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깊은 심혼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욕망에 의해 쓰여지기도 한다. 글에는 그러므로 진정함과 허상이 동시에 묻어 있다. 글을 쓰는 자는 후자를 감추고 전자를 드러내려 노력하지만, 역으로 글을 읽는 자에게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욱 쉽게 포착되어지기도 한다.
이는 가벼운 글을 넘어선 학술적인 논문도 마찬가지이다. 논문을 써보니 본인의 펜 또한 이 이중성의 덫 앞에 자유로울 수 없음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된다.
오늘은 우연히 어떤 분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 글에는 완벽하리만치 그의 심혼은 성실하게 담겨졌고, 욕망은 감지할 수 없었다. 전자에서 후자로 갈 수록 글 안에서 심미적 윤기와 느낌이 증발하고 사각사각해진다는 인상을 일반적으로 받게 된다. 그러나 오늘 내가 감사하게 읽은 그 글에는 저자의 고뇌, 그의 단단한 결기,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난한 자에 대한 고민. 이는 사실 모든 생의 색조가 다 빠져버린 형이상학적 사변의 당구알 동역학보다 더 우리가 이해하고 해명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생이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던져주는 것들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가난을 경험하는가. 왜 인간은 가난 앞에서 절망하게 되는가. 가난은 왜 쉽게 우리로부터 사라지지 않는가."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나는 마리아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동구에서 독일로 왔으며 그녀의 얼굴에는 가난의 슬픔이 깊이 젖어 있었다. 어떤 모임에서 마리아는 그 나라의 민요를 불렀다. 그 민요에서 그와 그 민족이 겪던 고난과 슬픔이 나에게 아주 깊이 동조되었던 기억이 있다.
가난은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어찌 보면 체험의 문제이다. 가난을 체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가난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가난의 문제는 더욱 더 그러한 체험적 요소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오늘 읽었던 그 글에 대한 인상으로 돌아가 보자. 그 글을 읽고 난 후 나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글은 바로 되도록이면 세상에 대한 심혼의 시선과 느낌과 체험을 진실하게 담아내야 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하나였다. 글은 조작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조작은 글에 음각으로 흔적으로서 남는다. 흔적은 적극적인 정보를 주지 않지만, 여전히 심미적 인상 가운데 어떠한 영향력을 준다. 어짜피 글을 읽는 자는 시각적인 눈과 의식이 아니라 심미적 영혼이기 때문이다. 조작은 의식적 행위이지만, 글읽기는 영혼의 행위이다. 영혼은 의식보다 더 근원적으로 글을 밝히 본다.
다른 하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을 보면서, 나 또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놓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학문은 가난의 조건을 이해시킬 수 있어도,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은 촉발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냉정한 학문은 가난을 대상화시키고 추상화 시킨다.
가난한 자들은 연약한 자들이다. 세상에서 연약하고 부드러운 것일 수록 그것은 생명이다. 생명이 강하다는 판단은, 사악하게 살아가는 주류 사람들에 관한 뉴스에 우리가 포위되었기 때문에 갖게 되는 오해일런지도 모른다. 오히려 생명은 강하지 않고 대단히 연약하며 부드럽다.
우리의 대지와 환경에는 이미 생명을 언제나 염탐하고 탈환하려는 요소가 존재한다. 그것은 잡히지 않고 시각화 되지도 않지만 언제나 생명의 막 저편에서 연약한 곳을 틈타 생명을 잠식한다.
가난은 생명 내부에서 주워지는 아프리오리적인 천형이 결코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으로 프로그램되어진 생명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 생명의 환경이 가난하다고 할 때 그 환경은 기껏해야 가난한 부모에 대한 지시사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럼 그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도 연쇄적으로 가난의 DNA가 프로그램된 존재인가.
적어도 가난의 문제는 생명 내부의 문제보다는 그 생명을 둘러싼 집단적인 환경이 각각의 생명에 가하는 아픔과 무게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정말 민감하고 부드럽고 연약한 생명일 수록 집단적인 환경이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가난의 인자에 누구보다 쉽게 노출되고 감염된다. 가난의 경험은 가난한 자의 천형이 아니라, 부조리한 환경에 대한 면역의 부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환경과 생명의 함수 속에서 가난의 문제를 봐야 한다. 그러므로 특정한 환경의 오염에 민감한 생명들의 고통과 죽음을 개인사로 정의하는 관점은 과학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가장 환경에 민감하고 활동성이 뛰어난 이유 때문에 환경과의 경계인 생명의 막이 풀어지는 고통을 직면하는 것은, 그 동일한 환경 안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 고통의 또 다른 얼굴들인 것이다. 아니 언제든지 우리 자신을 탈환할 수도 있는 그 환경의 슬픔을 바로 그 생명이 고통 가운데 체험하고 대속하는 행위이다. 그 생명의 고통은 우리에 관한 대속이며, 그것은 환경의 청정에 대한 소망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은, 그러므로 계급과 이념의 문제 이전에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의 태도에 대한 문제이다. 또한 그것은 가난에 대한 낭만적 칭송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생명들이 과잉면역으로 인해 경직되지 않아도 충분히 생명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대안에 대한 고민이다.
가난의 문제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연약한 생명에 대한 인격적 공명의 문제이며, 우리를 품고 있는 이 환경의 청정을 꿈꾸는 연대적 성찰의 문제이다. 바로 이 길에 들어서기 위한 첫 문턱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믿는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고, 가난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 글과 인격에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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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경험 (04.10.08 | Coram 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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