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7/20 (22:08) from 80.139.156.187' of 80.139.156.187'	Article Number : 268
전철	Access : 8361 , Lines : 59

사고

사고가 났다. 아주 작은 사고. 마리아가 기숙사 식당의 냉장고 문을 열다가 내 머리에 상처를 내었다. 뭐 이마에 난 작은 상처이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들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약품들 가운데 상처에 바르는 연고를 찾았다. 한번도 쓰지 않은 연고라, 구멍을 뚫어서 연고를 짜냈다. 그러고 보니 그 봉지에는 한번도 쓰지 않은 약품들이 많이 있었다. 그만큼 별 탈 없이 이곳에서 생활을 했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감사함이 들었다. 거울을 보며 간단하게 연고를 머리의 상처에 바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고, 사건, 상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어쩌면 사고, 사건, 상처가 야기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필, 내가, 거기에, 그렇게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간에 그 공간에 있었기에 그 사고를 경험했다. 시간과 공간과 사건은 일종의 구분 불가능한 한 순간이다. 만약 오늘 내가 그 시간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고자 하지 않았다면, 오늘 마리아가 기숙사에 놀러오지 않았다면, 그 사고는 나에게 있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나의 사고는 아주 작은 사고이다. 물론 모든 사고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모든 자리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저 공기가 자기 자리를 찾는 저 대기의 흐름도 사건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종의 일상적인 사건이 아닌 조금은 더 두드러진 사건은 우리 세상에 너무나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내 친구들 기억이 떠올랐다. 흥식이. 물에 빠진, 이름도 모르는 친구들을 구하려다 도리어 자신이 생명을 잃어버린 몇 년 전의 아픈 사건. 친구 군대 면회를 가던 중에 당한 다른 친구의 가슴 아픈 교통사고의 기억들. 수술 실패로 인하여 결국 세상으로부터 생명이 떠난 쌍둥이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수술을 앞둔 한국의 사랑이와 지혜. 며칠 전 생활고로 인하여 모든 가족의 동반자살로 아파트에 뛰어내린 사고 등등. 사고는 분명 어떠한 인과관계의 흐름 안에서 존재한다. 정확히 그 순간과 그 시간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와 어느정도 공존하는 울타리 안에 내가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 인과적 사건의 연쇄선상에서 사고는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는 한 편으로는 우리가 만들어낸 몫이기도 하다. 즉 세상에 전적인 비약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형성된 인과의 끈 안에서 운신하고 살아가는 그런 유한한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두 갈래 길을 동시에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선택하며, 감내하며, 그것이 한편으로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만약if'이란 유한한 존재와의 본성과는 무관한 초월적 상상이다. 불교의 정신은 이러한 인과의 감각을 마이크로한 물리적 세계로부터 마크로한 정신적 사태에까지 적극적으로 투영시킨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는 이러한 인과적 연쇄관계'라는 안목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엄청난 사건들과 재난들을 설명할 재간이 우리에겐 없다. 더우기 인과적 흐름으로 인하여 형성된 사건을 해명한다고 하여 앞으로의 새로운 사건들의 흐름을 뒤바꿀 재간은 더더욱 없다. 과학은 기껏해야 사건을 해명할 뿐이지 그 사건을 뒤로 돌릴 수는 없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과 정신과학은 이러한 사건의 이해 가능성을 우리에게 유용한 한계 내에서 제한적으로 제시해줄 뿐이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세상은 끊임없이 긴장과 마찰과 갈등 가운데 서로가 경합하고 있다. 아기의 눈물이 그렇다. 아기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눈물을 흘린다. 우리가 보는 뉴스는 세상에 존재하는 작고 큰 마음과 삶의 가치들이 서로 끊임없이 경합하면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파생물들이다. 그 파생물들의 흉측함이나 신선함이 어느 정도 현실적 매력을 갖고 있을 때, 수많은 뉴스거리를 뒤로 하고 몇몇의 뉴스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사건들은 근본적으로는 뉴스감이며 거기엔 슬픔이 있고, 갈등이 있고, 그리고 기쁨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인과적 연쇄관계의 끈으로도 결코 해명이 안되는,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질문하고 씨름해야 하는 그러한 사건들이 있다. 불치의 고통을 갖고 태어난 아기, 청천벽력으로 어느 날 다가오는 가족의 사고와 병의 출현, 자연의 재해로 인한 큰 피해 등등. 그리고 마음의 뜻과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엄습해 오는 삶의 좌절과 절망들. 여기에서 인간은 그 사건의 의미를 묻게 된다. 인간의 물음에 대한 답이 열리지 않는 그 경계에서, 인간은 한 편으로는 신을 찾거나 신을 버리기도 한다. 어쩌면 이 둘 모두 인간은 의미 없이는 살 수 없는 목마른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은 그 사건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판단, 아니면 그 사건의 의미를 유한성을 벗어난 지평에서 구하고자 하는 소망 가운데 인간은 양자택일을 하게 된다. 사건은 어느 누구에게나 엄습해 온다. 인과의 흐름에서일 뿐만 아니라 그 연쇄관계를 파괴하고 무조건적으로 돌입해 오는 사건도 있다. 이 양자 모두 그 순간 ‘일어났던’ 사건이기에 그 사건을 ‘대면하고’ 있는 인간에게는 그 사건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낯설음과 심연을 경험하게 된다. 가끔 엎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가능하면 얼마나 좋을까. 삶에 반복된 재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빚어지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비극의 사건에서, 그 비극을 최대한 다시금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와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노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며 허망한 것인지도 가끔 느끼곤 한다.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섭리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도대체 이러한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신앙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이러한 것은 아니리라. 그 자리에서, 그 순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하느님이 섭리가 실현되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더 잔인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인생의 여러 슬픈 사건과 불행을 겪지 않았다고 하여 하느님에게 감사하는 고백은, 어찌보면 하느님이 보시기에 별로 선한 생각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 어느 생명도 다 똑같이 사랑하시고 보듬어 안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불행과의 비교에서 우리의 행복에 대한 감사를 그 분에게 드린다면, 그 분의 넓으신 마음을 우리의 작은 상상의 영역에 가두는 꼴이 될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의 경험을 존중하시는 분으로 나는 고백한다. 그것은 세상의 방기가 아니라, 세상 생명들의 지난한 경합과 긴장과 마찰,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자 노력하는 이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숙고하시며 배려하신다.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안목은 어찌보면 우리가 사는 백년의 짤막한 세대가 수천 수만대가 흘러도 지나가도 온전히 지속될 것이다. 동시에 하느님의 생명에 대한 끊임없는 연단과 성원은 특정한 이들에게만 허락되지 않는다. 즉 하느님은 모든 이들의 삶을 돌보아 살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유한한 시간의 무대에서 경합하고 있지만, 그 분은 모든 시간을 넘어 영원함의 빛 안에서 우리를 지지하시고 지탱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 안에 투과해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지, 그 경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빛과 섭리와 경륜을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저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생각한다. 유한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가치척도가 혹시 유한의 지평에서 형성된 제한적 가치인 것은 아닌가 말이다. 우리는 행복의 네잎클로버를 쫓는다. 그러나 그 네잎클로버를 찾기 위해 무수히 버려지는 모든 클로버들은 그 행복을 가능케 하는 소중한 것들이다. 네잎 클로버가 행복이라면, 버려지는 세잎 클로버를 행운이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인간의 기원은 먼지이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 여정에서 더욱더 자신의 뜻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여러 긴장과 갈등, 그리고 우리의 삶을 뚫고 들어오는 사건은 분명 인과론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사건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우리가 그 사건을 통하여 지혜를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건에 대해 지혜를 찾는 것은, 사건을 해명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과적 사건과 과학적 안목으로도 충분히 포섭될 수 있는 여러 세상사의 사건에 대한 초월적 태도를 구하는 것은 아니리라. 세상의 경험은 세상을 뚫고 들어오는 사건을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 사건에 대한 성실한 책임과 미래적 대안을 꿈꾸어야 할 가치가 있다. 사실 오늘 우리사회에서 펼쳐지는 많은 사회적 현실적 사건과 비극들은 우리가 연대적으로 노력하면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는 것들이라 생각한다. 난 인간의 사건은 궁극적으로는 과거에서 오지만 생명은 궁극적으로는 미래를 향한다고 믿는다. 하느님은 인간의 사건을 지켜보신다. 그리고 그 사건을 다시금 받아 안으시고, 인간의 미래를 향해 사건을 건네신다. 그러기에 인간은 쉽게 지치지 않고, 절망하지 말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와 경륜을 새로운 사건으로 기다리고 소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며칠 후, 큰 분리 수술을 앞둔 사랑이와 지혜가 건강하게 우리 앞에 설 수 있기를 희망한다. KARL GOLDMARK | II  Air : Andante - Violin concerto in A minor op.28 홈페이지메인 전철논문 한국논문 사물의질서 연구실 방패와창 꼬람데오 新자연신학 엽서한장 토론광장 추천사이트 방명록보기 신학동네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