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마녀사냥(Hexenjagd)를 보다. 원작은 아서 밀러의 시련(The Crucible, 1953)이다. 주인공 프록터는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는 점진적으로 그러나 아주 단호하게 자신의 존엄성을 끝까지 지켰다. 다른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신은 그저 '수단'일 뿐이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 안의 양심(신)을 훼손하지 않았고, 양심(신)과 대화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자신의 존엄성 또한 훼손하지 않았다. 세상은 그의 생명을 죽였지만, 그의 존엄성을 죽일 수 없었다.
특히 순결과 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프록터의 부인 엘리자베스(Elizabeth Proctor) 연기를 하는 친구는, 마지막 클라이맥스의 시점, 남편을 면회하는 장면에서 종일 울었던 것이 너무나 인상에 남는다. 우는 연기가 아니라 그녀는 정말 울면서 연기를 했다. 작품의 정신은 연기로 표현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연기자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프록터와 같은 사람, 즉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양심과 신이라는 기반 위에서 살아가려 노력하는 사람은 거짓과 사기를 칠 수가 없을 것이다. 진실의 댓가가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녹녹한 우리네의 삶에서, 그리고 타인과의 삶에서는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거짓과 부정과 욕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모습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눈'인 신이 자신 안에 진정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거짓과 부정과 욕망을 숨길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어찌보면 신이라는 이름의 내용은 진실과 정의와 사랑일런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진실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하며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삶에서 언급되는 '신'의 이름은 단지 '이름'으로 추락하는 꼴일런지도 모른다. 그 이름은 바람이 불면 그저 날라가버리고 말 가벼운 휴지조각일 뿐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신'이 진정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거짓과 부정과 욕망의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에 진정 신을 찾는 염원이 있다면, 그는 아마 우리의 거짓과 부정과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거울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 거울을 보면서 우리는 부끄러워하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새로운 전향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신이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젖어사는 그 구부러진 존재양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폭로하며 반성하게 하는 역할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란 인간과 개인의 '투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신이라는 관념은,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투사'가 지니는 욕망의 성격 건너편의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라는 관념은 인간에게 있어서 대단히 엄숙하며 진중한 가치이다. 신은 그러므로 인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의 가치'이다. 신이라는 가치는, 인간의 궁극적 존엄과 결부된 궁극적 가치이다. 신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발견하고, 인간의 존엄을 통하여 우리는 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세상의 법정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포기하지 않아야 할 신의 질서의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작품에서도 나왔다 시피, 인간이 세운 법정 또한 인간들의 욕망만 반영할 뿐이다. 그 법정의 선고는 신의 질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선한 이들만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이는 나에게 이렇게 독해되었다. 인류의 경험을 통하여 역사에서 구현된 여러 '법', '정치', '문화', '사회제도', '교육' 또한 인류가 훼손하지 않아야 할 궁극적 정신인 진실과, 정의와 사랑과 전혀 별개일 수도 있다는 자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에서, 신학은 바로 이러한 인류의 경험적 제도가 진정한 인간성의 존엄과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하는 바로미터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서구의 신학정신의 발화와 그 역사적 기능은 이러한 기반 속에서 작동되어 왔다고 나는 판단한다.
핵심적인 매카시인 소녀 에비게일을 포함한 주위의 사람들의 광기로 프록터에게 결국은 '죄'를 씌울 때, 프록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악마(마녀)임을 자청하면서 "신은 죽었다"라고 울분을 토하며 외친다. 그 외침은 목사와 판사와 법정에게는 프록터를 악마로 단정하게 하는 핵심 단서가 된다. 그러나 어찌 보면, 프록터의 말은 악마의 외침이 아니라 진실이며 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예언자적인 말일 수도 있다. 진정 신은 죽었으며, 바로 인간들이 신을 죽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프록터는 죽지만 그의 존엄은 남을 것이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프록터는 형장에서 처형된다. 네 시간 가까이 진행된 '광기로 인한 비극' 또한 어두어지는 무대와 함께 마무리 된다. 얼얼한 마음이 되어 돌아오는 길목에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궁극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진실함과 정의로움과 사랑을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고 살아내는 것이라고. 이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신의 진정한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지켜내는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