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22 (08:50) from 80.139.177.218' of 80.139.177.218'	Article Number :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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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의 눈물

새로 온 기숙사 또한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매주 수요일 저녁에는 명사와의 좌담, 혹은 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월요일 아침과 목요일 저녁에는 예배가 있다. 매일 나오는 식사를 같이 먹고 마시는 밥상 공동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느님에게 오늘은 감사함이 마음에 피어올랐다. 오늘은 인상적인 하루였다. 하늘은 종일 우울했으며, 비가 세차게 내리쳤다. 이는 마치 한국의 여름을 정면으로 지나가는 장마의 장대비를 다시 여기에서 만난 듯 하였다. 자기 목소리를 찾는 이 학문의 여정이 힘든 것인지, 아니면 낯선 타향의 삶이 버거운 것인지, 창가를 엷게 스치고 지나가는 그 비의 쓸쓸한 흔적들이 그저 남의 것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하늘에서 추락하는 우박과 같은 것들, 그럼으로 성실하게 서 있는 저 성의 선명한 경계 마저도 그 뿌연한 포말들로 인하여 엷게 퍼지는 한 오후였다. 공동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다시 오순도순 모였다. 이번 학기는 이 주교회의 10여명 되는 목사님들이 안식년 프로그램으로 우리 기숙사에서 같이 산다. 그분들도 같이 참석하였다. 나와 같이 틸리히 세미나를 참여하는 마음 좋으신 더벅머리 수염 아저씨 만프레드 목사님도 같이 참여하였다. 오늘의 주제는 [폴란드]. 다음 달에 이번 학기 기숙사 수학여행을 폴란드와 체코로 가는데 그 수학여행과 관계된 일종의 문화답사였다. 폴란드 출신이고 기숙사 재단의 맴버이신 분과, 폴란드에서 독일로 유학 온 친구, 그리고 독일 친구 모니카가 그 시간을 준비하였다. 모니카는 말하자면 폴란드계 독일인이다.그녀의 가족은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서 세계대전의 참상 가운데 개인사적이고 역사적인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고 7살까지 폴란드에 살았던 그녀에게도 그 시련은 그녀의 피와 마음에 아주 깊이 고여 있었다. 오늘 점심 식사때 디저트로 산딸기와 같은 빠알간 열매들이 나왔다. 그런데 그 열매를 다 집어먹고 남아있는 접시는 꼭 흥건하게 핏물이 묻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들과 각자 자기의 접시의 '피'가 더 리얼하다고 티격태격 하고 있는데, 오늘 모니카는 자신의 팔을 걷어부치더니 꼭 주사받고 붙인 듯한 대일밴드와 상처부위를 보여주었다. 그 접시의 '피'는 직접 자기의 몸에서 뽑아낸 피라는 것을 여실히 재치있게 퍼포먼스로 보여주었다. 다들 뒤집어졌다. 오늘 내 옆방에 사는 모니카가 그렇게 독일과 폴란드의 슬픈 역사로 인하여 그 한 가족이 많은 고통을 받게 되었음을 난 알지 못하였다. 그는 딱딱한 폴란드의 역사를 설명하는 대신에, 독일인으로서 전후에 폴란드에서 당한 박해, 그리고 끊임없는 고향에 대한 소망, 그리고 자신의 고향을 찾아오게 된 여러 어려운 삶의 과정과 역사를 아주 진솔하게,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점심시간에 만난 모니카의 퍼포먼스가 뿌리깊은 내력을 갖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독일인들은 우리보다 분명 합리적이다. 그것은 짧은 시간 동안 여기에서 내가 느낀 독일인과 독일의 멘탈리티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소견이다. 한국의 침묵과 독일의 말, 한국의 감성과 독일의 지성, 한국인의 통찰과 독일인의 논리가 만나면서 펼쳐지는 개인적 긴장과 차이를 나는 적지 않게 경험하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도 어느 수위에서는 공허한 진단임을 난 아주 가끔씩 느끼곤 한다. 그것은 독일인이든 한국인이든, 결국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고뇌하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저번 학기 헬라어 시험 때문에 꼬박 한 학기를 기숙사 책상에 붙어 있었던 모니카, 조용하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이 친구가 오늘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의 아픔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숙연하였고, 모니카의 이야기가 다 끝나고 그 친구에게로 다가와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주었다. 나도 모니카를 진심으로 품어 주었다. 실로 모든 이들은 그 마음에 이렇게 세상이 주는 크고 작은 슬픔을 비밀로 품고 있다. 다음 주면, 베를린에서 교회의 날 행사가 시작된다. 기쁘게도 한국에서 선생님도 오시고 또한 동문도 온다 한다. 이곳 기숙사의 친구들도 팀을 짜서 올라간다고 한다. 나는 독일과 이 세상의 교회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신음하는 피조세계의 고난을 헤아리면서 흘리는 눈물을 거기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 인류에게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하는 교회의 간절한 염원과 바람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몇 주 후면 오늘 모니카의 눈물의 그리고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던 폴란드와 그 세월이 만들어 놓은 풍랑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많은 이들의 아픔과 눈물이 풍화가 되고 꿈의 그리움으로 단련이 되어 형성된 견고한 작품들이다. 대지 밑에 드리워진 우리 삶의 뿌리는 저 눈물과 닿아 있고, 대지 위에 서 있는 우리 삶의 시선은 저 그리움의 별을 향해 있다. 난 우리가 경험한 세상의 고통과 상처에 우리가 쉽게 쓰러지지 말고, 그 상처로 인하여 오히려 우리가 지혜를 얻기를 소망해 본다. 생명은 그렇게 약한 존재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명의 흔들림은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꿈을 향한 동기부여이다. 우린 거칠어지지만 않으면 된다. 우린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 안으로는 더욱 더 단단해지면서, 밖으로는 타인을 더욱 배려하고 받아들이며 조화를 만들어 나아가는 것, 그 생명의 진정한 모습을 배우는 도상에 기쁘게 나와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생명들이 더 이상의 아픔과 눈물이 없는 날을 지치지 않으며 꿈꾸어 나아가는 것, 친구 모니카의 눈물이 오늘 나에게 건네준 교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