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2/23 (08:51) from 147.142.196.118' of 147.142.196.118'	Article Number :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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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문법

사유에도 문법이 있고, 사변도 방법이 있고, 학문, 신학, 더군다나 종교적인 삶은 나름대로의 엄격한 길과 층위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 문법과 길은 우리가 쉽사리 헤아릴 수 없기에 우리들은 그 엄연한 것들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에 있어서 정치한, 혹은 세세하면서도 견고하고 혹은 성실한 사유와 삶을 일궈나가기가 더욱 어려울 수가 있다. 보이지 않는 행간의 훈련보다는 기술과 재능이 더 크게 평가받는 시대에서는 더더욱 그럴런지도 모른다. 그간 내가 느끼고, 읽고, 생각하고, 쓴 모든 것이 한여름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가버리고, 그 자리를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깊은 공허감을, 강의실에서, 도서관에서, 그리고 이렇게 조용한 곳에 와서 책을 읽으면서 많이 느낀다. 그것들은 정말 한 줌의 낙서만도 못한 것이었구나 하는 절박한 고백인 것이다. 한 줌의 재만도 못한 내 안의 것들을   아예 들춰내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 어쩌면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폭과 넓이가 없는 전문성은 자칫 기형적이거나 폭력적일 수 있다. 문법과 훈련이 부재한 생각들은 오히려 해를 주는 공허한 거품일 수 있다. 몸과 삶과 유리된 신학적인 발상과 종교적 행위는 궁극적으로 간절하게 소망하는 구원의 지평을 오히려 망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현들의 책을 읽으면서, 그 저자의 문법과 인격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고,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 가면서, 그들의 영혼의 빛과 그늘을 볼 수 있고, 생을 살아가면서,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더디거나 어리석은 길이 아님을 확신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다보니, 탁월한 신학자가 될 시간이 없었습니다."라는, 내 머리를 후려치는 누구의 고백을 듣고 한참 말과 눈을 제대로 뜨고 가늠할 수 없었다. 한 편으로는 인류가 오늘 우리 정신에게 끊임없이 제공해주는 새로운 지식과 문법들에 적응하고 훈련하고 익숙해야 하고, 시대의 언어를 끊임없이 새롭게 반추하고 생성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신학인, 그리고 신앙인의 심지를 망실하지 말고, 이 신열을 앓는 피조세계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이 욕망이 아니라면 더욱 많은 것을 덜어내어, 머리를 비우고, 눈을 맑게 하고, 인격을 잃지 말고, 영혼은 우주와 자연을 경건하고 신실하게 응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00.12.23. 12시 51분, 기숙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