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6/21 (02:00) from 203.252.18.128' of 203.252.18.128'	Article Number :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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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만에 고등학교를 다녀와서

나에게 있어서 고등학교는 회색빛 사각지대였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고등학교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던져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오히려 내가 거쳐온 군대보다 더 군대같았던 시절. 바삐 일어나서 아침밥을 챙겨먹고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나른한 계절이 세번 털갈이를 하니 어느덧 졸업장을 얻게 된 것 같았다. 단지 남아있는 나의 마음에는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한 동경과 염원 대단히 실존적이고 비교육적이고 개인적인 그 열망이 가득찬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제 나는 고등학교를 찾게 되었다. 10년 만에. 우리 때에는 평준화였는데 그것이 풀리고 나서 이후의 변화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별로 관심도 없고. 집에서 이리에 도착해서 더운 날씨에 택시를 타고 고등학교 앞까지 시원한 바람을 쐬며 쌀쌀맞게 도착했다. 고즈넉하게 아침과 저녁을 오고갔던 길목들을 다시 음미하는 마음으로 걸으면서 갈 수도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들긴 하였다. 그래도 그것은 잠시. 해는 쨍쨍 내리쬐고 날씨는 너무 더웠다. 와. 그런데 입구를 넘어 운동장을 보니 뿌연 연기를 내며 학생들이 구보(군대용어 말고 무엇인가 있는데? 행군)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나 정말 뛰기 싫어서 억지로 끌려다닌 듯한 느낌으로 운동장 몇 바퀴 돌곤 했던 기억이 머리를 핑 돌면서 떠올랐다. 하하. 그런데 왜 그렇게 신나게 뛰어다니는지. 인상을 찌뿌린 내 얼굴이 그 신나는 발걸음으로 장난을 치며 운동장을 도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보면서 금새 환해졌다. 저 운동장에서 기고, 뒹굴고, 혼나고 장난쳤던 3년인데 내 머리에 남아 있는 기억들은 별로 없다. 실은 워낙 기억력도 없거니와, 혹시 고등학교는 내 인생의 중세였을까. 신나게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 밖에서 교실을 쳐다보고 선생님을 쳐다보고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10년 전에 수업 밖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일반인과 자유인을 그렇게 동경하였지만 적어도 지금은 수업에서 자유로운 몸이라는 기분에 마음이 날아갈 듯 하였다. 일단 유학용 서류를 어디에서 떼어야 하는지 잘 모르는지라 그냥 2층 교무실로 갔다. 가슴이 콩콩했다. 왜 그랬을까. 말 그대로 교무실 정문에 놓여있는 거울을 보고 내 옷깃을 여메었다. 일단은 내 목적을 위하여 왔으니 만큼 당당하게 들어가서 여기 혹시 고등학교 서류는 어데서 떼는지요 하고 여직원에게 물어보니 다른 곳을 알려주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즈음에 뒤로 펼쳐진 풍경을 창문을 통하여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허허벌판이었고 잔디가 황홀하게 널려진 넓은 대지였는데 많이 아파트가 세워졌다. 10년전에 인상적인 미술선생님이 아파트에 색깔 배열하는 것도 대단한 감각이 요구된다는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 괴짜 미술선생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서류를 떼기 위하여 사무실로 들어가니 안은 시원하였다. 교무실은 더웠지만 사무실은 시원했다. 앉아서 영문서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문이라고 하하.. 미수가루를 타주는 아가씨의 마음에 너무 기뻤다. 내가 학교를 위해 해준 것도 없는데 나에게 이 더운 날 미숫가루를 타주니 난 너무 감동하였다. 서강대학교 모토인가. "서강 그대의 자랑이듯, 그대 서강의 자랑이어라!" 다시 교정하자. "남성 그대의 자랑이니, 이름에 떡칠이나 하지말라!"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으니 나중에 악덕이름으로 날려서 고등학교 먹칠이나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순간 갖게 되었다. 여하간 기쁜 마음으로 미숫가루를 얼음까지 꽉 깨물고 다 헤치우려 했는데 정말 땡땡한 얼음에 이빨이 나갈 뻔 알았다. 여름에는 얼음 조심. 주위를 둘러보니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칠판에 기숙사에 사는 사생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600여명? 정도, 많은 숫자가 통학을 하지 않고 도미터리에서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암흑이었지만 그대들에게는 정열과 청춘을 쏟는 귀한 시간이 되길 하는 기원을 마음에 품었다. 한신도 원래 도미터리 스쿨로 명성이 자자한 학교로 알고 있다. 선생과 학생이 혼연일체가 되어. 현재는 그 고리가 많이 끊어졌다고 하나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그 끈끈한 정이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양산리에서 밑변에 힘이 되어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 수유리는 잘 생활 안해보아서 잘 모르겠지만 오히려 더욱 공동체의식이 아름드리 맺어지는 시간적 공간적 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지지고 볶고 고민하고 싸우고 해야 거기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화이트헤드의 논지도 아마 그럴 것이다. 잡다하게 무엇이 모여있지만 자연과 시간의 그 안에서 새로운 무엇을 잉태시키고 있다고. 그 용트림이 우주의 신비라고.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안고 있다. 정말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모여 있을까.... 여하간 기숙사생활을 나는 고등학교시절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기숙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였나. 대학교 대학원시절 기숙사를 한 번도 걸르지 않고 생활하게 되긴 하였지만 말이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서류를 다 끊고 오늘 발급받지 못한 영문서류는 학교로 직접 우송해드린다는 말에 또 감동을 받았다. 이것 삭막한 고등학교 맞아? 아닌가벼... 고맙다고 인사 드렸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비교적 잘하는 편이다. 그랬더니 놀라면서 아니요. 우리가 빨리 서류를 발급해 드려야 하는데. 하면서 민망스럽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학교에 왔는데 선생님을 보지 못하고 가면 말이 되나. 해서 가슴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교무실을 찾게 되었다. 나는 1학년때 함영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2학년때 한상선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3학년때 박석구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1학년 때 함영태 선생님은 매우 인자한 분이셨고 한자를 기가막히게 잘 아는 분이었다. 내리짐작으로 은퇴하셨겠지 하는 생각을 이전부터 갖게 되었다. 2학년 때 한상선 선생님은 전교조 활동을 하신 선생님이셨다. 키가 매우 큰 분이셨고 눈이 크셨고 뿔테안경을 쓰셨다. 조용히 조용히, 그러나 모든 세상을 다 짚고 계신 분이셨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한상선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간혹 듣게 되었다. 전교조 활동으로 그만 두셨다는 이야기. 그리고 세상을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지. 결국 나에게 남아있는 선생님은 박석구 선생님이시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아까 질문한 사무원에게 다시 질문했다. "혹시 박석구 선생님 어디 계시는지요?" 했더니 저 끝으로 가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긴 교무실을 가로질러 저쪽 끝을 가보니 정말 박석구 선생님이 계신 것이다. 하하.. 인터넷에서 바둑을 두고 계시고 있었다. 나는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박석구 선생님은 나를 첫눈에 익숙하게 바라보셨다. 선생님은 시인이시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시집을 건네주셨다. 멋진 싸인과 함께. 나도 내 홈페이지 주소를 건네주었다. 인사를 마치고 학교를 나가는 길목에 내가 다시 언제쯤 고등학교를 방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서류를 보니 사범, 약학, 자연계가 나의 적성검사에 맞는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학생과 부모의 희망 모두가 교역자로 기재되어 있었다. 1학년 선생님은 "자연계가 바람직함"으로 기록하셨고 2학년 선생님은 "본인과 부모와 협의하여 결정하도록"으로 기록하셨고 3학년 선생님은 "더욱 정진하도록 권장"이라고 기록하셨다. 인간승리인지, 길을 잘못들어선 것인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이다. 10년동안 걸어온 길, 앞으로 10년 20년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 바램에 고등학교는 딱 10년에 한 번씩 들러 그동안 한 매듭을 어떻게 지었나 헤아릴 수 있는, 우울하지만, 그리운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기쁜 마음으로 찾아올 수 있기를 희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