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13 (04:25) from 80.139.147.18' of 80.139.147.18'	Article Number :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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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나는 봄

참, 햇살 좋다. 눈이 부신 이 봄, 숨을 쉰다는 것은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이다. 자연을 눈으로 보고, 산책을 발바닥으로 하고, 대기를 가르는 바람 사이에 이미 터져서 흘러내려 버린 봄을 느끼면 가슴이 뛴다. 계절 앞에서 현기증이 일어난다. 하물며 이 세계는 전운이 감돌고 한국의 정치는 여전히 긴장과 대립의 날 위에서 미친 무당 춤을 추는데. 제기랄, 그래도 가슴이 뛴다. 자연의 시간은 삶의 경험을 내 세월에 녹녹하게 기록하나보다. 이제는 수신자 주소가 없어서 더 이상 그들을 찾지 못하는 다음과 같은 기억들 : 엄마의 정성스러운 찐 계란과 금색 벤또와 와리바시의 기억이 콧물처럼 묻어 있는 국민학교의 봄 소풍. 시골 할머니 집 평상에서 노곤하게 자다 깼을 때 본, 햇살에 익어 흙바닥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그 아지랑이들. 노란 먼지를 퐁퐁 일으키며 한 볕의 나른함 가운데 놓여 있었던 고등학교의 회색 운동장, 클래식 사계의 봄이 온통 캠퍼스 스피커에 흐드러지게 울렸었던 대학시절의 어느 날 화창한 봄, 청명한 햇볕 아래에서 은빛으로 빛나면서 흐르는 2001년 네카강의 봄. 시간이 지난 지금, 저 금박 하이델베르크 도서관은 그대로이고, 내 육신도 그저 이렇게 그대로이지만 영혼의 귓가에 맴도는 봄의 울림은 예전과는 다르다. 이는 영원한 계절의 회귀인 겨울에서 봄을 맞이하고 있다는 자연의 이치보다, 이십 여년 내 인생의 겨울잠에서 겨우 깨어나 생전 처음 봄을 피부 숨구멍으로 끌끌하게 대면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 싱그러운 봄이 나에겐 버겁다. 요 며칠 사이 수백 명의 이웃들이 어이 없이 몰살당하는 이 뒤뚱거리는 조국에 살면서, 동포 수십 만명이 가난과 기아로 죽어가는 이 쓸쓸한 조국에 살면서, 또 제국의 이빨에 그저 갈갈히 찢겨나갈 운명에 처한 불우한 여러 동시대인들을 생각하면서, 아름답지만 쓰라린 봄 앞에 난 어수선할 뿐이다. 몇몇 과오도 떠오른다. 꼭 신앙인의 원죄의 피로 인한 항거나 절규가 아니어도 좋다. 그간의 게으름, 오만, 나약함, 용기없음의 비린 생선가시들이 목젖과 식도를 긁고 하류로 흘러내려간다. 내가 암시한 덕목으로서의 학문은 인격을 향한 도구이지만, 현재 무엇인가 방향이 역류하는 듯 하다. 그저 저 학문은 그 자체의 논리가 엄격하게 채택되기를 요구한다. 그래도 봄은 오고, 시간은 흐르며, 봄이 건들고 있는 저 기억의 목록은 그사이 더 마음의 수납장에 첩첩이 고여 있었음을 발견한다. 봄은 사랑의 계절, 아니 봄은 자살의 계절, 혹은 봄바람에 마약을 장전한 환영의 계절. 누군가 봄날은 간다 하였다. 그리고 지금 봄날은 간다. 봄은 우리를 가로지른다. 허나 이 봄날 가슴이 뛴다는 것이 영혼이 극도로 민감해진다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불우한 경험일 것이다. 어떠한 자극에도 쉽게 단선될 터이니까. 자연의 봄은 영원한 매혹이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크고 작은 숙제들에 끙끙대면서 대면하게 되는 우리들의 이 봄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고혹적인 침묵에 아슬아슬하게 둘러싸인, 기원이 불분명한 불안의 적막과도 같은 것이다. Acker Bilk | A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