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14 (04:39) from 80.139.174.240' of 80.139.174.240'	Article Number :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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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사

언제부터인가 샤워실의 물이 쉽게 빠지지 않았다. 욕조도 아닌데 물이 쉽게 빠지지 않아서 샤워 도중에는 조금만 더 수위를 넘으면 물이 샤워실 턱을 넘어서 화장실로 흘러나올 것 같았다. 물에 오래 잠긴 두 발은 하얗게 불어 오르기도 하였다. 한명이 들어갈 만한 1인용 샤워실 바닥의 물이 빠져나가는 수로는, 구멍 뚫린 쇠 필터와 그 위에 나사로 조여져 있었다. 나는 샤워의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한번 확인하기 위하여 샤워를 끝내고 드라이버로 물이 빠져나가는 곳의 나사를 풀었다. 긴 나사가 빠지고 구멍이 연탄구멍처럼 뚫려 있는 밥공기만한 뚜껑이 열렸다. 무엇이 막혔나 하여 드라이버로 안을 더듬어보니 아주 많은 양의 머리카락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수로를 막고 있었다. 큰 알사탕만한 머리카락 덩어리를 뽑아내었다. 기숙사가 새로 지어진지 약 2년이 되었으니, 그동안 잘 배출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렀던 머리카락 잔해들이 빛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카락을 꺼내어서 처리하는 도중에 내가 풀어놓았던 나사에 내 손이 잠시 스치는 순간 그 나사가 아슬아슬하게 미끌어지면서 그 수로로 빠져버렸다. 마치 그 구멍에 긴 나사가 빨려드는 것 같이 아주 매끈하고 빠르게 그곳으로 굴러가 버렸다. 내 기억에 나사는 약 5센치 정도의 길이에 머리는 1센티가 약간 되지 못하였다. 사실 나사와 그 입구는 그간의 때와 기름으로 인하여 아주 미끈한 상태였다. 마찰이 거의 없는 그 입구 주변에 나사가 놓여 있었고 물이 쉽게 그 수로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바닥이 입구를 향해 경사지어 있었다. 그 쇠로 된 나사 또한 매끈한 기름덩어리가 그 표면에 범벅되어 있었다. 난 난감해 하였다. 그러나 그 나사가 워낙 길다고 생각하였기에 구멍 아래에 뭐 걸터 있으리라는 판단을 하고, 책상의 스탠드를 가지고 와서 그 입구를 밝혀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나사는 없었다. 샤워를 바로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맨몸으로 오래 있으니 약간 추워졌으며, 옷을 하나 둘씩 갈아 입고 복도의 공동 샤워실에 갔다. 그리고 그 샤워실의 물이 빠지는 곳에 박혀 있는 나사를 돌려서 뺐다. 만약 나사가 맞으면 그것을 구입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핏 눈에 보이기에도 그 공동 샤워실의 물 빠지는 곳은 방의 것보다는 아주 작아 보였다. 머리카락과 때가 나사의 결에 동동 묶여 있어서 힘들게 찌든 때를 벗겨내고 나사를 방의 샤워실에 맞추어 보았다. 그러나 맞지 않았으며 저 깊은 곳의 너트에까지 그 볼트 나사는 닿지 않았다. 눈에 보이기에 그 나사는 약 3센티 정도 되었는데 그 길이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난 할 수 없이 그 나사를 하얀 백지 위에 올려놓고 나사의 외곽선을 따라 볼펜으로 똑같이 선을 그렸으며, 3센티미터의 나사 위에 약 2센티미터를 더 덧붙여 물음표를 찍었다. 얼마나 긴 나사가 필요할 지는 쉽게 판단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공 샤워실에서 빼온 나사는 제 자리에 갖다 다시 조였다. 다음 날 오후 슐레 박사 만남과 병원 주치의 만남 사이의 시간에 그 나사를 구하기 위할 계획을 하였다. 나사가 그려진 그림과, 찌꺼기를 거르는 밥그릇 뚜껑 같은 필터를 갖고 시내에 나왔다. 비스마르크 플라츠 옆에 바우하우스라는 곳이 기억이 났다. 거기에서 올 여름 창문에 걸 모기장을 구입하러 한번 가 보았다. 그곳은 공구류 철물류 등을 다루는 생활품 백화점이다. 사실 나의 경험상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어 그 나사를 발견할 지, 그리고 발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들어가서 욕조 샤워 화장실에 관한 물건을 파는 곳을 찾는데, 그 백화점이 생각보다 아주 넓었다. 흥미로운 것은 비슷한 물건들이 질서 잡혀진 위치에 다들 놓여져 있기에 그 긴 통로를 계속 지나가다보니 어떤 환시 현상이 일어났다. 막 앞으로 달려나가도 마치 난 제자리에서 헛바퀴 걸음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사실 자연은 절대 그렇지 않은 듯 하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다양한 시각적 변주는 인간에게 관심과 흥미로움, 그리고 경이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마치 끊임없이 펼쳐지는 컨베이어 벨트에 앉아 있으면서 동일한 것들을 반복적으로 지각할 때에는 알 수 없는 감각의 퇴행이나 상실 같은 게 일어난다. 난 약간 어지러웠다. 마치 미로와 같은 곳을 계속 떠돌다가 머리에 흐르는 땀을 닦고, 두텁게 입은 옷의 자크를 내리고 결국 한 코너에 몇 종의 욕조 세트가 세워진 것을 발견하였다. 난 그곳이 내가 이 나사를 찾아야 할 곳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얼마나 헤맬까 생각하여 바로 옆의 직원에게 내가 들고 온 동그란 공기뚜껑과 들고 온 종이를 보여주었다. 나를 따르라! 그 직원은 마치 본회퍼 같은 말을 하였으며, 난 그를 따랐다. 그가 나에게 변 봉투 같은 비닐에 들어있는 긴 나사가 걸려진 곳을 알려주었다. 여러 종류도 아니고 딱 한 종류의 그 나사만 걸려 있었다. 난 발걸음을 두 번 거닐기 싫어서 혹시 이 종류 밖에 없나 물어보았다. 이 종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나사의 길이가 생각보다 긴 것 같은데 짧은 것은 없나 물어보았다. 오직 이 종류 하나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길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어디에서든지 길이에 상관없이 다 맞다는 말이다. 난 약 2000원의 돈을 지불하고 마치 변 봉투 같은 비닐에 들어있는 나사와, 오는 길에 여름을 위하여 창에 걸 모기장 130*150 짜리를 사가지고 그곳을 나왔다. * * 근대과학의 환원론과 절대주의를 절대적으로 넘어서야 하고, 모던한 양자물리학의 출현을 새로운 시대의 전조인 양 생각하는 류의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실 그 얼굴들은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말하자면 어찌보면 체계적 조직적 사고와 그 사고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는 요소론적 문화의 본성에 대한 경험을 생활 가운데 있었고 그 끝에서 이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 연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세계와 문화와 삶이 나에게 가한 어려움과 불편함, 심지어 허상들에 대해서 요즘 생각을 하고 있다. 사고와 인격과 삶의 정리되지 않은 그 모든 것을 나는 되려 유기적이고 고도로 생물학적이며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강변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강변한 것들의 대부분은 그저 혼돈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요즘 이러저러한 이유로 의학 서적을 본다. 사실 거기에는 여전히 요소론과 분석적 사고가 철저하게 어떤 흔적과 근간이 되고 있다. 인풋과 아웃풋, 상승과 하강,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매우 디지탈적인 정신이 거기에는 주요하게 기능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론 뿐만 아니라 인간 생명체에 직접 적용되는 임상의 차원, 그리고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매우 근본적인 문제에도 직접 관여되어 있다. 나는 아날로그적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매우 기본적인 디지털이 아주 진지하게 동원된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난 나의 삶이나 사회나 이런 건강한 의미의 요소론적 태도를 지닌 문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등한 유기적 체계는 요소론과 디지털리즘의 엄격한 기반과 연속적이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환원론의 바탕마저도 충실히 그 안에서 소화해 낼 수 없는 유기론이라면 그것은 수상하고 조악한 것임이 분명하다. 개인과 사회가 문화가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적어도 어떤 방향으로 길을 찾아가면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의 교과서가 아주 많이 우리 손에 쥐어졌으면 좋겠다. 만약에 요소론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면, 우리 삶의 여러 복잡다단한 고리들이 조금 더 정갈하게 정리가 되며 그 아픔과 극복의 경험이 체계화될 수 있는 어떤 세련된 태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종교엔 교과서가 없다. 심지어 경전이라는 교과서에 대한 해석 자체가 너무나 다양하다. 그리고 그 다양한 해석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꼭 어떠한 섬세한 차이에 대한 분리와 강조 때문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부끄럽게도 해석의 갈등에는 추한 동기가 묻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종교의 힘은 해석의 지혜에 기원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지혜와 모범에 있다. 그 삶이 빛이 되어서 주위와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내가 그 안에 있으며 믿고 의지하는 한국 기독교가 어떤 모범이 되었으면 하는데, 참 어려워 보인다. 그 ‘모범’이라 하는 것은 삶의 반복된 지혜가 어떤 패턴을 이룬 것이며, 그럼으로 인해 다른 이들도 그 패턴에 대한 동의와 경청을 한다는 것이다. 어느 삶의 자리와 문화보다 훨씬 바벨탑의 깨어진 언어에 휩싸여 있는 곳이 한국 기독교와 교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교회가 어느 자리보다 더 투명하고 더 모범적이며 교과서적이어야 하는데, 더 복잡다단하고 더 빈축을 사며 독선과 배타의 도그마로 얼룩진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우리의 삶과 생명이 아프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전체적인 아픔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아날로그적이며 모호함의 영역과 원리에 서 있는 가치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포리아에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어떠한 인간의 열정이 신념을 만들고, 지식을 형성하며, 세월 속에서 지혜의 훈장을 얻게 된다. 그 인간적 사회적 우주적 생명이 아플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아픔의 자리를 성실하게 진단하고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얻은 해법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버겁거나 복잡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그 답의 복잡성은 비교적 수상한 것들이며 심지어 무시해도 될 것들이다. 생명의 아픔은 복잡한 것이지만, 그 아픔의 극복을 지시하는 대답은 미로처럼 복잡해서는 안 된다.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생명을 부여잡고 씨름하는 이웃들, 가난과 소외와 전쟁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얼굴들이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전태일과 같은 생명이 죽어나가야 노동자들의 눈물을 씻어낼 수 있단 말인가.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우리의 형제들이 이라크 전쟁의 현장에 나아가서 죽어나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많은 무고한 아이들과 사람들과 군인들은 이라크 현장에서 저렇게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잃고 있는데 말이다. 잃어버린 나사는 다행스레 찾을 수 있었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사랑과 정의의 연대성을 찾기엔 아직 여러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길에 서 있는 우리가 이러하길 희망한다. 우리의 삶이 더 단순하고 신실하고 투명하여 세상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며 나누고, 작게나마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복잡함의 미로에 노예가 되지 말며, 건강한 상식의 주인이 되기를 바란다. 아주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누구처럼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생명을 던져버릴 용기나 필요성을 간직하고 있거나 느끼지 않는다면, 차라리 우리의 삶이 지속될 때까지, 사랑과 정의를 위한 단순하고 소박하며 상식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도 무척 소중한 일일 것이다. Bach | Goldberg Vari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