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서 3 SAT 채널에서 1주일간 근대 사상가들에 대한 특집방송을 제공하고 있다. 월요일에는 포퍼와 비튜겐슈타인, 화요일에는 하이데거와 칼 야스퍼스, 그리고 오늘은 에른스트 불로흐와 하버마스가 특집으로 조명되었다. 저녁 6시 30분부터 12시까지 약 4-5개의 다큐멘타리 형식의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이들 모두 그들이 쓴 저서 한두권을 통하여 그들을 쉽게 헤아릴 수 없는 큰 사상가들이다. 사실 사상가라고 하기 보다는 천재적인 열정과 노력과 사상의 구축으로 현대 사상의 흐름들을 바꾸어가는 독일의 세계적인 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나 또한 그들에 대한 독서와 이해는 아주 지엽적이며 몇몇의 책을 통한 피상적인 정보밖에 갖고 있지 않았으나, 죽은 자, 그리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자들의 눈빛과 삶의 여정, 그리고 사상의 흐름을 아주 구체적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저번의 아도르노와의 생생한 만남을 통하여 그 사상과 저서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있었다면, 이번의 만남으로 인해 그 이름들은 어떠한 이름들보다 더욱 분명한 의미와 무게를 갖게 되었다.
한 사상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상가의 초기 작업에서부터 말기 작업에 이르기까지 출판된 저서와 그 사상의 흐름을 헤아리는 작업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도르노에 대해서는 몇 권의 저서를 구입하여 읽고자 하는 열의가 생겼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아주 사적이며 우연적으로 접한 사상가들의 저서를 읽는, 소위 사상적 행간을 고려하지 않은 저서읽기의 태도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사회적 교양이 제시하고 있는 사상가들의 저서라고 하는 것은 그 사상의 후기에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사상서이거나, 아니면 그 사상가가 당대의 사상사에 여파와 충격을 준 작품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저서를 읽을 때에는 그 저서가 말하는 메시지의 본질적 의미와 행간을 헤아리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으며, 후자의 저서를 읽을 때에는 그 충격을 준 사상과 방법론이 어떠한 방식으로 더욱 더 세련되게 예각화 되는지를 추적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양자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다량의 저서를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많은 시간과, 여유와 열정이 필요할 수 있겠다. 이러한 조건은 완벽한 상상에서나 제시되는 허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상가를 만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싹트이는, 혹은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어떠한 Point를 지향하려는 열정과 관계맺고 있음을 의미하기에, 사상가를 잘 만나고, 그 사상을 자기화 하면서 섭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방송들은 전반적으로 근대 이후에 새롭게 조명되는 개인의 탄생, 또한 개인과 사회의 소통, 언어와 세계의 관계, 학문과 역사성이라는 아주 구체적이며 역사적 조건을 담지하고 있는 주제가 제시되었다.
현재 내가 걸어가면서 고민하고 있는 지점은 고전적인 시간, 공간, 사건, 신성에 대한 틀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한 수단으로 물리학과 자연철학, 관계론과 그에 상응하는 신학적 반성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고민의 과정이 어느정도 성과를 얻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번 주 내가 접하게 된 사상가들의 고민을 접해야 하겠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에른스트 불르흐의 히브리적 사유를 통한 새로운 유토피아 철학의 제시는 이미 몰트만의 정치신학과 사상적 얼개를 충실히 담보하고 있을 만큼 그 원천의 뿌리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Der Prinzip Hoffnung은 언젠가 꼭 시간을 내어 정독하자며 나에게 다짐하였다.
비튜겐슈타인의 언어관은 언어, 이해, 세계라는 주제들을 개인의 자리에서 새롭게 검토한 철두철미하고 집요한 프로젝트였다. 화이트헤드의 언어이론이 갖고 있는 그 이해의 어려움들이 언젠가 조금씩 새롭게 밝혀지면, 비튜겐슈타인의 언어관에 관한 검토를 통하여 언어에 관한 근대적인 성과들을 적실하게 수용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칼 포퍼는 철저하게 학문이란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나에게 던져주었으며, 진리와 학문의 관계, 진리를 향한 학문의 논리에 대한 디테일한 태도를 갖게 하였다. 특히 '진리와 직접 내통하는 듯한' 신학적 담론체계가 지니고 있는 거친 면과 오류를 포퍼의 고민을 통하여 고려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칼 야스퍼스는 무한자를 대면하고 있는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 그리고 실존철학의 독특한 입장을 아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였다. 믿음과 자유, 실천의 현실적 문제들이 어떻게 무한자와 관계되는지를 실존적인 전망을 통해서 연결시키는 과정에 난 감탄하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과 실존의 문제를 그의 독특한 방법론 속에서 융화시켰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에게 실존의 자리는, 요즘 내가 고민하는, 과학과 별개된 실존이 아니다. 시간, 공간, 사건이라는 그 사태에 관한 기술의 본질을 다시 묻게 하는 자리를 하이데거는 이미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가 기술시대에 관한 비판철학적 언급을 시도하였으며, 다른 한편 결국 그의 철학이 시로 귀환하였다는 사실을 염두해 볼 때, 결코 그는 과학을 버리는 철학의 소극성으로 치부될 수 없는 내적인 방법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버마스는 헤겔의 논법이 개인적 주체와 절대자 사이의 사이클에만 제한되기를 거부하며 새롭게 소통의 문제를 제시한 현대의 사상가로 나에게 다가왔다. 특히 다문화사회의 현실에서, 또한 다양한 하부의 담론공간이 중첩된 현대의 삶의 공간에서 어떻게 각자의 체계내적인 논리들이 다양하게 조합되고 공존하며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적 소통을 실현할 수 있는지를 평생 연구한 학자로 다가왔다. 하버마스의 소통에 관한 이론은 독일의 대화 민주주의와 긴밀하게 연루되어 작동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포퍼나 에른스트 불르흐도 마찬가지이고 당대의 정치현실과 문화와 아주 놀랍게도 소통되고 있었다는 현실에, 밖에서 온 수입학문과 안에서 형성된 자생문화 사이의 자연스럽지 않은 한국의 공존이 떠올랐다. 우리에게도 수입학문이든 자생학문이든 우리들의 사회와 문화를 새롭게 여는 견실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야 할 텐데, 아직은 잘 소통되지 않아보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하이델베르크 교수였던 하버마스의 도큐멘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야스퍼스와 불르흐가 거쳐간 하이델베르크 시대에 대한 회상과 그 정경이 TV에서 나올 때, 이곳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참으로 축복의 시간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다. 물론 모든 경험은 시간의 흐름 가운데에서 소중한 기억과 추억으로 자리잡히는 것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젊은 시절을 큰 지성들이 스쳐지나간 이 흔적들을 헤아리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어떠한 시간보다 더 아련하고 귀한 시간임을 느끼게 하였다. 특히 야스퍼스의 하이델베르크에 관한 기억은 그 자신에게는 아주 중요한 대목이었으며, 당시 맑스 베버를 비롯한 거성들과의 지적 교감은 독일 현대 사상의 역사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운동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본격적으로 임마누엘 칸트에 관한 방송이 준비되어 있으며, 금요일에는 아도르노에 관한 내용으로 5일간의 사상의 향연은 마감이 된다. 주로 Arte와 ARD ZDF만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았었는데, 3 SAT의 특별기획 덕분에 이 체널의 특징들과 또다른 양질의 방송들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 과학, 사상에 대한 끊임없는 재해석과 환기, 3 SAT를 통하여 느끼는 인상들이다.
기본적으로 사상가의 사상은 그 사상가의 일관된 고민이 어떠한 질적인 비약을 통하여 전개되고 익어진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면적으로 드러난 결실들을 혓바닥으로 핧기만 해서는 그 사상가의 진정한 핵심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길을 피하는 것은 그 사상가의 텍스트와 동시에 사상가가 고민하였던 그 내밀한 지점으로 들어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한 내재적 접근의 길은 텍스트 보다는 영상과 바이오그라피, 그리고 생의 단편인 텍스트가 아니라 생의 연속성을 그대로 담은 다큐가 훨씬 용이하다고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곳에서 지금 그들이 고민한 흔적들을 아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자리가 심연에 가라앉은 체 그들이 놓아두고 간 몇 권의 책으로 그 사상의 핵심과 본질을 응시해야만 하고, 그로 인하여 내가 아주 힘들어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이 젊은 시절 만나는 화이트헤드도 마찬가지이다. 아인슈타인과 루만도 마찬가지이다.
사상의 힘은 사상가의 깊이와 그 방법론의 일관성에 있다. 깊이와 일관성은 사상의 중요한 두 축이다. 그리고 사상을 접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수용이 결코 아니다. 그 사상은 여하간 내 밖에서 생생함을 결여한 흑백의 영상일 뿐이다. 내 안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아직은 떠돌아다니는 사상들의 흐름과 만나서 더욱 더 나 자신의 고민과 방법론이 고양되고, 또한 외부의 흑백 영상도 더욱 민감하게 인지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너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내가 본다" 이것은 사상가가 나에게 거는 말이지만, 달리 보면, 내가 사상가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