겨놓은 체 그의 사명을 완료했기 때문에, 오히려 비신화화라는 가치있고 소중한 작업의 점진적 계승이 단절되었다고 브라운은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신화화의 작업은 교회의 대부분의 영역 가운데서 계속 무시되기 쉬우며 더구나 고의로 무시되어 버릴 것이다"(p.167).

또 한 가지, 왜 스마트가 불트만의 신학적 성과에 대하여 그렇게 부정적으로 판단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본다. 그것은 아무래도 독일신학에 대한 영미신학의 입장의 차이에 기인한 반격이 아 닌가. 아무래도 독일신학과 영미신학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양상을 흥미롭게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스마트의 비판을 조금 더 확대하면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과도 궤를 같이 하게 된다. 말하자면 민중신학에 있어서 민중은 하나님이다(안병무). 이러한 민중에 대한 해석의 신학 은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해석을 모티브로 갖고 있다. 스마트는, 이러한 실존주의적인 해석이 얼 마나 그 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가에 회의를 가진다. 하나님이 실존에 물든다면 그 작업이 이미 큰 한계를 담고 있다는 점을 스마트는 지적한다. 결국 민중신학에 대한 새로운 충고를 이 본문 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학은 어쩌면 완고한 모습과 역사 안에서 실존적으로 해석되어지는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는 하나님을, 높은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듯이, 역사 안에서 말하고 전해야 할 사명을 담고 있다. 성 서 해석도 마찬가지가 된다. 나는 신학의 역사, 성서해석의 역사를 통해서 신학적 작업의 의미와 한계를 또렷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결국 비신화화의 문제는 내가 행해야 할 신학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불트만의 성과와 그 한계를 동시에 담아내면서 새롭게 전진해 나아가야 할 숙제라고 여 겨본다.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아우러짐, 초월적 신과 내재적 신의 조화로운 만남, 그리고 그것 을 바탕으로 한 성서해석, 이것이 스마트가 나에게 던져주는 바램인 듯 하다.


1996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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