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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비처 | 자본주의 혁명


전 철


골비처 | 자본주의 혁명 - Die Kapitalistische Revolution
 


 
1.

자본주의 혁명은 골비쳐가 1973년 9월 27일부터 29일까지 하이델베르크에서 개최되었던 개신교 신학 연구협회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분과모임에서 발제한 보고서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7쪽). 골비쳐는 자본 주의가 갖고 있는 병폐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진단을 위한 방안으로서 이 글을 내었다(11쪽).

그렇다면 {자본주의 혁명}이라는 제목의 함의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골비쳐에게 있어서 자본주의 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이며 큰 혁명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획기적 사건은 많은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 그 가장 큰 문제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골비 쳐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짓 을 하는 자로 규정된다(10쪽).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신학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골비쳐는 사회분석과 신학하는 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신학이란 구두깁는 일처럼 자신의 전문분야에만 몰두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은 절대로 어떠한 인간 사와도 무관한 것이 아니다. 신학이 학문적 분업에 의하여 그에게 할당된 우리Kafig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만다면, 신학은 추상적인 영역 아넹 머물게 될 것이고 인간의 현실에 대한 그 추상적인 영역의 의미를 더 이상 밝힐 수 없을 것이다. 신학은 이 현실을 하나의 세속적 현실로서 간주하여 그 자체의 법칙성에 넘겨주 고, 이런 포기를 통하여 바로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 식이 신학에게 명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 된다. 신학자는 기독교의 복음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실을 바라보아 야만 하고 현실의 분석에 참여해야만 한다.

2.

자본주의적 현실 분석과 신학하는 자는 서로 무관한 관계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현실이라면, 기 독교의 복음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아야 할 사명을 가진 신학하는 자에게 있어선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당연히 요청되기 때문이다. 사실 신학자는 자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위에서 말한 관련성 이 상으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公의 개념에 뿌리를 둔 기독교는 사실 자본주의적 체 제와는 상극의 자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복음이 무엇인가? 구원이 무엇인가? 자유란 무 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렇다면 오늘날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자본주의 사건 안에서 복음의 문제, 구원의 문제, 자유의 문제는 어떻게 용해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작업은 신학하는 자의 가 장 중요한 요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과 구원과 자유라는 신학적인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기 본적인 출발점으로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은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골비쳐는 서문 제일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맺음말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인류의 존속의 조건들에 관하여 스스로 를 계몽하고 타인들을 계몽하는 것이 오늘날 자유의, 더욱이 기독교적 자유의 실행인 것이다."

골비쳐는 1부에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계급사회에 관한 분석들을 다룬다. 그리고 2부에서 교 회와 계급투쟁에 관한 관계에 대한 분석들을 다룬다.
 

제1부 계급사회

3.

제국주의는 무엇인가? 골비쳐에게 있어서 제국주의는 백인들로 이루어진 세계 중심부를 위해 변형되어 진 것이다. 제국주의는 백인들의 관심들이 이 세계를 지배하는 관심들이다(28쪽). 이 세계는 착취국과 피 착취국의 대립의 구도이다. 착취국은 백인을 중심으로 한 백인국가이다. 그 구도는 백인들로 이루어 진 중심부와 가난한 나라들 사이의 착취적 관계들의 다양한 형태로 규정되어진다(29쪽). 그리고 이러한 기형적인 지배체제에 대한 언급을 골비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지배체제는 그것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보편적인 체계가 아니라 내부를 향해서나 외부를 향 해 분파주의적 관심들을 지니고 있는, 세계가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큰 편파주의적 체제ein partikulares System이므로, 그리고 이 체제는 그 자신의 분파주의적 관심들을 오늘의 인류의 보편적 관심들에 종속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그런 준비를 할 수도 없으므로, 이 체제는 오늘날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들에 직면하여 인류에게 미래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제공된 보편적인 노력을 거스 르는 가장 큰 반대 동인이다.

인류의 보편적 관심의 증대는 인류문명의 최대의 숙제이다. 보편적 관심은 보편적 발전을 의미한다. 보 편적 발전은 인류의 밝은 미래를 여는 빛이다. 하지만 분파주의적 관심은 보편적 관심과 보편적 발전의 빛을 저해하는 요소로서 작동한다. 그래서 골비쳐는 이러한 지배체제는 오늘날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들에 직면하여 인류에게 미래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제공된 보편적인 노력을 거스르는 가장 큰 반 대동인이라고 규졍한다(35쪽).

4.

골비쳐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세계경제적 지배구조의 틀 안에 있다면 제 과학은 지배구조에 봉사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경제의 전능함은 정신적 삶에서 객관화시키는 과학의 전 능함을 요구한다. 과학에 알맞지 않은 것은 환상, 즉 사치스러운 정신적 놀이들의 왕국으로 밀려나고 만다. 경제처럼 과학도 다만 자신의 고유한 합리성 외에는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되었다. 단지 그렇게 만 과학은 경제에 의한 착취를 위해 자연을 준비시키는 데 유용하였다(47쪽)."

우리는 골비쳐의 위의 문장을 통하여 학문Wissenschaft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학문은 객관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학문은 소통가능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골비 쳐의 학문 이해는 무전제의 객관화와 소통가능성을 향한 지평으로만 학문을 이해하려는 우리들의 관점 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를 요청한다. 학문은 학문이 자리잡고 있는 틀을 넘어설 수 없는 학문의 존재구 속성Seinsgebudenheit der Wissenschaft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학문이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은 학문 자체가 자신의 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자기 관련성 안에서의 물음이 되어야 하겠다.

다음으로 골비쳐는 클라우스 뮬러의 {준비된 시간}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과학 활용의 특징을 언급한다. "클라우스 뮬러는 {준비된 시간}이라는 저서에서, 과학자들과 과학의 이용자 들은 아마 그들이 기획하는 것들의 효력들을 계산할 수 있겠지만 그 성과들에 대하여서는 맹목적이라 고 그들을 비난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과학 활용의 특징인 것이다. "생산과 교 환을 지배하는 개개의 자본가들은 단지 그들의 가장 직접적인 효율에만 마음을 쓸 수 있다. 그 뿐만 아 니라 이 효율 자체도 완전히 배후로 물러나고 판매에서 얻으려고 노력하는 이윤이 유일한 동기가 된다 ". 과학에 의하여 인간의 통제와 처분 안으로 들어 오는 자연계의 힘들이 커지면 커질 수록, 그럼으로 써 자연계에 대한 기술의 영향력들이 커지면 커질 수록, 누가 여기에서 사용하고 계획하고 통제하는, 그러므로 책임적인 주체인가 그리고 어떤 표준들에 따라서 사용에 대하여 결정이 내려지는가 하는 질 문들은 더욱 더 절박해진다"(51-52쪽).

5.

여기에서 우리는 과학은 순결하지 않다!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맹목적인 과학의 과학성, 과학의 효 율성 또한 일종의 자본주의적 전략의 일환으로서 수행되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결코 과학은 자본주의적 지배전략 앞에 순결할 수 없음을 목도한다. 이러한 과학에까지 은밀하게 깃든 자본주의적 지배전략에 대한 대응방식으로서 사회주의적 혁명에 관하여 골비쳐는 언급한다. 골비쳐는 사회주의적 혁명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본다.

사회주의적 혁명의 문제는 다름아니라, 그것의 내재적인 법칙성으로부터 목표없이 미친 듯이 계속 날뛰 고 있는 자본주의 혁명을 통제해야 하는, 즉 여기에 해방된 가능성들을 인간적인 삶에 - 즉 모든 인간 의 삶에 그리고 그와 함께 인간적인 삶의 가능성에 - 봉사할 수 있게 통제해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다 양한 사회주의적 구상들Entwurfe과 분파들은 이 목표설정과, 이 목표는,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 질에 대항하는 것이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개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것의 극복을 통해서만 도 달될 수 있는 인식에서 일치한다(53쪽).

6.

골비쳐는 자본주의의 무한한 팽창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적 혁명을 설정한다. 대안은 현재 세계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대안은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일대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근 거와 거점이 된다. 자본주의적 병폐는 자본주의적 기능의 보완과 지양을 통한 소극적인 대안으로 해결 할 수 있을만큼의 수위를 넘어섰다. 자본주의적 병폐를 대결할 수 있는 대안은 오직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질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적 구상을 통하여야만 가능한 것이고 그러한 적극적인 대안이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골비쳐는 본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병폐의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 운동은 후퇴의 노정을 겪고 있다. 노동자 게급의 역 사변혁적 당파성과 역사변혁적 가능성을 간과해버리거나, 단지 국부적인 계급이익에만 집중하는 경향은 자본주의의 당당한 대안으로서의 자리를 상실하는 듯 한 현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골비쳐는 산업국가 들의 노동자집단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제3세계에 대하여 중부 및 북부 유럽과 미국 등 대부분의 개신교 산업국가들의 노동자 집단은 (그들 자신 이) 그 국가들의 주변부로서 타국의 주변부들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국가의 엘리트들과 결합되어 있는 노동 귀족으로 되어 버렸다. 노동운동의 국제주의는 늘 매우 빈약한 상태에 빠져 버리곤 했으며 노동 운동의 국 제주의는 행위에서보다는 노래와 연설에서 더 낫다! 1914년 8월 4일 그리고 그 이후의 거의 모든 파업은 이 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노동자 집단의 자본주의 체제에로의 통합은 노동자 집단의 국제주의를 거의 완전히 해체시켰다. 계급의식과 함께 국제주의가 이제 다시금 일깨워져야만 한다.

하지만 골비쳐는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놓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철 저한 인식과 본질에 대한 파악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결 코 포기할 수 없는, 혁명의 근거로서 존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적은 개인의 희 생도, 국토의 파괴도 아닌 유일한 대립항인 사회주의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적나라한 인식이 필요하다. 과거의 모든 국가들처럼 자본주의 국가는 계급 국가, 즉 지배계급의 국가이다. 자본주의 국가 자체와 자본주의 국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법률은 이중의 얼굴을 갖고 있다: 동시에 공동의 복지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의 이익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 칠레에서의 군사 쿠테타는 갈등이 생길 경우에는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가 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을 위한 단 지 하나의 특별히 명백한 증거일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그 체제에 소속된 사람들을 그처럼 사로잡기 때 문에, 그 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모두가, 즉 자본가 개인의 희생도, 국토의 파괴도 제물로 바쳐진다. 그 체제 가 유지되고 있는 한, 자본은 늘 다시금 회복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에게 치명적인 것은 전쟁도 황폐화도 아니고 오직 사회주의 뿐인 것이다.

제2부 교회와 계급투쟁

7.

그렇다면 교회는 자본주의와의 관련성 속에서 어떻게 존속되어 왔는가? 교회는 자본주의적 체제와는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었는가? 또한 신학은 사회 계급과 어떤 접촉점을 갖고 있는가? 교회가 이해하는 계급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주워져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2부 교회와 계급투쟁에서는 내용을 전개해 나간다. 우선 교회와 신학이론들은 권력과 밀접한 친권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지배세력의 승인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유지하였던 것이 아니라 계급사회에 대한 순응적 자세로서 임해왔던 역사적 상황을 골비쳐는 주목한다. 교회가 주장하는 하나 됨, 연합, 코이노니아가 갖고 있는 맹점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해악에 대하여 골비쳐는 집중적으로 관 심을 갖는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옛것이 파기되고 새 지평이 역사에서 열리는 기쁜 소식. 불평등한 관계가 파기되고 올바른 관계가 맺어지는 기쁜 소식을 외쳐야 하는 교회는 이미 제도권 안에서 자신의 창조적 가능성을 거세하며 안정을 찾기에 연연할 뿐이다.

새로운 신학 이론들은 부득이 교회의 기원으로부터 볼 때 문제가 되는, 권력과의 교재를 위한 변호들일 뿐 만 아니라 동시에 또한 계급권력의 변호들이었으며 계급사회의 변혁에 관해서는 어떤 목표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이 신학이론들은 계급분할, 기존의 소유관계들, 그리고 그것들을 보호하는 법을 승인하였으며, 스스 로를 체제내재적인 목표에, 즉 권력행정과 그것을 위하여 요구되는, 신하들의 순종을 도덕적인 것으로 정당 화시키는 일에 국한시켰다. 이 이론들은, 동화된 조직인 교회에 스스로 속했으며, 사회적 신분상승에 참여했 고, 기존의 권력에 의하여 기능하게 되었으며 장려되었고 재정지원을 받던 기관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에 의 하여 만들어졌고 확산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총체적 의식은 기존의 계급사회 안으로 편입되어 있었 다. 계급사회를 초월하는 통찰은 단지 피안에 대한 통찰로서만 가능하였다. 모든 사람이 "함께 그리스도 안 에서 하나"(갈라 3,28)인 형제성은 오직 피안의 세게에서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8.

틀림없이 신학과 교회가 존속해온 역사적 경로를 점검해 본다면 자본의 구도를 비판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의 신학과 교회의 기능은 소흘했음을 알 수 있다. 신학과 교회는 현실을 현실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대자적 거점을 통하여 현실을 대상화시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현실을 초월하는 초월성이 부여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현실을 그리스도라는 비 판적 거점을 통하여 현실의 문제를 정확하게 목도하고 이상적 틀을 제시할 수 있는 기능은 교회와 신 학의 가장 중요한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와 신학은 위에서도 말하였듯이 현실 안에서, 제도권 안에서 제도권의 비호 아래서 밀접한 관계 안에서 존속하였기 때문에 역사현실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 계급의 불평등에 대한 맹아적 가치판단, 그리고 계급투쟁에 대한 엄격한 교회와 신학의 입장 정리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현실의 부단한 지각변동과 움직임에 대한 타성적인 반응과 수동적인 자세 는 교회와 신학의 창발적 가능성에 커다란 저해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가진 교회와 신학은 체제로부터 보호 보존받으려는 수동적 사고로 인하여 그의 기능을 상실 당하였던 것이다. 골비쳐는 신학과 교회에 대한 진단을 다음과 같이 긴 어조로 제시해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 소위 과학기술 혁명의 위험성에 직면하여 신학과 교회가 소흘히 여긴 것들에 대하여 질 문한다면, 그것들은 나의 견해로는 아주 쉽게 찾아 내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학문에 대한 거부가 부 족하였다든지 혹은 개별적인 사고가 지닌 오류가 아니라, 학문의 사회적 상황, 즉 교회와 신학 스스로가 그 안에 매우 밀착되어 있었고 교회와 신학은 변혁하는 힘으로서 작용할 수 있어야 했던 그 상황에 대한 무비 판성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만을 우리가 유럽의 교회역사를 계급사회의 계급투쟁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 대 한 질문이라는 표준 아래에서 개관한다면 우리는 논쟁이나 변호가 아니라 객관성을 위해 노력한다면 기껏해 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역사적 기독교는 개혁주의이다. 이것은 늘 반복되는 정체와 늘 새 로운 출발, 모든 업적들과 또한 그러한 운동에 초래되는 한계들과 예측될 수 있는 손상들을 지닌, 수세기에 걸친 개혁운동의 고전적인 표본적인 경우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명예인지 수치인지, 개혁주의적이 아닌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었고 또한 다른 형태를 취하여야만 마땅했는지에 대해서는 늘 다시금 논쟁을 불러일으켰 으며 오늘날도 이 문제에 대하여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9.

복음은 실로 그 자신이 큰 힘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빛은 다름 아닌 복음이다. 복음은 기쁜 소식 이다. 기쁜 소식은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뒤엎을 수 있는 혁명적인 소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혁 명적일 수 밖에 없고 혁명을 몰고 올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혁명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럼 복음은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의 세계 안에서 어떤 옷을 입고 등장을 하는가? 복음은 자본주의적 병폐에 대하여 외면하는 존재가 아 니다. 자본주의적 병폐의 뿌리 끝에서부터 새롭고 전면적인 전환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서 복음은 다가 오는 것이다. 그 원동력은 새로운 사회, 새로운 관계, 새로운 의식, 새로운 화해,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개혁, 새로운 자유를 향하는 전향Umkehr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골비쳐에게 있어서 복음의 빛은 어 떻게 다가오는가? 그것은 철저한 사회적 혁명으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역사속에서 교회가 복음이라고 자처하며 행해왔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사회적 혁명에 대한 교회의 거부는 실제로는 개급지배에 대한 선택으로 귀결되었다(100쪽). 그리고 교회는 계급투쟁에서 대타적으로 바리케이트 우편에 서 있었다 (101쪽). 이러한 역사적 노정속에서 골비쳐는 철저한 결단과 판단이 없이는 복음의 진정한 기능과 정수 를 망각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결단은 "너만 지혜롭다는 말이냐? 다른 사람은 모두 잘못 생각한다는 말이냐?"(101쪽) 하는 물음을 되돌려 받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봉착하게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사회적 혁명은 새로운 전환을 끌어들인다. 새로운 전환은 예전에는 없는 새로운 시대의 태동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익숙한 상황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익숙하고 눈에 익은 기존 환경에서 비판하는 "너만 지혜롭다는 말이냐?"라는 물음을 정면으로 맞대면 할 수 있는 용단과 결단이 필요한 것 이다. 루터가 그랬고 수많은 종교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이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 및 공관복음서의 예수가 현재의 비참한 상태와 대결하였다는 사실로부터 혁명적인 충격이 발생한다"(102쪽)고 골비쳐는 주목한다.

10.

그렇다면 교회가 자본주의 구조안에서 그 체제를 향해 가할 수 있는 목소리와 대안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나. 이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복음의 빛은 어떤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갈등의 화 해와 해소를 던져줄 수 있는 새로운 메세지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나?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무한한 가능성을 오늘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긍정적인 대안으로서 바라본다. 교회는 그 안에 복음을 갖고 있고 그 복음은 계급사회에 대한 폭발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골비쳐는 진단한다(123 쪽). 그리고 이 폭발물이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행해야 할 과제라고 말한다(123쪽).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기독교 전승의 뿌리이자 고향Heimat가 되는 초대기독교에 대한 전면적인 관심 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복음의 무제한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아직도 우리 앞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 신 앙은 붕괴하고 신앙의 이질적 요소가 현저히 증대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새로운 차원들이 발견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신앙의 새로운 차원의 발견을 위해서는 콘스탄틴 이래 사 회적 책임 안으로 교회가 걷던 길을 긍정하는 것과 아주 똑같이 성서적 하나님-나라-복음의 현세적-사회적 내용에 대한 숙고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비역사적으로 콘스탄틴 시대를 뛰어넘어 초대교회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진리-세계형성에 이르는 길-를 초대기독교적 실마리의 도움으로 교회 와 지배 세력들 사이의 결합이라는 울타리들로부터 빼내어 오려는 것이다(123-4쪽).

이러한 기독교의 가능성을 통하여 신앙공동체는 자본주의 혁명에 저항하는 대응과정을 촉진하게 된다 (125쪽). 그리고 신앙 공동체는 새로운 대안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담지받는다. 오히려 신앙공동체는 우리 시대의 역사적 한계의 경계선에서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영역으로 자리잡혀지게 되고 따라서 우리 시대를 앞서 나갈 수 있는 접촉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종적인 희망의 가능성은 그리스도 인들의 <메타노이아>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서만 열린다고 골비쳐는 결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다(127쪽). 메타노이아의 주창이 혁명의 가능성이고 복음의 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야 자본주의 혁명이 노 정해온 병폐를 치유할 수 있고 넘어설 수 있는 백인 지배체제에 대한 대응의 방식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운을 지닌 소수에 속한다. 우리가 메타노이아를 거부한다면, 즉 우리들의 특 권들을 유지하려 노력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운명이 좌우되는 이 때Menschheitsstunde에 인류의 구원 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동인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127쪽).

11.

우리 세계의 첨예한 문제인 자본주의적 체제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 그 리고 계급갈등에 대한 중심논의를 이 책에서는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체제 안에서 그리스도 인들이 행해야 할 정치적 실천적 결단과 방향에 대하여 새로운 전망을 제시해 준다. 그 전망이야말로 구원을 향한, 새로운 복음을 향한 전망이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현재상을 이 책을 통하여 엿볼 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순수한 복음과 구원의 문제가 구체적인 현실체제 안에서 융해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촉진제가 되었다. 순수한 복음은 구체적인 우리의 현실과 결 코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종말론적 구원의 문제는 오늘의 현란한 체제를 넘어서는 공허한 물음이 아니라 체제에 깊이 스며들면서 실천적인 방안을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인류의 운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명을 오늘 이 자리에서 고안해 내는 작업은 자본주의 체제 에 대한 전면적이고 철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각성을 하게 된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리스도인 들의 메타노이아는 결코 멈춰질 수 있는 언명이 아니다. 세계사회의 새 전환은 바로 우리의 <메타노이 아>에서만 출발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며 펜을 놓는다.

1995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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