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 Leben




>Die wahre Geschichte des Geistes ist nicht in gelehrten Büchern aufbewahrt,
sondern in dem lebenden seelischen Organismus jedes einzelnen.<
Carl Gustav Jung, GW XI, 37


2007/07/07 (10:10) from 84.173.172.131' of 84.173.172.131' Article Number :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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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이해



사변과 이해의 세계에서 신은 요청의 의미가 강하다. 사변은 경험에 대한 해석이며, 경험의 다양성에 대한 통일된 해석에는 그 근거가 불가피하게 요구되기도 한다. 경험에 대한 일관된 해석은 경험의 일관된 근거인 신과 자웅동체의 관계를 보여준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이러한 요청으로서의 신의 성격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구상하는 도덕원칙의 근거를 최고로 완전한 창조주로부터 끌어낸다. 물론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순수한 사변이성을 통해서 신을 만날 수는 없다고 주장을 한다. 그럼에도 결국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과 신 사이의 이질성은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백두에게 있어서도 신은 일종의 요청 개념이기도 하다. 물론 이 요청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낮은 단위의 다양한 체계적 모순들을 체계내적으로 극복하고 높은 범주의 통일성을 향해 상향하다 보면 결국은 몇 개의 큰 체계의 덩어리들이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큰 체계들 또한 서로 모순적으로 병존하게 된다. 이 모순적 병존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개념이 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덩어리들의 총체적 연관성은 결국 신에 의해 존립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의 요청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그 요청의 과정은 매우 치밀하며 모든 이성적 논증 속에서 구성되는 합리적 절차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성이 찾는 신에 관하여 흥미로운 점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신을 만나는가? 라는 질문이다. 많은 경우 신앙인은 신에 대한 체험 속에서 신을 만난다. 이 체험은 분명히 인격적이며 정서적이고 또한 자명한 체험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대면하는 신과, 사변을 통하여 요청되는 신의 관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 앞에 우리는 정직하게 서보고 우리가 그간 가져왔던 신과의 조우방식을 구체적으로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믿음과 이성에 의해 다져진 신을 만나는 두 길에 대한 오해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 오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은 아마 이런 것들이리라. 즉 신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만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일견 정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가슴은 직접적인 체험의 지평이며, 머리는 일종의 가설과 이론의 지평이기 때문이다. 즉 체험이 이론보다 더 직접적이고 의미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머리가 짜내는 그림은 사실 가짜로 여겨질 소지도 있다. 가슴은 거짓말을 못하지만 머리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여기에는 한국이라는 신앙적 생활 세계의 특수성도 가미되어 있다. 즉 무엇에 대한 지식은 무엇에 대한 믿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문화 안에 우리 신앙공동체가 놓여 있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이성의 폄하에 관한 부분은 조금 더 상세하게 주목해 봐야 할 것이기도 하다. 우선 믿음은 지식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전통적 명제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체험이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체험은 믿음과 지식의 방식 모두를 포괄하는, 소위 한 인간이 저 밖의 세계와 신을 접촉하는 존재 방식이다. 여기에서 지식은 간접적 체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체험이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식사하는 것이 국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바와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한편으로 신에 대한 믿음은 비매개적 체험이며, 신에 대한 이성적 지식은 매개적 체험이기도 하다. 체험의 비매개성은 개인의 차원에서 내면성, 실존성, 궁극성으로 드러나고, 체험의 매개성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소통가능성, 객관적 담론가능성을 품고 있다. 물론 순수 객관의 망령이 점점 퇴출 되어가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에서 완벽한 소통과 담론가능성은 여전히 환영의 성격을 지닐 수 있다.  

믿음이 신을 향한 직접지적인 대면이라면 이성은 신에 대한 간접지적인 성찰이기도 하다. 믿음과 이성은 그러므로 지식의 성격을 공유하며, 또한 체험의 성격도 여지없이 공유한다. 그러므로 이성과 믿음이 다르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이성이 믿음에 비해 신을 조우하기가 어렵다는 주장은 상당히 신중하게 말 되어져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신이라는 실재를 대면하는 두 채널인 믿음과 이성을 소위 선과 후가 존재하는 가치개념으로 설정한다면, 그 순간 그 관점은 관성상 신비주의적인 정조로 귀결될 소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즉 신의 신비를 믿음은 우선적으로 대면하고, 이성은 소위 믿음의 프리즘에 의해 흩어진 빛을 부차적으로 대면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그러므로 이성은 신을 생생하게 조우한 믿음의 체험을 따라가지 못하는 서자의 그늘이 된다.

신에 대한 믿음과 이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이 구현해 내는 사랑의 열매에 의해 드러난다. 적어도 기독교의 전통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모든 조우의 근거와 그 의미를,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의 사랑과 나눔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그 삶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메시지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의미를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핵심이다. 게다가 우리가 믿고 이해하는 신이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성서의 말씀은, 사랑의 삶이 기독교의 핵심임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을 창조하기 위한 수단의 의미에서, 흔들리는 이 세상의 기초가 되는 신, 나의 모든 생의 기반이 되고 나의 도덕의 근거가 되는 신, 더 나아가 우리의 각자의 삶을 훼손하지 않고 그의 세계에서 모두 기억하고 보존하시는 신에 대한 이성적, 혹은 요청적 이해는, 우리가 신의 현존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그를 의심없이 믿는 태도와 궁극적으로 모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상위 관점에서 믿음과 이해는 대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신이라는 실재를 대면하는 믿음의 직접성과 이해의 매개성에 의하여 이 양자의 행위가 겉으로는 모순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나의 믿음은 신의 어느 한 모습을 거부하지 않는데, 나의 이성은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 사실 하나의 대상을 각각의 두 눈으로 볼 때, 그 두 영상을 대상의 통일성에 입각하여 주의 깊게 공명-삼투시키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은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믿음과 이성을 통한 신의 대면은 마치 베이트슨의 핵심 개념인 스터캐스틱(stochastic)한 과정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결론은 분명해 보인다. 신에 대한 믿음과 이성적 이해 사이의 경합은 결국 우리 생이 드러내는, 사랑의 결실 속에서 융해가 되어야 할 것들이다. 사랑의 실현은 신을 향한 우리의 이성과 믿음이라는 존재방식보다 더 궁극적이다. 게다가 믿음과 지식이라는 도구는 구원을 소망하며 생의 견습공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모두 다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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