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순간 뜨겁게 타오르다 사라지는 성과 넥카강의 불꽃놀이와 더불어 2003년을 보냈다. 친구들과 몇 잔의 샴페인과 더불어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기뻐하였다. 새로운 일 년을 위한 자질구레한 계획들을 세우고, 아늑한 새해 첫날 밤에는 ARD의 영화를 보았다. 케스트 어웨이. 이 영화는 나에게는 작지 않아 보이는 영화였다. 영화의 간결함의 이면에는 사물의 의미를 대하는 인간의 원형적인 면모가 응축되어 있었다.
주인공인 척은 FedEx라는 택배회사의 직원이다. 그는 워커홀리커이다. 세상이 그에게 수여한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다. 가끔씩 일로 인하여 사람을 챙기지 못할 때가 있기도 하다. 그런 어느 날 그는 택배회사 전용 비행기와 더불어 자신의 일을 충실히 감당하던 도중에 큰 사고를 당하고, 죽음의 파도를 넘어 외딴 무인도에 홀로 생존하게 된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간 안에서 그는 살아간다.
그가 무인도에서 홀로 꾸려가는 삶은, 자연과 대면하면서 얻게 되는 인간의 몇몇 문명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생존하고, 자신을 위하여 문명을 건설한다.
그는 불을 피우고, 벽에 그림을 그리며, 대화를 하고, 사랑을 그리워한다. 그가 가장 기뻐했던 순간은 아마도 불을 지펴낸 때였을 것이다. 불은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 선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에서 출현하는 불은 인간을 더욱 더 고양된 방식으로 자연을 사용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불은 자연의 산물이면서 문명의 도구라는 양면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미묘한 경계의 질료이다. 불의 개념은 나에게 여러 물음을 갖게 한다.
척은 벽에 그림을 그린다. 그가 사랑하는 이, 그가 지나온 계절들에 대한 기록과 유희의 유일한 매체가 벽화이다. 거기에는 기록과 소망, 그리고 향유가 동시에 각인되어 있다. 예술은 보존과 동시에 그 자체의 향유이다. 예술은 사멸해가는 인간 경험에 대한 보존의 본능이다. 또한 예술은 과거의 기억을 회상시키는 향유의 능력이다.
척은 그와 같이 떠밀려온 사물인 배구공에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척의 윌슨에 대한 우정은 가히 감동적이다. 윌슨은 불을 붙일 때에도, 외로움에 떨고 있을 때에도, 그리고 그 무인도를 떠나 새로운 출발을 할 때에도 한결같은 척의 친구이자, 베아트리체 같은 존재이다. 세상의 시간이 끊어진 그 적막한 공간에서 척의 유일하고 구체적인 파트너는 윌슨이다. 척이 불을 만들어내지 못하였을 때 윌슨을 그 옆에 세우고 다시 불을 지펴냈다. 그 시점에서 윌슨은 대화의 파트너를 넘어서 척의 신념을 수호하는 소망의 담지자로서 모종의 종교적 대상으로도 변모한다.
마지막으로 척은 그의 사랑을 끊임없이 자신의 분신처럼 가까이 한다. 그는 비행기 추락의 와중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캘리가 선물한 시계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했다. 아마 그가 비행기 안에서 그 선물을 잃어버렸다면, 그는 4년 동안의 긴 시간을 생존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의 궁극적인 근거가 신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캘리의 시계와 사진은 척을 생존하게 하는 근원이었을 것이다. 육신은 약해지고 사진은 점점 빛을 바래도, 척의 사랑은 세월에 의해 잊혀질 수 없는 절실한 가치였다.
척은 완벽하게 홀로 남아있는 공간에서, 심연에 존재하는 자연과 환경을 주체적으로 활용하였고, 의미를 누렸으며, 대화와 경청의 대상으로 사귀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의 노력을 통하여 제한적이지만, 홀로 문명과 예술과 종교, 그리고 사랑을 훼손하지 않고 실현하였다. 현대문명과 삶의 공간에서 자동으로 부여된 의미체계에서 살아왔던 척은, 그 현대문명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그만의 의미체계를 개간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과 결부된 노력이어서 더욱 더 비범한 모습이기도 하다. 문명과 예술과 종교의 기원에 대한 여러 이해의 방식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가치의 기원은 생존의 문제와 상당히 가까이 있는 것들임을 척은 보여준다. 이전의 주어진 사회에서 그저 사물로 존재하였던 가치들이 얼마나 생존과 연루된 충만한 것들인지를 척은 다시금 발견하게 된다.
척은 다시 구조되며, 그를 죽음의 목록으로 밀어내었던 사회에 다시 귀환한다. 척이 삶을 바쳐 열심히 일해왔던 회사가 그의 예상치 못한 귀환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보였는지는 모호하였다. 실종의 빈 자리에 대한 댓가를 이미 치룬 회사였지만 회사는 도의를 다해서 큰 환영식을 거행하였다. 하지만 그가 결국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하였던 원천이자 그의 유일한 사랑인 켈리는 새로운 남자와 가정을 꾸렸다. 켈리는 척을 잊지 않았고 사랑하지만, 척은 켈리와 그의 가족을 더 사랑하기에 그녀와의 추억이 묻어있는 차로 켈리를 남편과 가족의 문 앞에 내려놓는다.
그는 사물로만 존재하였던 세상에 대한 가치들을 다시금 생생하게 생존을 통하여 얻게 되었다. 그는 자연의 불과 바다의 게를 힘겹게 얻어냈지만, 세상은 너무나도 쉽게 라이터와 게 요리를 접할 수 있다. 척은 그렇게 쉽게 불을 지피고, 쉽게 음식을 접하나 거기에는 얼마나 절실한 이해가 깃들어 있는지를 현대 문명을 구가하는 우리에게 질문하게 한다. 더 나아가서 척은 사회적 기능과 기술과 그로 인한 사물성의 안락함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한다. 우리는 불을 사용할 수 있지만, 불의 의미를 모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음식을 잘 먹을 수 있지만 음식이 어떠한 과정으로 우리의 식도를 거쳐 내려가는지를 모를 수 있다.
현대사회가 구가한 환경의 체계는 그 의미를 인식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 자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조금 회의적이다. 의미는 시간의 경로 속에서 사물화 된다. 의미의 과잉은 사회적 질서의 교란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굳어지는 것은 의미의 생존전략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드러난 사물이 지난한 생존의 산물인지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것인지 헤아릴 수 있다. 사물화된 환경에서 반성 없이 산다는 것은, 원시성의 세계에서 힘겹게 의미를 캐어내는 삶보다 더 권태롭거나 불행한 삶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홀로 힘겹게 얻어내었던 문명과, 예술과, 종교, 그리고 사랑의 의미를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그는 발견하지 못한 듯 하다. 척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다시금 그 홀로 된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무인도의 힘겨운 생존의 공간으로 귀환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자리, 사물화된 삶에 다시 안락하게 되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는 4년전에 이미 배달했어야 할 소포를 늦게나마 결국 배달함으로서 운송회사 직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마무리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삶의 출발이 그 소포와 더불어 이어진 듯 하다. 물론 그 소포의 여주인과의 새로운 사랑의 시작에 대한 가능성은 모호하게 여운으로 처리되었다. 날개가 그려진 소포는 척에게 생의 의지를 갖게 한 원천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척의 새로운 삶은 우연히 만난 소포의 여주인과의 사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쪽에 점수를 주는게 자연스럽게 보인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FedEx라는 운송회사와 윌슨이라는 배구공 회사의 홍보작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조악한 의도를 넘어서서, 사물의 생생한 의미를 추구하는 깨어있는 인간 본성의 심층적인 면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세상은 그를 실종으로 낙인찍었지만, 그는 가장 생생한 세계를 홀로 체험하며 깨닫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에 대한 감각이 굳어진 우리들에게, 우리의 환경, 인연, 우정, 사랑, 사람이라는 것들이 알고보면 얼마나 절실한 실상들인지를 척은 보여주고 있다. 세상과 철저하게 단절된 4년의 봉인된 시간에서 힘겹게 생존하며 소중한 삶의 의미를 쟁취한 척 놀랜드의 모습을 통하여, 나는 최소한 나에게 주어진 365일을 어떻게 깨어있는 눈으로 대면해야 할 지를 새해 첫 날 생각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