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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선| 구약성서와 현대생활


전 철


장일선| 구약성서와 현대생활
 
 
 
I.땅
성서는 야웨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첫 번째 주장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무력진압에 의한 진입일 것이라고 보는 점이다. 두번째 주장은 알트, 노트, 바이페르트 등 의 입장으로 반(半) 유목민들이 계절의 주기적 리듬에 따라 초원을 찾아 움직여 간 매우 점진적이 고 평화적인 이주였다고 본다. 이들이 차지했던 땅들은 가나안의 산간지역 여러 곳에 넓게 흩어져 있는 가나안 도시들 사이사이의 여백의 땅이었다고 본다. 세 번째 주장은 멘덴홀이나 갓월드의 농 민봉기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고생하던 소수 집단이 그야말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야웨 하나님의 평등사상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그 땅에서 살던 농민계층이 그들을 억 압하는 상층계급에 반기를 들고 봉기함으로 이스라엘이란 공동체가 그 땅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 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에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공적에 있는 이들이 그들의 직위를 이용해 땅을 투기 목적으 로 구입했다느 사실이 밝혀지자 국민은 아연실색했던 것이다. 한국사람 처럼 자식사랑이 지나쳐 땅을 물려주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자녀가 원하는 것은 맑은 공기, 깨끗한 물, 그리고 떳떳하게 거리를 거질 수 있는 질서 잡힌 사회이지 눈물배인 농민의 땅 한 마지기는 아닐 것이다. 성서는 분명 어느 누구도 땅에 대한 절대 소유권이 없음을 보여준다. 희년법과 같은 제도는 오히려 땅으 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시켜 공동체 구성원간의 경제적 평등권,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 기 분수껏 똑같이 살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 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땅은 언제가지나 우리의 인 간 삶의 터전이며 또 우리 생명을 키워 나가는 텃밭인 생명체이지, 그것이 결코 투기의 목적이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II.약자의 하나님
창세기 4장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창세기 3장까지의 에덴 동산 이야기에서는 아 담이 최초의 인간이었고, 하나님이 그를 위해 하와를 마련해 배필로 삼아 주신 것으로 되어 있다. 창세기 3장 마지막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그리고 곧이어 4장 서두에서는 동산 바깥에서의 생활을 읽게 된다. 출에굽기 15장 1절에서 18절은 모세의 노래라고 부른다. 이 부분은 앞의 14장에서 언급된 산문체로 된 갈대바다의 구원사건을 시 형태로 다시 띬 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상 2장 1절에서 10절을 주석가들은 하나의 기도라고 부른다. 한나는 사무 엘의 어머니이다. 원래 한나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하는 엘가나라 하는 사람의 아내였는데 아기를 낳지 못하였다. 우리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약자의 하나님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2천여 동 안 이스라엘은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던 약소민족이었으나 약자의 하나님 야웨는 끝까지 그들을 버 리지 않아 1948년 현대 이스라엘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약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 강자가 되어 약자 PLO를 억압할 때는 그의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겠는가 하는 것이 남은 과제이 다.

III.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세상 만드시는 이야기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12장부터 전개되는 본격적인 아브라함 이야기를 유도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극 정도로 본다면 막이 오르면서 무대 중앙에 신이 세상 창조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연극에서는 대사를 낭독하거나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배우의 일거수 일투족에 청중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만큼 현재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배우의 정체에 대해선 논의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 지를 창조하셨다"는 문구에서 성서는 그 하나님이 누구이며 또 어떤 분인가 하는 것에 대한 철학 적이거나 신학적인 개념 정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가 천지를 창조하신다는 그 사건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이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여자나 남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혹은 수적으로 다수나 소수가 모두가 동등한 아브 라함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임을 각성케 한 것이라고 본다.

IV.우상

성서는 야웨 하나님을 어떤 동물의 형태로든 조각품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것은 구체적으로 가나안의 바알 신이 금송아지 모양으로 만들어졌던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광야 시절 아론 이야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과 은을 부어 금송아지상을 만든 다음 그것을 신으로 섬긴 것으로 되어 있다. 구약성서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참 하나님은 형상이 없이 오늘 도 세미한 소리로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분임을 다시금 확인해야 한다. 물론 마이클 딕이 지적한 대로 그 세미한 소리가 머지않아 또 다른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의 "제단을 허물고 석상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우상을 불살라라. 너 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신 7:5-6)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데 게을러서는 안될 것이 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꾸준히 개혁해 나가야만 하며, 우상숭배는 계속 철폐되어야 한다.

V.율법

계약법전은 종에 관한 법을 다루고 있다. 신명기 법전은 여자 종에게도 남자 종과 같은 대우를 해 주며 또 주인은 종이 나갈 때 후한 정착금을 지불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신명기의 인도주의적 정신 을 드러내고 있다. 폭력에 의한 손해는 반드시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빛으로 오셨으니 구약은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이 꽃이라면 구약은 그 꽃을 피우는 화분의 흙과 같다. 둘을 갈라놓고서는 안된다 는 것이다. 꽃이 화분을 떠나면 곧 시들어 버리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VI.제의

인간이 신에게 예배드리는 형태는 제사이다. 이것은 구약성서도 마찬가지이며, 레위기는 제사의 종류와 절차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을 읽어버린 유대교인들은 그 이후 전세계 방 방곡곡에 흩어지면서 회당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회당예배 때는 일차적으로 시내계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야웨 하나님의 계명을 적은 성서를 공부하며, 영으로 임 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그 말씀을 풀어 주는 설교자가 강해를 한다. 회당예배는 그리스 도교 예배의 모델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의가 있다. 제물을 바치는 제사 없이도 성 서를 읽고 묵상하며 기도드리는 영적인 예배가 가능한 것을 보여주며, 신약시대의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요 4:23) 드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VII.성윤리

이스라엘 종교에서 농경문화권에서의 이스라엘 종교의 정체성이나 차등화 작업이란, 야웨종교가 성을 초월한 종교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야웨는 성이 존재하고 번성하느 현상세계를 뛰어넘어 존 재하는 것이다. 고대세계의 신들은 모두 자연신이며 자연세계 역시 성의 원리하에 발생과 성징, 쇠퇴가 이루어진다. 야웨는 그같은 세계 위에 있기 때문에 다른 자연신들은 아침 풀처럼 사라지지 만 야웨의 말씀은 영원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야웨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말씀으 로 역사를 통제하신다. 그리스도교는 이 말씀 종교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 님과 함께 존재하던 바로 그 말씀이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우리 개신교가 말씀의 종교라고 하 는 것도 바로 그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VIII.왕

사무엘서 전승에는 왕정을 지지하는 전승과 반대하는 전승이 함께 병립되어 있다. 그러면 역사적 으로 부족동맹체에서 왕정체제로 어떻게 전환되었으며, 이것을 신명기 사가가 어떻게 정리하고 있 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학자들은 이스라엘 왕정 출현에 대해 내적인 이유와 외적인 이유를 찾고 있다. 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블레셋의 공격을 들고 있다. 블레셋은 이미 지중해 지역에서 팔 레스타인 해변에 도착할 때 철기문화를 가지고 들어왔다. 우리는 신명기 사가가 이스라엘 역사를 남왕국의 시각에서 재구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근 성서를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해체시켜 그 본래의 모습을 보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아직 그 본래의 실 체가 무엇인지는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쿠트 같은 이에 의해 점차 그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 는 중이다.

IX.공의

성서에서, 공의는 미쉬파트와 체데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미쉬파트의 어근은 재판하다라는 동사의 뜻을 가진 샤파트이다. 이 낱말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심판언도를 선언하다라는 뜻보다는 서로 상이한 주장을 펴는 양측이 각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권위 있는 제삼자에게 호소하는 과정을 말한다. 구약성서 초기에는 성문에서 각 지파의 원로격인 장로들이 상이한 입장을 가졌던 것이다. 이때 판정은 주로 관례를 따르게 되었으며, 후일 판례가 집대성된 것이 미쉬파트라는 법 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신명기에서 모세의 법을 미쉬파트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같은 의미이 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미쉬파트를 법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인 의미로 바꾸어 해석했으며, 결국 하 나님의 뜻에 따르는 종교적 규칙을 뜻하게 된 것이다.

X.인도주의

야웨가 이스라엘에게 보여 준 사랑을 이스라엘은 자기 공동체 내의 약한 자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 다. 톰슨은 정의와 사랑을 동내의 약한 자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톰슨은 정의와 사랑을 동의어 라고 보며, 이스라엘 백성이 강자에 의해 착취를 당할 때 야웨가 그들을 구해 준 것이 정의의 실 현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곧 하나님 사랑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스 라엘 에게는 하나님 사랑의 모범이 인간사회에 있어서 정의를 실행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런 면에서 신명기법전은 인도주의적인 관심을 많이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 다. 오늘 우리 사회는 기원전 8세기 예언자들의 질책을 받던 사치 낭비의 시대 못지 않은 과소비 시대가 되었다. 더욱이 더 안타까운 것은 오늘 이사회의 양심이 무뎌졌다는 것이다. 더 이상 부끄 러움을 모르는 집단이기주의가 활개치는 세상이 되었다. 어느 평론가는 우리 사회가 청개구리 심 보 사회라고 평가하였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느 안될 일만을 골라 행하는 세대 가 되었다는 것이다. 신명기의 정신을 반영하는 설교가 양심에 호소하는 소리라고 할 때, 그것이 한낱 귓가에 흘리는 마이동풍에 불과한 소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XI.평화

미가가 말하는 우주적인 평화는 내면적인 평화가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 개념으로서 구체적인 역 사현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와 같은 때가 있었는지 의심 스럽기도 하다. 열왕기서의 저자는 솔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마음놓고 살면서 저마다 제가 가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라고 말하지만, 당시의 정치적 현실로 보아 이것은 어디까지나 솔로몬 시대의 평화를 과장 하여 진술한 것으로 보인다. 신명기에 의하면 자기가 심고 가꾼 포도원의 소출을 따먹지 못하는 것을 큰 저주로 보고 있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평화통일교육을 교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소 리가 높혀지고 있다. 그 방안은 적대자상이란 실제로 역사적, 사회적으로 형성된 선입견임을 인정 한 다음 적대자상을 해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XII.역사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고레스를 불러일으켜 세워 역사에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 이 시점에서 제2이사야를 다시 읽어 본다면 고레스는 야웨를 알지 못했다. 또 제2이사야의 선언은 야웨의 선포가 아니라 역사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한 추측에 불과한 것 이다. 그리스도교가 역사종교라 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 가 인간의 역사 속에 현현하셨으며, 성령이 인간 역사과정을 주관하신다고 믿는 데 있다. 이같은 역사관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최후 목표지점을 향해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다.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그 최후의 날이 다가와 인간의 역사가 완성되기를 바라며 오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XIII.개인과 공동체

포로민 공동체에게 들려준 에스겔의 메세지는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그 길을 택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녀희는, 너희가 지은 죄르 모 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 자 하느냐?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은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18:31-32). 우리는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혈연중심의 집단은 아닐지라도 신앙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는 구성 원끼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공동체 정신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XIV.민족주의와 세계주의

미가는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이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 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으로 보았다. 우리의 시대에 각 구절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가의 이 본문은 북한과 남한의 교회가 함께 예배드리는 공동예배문에 채택된 성서본문이기도 하다. 북 한의 핵개발문제로 인해 남한에서 팀스피릿 군사훈련을 하느냐 등의 이야기로 한반도의 긴장이 고 조되어 미국에 사는 교포들 중에는 한국에서 곧 전쟁이 나지 않느냐는 염려가 있었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해본다.

XV.메시아

그리스도교에서는 구약성서가 예고하고 있는 메시아가 곧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로부터 새로운 메 시아 시대가 도래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그 메시아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 그리스도교는 초창기부터 유대교와의 논쟁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그리스도교가 구약성 서의 뿌리에서 나왔음을 강조하였다. 즉 유대교와의 정통성 시비에서 유대교가 인정하는 구약성서 에 이미 메시아 예언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것이 곧 에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 것이니까 그리스 도교가 자연그러운 구약사상의 정신을 잇는 종교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스라엘 왕조 초기에 있었 던 반왕권운동은 '성취'의 면에서 보면 잘못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길을 예비한 것이 다. 그리고 왕조 그 자체도 완성의 목적이 될 수는 없었으나 신정론으로 조화가 되어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해 준 것이다. 목적 없이 끝없이 방황하는 동안 이스라엘의 역사가 굽이칠 때 거기에 는 메시아 또는 '인자'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 장일선 교수의 "구약성서와 현대생활"을 읽고

한국교회는 구약성서를 등한시 한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본인도 구약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구약 의 세계에 들어가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 고백해 본다. 설교라 하는 것은 본문과 오늘의 상황의 관 련성 속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세계에 나의 생각을 묻지 않고 어떻게 구약설교가 인용될 수 있을까.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국교회가 구약성서를 등한시하는 이유는, 한국의 일반 목회자들이 구약에 대한 경시 내지는 진지한 접근의 결여가 가장 큰 이유이겠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본문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여 맺기란 당연히 쉽지 않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론적으로도, 설교상황에 있어서도 한국교회가 구약을 도외시해 왔다면 장일선 교수님의 구약성서와 현대생활은 한국구약설교의 세계에 새로운 빛을 던져준 것이라고 일단 보아 도 별 무리가 없겠다. 구약이라는 세계가 다양하긴 하지만, 그것이 삶과 어떤 관련성을 맺는가, 더 나아가서 교회의 혈액으로서 숨쉴 수 있는 설교로 어떻게 옷입혀지는가 하는 문제는 교회나 신학 에 있어서 도외시하였던 것 같다. 구약의 무궁무진한 말씀과 하나님의 소리가 오늘 이땅에 구체적 으로 어떻게 실핏줄처럼 닿아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설교집이 이것을 계기로 촉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구약성서와 현대생활은 세 단계의 구조로 되어 있다. 첫째는 성서 본문의 의미 단계이다. 이 단계 는 성서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있는 그대로 보는 단계이다(p.8). 둘째는 역사적 이해의 단계이다. 성서의 본문을 역사적으로 구성해보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역사비평적인 방법이 활용되 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셋째는 본문의 현대적 의미의 단계이다. 성서본문이 현란한 현대와 어떻게 관련을 맺고, 어떠한 맷세지를 전달하는가? 하는 물음을 담은 단계이다. 특히 구약성서와 현대생활의 구성 가운데 이 세번째 단계인 본문의 현대적 의미 단계는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우리 들의 다양한 모습이 면면히 드러나면서 그러한 현실이 도대체 하나님이 보시기에, 본문을 통하여 볼 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하여 주도면밀하게 고찰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구약의 세계의 다양한 인물들과 본문에 대하여 좀더 다양하고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왜냐하면 구약의 여러 이야기들이 눈에 낮익지 않은 부분 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본문과 현실의 접촉점이 어디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라는 물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본문과 현실을 동시에 바라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현실에 맞닿아 있지 않은 본문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해가 다 저무는 시점이다. 예레미아를 발제하면서 그 예언자의 고통과 한탄에 눈물을 적시며 발제를 하였던 며칠 전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구약의 세계가 이렇게 우리들의 오늘을 향해 빛 을 던져줄 수 있었는가 하는 놀라움의 감격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신앙의 선배들의 그 눈물어린 자욱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선배들의 땀과 노력에 비하면 나 자신이 한이 없이 부끄러워진다. 예레미아를 만나고 구약 안에서의 신앙의 선배들을 만나며, 오늘 이 자리애서 신학적 실존의 사명을 다시금 새롭게 건져보면서 신학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는 발걸음을 걸어가길 빌며 펜을 놓고자 한다.

1995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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