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2/22 (14:07) from 62.104.211.64' of 62.104.211.64'	Article Number : 253
Geist	Access : 7959 , Lines : 54

눈을 질끈 감고

1. 어제 스탠리 큐블릭 감독의 일대기를 내가 좋아하는 ARD 방송에서 보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오늘 저녁, 피곤했던지 저녁식사 후 잠시 눈을 붙인 후 다시 깨어서, 아주 우연히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을 ARD에서 보았다. 욕망에 젖은 꿈이 우리의 삶을 상처 낼 수 있는 세기말적 불안이 영화의 우울한 블루톤 사이에 짙게 깔려 있었다. 미국과 한국에서 볼 수 없었다 하는 몇 몇 장면이 유럽판에서는 그대로 나왔다. 큐블릭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신문과 편지가 왜 하필 독일어였을까, 하며 나는 의아해 하였다. 마치 라틴어 처럼, 귀족의식과 고급문화에 연루된 불안의 시대적 징후와 어울리는 언어로서 의미를 발하기를 소망했을까, 아니면 1926년 독일어 원작에 충실해서 그랬던 것일까. 배경은 오스트리아에서 뉴욕으로 바꾸어 놓고서 말이다. 가끔씩 해가 지는 하오 내 삶이 찌뿌둥하면 물랭루즈 DVD에서 니콜 키드만이 부르는 몇 편의 음악을 건너뛰며 듣곤 하였다. 특히 거기 광대가 부르는 물랭루즈의 인트로 음악은 참 쓸쓸했던 것 같다. 나는 저 영화 덕분에 키드만과 크루즈의 개인적인 삶과 이별에 대해 궁금하였고, 오스트리아 출신 프로이트의 이론의 알리바이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영화의 암호인 피델리오, 피델리티, 사랑의 신뢰, 정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인간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에 숨어 있기에 잘 형상화 하기 어려운 성과 사랑의 모호한 균열을 그 영화는 꺼내게 하였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난 불안하였다. 2. 요 며칠 사이, 낮에는 자연의 개념을 읽고, 오후에는 루만을 읽으며, 밤에는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를 읽는다. 자연의 개념은 그렇다 치자. 괴델, 에셔, 바흐는 정말 만만치 않은 불가사이한 책이다. 이 책은, 이전의 베이트슨의 정신과 자연에서 느껴지는 지적 말끔함과 농축의 느낌과는 다른, 유쾌하고 시끄럽고 산란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나에겐 무겁다. 그의 유쾌함은 채찍 이전의 당근일 뿐이다. 참 대단하다. 그는 저 책에서 현대가 고민하고 있는 논리의 논리라는 본질적인 화두를 종횡무진 요리한다. 며칠 전 지도교수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교수님 자택에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권터 토마스 박사를 만났으며, TV의 신학적 이해와 비판에 관한 그의 박사논문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연구소에서 관리하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CD의 사용법을 알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내 논문에 니클라스 루만은 많은 전망을 줄 것이라는 팁을 받았다. 물론 그것은 이전에도 내가 직감한 바였다. 3. 나는 루만을 사회학자로서 읽지 않고, 체계이론가로서 읽는다. 특히 창조성과 관련하여. 루만이나 호프스태터의 고민은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원리에 씨름한 논리계형의 문제와 연루되어 있으며, 현대인의 특권과도 같은 이후의 많은 성과들을 소화하고 있다. 루만은 실재론과 구성론 사이의 뿌리깊은 논쟁에 새로운 길을 연 사상가로 보인다. 그의 체계이론은 실재와 구성 사이의 골을 체계로 연결한다. 체계는 차이를 차이로 만드는 구조이며, 거기에서 의미가 형성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동력은 그의 이론에서 존재들의 autopoiesis, 즉 자기창조/자동창조/자동생산의 능력에 기인한다. 내 눈에는 이 개념이 매혹적이다. 몇 년 전에 구상했던 주체성, 타자성, 연대성을 떠올려 본다. 거기에서 내가 아르키미데스의 점으로 단순하게 처리해 놓을 수 밖에 없었던 주체와 타자관계를 루만은 체계 개념을 도입함으로서 매우 섬세하고 효율적으로 구체화 한다. 그의 체계이론은 새로움과 우연, 그리고 환경의 자기화로 표현될 수 있는 자연의 역동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마치 화이트헤드의 유기체론과, 호프스태터의 논리계형이론 사이의 자리에 적절히 서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렇다고 루만의 구성주의는 하버마스의 상호 주관주의와 쉽게 만날 수도 없다. 생존은 대화보다 더 절실하고, 체계는 소통보다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배고픈 자에게 도덕은 지나친 강요이다. 4. 루만의 저서 열정으로서의 사랑Liebe als Passion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사랑을 코드화 하며 그의 좌표이동을 다룬다. 참 놀랍다. 그가 구상한 체계이론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접근으로 보인다. 만약 쥴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와 페터 라우스터의 사랑론은 문학, 정신분석학, 심리학의 영역에서 사랑의 문제에 접근했다면, 어떤 의미에서 Liebe als Passion은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으로 사랑의 현상을 접근한 전무후무한 저서로 여겨진다. 주체 이론의 대안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준 그의 체계 이론은 유기체론이 자칫 위계들간의 차이들을 모호하게 처리해 버린다거나 추상적 생기론으로 빠질 수 있는 난점을 경계한다. 그러나 분명 그의 이론의 기저에는 죽은 체계에 생명을 불어 넣고자 하는 본능적 모티브가 존재한다. 그 점에서 새롭게 견실화된 유기체론이라 하여도 그리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는 차이와 해체를 혼동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는 막 나가는 후기구조주의자들과도 거리를 둔다. 말하자면 그는 무뚝뚝한 독일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 5. 평생 초인적으로 글을 쓰고 사상의 폭을 넓혔던 그는 사랑을 다루지만, 종교도 다룬다. 이 정도면 진정한 사상의 종횡무진이다. 루만에 관한 지도교수의 책도 루만의 종교이해가 경직되지 않으며 많은 현대적인 시사점을 주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의 종교에 대한 접근방식은 맑스베버 류의 건조한 종교사회학적인 접근보다 훨씬 윤택하게 분화되었으며 견실하다. 대학 서점에만 가면 촌스러운 안경을 쓰고 나를 쏘아보는 그의 Suhrkamp전집에 얹혀 있는 얼굴이 지금 떠오른다. 칸트와 헤겔은 그렇다 치고, 가다머의 사상은 마치 잘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모종의 뻘밭과 같다.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대화하고 독파해야 할 사상들이다. 지금의 형세는 창조성과 체계라는 문제제기를 가지고 여러 사상의 양식들을 파악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와 더불어 표현된 사상에 몰입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배후에 존재하는 사고의 원형적 양식을 추출해 내는 것이 요구된다. 진정한 독해는 오히려 눈을 질끈 감고 사고의 본질을 겨냥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2년 12월 22일 새벽을 맞으며 Oystein Sevag l Rio Amazon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