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 Leben




>Die wahre Geschichte des Geistes ist nicht in gelehrten Büchern aufbewahrt,
sondern in dem lebenden seelischen Organismus jedes einzelnen.<
Carl Gustav Jung, GW XI, 37


2006/03/27 (08:24) from 129.206.196.98' of 129.206.196.98' Article Number :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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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시즘의 그늘



이번 주에 독일의 영화 레퀴엠(Requiem, Deutschland, 2006)을 보았다. 이 영화는 70년대 초반에 있었던 독일의 실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대충의 요지는 이렇다. Anneliese Michel이라는 소녀는 간질증세를 앓고 있다. 미하엘의 고향은 가톨릭 문화가 깊이 스며든 튀빙엔 근교이다. 그녀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그녀의 꿈은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한 후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이다. 그녀는 늦게나마 21살의 나이로 튀빙엔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간질'로 보이는 증상의 악화로 인하여 대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결국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곳에서 가톨릭 신부의 엑소시즘을 통하여 치료를 받다가 23살에 사망한다. 현재 그녀의 묘지가 있는 곳은 가톨릭 신도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며칠전에 본 독일의 영화 레퀴엠은 바로 미하엘이라는 소녀에 대한 비교적 치밀한 기록이기도 하다. 물론 관점은 대단히 실사적이다. 오히려 역사속에 물음을 던지고 사라진 이 사건, 즉 Wissenschaft와 Glaube, 과학과 신앙의 경계를 묻는 이 사건을 비교적 냉철하게 접근한다. 예를 들면 이 영화에서는 미하엘의 '병'을 단지 악마로 인한 병이며, 가톨릭과 신부는 이 악마축출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은 악마의 힘으로 인하여 그녀는 안타까운 생명을 잃고 성녀의 반열로 추앙되는 일반론을 다른 관점에서 꼬집는다. 그 관점은 바로 그녀가 '엄마'와의 관계가 대단히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는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낭만'을 만끽한다. 12월이 들어서고 독일의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가 되어서 고향을 찾는다. 그녀는 이쁜 치마와 플로버를 튀빙엔에서 구입하고, 엄마에게 자랑을 한다. 그러나 엄마는 오히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그리고 딸 모르게 엄마는 그 치마와 옷을 쓰레기통으로 쳐박는다. 딸은 그러한 엄마에 분노를 한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참여하는 크리스마스 예배에 엄마는 너무나 진실한 '듯한' 마음으로 예배와 찬양을 드린다. 그녀는 엄마의 자신을 대하는 현실적 태도와 종교적 성스러움의 이중성에 치를 떨고 예배 도중에 나와버린다.



게다가 자신의 고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두 신부는 자신을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엑소시즘을 상부의 허락을 맡아 실시를 한다. 결국 자신은 결코 귀신들림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 엑소시즘의 치료를 받고 난 후, 그리고 신부가 그녀에게 선과 악의 거룩한 '대리전'을 지금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후, 그녀는 동의를 한다. 자신이 귀신이 들렸다는 것. 그리고 엑소시즘으로 자신이 건강을 회복하기를 소망하려고 자발적으로 노력을 한다. 십여번의 엑소시즘의 끝에 그녀는 삼십여키로의 몸으로 바싹 마른 후 결국은 사망을 한다.

오늘 본 The Exorcism of Emily Rose (2006, USA) 이라는 영화는 그녀의 심리적 변화와 내면의 흐름을 깊이 추적했다고 하기 보다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의 대립, 그리고 신부와 의사의 법정공방에 촛점을 맞춘 영화이다. 거기에는 레퀴엠에서 보이는, 그녀의 증상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일어난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게다가 심각할 만큼 '역사적 사건'을 뒤틀어버린 면이 보이기까지 하다. 엑소시즘이라는 '비의적 주제'에 대한 심리적, 문화적, 종교적 접근이라는 시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단편화된 도식과, 사실에 대한 신앙의 승리라는 거친 결론으로 영화는 치닫게 된다.

나는 이 둘의 영화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다. 단지 몇 가지 개인적인 생각을 남기고자 한다.

1. 70년대 독일의 한 지역, 그것도 시골, 카톨릭의 신앙과 문화가 깊이 스며든 그곳에서 그녀의 부모님은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병'을 그녀의 내면에서 찾지 않고, 그리고 '의학적' 도움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일찍 '종교'라는 도식에서 접근한 것은 아니었는지.

2. 레퀴엠에서 나온 두 신부는 천사와 악마라는 표상으로 그녀의 병을 도식화 한 것은 아니었는지. 엑소시즘이라는 '가설'로 엄마와의 관계에서 끔찍하게 고통당하는 그녀의 마음의 병을 오히려 가볍게 덧칠한 것은 아니었는지.

3. 인간은 '의미체계'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녀는 '건강'을 기준으로 자신의 의미체계를 구성하였다. '약'은 그녀에게 충분한 의미체계를 제공해 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서 너무나 쉽게 '엑소시즘'에서 그녀의 의미체계를 찾은 것은 아니었는지. 물론 그녀의 선택에는 결정적으로 '귀신쫓기'를 그의 중요한 종교적 과업으로 생각하는 젊은 신부가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난 영화를 보면서 두 번의 눈물을 흘렸다. 하나는 그녀가 튀빙엔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디스코텍에서 춤을 추었을 때이다. 그동안 가정에서 겪었던 그 내면의 슬픔을 쌓아놀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서 그녀의 춤은 슬픔과 아픔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그녀의 댄스는 피부 깊숙한 아픔들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건강하게 버티어 내려고 그렇게 노력하다가, 약의 도움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했을 때 처음 엑소시즘을 한 후, 한 줌 다가온 마음의 편안함, 그리고 귀신이 들렸으니 그것을 쫓아내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과제라고 신부가 말했을 때, 그녀가 끄덕이는 그 순간... 이미 더 이상 눈가에는 눈물도 나오지 않고 모든 기력이 사라진 그녀였지만, 그것을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수용했을 때의 그 순간이었다.

4. 우리들의 '세계'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의 마찰과 교감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산물이다. 과학과 문화와 종교 또한 이러한 일종의 안과 밖이 만나서 이루어진 '기하학적 변형'과도 같은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천사'와 '악마'라고 하는 것은 인류의 종교적 성정과 역사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표출된 코드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성스러운 것과 성스럽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류는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천사'와 '악마'라는 의미체계를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사'와 '악마'가 실재Realitaet이냐 아니면 표상Vorstellung이냐의 문제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 문제를 지금 '기하학적 변형'이라는 화두로 고민하고 있다. 악마는 우리의 신앙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과학적 개념인 원자와 초끈은 우리의 실재의 세계 안에 정말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을 과학에게 던지듯, 악마는 우리의 실재의 세계 안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을 우리는 동일하게 던질 수 있고, 던져야만 한다.

경험은 안과 밖이 접히는, 그리고 교감하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세계는 심지어 '표상'이라 하더라도 안과 밖의 마찰로 인하여 열린 '표상'은 또한 그 역사성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이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표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또 하나의 자명한 실재성을 얻게 된다.

즉 악마가 '표상'이라 하더라도 그 악마라는 표상을 '십자가'가 물리친다면 그것은 표상세계 안에서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보편적 정당성과 실재성을 지닌다. 즉 종교는 '천사'와 '악마'가 실재가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그 종교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삶이 상호주관적인 영역에서 출현한 것이라는 것은 이 삶이 가상적임을 말하지는 않는다. 악마가 인류 내부에서 고안된 의미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허황된 것임을 직접 보증하지는 않는다.



5. 신앙은 과학이 접근하지 못하는 부분을 신앙의 존립근거로 제시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럴 경우 과학의 발전은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지평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악마'로밖에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앙과 과학 또한 삶을 진실하고 성실하게 대면하려는 의미체계인 것이다.

레퀴엠과 The Exorcism of Emily Rose는 엑소시즘으로 사라져간 '사건'을 각자의 다른 눈으로 접근하는 두 채널이다. 레퀴엠은 정말 그녀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진지하게 묻는다. 그녀는 정말 귀신에 들린 것인가? 거기에는 오히려 잘못된 가족관계와, 가톨릭의 '반과학적' 태도, 그리고 당시의 보수주의적이고 반주지주의적인 태도가 만들어낸 시대의 희생양은 아닌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현실과 영화적 상상이 뒤틀려버린 The Exorcism of Emily Rose 에서는 그녀의 고민은 뒷전으로 사라진다. 오히려 천사와 악마는 실재하는가? 과학은 정말 '합리적'인가?라는 잘못된 유아적인 물음을 던진다. (물론 이 영화는 대단히 형편 없이 만들어졌다. 도중에 영화관람을 마음으로 몇번이고 포기하려 하였다.)



6. 그녀가 죽은 지 몇 개월 후 법은 신부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엑소시즘의 역사적 경험은 가톨릭에게 '엑소시즘'의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여전히 로마에서는 엑소시즘에 대한 강좌가 새롭게 열렸고, 베네딕트 2세는 이러한 카톨릭과 엑소시즘의 관계설정에 대하여 큰 의미를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엑소시즘으로 인한 그녀의 죽음은 독일내부에서부터 종교와 국가, 현대사회와 가톨릭, 신학과 의학, 종교적 관념의 실질적 의미에 대한 다양한 문제제기를 남겼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화까지 되어서 30년이 지난 이후에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천사와 악마가 실재하느냐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병'이다. 그리고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가족과 병원과 신부는 더욱 더 그녀의 마음 안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그리고 천사와 악마를 '실재'한다 '부재'한다고 보는 이러한 단선율적인 인식을 넘어서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헤아렸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천사'와 '악마'의 치열한 싸움으로 고백하는 사이트 담당자의 답신이 왔다. 며칠 후이면 그녀의 엑소시즘이 담겨 있는 90분짜리 육성 테잎이 도착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정말 '그녀'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악마'의 목소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없다. 물론 여전히 나는 튀빙엔의 저명한 의학자 쿠르드 코흐나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심령학'과 엑소시즘에 관한 공신력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비의적 관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그녀는 그렇게 심각한 병을 앓았는지, 그리고 그녀와 가톨릭이 표상화 했던 '악마'라는 것이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과 삶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악마'가 없는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그 구체적인 방법과 환경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엑소시즘을 바라보는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관련링크


독일영화 Requeim 공식 사이트

독일영화 Requeim 내용을 담은 도서

독일영화 Requeim 사진들

슈피겔의 기사 : Gott schweigt

미국영화 The Exorcism of Emily Rose 공식 사이트

Anneliese Michel und ihre Dämonen. Der Fall Klingenberg in wissenschaftlicher Sicht

Exorzismus oder Liturgie zur Befreiung vom Bö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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