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분 좋은 날. 접하기 어려운 틸리히의 저서들을 구입하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도 않고 책구입을 좋아하는 것에는 나의 허영과 사치도 한 몫 할 것이다, 라고 지각은 판단하지만 감각은 어쩔 수 없이 환희에 가득 차 있다.
내가 죽어도 저 책들은 다 읽을 수 없을런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죽기 전까지 저 책들을 다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불가능의 가능성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나는 기분이 좋을까.
허영 하나, 총질도 못하면서 상대적으로 총알만 많이 구입한 자의 그 소유적 충만성에 의거한 기쁨.
허영 둘, 궁극적으로는 지식이 현실에 힘이 된다고 하는 (자칫 잘못하면 대단히 사악하기도 한) 지식우월론적 견해 위에서 잘 짜여진 허약하고 근거 없는 망상.
이 두 허영을 나는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허영을 넘어 나에게 젖어드는 확신이 있다. 나는 도대체 정신과 자연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 고민은 사실 내면속에서 완전히 조명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밖의 여러 텍스트와 생각들을 싸매곤 하였다. 틸리히를 표피적으로 이해했을 때에는 '상관방법론'이 무엇인지를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왜 그가 '상관방법론'이라는 개념을 썼고, 무엇을 위해 그 개념을 사용했는지를 어느 때인가 아주 작게나마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내가 고민하는 '기하학적 변형'(이는 아직 무정의용어이다)도 이러한 틸리히의 문제제기의 본성과 동종을 이루는 고민들이다.
이번에 구입한 책들은 바로 그가 던진 '상관방법론'의 구체적인 내용들과 발전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일 것이다. 거기에는 시공간론, 문화와 종교, 인상과 반성 등등 번다한 개념이 아니라 내 내면에서 생생하게 열망되어지는 문제제기들이 우선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슈마허 정도를 제외하고는, 운전을 잘하는 것 자체가 우리네의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을 일종의 타인에 대한 매개적 경험으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모든 책읽기의 이유를, 타인에 대한 더 깊은 배려와 소통에의 의지로 보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일 수가 있겠다.
물론 책보다 타인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거나, 책을 통해서 간접경험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자족적인 영혼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겠다. 나 또한 아쉽게도 그 영혼에 해당되지 못하기 때문에, 책을 붙잡고 일종의 허망한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
아이스크림은 일종의 불량식품이지만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그 달콤함에 젖어들어도 오히려 내 입맛과 인생의 생기가 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이런 기분 좋은 날이 내 일상에 찾아들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