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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와 가다머를 만나고

나는 지금 까까머리이다. 머리 행세로만 보면 다시 중고등학교로 돌아간 것이다. 사실 머리꼴 뿐만 아니라 생활의 여러 모습이 이전의 정신없는 중고등학교로 돌아간 경향이 있긴 하다. 어느 누가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의 낭만을 쉽게 말할 수 있는가. 독일 친구들은 언더라인 팍팍 치며 원서를 그냥 침대에 누워 읽어가는데 외국인들은 그들을 넘어설 수는 없어도 그들만큼의 노력은 해야 하는 상황이니. 주위에 유학생활의 낭만을 말하는 선배들이 있다면 한 번은 의심의 시선을 던져보는 것도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낭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헤아리는 것도 필요하고.... 9월 말경에 처음 하이델베르크 기숙사로 들어와서 늦은 밤에 티브이를 보는데 낯이 익은 한 중이 눈에 보였다. 그분은 달라이라마였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달라이라마 방한을 둘러싸고 여러 실갱이가 오고가고 있었다. 그런데 티브이에서 그분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계속 그 인터뷰를 지켜보았다. 대담하는 독일사람도 매우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인듯 한데 독일 연예계와 방송계에 대해서 내가 뭘 알아야지. 대담자의 질문은 독일어이고 달라이라마의 대답은 영어이다. 중님들이 공부는 많이 한다는  소식을 일찌기 듣고는 있었는데 쉽지도 않은 독일어를 척척 알아듣고 또 영어로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 정말 이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인가 질투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나는 달라이라마와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 복잡다단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질문하는 대담자의 질문도 인상적이었고 거침없이 혹은 지저분하지 않게 간단명료하게 대답하고 다시 묘한 여운을 남기게 하는 달라이라마의 모습을 보면서 매우 큰 인상을 받게 되었다. 김용옥 교수나 현각스님이 쓰신 책을 보면 이러한 선적인 대화에 대한 여러 체험이나 인상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내가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처음이다. 달라이라마와 그 인물을 잉태한 문화의 내용들을 속속들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안경 뒤에 비추이는 맑은 눈망울과 해맑은 웃음과 매우 직관적이면서 분명한 그의 어조를 매우 인상적으로 지켜보면서 도의 함양이라는 것이 나름대로의 논리와 길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저 개차반 책만 파도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그 방송을 다 보고 나의 마음에 잔잔히 남아 있는 감동을 고이 간직하기 위해서 그리고 조금은 길게 보이는 머리를 다듬기 위해서 머리를 깎게 되었다. 달라이라마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만도 아니었고 도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삼사십마크르가 넘는 이발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만도 아니었고 여러 이유들이 그저 뭉게뭉게 피어올라 목욕탕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게 되었다. 내 두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그저 일회용 면도날 5개짜리 한 세트. 나는 내 손으로 빡빡머리를 깎아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 때 친구와 함께 목욕탕에서 한 번 친구의 도움으로 빡빡머리를 해본 적은 있지만, 홀로한다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내가 그 한적한 밤에 머리를 깎고자 했는지 이해를 도통 못하겠다. 다음 주가 되면 새롭게 시작하는 독일의 대학생활을 가뿐한 마음으로  열어보자 하는 속셈이었나. 아니면 중이 제머리 못깎는다는 학설에 몸소 반기를 들고 싶어서 그랬나. 여하간 밤 12시가 다 되어서 남들은 쿨쿨 자고 있는데 나는 목욕탕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는 것이다. 그것도 혼자, 일회용 면도기로.... 짜른 머리카락이 옷에 묻으면 나중에 불편하니 아무것도 입지 않고 목욕탕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는데,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이마에서부터 면도기를 쓰삭쓰삭 문대니 잘 짤려지는 듯 한데 시간이 지날 수록 머리는 나에게 어려운 난위도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일회용 면도날이 그렇게 약한 면도날인지 난 몰랐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면도날은 수염은 자를 수 있지만 거친 머리카락을 자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조금식 몇십 개의 머리카락씩 계속 자르면 언젠가는 다 잘릴 날이 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조금씩 조금씩 머리를 깎게 되었다. 눈이 내리듯 어깨위로 그리고 차가운 목욕탕의 타일 위로 검은 머리카락은 사르르르 소복히 쌓이게 되었다.머리를 깎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 다짐, 그리고 인상적으로 바라본 달라이라마의 눈빛 그리고, 나도 조금 있으면 달라이라마와 같은 멋진 번쩍이는 머리를 볼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갈 수록 태산이었다. 겨우겨우 이마 위쪽은 민둥산을 만들었는데 옆쪽을 깎는 것은 매우 쉽지 않았고 특히 귀를 둘러싼 부분 더더군다나 뒷머리는 왠만한 기술이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음을 시간이 지나면서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거의 오래된 영화에 나오는 사무라이의 머리모양을 한 내 몰골과 홀라당 벗은 온몸을 거울로 쳐다보며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잠이 오고 면도기도 한 두 개 정도 남지 않게 되었고 그리고 뒷동산을 도대체 거울을 동원하여도 쉽게 낫질을 할 수 없어서 매우 힘이 들었다. 그래도 도를 닦고 학문을 하는 것만큼 어려웁고 지난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시간이 지나면서 다가오는 추위에 배고픔에 잠고픔에 벌벌 떨다가도 정신이 바짝 번개처럼 들었다. 가장 마지막에 심혈을 기울여서 최종적으로 멋지게 머리통을 마무리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면도기 하나는 아예 개봉을 하지 않았고 벌써 이빨이 빠진 나머지 4개로 열심히 조금씩 조금씩 계속 벌초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공부다운 공부, 도를 깨치는 것보다는 어렵지 않겠지 하면서 위안을 삼으면서, 벌초 진도가 더 나가면 삐쭉빼쭉한 머리통에 샤워기를 대고 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체들을 보고 기뻐하면서... 그러니 어느덧 6시가 가까이 오게 되었다.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한국 같았으면 6시에는 동이 트이는 날씨이다. 하지만 이곳 독일은 8시가 되어야 비로소 하늘이 푸르스름해지고 저녁 5시만 되면 벌써부터 어둠이 하늘을 물드는 곳이다. 이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마지막 남겨진 면도기로 마무리를 해야 할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이마와 윗동산 그리고 옆동산은 그래도 정리가 되었는데, 귀를 둘러싼 뒷부분, 그리고 뒷동산은 여전히 머리가 상당히 많이 남게 되었다. 달라이라마를 보고, 마치 도에 눈이 번쩍 뜨인듯한 뜨끔한 마음을 가지고 12시경에 가졌던 나의 자신감과 기대의 댓가가 바로 뒷동산의 삐쭉빼쭉한 머리였다. 누가 그랬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야 한다고 했나. 그래서 나는 미련 없이 모두 손을 털털 털어내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한 두어시간 잠을 청한 후 10시 대학교회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교회를 나섰다. 모자도 없었던 터라, 모자가 달린 티를 입고 교회 뒤에 앉아서 티에 달린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다. 난 그래도 마음은 흐뭇했다. 나의 까까머리 깎기, 꼭 통과제의라고 이름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새로운 출발을 나에게 새롭게 알리는 하나의 조그만한 의식이었고 6시간여의 짧은 시간을 통하여, 혹은 인내를 통하여 나 자신이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고, 정화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다녀와서 내가 생각해도 매우 웃음이 나오는 나의 머리카락 몰골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식당에서 기숙사 형님인 엔스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내 모자를 벗고 활딱 뒷통수를 보여주면서 머리깎는 기계 혹시 있냐고 물어보니, 형님이 나의 몰골을 보고 박장대소하면서 구르는 것이다. 눈물이 나게 웃다가 결국 형님의 도움으로 긴 가위도 구하고 까까머리를 전용으로 깎는 기계도 구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디론가 훌쩍 떠난 어느 간호사 동료가 당시 기숙사에 있었다. 방학에 어떠한 프로젝트를 위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잠시 공부하러 온 간호사였는데, 그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머리 이야기를 꺼내니 자신이 나의 머리를 마무리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호사의 그 세심한 손길 덕분에 나의 머리는 완전히 백두, 땀꾸멍에 박혀 있는 숨털 하나도 안보이는 완벽한 백두로 바뀌었다. 번쩍번쩍한 머리와 이마와 얼굴을 보니 완전히 동자승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마가 넓은 편인데 나 자신이 보아도 참 멋지게 보였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런지는 모르지만. 동양 신나찌 혹은 백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다음주 월요일부터 1주일동안 뉴렌베르크에서 열린 독일 WCC 장학생들의 모임에도 하이델베르크 피터교회 앞에서 싸게 5마르크로 구입한 모자를 쓰고 지내게 되었다. 나는 동양인, 게다가 머리를 완전히 깎으니 유럽친구들이나 서양친구들이 보더라도 완전히 동양의 도인처럼 보였나보다. 나도 정신적으로 사실은 너희들과 다를 바가 없는 기독교인인데, 다른 친구들은 나를 동양에서 온 중이나 도인으로 생각하니 내가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1주일간의 모임이 끝이 갈 무렵 마지막 밤에 자신의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노래나 춤과 민속음악을 같이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50여명 되는 식구들 중에 한국인이야 나 혼자이고, 동양인 또한 나 혼자여서 준비하기가 난감했지만 그래도 한국인은 어디에 가서든 그 묘한 순발력이 발동하는지, 나는 아리랑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한글 발음도 옆에 알파벳으로 표기한 용지를 프린트하여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피아노로 내가 좋아하는 가곡 "님이 오시는지"를 치고 아리랑을 피아노에 맞추어서 불러주었다. 그리고 다음에 그들과 같이 부르기 위하여 zusammen! (다같이! 라는 뜻으로 나는 생각하여) 하고 말을 하니 그 말을 듣고 목사님부터 동료들까지 껄껄거리면서 박장대소를 하였다. 상황을 바꾸어 생각해 보니, 어느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외국인이 솰라솰라 혼자 노래를 부르다 좋지 않은 발음으로 "다가치~!"라는 말을 툭 내뱉은 꼴이니 만약 한국인의 입장에서도 외국인이 그랬다면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하간 그들은 힘들게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라는 그 번역하기 어려운 깊은 뜻을 번역해보니 꼭 증오에 쌓여 있는 젊은 연인 사이의 좋지 않은 감정 혹은 공포영화에 나오는 그러한 험악한 의미로 전달이 된 듯 하여 어떤 이는 나의 번역을 듣다가 얼굴이 변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내가 도중에 이 가사는 호러필름 내용이 아니라고 하니 또 깔깔거리면서 웃는다. 이렇게 한국에 대한 소개를 하는 시간에 어느 나라보다 큰 박수를 받게 되어서 1주일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나의 번쩍이는 머리통을 모자를 벗으면서 살짝 보여주니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완전히 모자를 벗고 머리통을 보여드렸다. 이게 작은 한국 꼬추, 아니 한국 백두의 맛이다 하고 보여주었다. 실은 나는 밖에 나가보니 도대체 한국인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 많은 물음을 갖게 되었다. 물고기가 물 안에서는 물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 있었을 때에는 좋건 싫건 그저 내가 한국인이네 하였지만 밖에 나와보니 도대체 나의 뿌리와 나를 규정짓는 그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정말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한신대학교에서 심포지움이 있었다. 아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하는 심포지움이었는데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저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부여된 존재가치가 아닌가 싶어서 그 심포지움의 의미에 대해서 의아해 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나와보니 이것 한국인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독일, 유럽에서 한국인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물음이 계속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만 예를 들어보자. 베를린 중심부에 가보면 엄청난 크기의 일본 SONY 센터가 널부러져 있다. 독일은 일본에 대해서 아주 애틋한 감정을 가진다. 내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독일보다 돈이 더 많은 경제강국이 일본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더군다나 일본 메이커에 대한 선호도는 가히 전세계적이다. 용산에 가면 일본 제품들이 쌓여 있는데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독일과 일본 사이의 애틋한 관계의 근원은 무엇일까. 양국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때문에 동족감정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전에 일본문화에 대한 독일에서의 전시회가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그 전시회의 관람을 하고자 하는 독일인들에 대하여 그 전시품에 인사를 해야만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독일인들은 그 인사나 의례가 전통적인 동양의 기품인양 기쁘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시에 한국문화에 대한 독일에서의 전시에는 정작 한국인들은 저리 가고 독일인들의 잔치만 되었다는 그런 소리를 듣게 되었다. 문화로 따지면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전통과 뿌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일본인 하면 독일인들은 까딱 죽는 면이 있다. 티브이에도 일본의상을 입고 나온 일본인에 대해서 이런 저런 문화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고 있고, 또 일본 음식을 먹으면서 맛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 등등, 한국의 고전적인 문화와 그에 대한 소개를 나는 아직 텔레비젼에서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쉽게 폄하할 수 없는 그 엄청난 문화와 문명을 갖고 있다. 훌륭한 사상과 사상가 그리고 엄청난 수자의 인구 등등, 극단적인 중화주의를 부추길 필요는 없지만 그들만의 오래된 전통과 역사에 대해서 존경하는 입장을 이곳 사람들은 갖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인가. 한국은 문화의 대국 중국, 경제의 대국 일본 사이에 낀 회색지대로 보이기 쉽상이다. 아이러니컬하게 한국에 대해서 이들이 알고 있는 바는 태권도이다. 태권도. 물론 모든 상황에 대한 일반적인 도식화는 위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국에 대해서 더욱 잘 알고 있는 독일인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전체적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태권도, 그리고 이 시대의 마지막 분단국가, 왜냐하면 독일도 분단국가였고 통일을 이룩한 나라였기 때문에 비슷한 나라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학지평에서는 교회와 교인이 굉장히 많은 나라. 이정도이다. 티브이에서는 간혹 한국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특히 뉴스에서는 요즈음 진행되고 있는 이산가족의 만남,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보도, 그리고 영화에서는 내가 몇번을 보았지만 미국영화에서 나오는 한국인 태권도 선수들 뿐이다. 환장할 일이다. 그래도 다행인가. 태권도마저 없었다면... 그러니 동양사람을 만나면 처음부터 아유 코리언?, 콤맨지 아우스 코리아(Kommen Sie aus Korea , 한국에서 왔나요)? 라는 질문을 받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이다. 일본 아니면 중국, 그리고 어느 경우에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내가 동양인이고 또한 머리까지 박박 깎고 다니니 그 일주일간의 장학생 모임에서 동료들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철군! 태권도 잘하겠네! 철군! 쿵푸 잘하는가? 태권도는 국민학교때 며칠 도장을 다닌 것 말고 군대에서도 안배웠는데 말이다. 한국이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한국에서 안한 것도 아니지만 이정도의 상황인줄은 몰랐다. 중국의 공자 맹자는 잘 알아도 일본의 소니와 도요타는 잘 알아도 한국은 잘 모른다. 그저 태꿔원토, 좀 더 잘 아는 사람은 현다이, 삼숭 등등. 덕분에 한국에 살았을 때 내 정서에서 없었던 오기같은 것이 막 생기게 되었다. 도대체 너희들 한국을 모른다니. 한국이 얼마나 오래된 문명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멋과 흥을 지니고 있는 민족인데. 하는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도 덜컹 마음이 울렸다. 결국 이렇게 한국이 소중한 전통과 문명을 지니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들어서 분단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많이 뒷걸음이 쳐지지 않았는가 하는 안타까움을 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 주한미군대사라는 사람이 한국의 통일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기살을 읽고, 지까짓게 뭐라고 남의 나라 사정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정말 뚜껑이 열렸다. 우리나라를 갈라놓은 놈이 누구인데 저렇게 여러모로 한국의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쏴얹는가 하는 생각에 열을 받게 되었다. 독일 와서 내 성질이 많이 변해버린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앞뒤 안가리고 통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노고와 피와 수고를 하였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분단의 상황으로 인한 피멍울이 우리 민족의 가슴에 얼마나 깊이 멍울져 있는가. 그래서 문목사님이 그냥 앞뒤 안가리고 김일성 만난 것 아니었나. 그래서 한국 교회는 앞뒤 안가리고 희년운동 한 것 아니었나. 자기네 나라 대통령도 제대로 뽑지 못하는 코메디같은 사태에 전 세계가 웃고 있는데,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왜 남의 피눈물 흘리는 상황에 이렇다 저렇다 감내놓아라 배내놓아라 하는가. 여하간 한국이 이렇게 놀라운 문화와 유산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의 장난에 그저 조국이 분단이 되고, 거기에 수많은 이들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불필요한 데 정력을 낭비해서 여러모로 모든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저 태권도, 분단국가, 삼숭, 김대융이 우리의 정체성이 된 것은 아닌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유를 외부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 안타깝께도 공존하는 것 같다. 나는 솔직히 한국이 제3세계이라는 딱지를 믿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살았을 때에는 경제적으로도(물론 아이엠에프 때문에 경제가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지만) 잘 사니 뭐 선진국과 큰 보폭의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갖게 되었었다. 김영삼이 어디에 한국 가입도 시켰고 해서 그저 선진국에 이제는 진입하는 혹은 선진국이라는 훈장을 우리도 획득했구나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가졌는데, 여기에 와보니 생각 이상으로 이곳의 복지사회와 우리나라 사이의 간극이 커져만 가고 있음에 안타깝기만 하다. 박순경 교수님이 독일에서 공부하셨을 때에 12월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홀로 방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면서 조국 한국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는데, 수십년이 지났어도 그 안타까움은 나에게도 계속 죽지 않고 그 느낌이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 난관, 민족적인 비극의 문제만을 넘어서서 전반적으로 들게 되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 나는 달라이라마의 그 머리통의 신선함, 그리고 내가 걷고자 하는 학문의 길이 인격과 도와 결코 유리되어서는 안되리라는 조그마한 소망을 위하여 머리를 깎았는데 모임을 끝나고 학교에 다시 돌아오니 많은 독일 사람들이 나처럼 박박머리는 아니지만 그저 수수하게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는 것이다. 특히 대학생들이라 더욱 그러한 면이 있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이야 앞뒤 가릴 필요가 없으니. 여기에서는 거지학생도 많이 보았다. 정말 거지같은 사람인데 학생이다. 도서관에서, 컴퓨터실에서 많이 본다. 그리고 진짜 거리의 거지와 친구관계를 유지하는 기숙사의 나탈리라는 친구도 보았다. 거리에서 이런 저런 쓸만한 물건을 줏어서 갖고 다니는 그 거지는 인품과 학식에 대해서 내가 헤아릴 바는 아니지만 나탈리라는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 기숙사의 초인종을 가끔 눌렀고 재수가 좋게 내가 그 문을 열어주어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결혼식을 보자. 이곳 결혼식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검소하다. 한국 결혼식이 한국민의 특징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옛날 채시라와 누구의 결혼식이 세기적인 욕을 다 얻어먹었지만, 그정도는 아니더라도 매우 화려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 튈려고 소소하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나에게 머리를 깎는 다는 것은 다소 정신적인 종교적인 면모였을런지는 몰라도 이 친구들이 머리를 짧게 깎는 다는 것은 생활의 단순함, 그리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요청인듯 하였다. 순간 달라이라마의 머리와 독일 친구들의 신경 안쓰는 머리 사이에 내 까까머리의 의미는 이상하게 센드위치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머리를 깎으니 머리가 매우 시려웠다. 저사람은 머리가 냉철한 사람이야 하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인줄 알았으나 내 머리가 한 번 냉철해 보니 얼마나 그게 큰 곤욕인지를 피부로, 아니 머리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추위 앞에 나의 머리가 고생을 많이 하던 도중 11월에 조그마한 생일파티를 기숙사에서 열었는데 그때 생일선물이랍시고 라키스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친구가 빵모자를 선물해 주어서 머리가 따뜻하게 되었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잘못 따라 하다가는 겨울에 혈관파열되니 조심하기를 바란다. 오늘은 바로 그 라키스라는 친구가 나의 머리를 깎아주는 날이었다. 라키스라는 친구, 그리고 나를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친구에게 내 모습은 원래 이 모습이 아니라고 하면서 비자의 사진을 보여주면 웃고 놀란다. 그리고 가끔씩 내 뒤에서 까까머리를 오기작오기작 손으로 만지며 장난치는 실비아라는 친구도 머리에 매우 관심이 많다. 결국 가장 나의 까까머리에 애틋한 안타까움을 느낀 라키스는 빵모자도 선물하였고 또 까까머리가 조금 자라면 얼마나 웃긴 형태로 변형이 되는지, 꼭 엉기 성기 뻗혀있는 밤톨의 가시처럼 머리카락이 진행이 되니 머리도 깎아준다고 하니, 라키스는 너무나도 고마운 친구이다. 머리를 이렇게 잘 깎고 기숙사에 들어와 이리저리 하루를 정리하고 잠을 청하기 전에 티브이를 켜서 이리저리 체널을 돌리니 매우 익숙한 어디에서 많이 본 이름이 눈에 띄이는 것이다. 이곳에서 여러 방송국이 있는데 ARD와 ZDF가 매우 정평이 난 방송이다. 특히 뉴스는 다른 방송에서도 ARD 뉴스를 생방송으로 보도해주는 경우가 많다. ZDF를 돌려보니 Gadamer와의 좌담이 바로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약간 피곤했는데 그래도 가다머를 살아있을때 이렇게 볼 수 있다니 하는 기대 때문에 피곤을 무릅쓰고 침대에서 텔레비젼을 쳐다보았다. 내가 가다머를 알게 된 계기는 고3인가 되었을 때였나, 집에서 굴러다니는 세계와 선교 잡지를 보다가 어느 신학대학의 교수가 쓴 해석과 이해의 의미에 대한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해석이면 해석이고 이해이면 이해이지 무슨 토를 더 다는가 하는 단세포적인 질문을 가지고 그 몇 페이지 되는 글을 보게 되었다. 어렵기도 하고 또 무엇인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아 몇 번을 보게 되었다. 그를 계기로 해석학이라는 학문이 무슨학문인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가다머를 알게 되었다. 나중에 한신에 와서 신학을 배우면서 그 신학대학의 교수가 김경재 교수님이었고, 해석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신학 및 인문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발견한 리차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맛깔스럽게 읽을 수 있었다. 해석학은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분야라는 것을 그때 독서하면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진리와 방법의 영문 번역 Truth and Method를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철학적 해석학과 더불어 신학적 해석학, 그리고 논리적 해석학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바로 이렇게 90년대 한국 해석학에 대한 바람을 일으키고 현상학의 시대를 넘어서서 새롭게 시대를 연 모든 근본적인 인자를 쉽게 단정할 수 없지만 그 배후의 중심에는 가다머라는 독일의 철학자가 서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또한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기숙사에서 가다머가 먹고 토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고, 엔스가 건네준 가다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때 직접 토론에 참여하였던 친구가 전해준 가다머의 풍채 그리고 자잘한 에피소드를 인상깊게 듣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티브이를 켜보니 가다머를 실물로 볼 수 있었고 그의 눈과 멋진 코와 입, 그리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배우는 이에게 있어서 진정한 행운은 읽는 책과 책의 저자를 동시에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왜 한신이 우리에게 이렇게 큰 배움의 터전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다른 곳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면, 즉 교수님들 그리고 선생님들이 직접 쓰신 책으로 선생님들이 직접 가르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이 말은 거품이 아니다. 사람이 어느 책을 저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이 없이 읽는 것과, 저자와의 만남과 더불어 그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여러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책이 그저 잉크와 종이의 결합으로만 끝날 수도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통하여, 책의 배후에 있는 저자의 인격을 헤아리게 하고, 도대체 문자를 넘어서서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직간접적으로 헤아리게 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하는 것은 저자와의 만남, 그리고 저자와의 교감에서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신에서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을, 책을 쓰신 선생님과 더불어서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을 사들고 그냥 책꽃이에 꼽아두고 있다가 하버마스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그곳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우연히 같이 가지고 온 그 책에 사인을 받고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육척 노인을 직접 보니 도대체 그 선생이 무슨 이야기를 책에 써놓았는지 하는 인간적인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인간적인 궁금증과 학문적인 궁금증, 인격적인 궁금증이 동시에 어우러진 책읽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하버마스를 직접 만나고 그렇게 번역투의 문장에 지루해보였던 책이 생각보다 쉽게 읽혀졌던 것이다. 과정과 실재도 마찬가지이다. 오영환 박사님을 보고 난 후에 읽었던 과정과 실재 번역본은 그 이해에 훨씬 큰 생동감을 주었다. 문창옥 박사님의 박사학위논문이 책으로 나왔는데 남들은 그 책이 어렵다고 하던데 나는 책을 읽으면서, 물론 심도깊은 논의가 있으니 어려운 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일 터이지만, 책의 여백에서 떠오르는 문박사님의 강의와 여러 제스추어 그리고 목소리 덕분에 매우 효과적으로 그 책이 의미하는 바를 따라갈 수 있었다. 가다머는 100이 넘었지만, 피부는 고왔고 눈빛은 이전의 총기를 그대로 갖고 있었다. 가다머는 알고보니까 하이델베르크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 저녁에 가서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는 막스베버 하우스의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막스베버 하우스는 막스베버와 부인이 같이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곳이고 지금은 어학을 가르치는 곳이다. 나는 막스베버의 부인 사진 앞에서 독일어 아베체데를 공부한다. 나는 자연에 그리 민감한 편은 못된다. 시인은 자연을 통하여 세계를 읽고, 자연을 통하여 영혼을 읽는다. 하지만 이곳에서 펼쳐지는 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저절로 시심이 생기고 저절로 고민과 생각이 든다. 이곳 가까이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 정말 철학이 나오고 사상이 나오고 괴테의 시가 나오게 하는 것이 바로 자연인 듯 하다. 한국도 정말 천외의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다. 어느 곳보다 훨씬 수려한 자연환경, 그리고 봄여름가울겨울이 확실한 한국은 복받은 나라이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 뜨거운 정열의 여름, 그리고 고즈넉한 가을, 고구마가 생각나는 겨울, 하얀 눈을 맞으면서 일년을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기약하는 신정 구정, 이런 것들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없는 한국의 고유한 자연과 문화이다. 그런데 도대체 수십년 사이에 한국의 자연환경은 산업화의 책략 아래 많은 공해와 오염으로 뒤덮혀 져 버린 듯 하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한국에서의 잔디는 금단의 영역이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잔디는 어디에서 볼 수 있고 뛰어다닐 수 있는 곳이다. 잔디가 아파요 하면서 잔디를 멀리하는 한국 어린이들과 잔디 위에서 뛰어놀면서 자연과 함께 하는 이곳 어린이들 사이의 자연에 대한 감수성, 그리고 환경을 통한 경쟁력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갖을 것인가. 괴테의 시, 쉘링과 피히테를 위시한 자연철학, 가다머의 해석학이 그냥 건조한 책상에서만 나오지는 않았으리라.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도착하려는 즈음에 항공에서 바라본 독일 대지는 온통 흰 구름에 가려졌었다. 놀랍게도 높이 하늘을 올라가면 더 이상의 구름이 없이 태양이 내리쬐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렇게 늦게나마 발견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구름도 없고 비도 없고 쨍쨍한 태양만 우리의 눈을 따갑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밑을 보면 하얀 뭉게구름이 빽빽히 들어서 있다. 중국 대지를 지나쳤을 때에는 환하게 그 평야가 보였는데 독일에 도착할 때 그 대지는 온통 구름 천지였다. 그러나 간혹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보인 독일의 첫 풍경은 푸른 초록 대지였다. 그리고 유유히 큰 원을 그리면서 돌아가는 전기를 만드는 파랑개비였다. 돈키호테가 뛰어놀았던. 그런데 그 초록의 이미지는 쉽사리 깨지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내가 놀랐던 것은 베를린이라는 엄청나게 큰 도시는 그 큰 위용만큼 푸른 숲이 매우 크게 펼쳐져 있어서 자동차의 매연을 매일밤이면 저 푸른숲 공단이 자체정화를 충분히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였다. 서울에서 생활을 해본 사람이면 다 안다. 얼마나 서울이, 그리고 공기가 망가졌는지를. 그러나 서울만큼 큰 도시인 베를린은 공해가 서울보다는 훨씬 적다는 사실에 나는 공해가 없는 베를린에서 뜻모를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이다. 한쪽에는 성이 있고 한쪽에는 강이 있고 성과 강을 둘러싼 모든 곳에 초록이 있고. 그러니 황테자의 첫사랑이 피어오르고, 괴테가 연가를 불렀겠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내 시선에 비추이는 이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나 그 이외의 모든 독일 풍경을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꼭 그 이면에는 혹은 풍경 뒷편에는 그에 상응하는 한국의 모습이 떠오르게 되어서 한참을 착란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 초록빛 대지와 숲, 그리고 그 사이에 피어오르는 맑은 공기 덕분인지 이곳은 먼지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연구소에 있었을 때 이삼일에 한 번 책상이나 오디오를 보면 뿌연하게 먼지가 껴서, 황사도 아닌데 하면서 의아해 하였는데, 이곳은 이상하게 먼지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기숙사 안에서는 신발을 벗고 다니는 진기한 표정을 많이 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매주 두번 열리는 예배 가운데 툴리아라고 하는 친구는 거의 신발을 벗고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 다른 친구의 방에 들어가면 복도와는 달리 방 안에 양탄자가 곱게 깔려 있는데 신발을 벗으려고 하면 신발 안벗어도 된다고 하고, 또 그냥 밖에서 신발을 신고 들어와서 양탄자를 팍팍 밟고 다닌다. 또 어느 경우에는 복도를 왔다갔다 하는 친구들 가운데에는 신발을 벋고 또 양말로 다닌다. 어디에서부터 신발을 신고 벗고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한참을 햇갈리게 되었다. 먼지가 없어도 사람은 이렇게 고충을 받는다. 기숙사에서 하늘에 트인 창을 열고 밖을 보면 눈에 보이는 저 네카강 건물 가운데 한 곳에서 가다머가 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많은 제자들을 이 강의실에서 키웠다는 사실, 그리고 엔스 형님과 기숙사 동료들과 같이 한 순간을 보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문자로만 책으로만 보다가 직접 목소리와 풍채를 볼 수 있나는 기쁨에 텔레비젼에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다머는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가다머와 스승이 하이데거와의 관계, 그리고 하이데거와 훗설의 관계, 그리고 왜 하이데거가 일본의 선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어떻게 가게 되었고 그곳의 생활은 어떠하였는가에 대한 이야기, 또 진리와 방법이라는 책에 대해서, 해석학에 대해서 등등... 예전에도 그랬듯이 티브이를 보면서 나의 대가리에서는 또 다른 새 윈도우가 열리면서 한국의 모습이 털털거리는 동영상으로 재생이 되었다. 이즈음에 한국방송국은 스포츠 중계권을 둘러싼 권력쟁탈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MBC가 박찬호 중계를 둘러싸고 잡음을 일으더니 이제는 KBS와 SBS가 프로축구인가 프로야구인가 하는 그 중계권을 독점하여 그에 맞대응하여 혈투를 벌리고 있다는 것이란다. 영세 유선방송이 그러면 이해하겠다. 그런데 몇 개 안되는 공영방송이 그렇게 피흘리면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도 대단한 기획을 가지고 유선방송사업이 진행이 되었는데 수익성이 없고 또한 어느 경우에는 영세성을 면치 못하여 매우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곳 방송은 돈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뉴스, 다큐멘타리, 음악방송, 여러 상업방송들이 제각기 색깔을 내면서 진행하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히틀러 시대의 영상이 매우 많이 방송이 되고 있다. 그만큼 이곳에서는 히틀러의 만행과 그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매우 경각심을 갖고 있고 쉬쉬 하면서 더 이상의 아픔과 시련이 없도록 자기훈련하고 있는 분위기를 많이 느낀다. 더더욱 인상적인 것은 여러 일반 방송에도 목사와 종교인 그리고 사상가 철학자, 그리고 이에 대한 다큐멘타리가 매우 많이 비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3년전인가 한 외국인 혈통의 어린아이가 수영장에서 죽은 사건이 있었다. 당시에는 어린아이의 약물복용으로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가 있었지만 3년이 지나고 나서야 약물복용이 아니라 그 주위에 있었던 신나찌 청년들의 폭력으로 죽게 되었다는 가설은 그 죽은 어린아이 요셉의 어머니가 주장을 하고 그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듯한 주위 사람들의 여러 자백이 나와서 독일언론이 며칠 뒤집어진 경우가 있었다. 도대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민족인가보다 하는 독일인들의 자책과 회한이었을까. 연일 방송을 타고 그 3년전의 어린아이의 죽음이 다시 일급 뉴스로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한 어린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그 사회적 의미와 독일에서 지속적으로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신나찌 세력에 대한 보도를 하는 한 방송에서 어느 성당 신부는 그 요셉의 죽음과 그 의미를 장시간 나와서 인텨뷰를 통하여 진행하는데 이렇게 인간의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접근할 때에는 신부가 나오고 목사가 나오고 문화를 접근할 때에는 문화학자가 나오고 문학가가 나오고 철학자가 비교적 거침없이 나오는 것이 내가 느낀 독일 방송의 현 주소이다. 일요일만 되면 여느 방송국에서는 성당이나 교회의 예배가 그대로 생중계가 되고 목사가 나와서 인생의 의미와 영혼의 성찰에 관한 이런 저런 설교 비슷한 광고를 하게 되고 기관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박히고 등등. 이곳은 사회 전반과 종교 그리고 인문학이 매우 가깝게 호흡하고 있는 듯 였다. 한국에는 현재 김용옥 강의 때문에 기독교 일부가 들고 일어서 있고 단군상 철거 동상 철거 등등 모든 일들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면서 시끄럽게 종교와 사회가 갈등의 소지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도대체 이곳에서는 이렇게 조용하게 그리고 밀도있게 종교와 철학과 사회가 소통하는 것을 보고 어느 신학도의 뚜껑이 열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현대를 살아가는 정신사의 한 맥을 분명하게 긋고 있는 대가나 철학자를 어렵지 않게 티브이를 통하여 접할 수 있고 강의실에서 어려운 해석학 공부하지 않아도 Wahrheit und Methode의 저자 이야기를 듣고 그 책이 무엇이지 하면서 그저 자연스럽게 서점을 찾아 도서관을 접속하여 쉽게 우리시대의 정신적 지도를 헤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부럽기 그지 없었다. 우리 한국에도 수많은 훌륭한 사상가가 많이 있다. 그리고 발굴하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지닌 사상가가 많이 우리시대에서 같이 숨쉬고 있다. 그런 이들을 쉽게 대중에게 소개하고 대중과 더불어 사회와 더불어 호흡할 수 있는 방법이 그렇게 없단 말인가. 사상이 대중과 영합할 필요는 없지만 대중과의 탯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고래의 옛 선현들의 이야기는 마다하더라도, 김재준, 함석헌, 김흥호 그리고 수많은 살아있는 신선한 목소리를 우리는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일까. 도서관과 서점에 가면 많은 책이 있다. 다들 자기네 선배들 책이 많다. 괴테가 그러하고 헤겔이 그러하고 바르트가 그러하고 틸리히가 그러하고 가다머가 그러하고. 그리고 나에게 인상적인 것은 오디오로 된 책이 계속 출간중이다. 눈을 잘 못뜨는 이들을 위한 배려이다. 귀를 통하여 서로의 정신이 접경할 수 있도록 귀를 드릴로 뚫어주는 것이다. 덕분에 나도 괴테의 파우스트 오디오 북을 구입하였다. 책과 함께. 소피의 세계도 있고, 요즘 유행하는 그 어린아이의 책도 있고, 괴테의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카프카, 보르헤르츠, 헤세, 브레히트 등등이 벌써 오디오북으로 나왔다. 그리고 계속 만들어 씨디로 테입으로 찍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최신형의 디지탈카메라나 시디플레이어나 마이마이는 만들기를 주저하여도 이렇게 선현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근원적인 짝사랑인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기꺼이 투자하는 듯 하다. 그대여 책읽기가 귀찮다면 귀로 책을 읽으시오 하는 식의 배려로 다가왔고 나도 매일 밤에 괴테의 파우스트를 귀로 읽는다. 어쩌면 심심하니까 책을 찍어내는 것인가. 그것 맞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이 없으니 고전을 파는 것이 전통을 파는 것이 도리어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전집도 쏟아져 나온다. 한달전에 꼬메니우스의 50% 할인 덕분에 매우 비싼 바르트 전집을 450마르크(약 23만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릭 프롬전집을 120마르크(약 6만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나는 소식을 늦게 접했으니 이 정도인데 다른 신학도들은 벌써 많은 책을 구입하였을 것이다. 내가 갔을 때에는 벌써 가다머 전집과 다른 여타 유수한 전집이 동이 나버렸다. 요즘에 서점에 눈에 자주 보이는 것이 괴테의 전집, 그리고 프로이트의 전집이다. 프로이트의 전집은 99마르크이니 약 5만원이면 프로이트의 전 사상과 면목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프로이트의 종교이해에 대한 관심을 그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구입하였다. 독일의 책값은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 1달 전에 멋도 모르고 판넨베르크의 책 한권과 더불어 이런 저런 책을 구입하려다가 워낙 책값이 비싸 그 책값을 계산하다 놀라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삼백페이지의 두께인데 140마르크 7만원 하는 책값에 판넨베르크에 대한 괜한 오해를 살 뻔 하였다.그러나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유용한 양서와 전집같은 것들은 가격의 수위를 조절하여 싼 가격으로 제공하는 듯 하다. 가다머는 죽기도 전에 전집이 벌써 나왔다. 소쉬르는 책 한권을 내지 않았고 죽었는데 제자들이 받아쓴 강의록을 모아 일반언어학 강의를 내었다가 그 책 덕분에 그동네 언어학 지평이 뒤집어졌다 하는데 가다머는 벌써 전집을 내고 그의 사상은 전 세계의 대학을 통하여 강의를 통하여 널리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다머를 보면서 독일 학자들의 모범, 혹은 학문을 하는 이들의 한 모범이 되는 듯 하여 더욱 깊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가 쓴 진리와 방법이라 하는 책은 60살, 노년에 쓴 한 권의 책이라고 한다. 그 책이 세상을 보기 전에는 그저 강의실에서 강의하고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자신의 관심의 깊이를 매진하는 조용한 학자였는데 어느덧 그게 쌓이고 쌓이고 하여 한권의 책이 되고 그 책을 통하여 해석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는 한겨레 21에서 김정란 교수의 한 꼭지 칼럼을 보고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백양 신드롬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었는데 글날은 예리하고 화려했지만 분석의 내용이나 접근의 수위가 매우 편향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고리타분한 성 경계나, 지나친 도식화, 그리고 성급한 듯한 결론을 보면서 이전의 그 분에 대한 신뢰에 약간은 금이 가버렸다. 한국인은 매우 머리도 좋고 개인적으로 매우 잘난 사람들 같다. 가까이 있는 독일 친구들을 보면 머리 좋다는 느낌을 그렇게 간절하게 가져본 적이 없다. 물론 개인간의 천향지차를 인정하면서도. 한국은 머리는 있지만 누룩이 익듯이 무엇인가를 공들여서 만들어 나아가고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여유를 가지고 나아가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독일인들, 독일의 학문은 머리가 좋건 나쁘건, 얼굴이 감자같건, 그저 그늘에 누룩이 자연스레 익듯, 포도주가 아름드리 익어가듯, 계속 지속력을 가지고 공을 들이다가 결국 큰 사건을 터트리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내가 만나고 있는 친구들은 기숙사의 친구들이 많은데, 대부분 심심해서 다른 친구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가면 꼭 책상에서 책 쳐다보고 공부하고 있다. 한 두번이 아니다. 독일 대학은 자율적인 학업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에 놀고자 하면 얼마든지 놀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친구들은 하나같이 놀때도 잘 놀지만 이렇게 혼자 있을 때에는 책과 같이 하는 것에 큰 인상을 받았다. 교수도 강의시간에는 잡소리를 거의 안한다. 오늘은 늦어서 벨커의 보어레중을 늦게 들어갔는데 뒤에서 보니 가관이 아니다. 선생은 글을 읽고 그 많은 학생들은 책상에 딱 붙어서 볼펜으로 다다닥 다다닥 하면서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고,노인이나 나이지긋한 분들도 책상에 앉아서 학생들과 같이 강의를 듣고. 15분에 시작하여 정각에 끝나는 종이 울리면 선생에게 강의 고맙다고 책상을 한 5초 정도 두두두둑 손으로 노크하고. 한국의 인문학에 대한 여러 논의가 오가고 요즈음에는 한겨레신문을 중심으로 인문학이 죽었네 살았네 여러 이야기가 오고간다. 그리고 한국의 학벌카스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간다. 도대체 그 잘난 한국사람들이 다 장성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좋은 전통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인가.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묵묵히 기초를 확실히 하고 단계를 밟아가면서 지난한 노력을 계속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큰 의미를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국의 인문학은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고사하고, 한국의 신학은 교파분열 때문에 고사하고, 한국의 정치는 두말할 나위 없고, 한국의 경제는 다시 바닥을 가고 있고. 한국의 교육은 그대로 학벌의 봉건체제를 지속하고 있고. 도대체 왜 이렇게 우리 한국에 하나님이 시련, 아니면 복을 주시는지 그 뜻을 잘 모르겠다. 이곳은 일류대학이 없다. 그래도 노벨상 잘만 타간다. 한국은 무엇인가. 한국이 아직껏 봉건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이야기를 선생님들에게 책을 통하여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한국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독일 전체가 한국이 처한 상황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진정한 레퍼런스이다.)를 경험해보니, 한국만큼 봉건적이고 불쌍한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 교육에 대해서는. 이곳에서는 일류대학이 없다. 모두가 일류이면 일류이고 삼류이면 삼류가 되는 것이다. 대학의 특성을 살려서 개성적인 대학의 특생을 살리는 경우가 있는지는 몰라도 한국과 같은 학벌카스트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어느 이름 모를 대학에서 일류대학으로 전학을 쉽게 갈 수 있는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대학을 여행하듯 이리저리 다니고 자기가 원하는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과 같이 뿌리깊게 어느대학나왔는가 하는 의미가 아주 기형적으로 발휘되는 경우는 없다. 왜 하이델베르크를 오게 되었나? 집이 가까우니까. 이게 이유이면 이유가 된다. 물론 세세하게 들어가면 독일에도 몇 개 되는 대학이 유명세를 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하이델베르크는 그 자체로 유명세를 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일류대학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비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이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1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하여 줄을 서는 것이다. 또한 어느 대학이 나왔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좌우가 될 수 있고, 또한 어떤 이유에서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되었을 때 겪게 되는 그 좌절감. 그 영원한 대학서열의 검열에 많은 이들이 자유롭지 못하고, 그 안에서 실제로 이 땅의 젊은이들과 우리 어린 청소년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에 와서 가슴을 치면서 느끼는 면이다. 어느 누가 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의 질을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 기형적인 잣대에 너무나도 깊이 침윤되어 있어서 소수만을 제외한 대부분이 정신적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한한 미래 앞에 열려 있는 우리 어린 영혼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활짝 펴고 살기에 우리 한국이라는 땅은 너무나도 많은 족쇄가 그들을 덮칠 형세인 것이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경험인데, 왜 살아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삶의 그늘 가운데 자신의 영혼이 저당잡혀야 하는가. 서글픈 우리 시대를 직면해야 어린 청춘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만큼 업적이 중요시되는 사회, 시간은 현대이지만 시대는 봉건을 벗어나지 못한 땅이라는 인상을 가다머를 보면서 머리속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친구들을 만나도 그 친구의 개성에 큰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지, 한국처럼 그의 학벌, 재력, 가족관계가 그의 정체성의 근원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 이곳에서도 빈부격차는 존재할 것이다. 실업률이 영퍼센트가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아직 이 사회의 완전한 바닥을 훑어보지는 않았지만 뭐라 할까 한국의 그 기형적인 형세는 분명 아니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부익부 빈익빈의 극악무도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이상한 나라 임에 틀림없다. 부가 부를 낳는. 가난이 가난을 낳는. 여기도 자본주의의 물결과 완전히 유리된 백색 진공의 지대는 아닌 듯 하다. 돈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눈독을 들인다. 며칠 전에 독일의 대표적인 상업방송 RTL에서 퀴즈를 잘 맞추면 돈을 주는 유명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백만마르크, 우리돈으로 오억원이 넘는 돈을 56살된 부퍼탈 대학의 Eckhard Freise라는 교수가 퀴즈를 잘 풀었다고 손에 쥐었다. 신문에도 뉴스에도 짤막하게 보도가 되었다. 인간 사는 곳에 돈에 초연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방송을 지켜보고 많은 사람은 실제로 그 방송에 나가려고 전화신청을 한다. 그리고 방송에서 본 인상은, 가면 갈 수록 난위도가 높아지면서 걸려 있는 상금이 높아지는데, 한 몇백이나 몇천만원의 수위로 올라가는 단계에 서 있는 대부분의 사람의 눈빛은 변한다. 뭐라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그 눈빛. 돈을 꿈꾸는 그 말로 표현못할 징그러운 눈빛, 나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싫어서, 그 프로그램을 싫어하게 되었다. 밑에 퀴즈 자막이 깔려 독일어 배우는 데에는 매우 유용한 프로그램이지만. 그러나 이곳은 누구의 표현대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향해서 부단히도 체제를 교정하고 시스템을 바꾸면서 나아가려 한다. 적어도 한국처럼 졸부들의 왕국은 결코 아니다.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있는데로 소박하게 티내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막나가는 자본주의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정갈함이다.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평생 흙과 더불어 살아온 농민들의 두손에 쥐어 있는 것은 부채독촉장이요, 땅투자 하여 증권투자하여, 피라미드 하여 여우같이 살아온 이들의 두 손에 쥐어 있는 것은 자신이 평생 좋은 일로 써도 다 쓰지 못할 저금통장인 것이다. 땅의 섭리와 자연의 섭리를 믿고 평생 자연과 더불어 살아갔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느 현상보다 더욱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것이다. 요즈음 진행이 되는 농민들의 데모는 그래서 심상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국민구성원간의 불균등한 격차와 갈등의 현실은 이곳에서 내 한국인의 눈으로 보아도 거의 동남아수준과 도토리 키재기로밖에 보여지기 쉽상이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고 정의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결코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는 오늘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조국의 현실이 아니리라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 백성들이 하늘에 기록된 이름만으로도 기쁨과 영광과 환호성을 지르면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럴 수 없다. 여전히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는 깊은 지옥과 닿아 있다. 우리는 정말 이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서로간에 이별도 없고 만남도 없고 기쁨도 없는. 이전에는 그래도 별 탈 없이 정상적으로 잘만 가고 있는 듯한 한국으로 알았는데, 나의 조국은 레일이 없는 곳을 달리는 기차를 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같은 꿈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대가리의 한쪽 윈도우에서 열리는 한국의 풍경과 이곳의 풍경을 비교하면 비교할 수록, 절망 혹은 좌절, 간혹 가다가 깊은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김용옥의 말대로 결국은 우리것을 위한 모든 여정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가다머는 분명 복받은 사람 같았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가능성을 잘 깨닫고 꾸준하게 노력하고 힘쓴 할아버지 같은. 100살이 넘었지만 그의 눈은 선하였고 그의 언어는 아름다웠다. 아주 곱게 늙었다. 오히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묘한 강박을 가지고 질문하는 옆의 젊은 사람이 애처로왔다. 가다머는 그 질문자에게 오히려 질문하였다. 왜 사람은 앎을 추구하는지. 그리고 대답하였다.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고 싶기 때문에 그렇다고. 타이센과 같이 가다머도 학문의 기나긴 여정은 결국 저렇게 시로 아름답게 승화가 되는 듯 하였다. 가다머도 부럽고 두텁게 자리잡은 독일의 인문학도 부럽고 그들의 내세울 수 있을만한 자존심이 있다는 것도 부러웠다. 그것은 단지 부러움일 뿐. 우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가치들인 것이다. 만약 국민이 모두가 감자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잘났던 못났던 최선을 다하여 소중한 가치와 지혜와 한국인의 독특한 순발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유럽과 미국이 서로 정신없이 쌈하는 틈을 틈타 훌쩍 통일해 버리고, 갈기갈기 찢어져버린 교회도 대오각성하여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민족의 미래의 희망과 비전을 교회가 제시한다면, 우리가 독일보다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느냔 말이다. 독일 감자들도 통일하고 이렇게 잘 하고 있는데 말이다... 쉽게 재단할 수 없지만, 여전히 세계는 독일 그리고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력 사이의 힘겨루기로 보일 수도 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그들이 스스로 형성한 삶의 양식에서 안주하려 하거나, 집안단속을 잘못하여 간혹 유럽과 미국의 밥이 되거나, 아니면 주책없이 미국의 봄바람에 휩쓸려다니는 그런 회색지대로 보일 수 있다. 아니면 유럽은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저번주 Theology of Culture 세미나 시간에 시각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친구가 우리들의 본문인 영어 신학책을 보고 레디컬 하지 않아서 랑바일리히(지루하다)하다는 토를 달았다. 사실 그런 면이 없지 않다. 독일 신학에서 보면. 맑시즘과 종교사회주의가 굳건한 토대와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독일 신학에서 미국신학의 논의라고 하는 것이 지지펀펀한 면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만큼 부정하려 하여도 부정할 수 없는 유럽과 미국 사이의 미묘한 갈등은 신학에서도 정신사에서도 세계사에서도 들어났고 계속 존속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독일이 논리에 신학을 가두고 미국이 자본에 신학을 팔아먹는 것 처럼 보일 때, 한국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역량들과 경험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새롭게 새로운 언어를 깁고, 교회는 민족의 과제를 정확하게 진단해서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고, 한국의 학문은 감자가 되어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면 어느덧 머지 않아 새로운 신학 새로운 학문 새로운 문화를 세계사 안에서 충분히 열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였다. 특히 한국이라는 고난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독일의 논리와 미국의 부왕기를 넘어서서 훨씬 더 성서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난, 열정, 아픔, 시련의 하나님을 우리는 어느 민족보다 훨씬 더 몸으로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통과 역사와 풍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침대 안에서 가다머를 보면서 이렇게 한 편으로 조국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과 기억을 떠올리니 슬퍼지다가 그냥 제 풀에 지쳐 잠이 스르르 들게 되었나보다. 시끄러워서 눈을 떠보니, 가다머와 내 슬픈 조국은 어디 가고 독일 아줌마가 아침 뉴스에서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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