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간 잘 지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의 방에는
장난감이 하나 하나 새롭게 쌓였고
나와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방에는 그녀에게 장난감을 하나씩 하나씩 선물한
내 친구가 지나간 흔적도 보였고
그 친구의 사진도 우연히 책장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불편한 마음에 나는 깊이 젖어 있었으며,
어느날 그녀와 이모 그리고, 나는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솔직함을 좋아하는 편인 나는
그녀에게 나에 대한 애정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그녀는 예전과는 달리 나에 대한 애정이 많이 식어간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나에게 조용하게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녀의 방에
하나 둘씩 쌓였던 장난감의 의미,
우리 사이의 식어가는 애정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들을 슬프게 하고 있었다.
식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이모 앞에서
나는 식탁을 떠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
어제 꾼 꿈이다.
아니 오늘 아침에 이 꿈을 꾸고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일어났다.
가끔씩 꾸곤 하는 전쟁에 관한 악몽은
그나마 객관적 정서를 유지하면서
그 분진의 현장을 담아내는
카메라 앵글과 같은 냉정함이 있었다.
물론 전쟁은 그 자체로 충분히 공포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오늘 꾼 이 꿈은
그러한 객관적 악몽보다 더욱 더 슬펐고 고통스러웠으며
꿈 자체가 내 마음의 큰 상흔을 준 것 같았다.
이리저리 생각해보았다.
왜 이런 꿈을 꾸었는지.
그리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었다.
내 인생의 정오 정도를 지나는 이 학업의 과정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어떠한 로고스에 대한
관성과 집착을 강하게 요구한다.
감성보다는 지성, 논리적인 것들이
이 학업의 연마 과정에서 강하게 요구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나에게 그간 비교적 자연스러웠던 성정인
시심, 정서, 직관, 낭만, 그리고 파토스를 벗어던지고
더욱 더 강한 갑옷을 입으라는 환경의 압력과
그에 나의 몸을 맞추고자 하는
자발적 의지가 강하게 형성된 것 같다.
이로 인해 꿈에서 연인으로 표현되어졌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은 더 이상 이전의 좋았던 관계와는 달리
더욱 나로부터 방치되어가고 조화의 끈을 잃어가고 있었다.
꿈에서 나온 그 여인은 나의 남성적 로고스가 그동안 잘
보살펴주지 않았거나 방치하였던 나의 아니마,
나의 또다른 모습인 '여성성'의 표상이라는
잠정적 결론을 갖게 하였다.
적지 않은 시간 로고스에 집착하는 순간,
그녀는 나로부터 어떠한 유희와 교감을 나눌 수 없었으며
그녀를 기쁘게 하는 '장난감'들을 다른 곳에서 찾아나갔던 것이다.
그녀와 나와의 이별이 말해주는 현실적 맥락들은
그러므로 더욱 더 나를 로고스로 몰거나,
내가 로고스를 과하게 열망하는 데에 있었다.
나를 떠난 연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시간이 주어지는 한,
문학작품과 시,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가까이 심취할 수 없게 된 음악을
마음의 이완을 위해 가까이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어제는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회심을
깊이 표현한, 멘델스존의 바울 오라토리오를 듣고 보았다.
내 영혼에 따뜻한 빛과 온기와 위로가 찾아든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인격적인 나눔과 대화를
깊이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로고스적 성향이 강하게 인간관계에서 발현 되면
타인을 너무 냉철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생기기도 하다.
사실 내 안에서 열등기능으로 오랫동안 자리잡혔던
'논리와 합리성'이라는 나의 그림자를 보완하기 위한 과정이
이 학업의 과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하면
나에게도 온전한 조화를 이루어낼 수도 없고
또한 타인과 환경에 대한 냉철한 태도와 비난을 야기할 수도 있다.
게다가 영혼은 정신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환경에 처한 곳일 수록
자신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고 타인을 비난하게 된다.
내 안에서 내가 관심갖지 못했던 아니마를 다시 관심 갖고
내 안에서 타인에게 투사했던 그림자를 다시 내 안에서 찾는 것이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에게 요구하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아니마의 변신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이제는 내가 인격의 함양과 마음의 조화를 위해
변신하고 노력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
이르른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PS.
내 꿈에서 내가 좋아하던,
그리고 여인과 나 사이의 가운데에서 아무말 하지 않았던
이모가 꿈에서, 그리고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