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고, 비가 내린다. 잘 익었던 단풍들도 내일 아침이면 빗물에 젖은 채 바닥에 다 떨어져 있겠지. 아는 친구와 오래간만에 대화를 했다. 아버님*이 많이 아프셨는데 이제 기력이 없으시다고 한다. 담당의사 선생님이 마지막 가시는 모습이라는 말을 하셨다고 한다.
의사분들은 사실 죽음과 대면하면서, 죽어간 많은 이들을 평생 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직관과 판단은 그렇게 실상과 엇갈린 것들만은 아니리라. 친구도 아버님을 위해 기도를 했다고 한다. 친구의 아버님께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셔서 그만큼 더 헤어짐이 아쉽고, 쓸쓸한 것 같았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정오의 그 따뜻한 시간을 지나면 중심을 거쳐 쓸쓸하게 변경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나는 가끔 그런 느낌을 받는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날 시내를 거닐다, 이렇게 밤이 되고 컴컴해지면 그 지나갔던 오후의 시간들이 꿈결 같다는 인상. 어쩌면 우리가 꾸는 꿈과 그 오후의 경험 모두는 두번 다시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동류일런지도 모른다.
이 대지 위에서 우연히 생명을 얻고, 인연을 갖고,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것, 이 모두 꿈과 비슷한 것들이리라. 더 이상 다시 재현될 수도 없고 어느 것 하나도 버릴 수 없는, 귀하게 허락받은 삶의 영수증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버리고 인연이 끊어지고 이별을 하는 것은, 그 시기가 빠르건 느리건, 우리가 맞닥뜨리는 또 하나의 자명한 시간들이다. 그것들은 참 아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이 너무 아프기에, 만남을 원망하기까지도 한다.
넥카 강변을 산책하면서, 내 인생은 봄일까, 여름일까, 아니면 가을일까, 겨울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 대답은 쉽지 않았다. 나는 인생의 겨울로 들어가는 친구의 아버님을 생각해 본다. 친구에게 말했다.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자고. 그리고 아버님이 이 지상에 있는 동안 따뜻한 사랑의 시간을 되도록이면 많이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친구의 아버님은 살아있는 우리 인간의 시간상으로 시린 눈이 내리는 겨울의 숲으로 들어가시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혹시 누가 아는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다 자신의 시간으로 품으시는 하느님에게는 모든 생이 다 여름이고 어느 것 하나도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아들이 전역 후 몸이 좋아지지 않아서 결국 자식을 보낸 아버지의 눈물이 담긴 뉴스를 보았다. 죽음이 드리워진 피골이 상접한 아들 노충국의 모습도 슬펐지만,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눈에서 떨어지는 그 닭똥같은 눈물이 더 슬펐다. 아들 바라보면서 울고, 인터뷰 하면서 우는 아버지의 모습. 50대 정도의 아버지이신데 얼굴에는 그 마음의 천진함이 여전히 남아계셨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에 설탕을 몇 스푼 넣을까를 고민하는게 삶이기도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게 자신의 반쪽과도 같은 이와도 생 이별을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자명한 삶이다. 우리가 스타크레프트 게임을 하면서 인생과 생명의 의미를 따지는 것도 이상스러운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죽음과 소멸을 대면하지 않는 삶의 소소함은 매우 가볍거나, 알고보면 대단히 이기적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 별에 왔으며 살고 떠날 것이다. 그것은 자명한 자연의 법칙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법칙은 이별과 헤어짐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인간적인 것은 어찌보면 그렇게 자연적인 것보다 원초적이며 뜨거운 입김과 같은 것들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이 생에 한번 알뜰하게 주어진 축제이기도 하지만,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잘 알 수 없다. 이 한낮의 무대와의 이별이 다른 별에서의 더 큰 만남을 의미하는지. 그러나 이별이 끝이 아님을 난 믿고 싶다. 친구와 아버지와의 이별이 끝이라면, 그 정오의 햇살 아래에서 쌓아왔던 사랑과 인연들을 이 자연과 우주는 얼마나 쓸쓸하고 야박하게 대하는 꼴인가. 그렇다면 이 대지는 얼마나 허무한 곳이란 말인가.
친구여, 그대의 친구로서, 신앙인으로서 내가 아버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주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 밖에 없을 것 같다. 아버님이 고통스럽지 않고 편하게 이 세상을 떠나실 수 있기를... 그리고 아버님이 하느님의 품에 편히 쉬실 수 있기를...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6.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