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 Leben




>Die wahre Geschichte des Geistes ist nicht in gelehrten Büchern aufbewahrt,
sondern in dem lebenden seelischen Organismus jedes einzelnen.<
Carl Gustav Jung, GW XI, 37


2008/07/27 (18:28) from 121.129.0.58' of 121.129.0.58' Article Number :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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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나라 임하시고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나라"라는 대망이 마음에 있다.
그 나라는 우리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나라를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상태 그리고 우리의 삶의 가치관을
문제삼아야 할 만큼 이는 아주 중대한 개념이다.

'하느님나라'에 대한 고민에는 매우 복잡하고
헤아리기 쉽지 않은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이는 꼭 하느님나라에 대한 회의를 뜻하지는 않는다.

우선 한 개인의 삶에서 하느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실현하려 부단히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 하느님나라는 모든 이들과의 안녕과 조화를
품고 있는 영광과 평화의 나라이기에
소위 내가 아무리 잘 해도 그 나라가 올 수는 없다.

게다가 하느님나라는 우리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감수성과 그에 기반한 판단만을 넘어서는
다차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나라는 그저 말씀과 로고스의 디지탈적인
실현에만 머무르지 않은 전인적이고 전체적인
국면을 담고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느님 나라는 그저 정치시스템의
완성된 민주주의, 복지시스템의 효율적인 구현과 같은
소위 세계의 하부토대에서만 만족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를 포함하면서도 그를 넘어서는 나라일 것이라 나는 믿는다.

내가 하느님나라에 대한 회의를 자꾸 갖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하느님나라라는 고상하고 종교적이고 미학적인 전우주적 사태를
고민하기 이전에, 그 하느님나라의 기초적인 맹아라고 할 수 있는
상식적인 생각, 즉 우리 세상이 예전보다 더욱 더 '건강하고', '평화로우며'
'살맛나는' 곳이라는 기대에 우리의 현실이 전혀 미치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이 이전보다 더욱 더 '진보되고
살만한 세상이 되어간다'는 어떠한 인식과 확신을
아직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이 이전보다 더욱 더
비인간화되고 냉혹하게 변해가며 끊임없는 경쟁의 환경 속에서
극심한 통증과 진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나라'를 단지 종교적인 망상이나 암호로 놓아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합리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러한 접근의 방식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신 이 터전 위에서 얼마나 우리 피조물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느냐와 결부된다. 이 땅위의 피조물들이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곳이며
이 땅위의 피조물들이 서로 조화와 화합을 이룬다면 그것은
비교적 하나님 나라의 관성과 방향을 타고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조화라는 키워드의 차원들은 1) 정치, 2) 경제 3) 사회 4) 문화 5) 종교적 측면 속에서 다양하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혹여라도 전자의 차원들이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는 질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정치경제사회적인 차원의 조화가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 나라라고 한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독재가 판을 치고,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으며, 아이가 중병에 들어도
병원치료를 받을 수 없는 이 극악한 상황에 존재할 수 있는
하느님나라란 무엇일까?

물론 가능할 것이다. 하느님나라를 순수하게
나 자신의 내면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으로만 해석한다면
주위 가족과 사회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도
나는 하느님 나라의 그 영광을 체험하고 있다고
고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제 TV에서 지켜본 세 방송 1) 엘리트변호사들의 수임료 및 이익수당
2) 강남에 존재하는 난민촌 3) 비정규직 인력과 젊은 노숙자들 방송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오히려 성서에서 보여준 그 하느님나라의 꿈과
비전을 향해 한층 더 가까이 나아간 듯한 인상보다는
점점더 비인간적이고 비신앙적인 방향성에 놓여 있다는 인상을
받기에 충분한 내용들이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평화와 조화보다는 경쟁과 약탈의 정신이
우리의 내면과 사회를 끊임없이 사로잡고 있으며
이러한 맨탈은 신앙인이 꿈꾸는 하느님나라의 비전과는
전혀 거리가 먼 현실이라는 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 자신의 실존적이고 개인적인 이해와 판단을 넘어서서
우리의 현실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수치와 자료를 찾고자 노력하였으며
중산층이 붕괴되어가고 있다는 수치를 제시한 자료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유경준 외, KDI 이슈분석: 중산층의 정의와 추정 (2008)

이 수치는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이 양극화의 극심한 관성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더 나아가 중산층에서 이탈한
이들이 빈곤층으로 이동되면서 사회체계의 붕괴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지시한, 상당히 중요한 지표를 담고 있는 자료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부조리한 구조로 우리 사회가 치닫고 있을까를
여러 방식으로 터치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신학적 관점에서
이 극심한 빈곤층의 증가에 대한 현실을 진단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성장지상주의, 물신주의에 극심하게 도취된 나머지
우리의 이웃에 대한, 나의 이웃에 대한 관심을 잔인하게 끊어버린다는
점이다.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 모두 욕심에 가득찬 '구부러진 존재'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인간론의 문제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의 핵심적 동인인
물질을 과잉 소유한 이들의 욕망과 부조리들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최소한 물질을 과잉 소유한 이들이 신앙인이라면
최소한 신앙의 핵심문법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 속에서
이웃에 대한 관심과 나눔과 연대에 충실해야 함은 분명할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연약한 이웃인 빈곤층의 감소를 위해
기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빈곤층의 증가에 편승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비교적 객관적인 대답과 수치를 얻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국의 빈곤층과 부유층의 객관적 지표와
한국 기독교인의 지표 사이를 비교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이들의 눈물과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대망 앞에서
그리고 우리 앞에 펼쳐진, 관심과 나눔과 연대는 사라진 무한경쟁의 현실 앞에서
주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
어디에 서야 할까. 그리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

그에 대한 답은 사실 그리 어려워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의 삶과 몸뚱이가 그 알고 있는
답을 향해 나아가고 노력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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