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wahre Geschichte des Geistes ist nicht in gelehrten Büchern aufbewahrt,
sondern in dem lebenden seelischen Organismus jedes einzelnen.<
Carl Gustav Jung, GW XI, 37
2002/12/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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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승리하는 세상
영화를 찍어도 이처럼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없을 것이고, 논문을 써도 그 역학의 모든 구조를 낱낱히 분석할 수 없을 만큼 이와 같은 미로의 사태가 없을 것이다. 12월 19일,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날, 이 날을 기뻐한다. 독일 공영방송 ARD에서도 기쁘게 노무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새 기숙사의 인터넷 상황이 너무 열약한 나머지 나는 가끔 신문을 읽고, 운이 좋으면 인터넷 라디오를 통해서 대통령 후보 토론을 고맙게나마 듣곤 하였다. 반공시대 이부자리를 뒤집어 쓰고 북한방송을 전파라디오로 어렵게 듣는 상황도 아니고, 잉크범벅이 되어 비밀리에 제작된 지저분한 찌라시나 금서를 몰래 읽는 시대도 아닌 21세기 정보사회인데 말이다. 그간 얼마나 험난하게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서 길들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그에게 많은 희망을 한올 한올 품어왔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 젊은 우리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극적인 상황은 어제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철회에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과 국민들이 실망과 좌절을 했을까. 나는 우리 민족의 종자적 본성에 대한 실망까지 잠시 갖게 되었다. 그 순간 머리를 가운데로 가르고 지나갔던 생각은,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이 쌓여 있는 국민들의 무관심이 더욱 가공할 정도로 증폭되고, 모처럼 국민의 관심과 열정이 집중되는 대통령 투표의 기권으로 직접 연결이 될 것이라는 짙은 부담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냉전보수와 팽팽하게 대적하고 있는 개혁진보 세력 사이에서 펼쳐지는 박빙의 상황이 주는 부담감이, 폭풍의 전야에 아주 고요하게 깔려 있지 않았었나. 그 소식을 밤에 들은 많은 친구들도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그 소식을 듣고 눈에 캄캄해서 책이 들어오지 않고, 논문이 잡히지 않아 네카강에 가서 바람을 쐰 후 일찍 잠을 청했으나 도대체 눈이 붙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 많은 난관을 겪으면서 젊고 건전한 세력들과 소중한 개미군단들의 노력들이 힘겹게 도달하여 저 끝에 고지가 희미하나마 유리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유시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몽준 폭탄”이 터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 하나 배웠다. 한국 정치라고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도의도 이렇게 쉽게 져버릴 수 있는 아주 불안한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한국 정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기운들일 수 있음을. 또한 도의라고 하는 것이 조폭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제한된 가치가 아니라 상식에 기반한 사회적 관계의 기저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든든하게 지지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노무현은 오해를 풀러 정몽준을 찾아갔다 한다. 기본적으로 수준 이하의 태도로 정몽준은 문전박대를 하였고, 국민의 지도자를 뽑는 그 역사적인 날을 하루 두고, 어떻게 기분이 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술을 해서 일찌감치 나가 떨어졌다고 하니, 정몽준의 정치와 현실과 근본적인 세계에 대한 형편 없는 속 태도를 몇 줌의 글을 통해서 직감하게 되었다. 이 직감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허황된 실체를 확인한 것이 앞으로 그에 대한 우리 국민의 에너지를 더 낭비할 필요 없게 만든 얼마나 큰 소득이었나. 문성근, 명계남의 호소문과 유시민의 사태분석 및 노무현 후보자의 결집에 대한 호소문은 폭탄이 터진 와중에 흔들리는 많은 이들을 단단히 묶는 요소로 기능하였다.
나는 유시민의 글이 대단히 정확한 글이라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사실 거기에는 이중적인 뫼뷔우스의 끈이 있었다. 그의 글은 현실의 수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읽는 본능적 판단과, 마음에 호소하려는 당위에 젖은 운동의 모멘트가 동시에 있었다. 그 분석은 대단히 날카롭고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그 판세분석의 이면에는 그 분석의 핵을 품고 둘러싼 절절한 소망과 당위가 더 근본적으로 얹혀져 있었다. 어찌 보면 구체적인 현실에 개입하여 소리치지 않으면 거기에는 당위도 사실도 없다는 것이다. 불이야!라고 하며 도로에 나와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그 목소리에는 사실에 대한 기자적 리포트와 사실의 지위보다 더 근본적인 절절한 당위가 젖어 있는 것이다. 지금 저렇게 생생하게 출현하는 사건에는 if(만약)가 없다는 것,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다는 것, 저기에 내가 뛰어들지 않으면, 저 사건에 대한 사실적인 기술도 당위적인 요구도 무의미하다는 것, 이 원리에 대한 자각이 운동이 갖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근육질들이다.
그러나 조중동은 조간 사설을 기뻐 날뛰며 써 내려가는 그 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시대와 정치를 저주했을까. 아마 그 긴 밤, 잠을 못 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곳 아침이 되었고, 새벽에 일찍 기자회견이라도 할 줄 알았던 노무현은, 정몽준의 지지철회가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대통령후보로서의 너무 솔직하고 비정치적이어서 오히려 궁색히 보이는 답변을 할 뿐이었다. 선거는 시작되었고, 그 곳 시간 너무나도 투표율이 저조해서, 나는 머리에 떠오르는 몇몇 친구들에게 공중전화에 달려가서 투표 꼭 하자는 전화를 돌렸다. 투표는 마감이 되었고, 개표가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힘겨웠지만, 매우 의미 있는 당선이었다.
나는 정치 언어의 생명력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이회창은 구국의 결단이라는 표현으로 정몽준의 후보철회를 커맨트 하였다. 노무현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 말 하였다. 그렇다면 이회창의 말 대로, 노무현 표를 결집시키려는 구국의 결단으로 정몽준이 후보철회를 1시간 반 전에 했던 것일까. 오히려 노무현의 표현은 어떠한 정치역학의 수를 복잡하게 고려하지 않은 인간적 진실에 기반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렇게 정치인들의 언술과 화법은 진실성보다는 정치역학적 효과와 전략에 기반하고 있다. 아니 오염이 되어 있다. 이미 정치의 언어와 태도가 진실한 현실감각에서 훨씬 벗어난 수위에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세계의 언어가 너무나도 오염되었다. 어떤 대변인은 “입으로 흥한 자는 입으로 망한다”는 평을 내놓았다. 우리의 정치언어에는 냉혹한 현실계산의 화법에서부터 대단히 심오한 종교적 언술까지 지저분하게 혼재해 있다. 거기에서는 현실의 진정성보다는 대단히 의심스러운 이미지의 가상성이 더 널뛰고 있는 판이다. 나는 김용옥의 어제 오늘 글을 보면서도 아쉬움을 많이 가졌다. 투표 참여를 반지의 제왕이라는 대 서사와 연결시킨 메시지도 좋고, 정몽준의 배신을 노자의 교훈과 엮어놓은 것도 좋은데, 거기에는 객관의 고답적인 시선만 존재할 뿐 ,생생하게 피튀기면서 펼쳐지는 저 흑과 백의 경합에 대한 예각화된 가치판단이 유보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예언자를 생각해본다. 예언자는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면서 “자, 가자!” 하면서 외치고 위정자들에게 잡혀 죽는 이들이라 한다.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며칠전 오래간만에 신학동네 식구들에게 보낸 글에 있는, 문익환 목사의 예언자에 대한 이해이다. 예언자는 현실 밖에서 얼마나 객관적인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현실의 좌표가 어떻게 이동되는지를 점지하는 삼류 무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 안에서, 현실을 바꾸고, 현실을 여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노무현은 민주당의 후보로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민주당의 수장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그가 이렇게 걸어오기 까지에는, 그에게 희망을 보고, 신뢰를 보냈던 수많은 이웃들이 있었으며, 한국 국민이 있었던 것이다. 유마경에는 백성의 고통으로 인하여 자신이 병을 앓는 이야기가 나온다. 평범한 백성들의 수준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떨어지는, 소위 정치세계의 그 타락과 오염과는 달리, 그의 그간의 역정과 언어는 무엇인가 잘 잡히지 않는 인간적 진실성과 감동이 있다. 영혼은 그 감동을 설명하지는 못할 지 언정, 엄연히 감지하고 있다. 민족의 미래를 발목 잡는 지역감정이나, 정경유착, 구시대적 정치 행태를 극복하는 것, 그리고 북한과 더불어 민족의 통일을 소망하는 것, 더불어서 인간이 진정한 인간으로서 추구하고 누려야 할 고귀한 가치를 가져다 주었으면 한다. 우리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자리에 주저앉지 말고, 백성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느끼는 백성의 왕, 그리고 민족과 민중에 도전과 희망을 끊임없이 주는, 수세기 후 반만년 한국의 역사에서는 이런 예언자가 있었다 하는 그 기쁜 찬사를 받는 그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도 새롭게 출발하는 그의 도전과 희망을 벗삼아 이 시대, 그를 믿고 정의와 진실이 승리하는 신화의 엄연한 주인공들이 되길 바란다. 더 이상 역사가 우리에게 준 슬픔과 절망과 저주의 나날들로 우리에게 오는 삶의 빛을 망실하지 말고 말이다.
나는 지금, 어떤 개념과 언어 놀이보다도 그가 그 동안 나에게 던진 몇몇 말의 의미들을 헤아렸다. 한 단어 단어가 결코 만만치 않은 의미를 품고 있다. 네카강이 보이는 쪽의 벽에 붙어 있는 저 의미들은, 내 학문과 삶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어떠한 복잡다단한 논리의 지시보다도 더 절실하게 가리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