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12/31 (01:40) from 203.252.17.161' of 203.252.17.161'	Article Number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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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 필요없는 시대에 살면서

오늘 몇몇의 박사님들과 점심을 같이 가졌다. 학기중의 바쁜 일정이 다 마감이 되면 학생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을 수 있다. 방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사님과 교수님들은 어쩌면 방학이 진정 자신의 학문의 도랑을 더욱 깊게 치고 김을 맬 수 있는 호기이기에, 방학이 없다. 그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바쁜 시대, 그분들도 여전이 바빴다. 오래간만에 만난 얼굴들이라 반가운 마음, 궁금한 마음이 스며있는 물음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방향과는 반대로, 입에서 튀어나온다. 모 박사님이 식사 도중에 나에게 말을 건넨다. "신학 그만두고 돈을 벌지 그래? 어쩌면 신학이 필요 없는 시대인지 몰라." 그분의 말씀은 이렇다. 교회가 신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를 예전에 외국에서 공부하는 때와는 달리 한국사회에서 피부로 느낀다는 말이다. 오히려 신학이 없어야 교회가 더욱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나도 박사님 말에 내심 동의하는 면이 있다. 아무리 어떠한 신학의 높이와 깊이가 세계 신학을 주도하고 앞질러가고, 세계가 주목하는 스케일을 지닌다 하더라도, 실상 오늘의 교회의 현실에서는 신학은 너무 높아서는 안되고, 결코 깊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듯 하다. 나의 고향 교회에도 큰 분란과 갈등이 끊이지를 않는다. 한 편으로는 인간의 삶이 다 그렇지 하는 온건한 목소리와, 새 생명을 잉태하려는 문명의 끄트머리에서 교회가 고작 고민하는 내용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가 하는 강경의 목소리가 내 마음 안에 동시에 있다. 아무리 정신이 좋아도 물질이 없으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도 젊은 이들의 마음을 끄는 단서이다. 사상은 탁월하지만 세상이 그것을 외면하기에 언제나 고뇌하는 한 친구와의 대화 가운데 우리는 꿈을 꾸었다. "백옥"출판사를 만들자고. 그리고 건강한 사상과 이념은 고민없이 문자에 찍어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자고. 세상 한 귀퉁위에서 세상을 씹고 있는 예언가의 언어를 종이에 담아 문명을 서늘하게 만들자고. 하지만 우리는 고민하였다. 그럴 만한 정신은 있지만 물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생각하였다. 백억을 벌어서 그 출판사를 만들자고. 백억 펀드이니 출판사 이름을 "백억"으로 하자고. 하지만 그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니 "백옥"으로 바꾸자고. 하염없이 깊은 겨울밤, 우리는 그렇게 꿈을 꾸었었다. 백억 벌러 내일부터 노가다 하자고. 자꾸, 세상은 우리를 절망으로 인도한다. 기민한 동료나 선배는 벌써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적지 않게 신학을 떠난다. 가난하고, 슬프고, 세상이 외면하는 이 신학을 그들은 다시 외면한다. 이 길에 남아있는 또다른 신학의 동료들은 어쩌면 세상의 흐름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둔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주신 그의 사명을, 세상이 어떻든, 꾸벅 꾸벅 걸어 나아가는 제자의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다. 나는, 나를 포함한 우리 세상에 남아있는 몇 몇 안되는 신학의 동료들이 교회와 잘 어울리고, 동시에 신학의 깊이와 높이를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기를 희망해본다. 진정 교회와 신학은 영원한 길항의 길인가? 진정 교회는 신학이 없기를 바라는가? 그리고 그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세상을 잘 모른다. 그러나 세상도 세상을 잘 모른다. 미래는 진정 비밀 가운데 드러나는 새로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세상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신학이 필요없는 듯한 오늘의 시대가 신학이 필요한 내일의 시대로 바뀌어지길 희망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 희망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것은 우리의 땀과 수고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희망은 우리를 통해서만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신학 하지 말고 돈이나 벌으라는 그 박사님의 그 한 마디는 신학의 길에 더욱 철저히 매진하라는 묘한 채찍질로 이렇게 가슴에 더욱 큰 공명을 준다. 어쩌면, 시대가 요청하는 건강한 신학이 세상에 창궐할 때 그 때에는 더 이상 신학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때 신학을 그만두고 "백옥" 출판사로 돈 벌어도 늦지는 않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박사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깨달았다. 역시 박사는 박사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