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2/07 (14:37) from 203.252.17.164' of 203.252.17.164'	Article Number : 25
Geist	Access : 7032 , Lines : 7

다석 유영모에 대하여

나는 다석(多石) 류영모(柳永模 1890-1981)를 김형렬이라는 신학과 입학 동기를 통해서 학부 1학년때 만나게 되었다. 그 동기는 나이는 나보다 열 살이나 더 많은 큰 형뻘 되는 분이었다. 그 형의 책꽃이에는 언제나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 선생의 책이 꽂혀 있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어른들의 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어언 5-6년이 지난 지금, 이제 다시 대학원에 들어와서 다석 류영모를 만나게 된다. 다석은 실로 국내 토착 사상가로서 일생동안 노자를 가까이 두고 읽었다. 실제로 다석으로부터 노자 이야기를 들은 이가 이광수 최남선 등 몇 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말이다. 또한 그의 제자인 함석헌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류영모와 노자 사이의 공통분모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다석 류영모 선생의 삶을 생각해 볼 때 진정한 영성의 대가라는 것을 새삼스레 발견하곤 한다. 그의 정신 "나가 죽어야 얼아 산다"는 말의 중심은 가히 여타의 영성가를 넘어선 깊은 울림을 던져주는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하느님의 얼인 영아(靈我)라는, 매우 고상하면서도 색다른 표현은 그리스도교 교리에 찌들어 새롭고도 진정한 의미를 놓치고 마는 교조주의자의 언어를 다시금 반성하게 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신, 인간, 영혼을 자주 입으로 읊조리며 사나. 그러나 그 언어의 본질에 스며든 중심의 의미를 또한 얼마나 쉽게 잊고 망각하고, 혹은 대충 생각하고 사나. 이런 의미에서 실로 류영모 선생의 언어는 가히 본질을 통찰한 직관의 언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얼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실로 나의 신앙과 언어가 닿지 않는 곳이기에 그저 나와는 겉도는 문자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단지 이런 생각은 해보았다. 분석적이며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으로는 류영모 선생의 사상을 결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왜곡되게 이해할 수밖에 없겠다는 모종의 불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류영모 선생은 서구의 발상인 주객도식의 문제 자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돌파(breakthrough)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실로 영성의 깊이에 천착한 이들은 주객도식의 문제를 극복하곤 했다는 느낌을 류영모 선생을 통해서도 반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류영모 선생이 말한 얼이 진정 나 자신에서부터 맑게 닦아야 건져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이제부터 훈련하고 영성의 고귀한 단계에 이르기까지 옷깃을 여밀며 이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지경을 살다 가신 분, 그 거리가 너무 커서 얼굴을 들을 수도 없었던 그분, 학부 1학년때 만났고, 가볍게 그냥 떠넘기다가 다시 큰 사람을 뵈니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이제 진정 나의 영성이 알곡으로 맺혀지도록 더욱 진지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 분을 모르는 채 하지 않을 바에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