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인생이란 수천년의 세월동안 이 땅을 왔다가 사라진 수많은 삶의 무덤 위에 핀 꽃과 같다. 우리 삶의 폭과 무대는 앞 뒤로 100여년이다. 태초부터 100년 전까지의 모든 이들은 죽었고, 지금으로부터 넉넉하게 100년 후 태어날 '생명의 모태' 안에 있는 생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죽음의 무덤위에 서 있는 우리들'이라는 감각은, 우리와 같이 이 삶의 무대에 존재하는 주위의 이웃을 동시대인으로 보게 한다. 100년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리고 100년 후에는 사라질 동시대인. 이는 대단히 엄숙한 자각이다. 이러한 자각과 충격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의 삶에 무대에 쌓인 갈등과 반목과 전쟁의 층적물들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공존과 협력의 무대로 이 동시대를 가꾸는 근거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시대를 경험하는 세월의 동료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이 다하고, 죽음을 거쳐 영원한 생명의 옷을 바꾸어 입는다는 것은 우리의 진실하고 간절한 믿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이 우리의 100년의 삶의 무대에서 살아가는 이 시간의 절실함을 깎아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현세에서의 삶은 영원한 삶도 아니고 단지 유한한 육신의 삶이지만, 이 육신의 삶 또한 우리가 처음 경험하는, 그리고 어떠한 가치로도 쉽게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삶일 것이다.
생명은 순수하지만 이미 그 생명이 놓여있는 이 현실의 삶은 우리의 나이보다 훨씬 더 긴 역사적인 대립과 갈등과 반목이 실질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현실이기도 하며, 생명과 삶의 그 귀중한 경험을 훼손하는 구조적인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탄생하기 전에도 분명히 우리의 현실에는 마성이 존재했다는 사실만큼 안타까운 자각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이 비인간화된 현실로서 우리의 시대를 넘어 미래에도 계속 고착화 된다면, 우리의 후손들 또한 그러한 마성의 그늘에 연약하게 방치되고, 여전히 고통과 괴롭힘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시대인의 과제는 다가오는 후손들의 더욱 더 나은 삶을 향해 이 시대에 놓여 있는 비인간적인 요소와 구조들을 새롭게 개혁하고 갱신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후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기에, 결국 우리를 위한 노력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처한 역사적 공간과 특수한 환경이 나에게 주는 습성과 '하비투스'로 인해서 나와 적대적인 공간과 환경에 대한 공격과 비난과 상처를 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열정을 가진 인간 보편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러한 적대적 관계 안에서의 투쟁은, 투쟁의 희생을 넘어선 보람과 역사적 결실을 후대에 열어주기도 했다. 진정한 마음으로 생명을 걸고 투쟁하다 죽어간 수많은 선조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적대적 관계 안에서의 삶에서 언제나 무장태세로 살아가는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점은, 바로 이러한 적대적 투쟁 자체도 궁극적으로는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의 평화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수단이라는 자각이다. 사실 이 지점은 모든 초인적 무장해제와 판단정지에서나 나올 법한 지극히 추상적인 지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알고 보면 동시대인들의 투쟁은 새로운 시대의 공존과 해방을 궁극적 과제로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즉 갈등과 투쟁의 동기와 첫 단추를 헤아려 본다면, 더 넓은 연대와 화해의 확보를 위한 투쟁을 했었지, 투쟁을 위한 투쟁은 원래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투쟁은 정의를 의도하며,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위한 극단적이고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우리는 투쟁의 관성 때문에 투쟁의 이유도 상실하면서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찌 보면 카이로스 없는 적막한 크로노스의 삶인지도 모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따스한 햇살을 맞이하는 경험은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유일회한 경험이다. 하늘나라에도 분명히 햇살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햇살은 오늘 우리가 이 대지에서 피부로 느끼는 경험과는 다를 것이다. 이 대지의 순간 순간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대단히 예외적인 것이며, 유일회한 것이다. 모든 시간들은 단 한번 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다.
삶이 주는 행복감에 도취되어서 그것에 탐닉하여 죽음을 거부하려는 퇴폐적 태도가 아니라, 우리 삶의 시작과 끝, 내 과거의 탄생과 미래의 죽음을 헤아리면서 이 삶의 정오의 경험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윗 세대들은 조금씩 우리에서부터 사라져 가고, 우리도 가고 있으며, 새로운 시대가 또 이 대지에 출현할 것이다. 우리 각자가 '동시대인들의 연대'를 느끼고 다져나가며, 과거의 모든 세대가 거쳤고 미래의 모든 세대가 거쳐야 할 이 '생의 무대'의 부조리와 비인간화를 극복하는 것은 살아있는 삶의 작은 숙제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우리가 이 생에 출현했는지는 모두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생에 초대되어 왔고, 이 생을 기쁘게 누리고 감사하면서 경험하고, 또한 우리와 우리의 후대들을 위하여 생의 무대를 더욱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능력껏 노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삶 자체만으로도 충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대인중 어느 누군가가 이러한 '노력'을 삶의 적극적인 목표로 열심을 다해 살아내고 실현한다면, 그러한 삶은 대단히 멋지고 보람된 삶으로 동시대와 후대는 헤아릴 것이며, 우리와 후대 모두 그 삶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