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몸이 무척 아팠다. 병원에서 약도 타다 먹고, 조금은 여유롭게 시간을 채워 나가니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몸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요즘 마음이 심히 아프다.
예수는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수난과 고초를 감내하셨다. - 그가 십자가를 지면서 흘린 피와 땀을 생각하노라면, 그를 <선생>으로 따른다는 우리네의 족속들이 얼마나 나태하고 게으른 족속인지를 뼈속 깊이 사무치게 한다. 우선 나부터 선생 이름만 팔아먹는 사기꾼 제자들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그러나 예수는 그 기나긴 수난의 터널을 지나고 그 어두움을 극복한 승리자이다.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건은 삶의 어두움과 고통과 슬픔을 엿보려는 불우한 나의 의식을 찢고, 인간의 삶은 결코 어두움과 고통과 슬픔에 깊이 침잠할 수 밖에 없는 가녀린 운명이 아님을 성찰하게 한다. '값싼 은혜'의 승리가 아니라, 불름하르트의 그 절규와 환희로서 다가오는 "예수는 승리자!"의 메시지는 주눅든 인간의 삶의 지평을 더욱 드넓고 자유롭게 인도한다.
그러나, 예수는 어두운 세상을 넘어 부활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아니 나 자신은 여전히 어두운 세상과 그 세상성에 깊이 절망하고 있다.
전날 늦게 몸을 추수려서 그러했는지, 토요일 새벽에 나는 꿈을 꾸었다. 온 도시가 화염에 휩싸인 꿈이다. 그 커다란 도시의 단아한 건물들이 중심을 잃으며 횡하니 도시 거리를 향해, 사람을 향해 달라들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떨어지는 폭탄의 굉음에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몇 척의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쉽사리 내가 거할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급박한 와중에서도 나의 주위를 돌아보니 그 폭탄과 불덩어리에 이미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강렬한 꿈에서도 충격은 의식의 시간을 마취시킨다.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린 속도로 그들의 처참한 시신은 나에게 비추어졌고 그 길다란 시간의 흐름만큼 마음은 깊게 아파왔다. 무엇인가 슬피 치밀어오르는 마음에 흐느껴 울다가 꿈을 깨었다.
인간은 다양한 꿈을 꾼다. 한 가지 느끼는 바는 전쟁에 대한 꿈은 인간에게 매우 고통스럽고 두려운 감정을 체험하게 한다. 전쟁의 꿈은 여타의 꿈과 같이 여유롭게 "이건 꿈이야"라는 거리두기를 전혀 둘 수 없다. 그래서 전쟁의 꿈을 꾸다가 깨면, 그 공포와 두려움에서 한 치 벗어날 수 있는 그 안도감, 그리고 그 전쟁은 결코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다는 현실감을 갖게 되기 때문에 긴 한숨으로 그 꿈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전쟁의 공포"에 대한 감각을 그 꿈을 통해서 체득하게 된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새벽 네 시를 향하고 있었다. 여전히 예수가 수난의 길을 겪고 있느 기간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고통과 그 절망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되는구나 하는 안위를 갖고 꿈의 꼬리를 잠결에 추스리려다, 나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현재 이 지구 또다른 곳에서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뒤늣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머나먼 발칸반도에서 세르비아군에게 사로잡힌 3명의 미군들의 모습이 머리 속에 홀연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의 코소보 난민들의 기나긴 행렬이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전쟁을 꾸고 있었지만 그들은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에는 몇 시간 후면 십자가를 진 예수가 부활하시리라는 믿음이 환하게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오늘 이 땅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고통과 신음이 놓여 있었다.
세르비아가 알바니아 민족에 대한 인종청소를 감행하고, 나토와 미국은 도덕의식을 가지고, 혹은 그 이상의 의도를 가지고 세르비아를 공습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사뭇 긴장된 어조로 미국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놓고 있다. 유고는 밀로셰비치를 중심으로 핏발서린 민족의식을 농축해놓고 있다. 로마 교황청은 부활절을 전후로 해서는 정전을 할 수 있기를 양측에 전달하였다 한다. 그러나 양측 모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발칸반도를 둘러싼 상황을 해석하는 입장도 비교적 분명하게 대립적인 견해로서 갈라진다. 민족분쟁을 왜 개입하는가? 왜 미국이 국제경찰을 자처하며 내분에 관여하는가? 아니면 인종문제와 인권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결코 어떠한 내적인 근거이자 수단으로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에 발칸반도 공격은 나름대로 정당한 도덕적 근거가 있다고 보는 견해들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어느 한 쪽의 분명한 자리에 서는 것의 난점을 아는 대부분의 여론들은 그저 사실을 보도만 하기에 급급한 지경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보건데 유럽과 미국의 언론들은 발칸 전쟁 기사가 쑥대밭을 이루고 있다.
엊그제 100여명의 세르비아계인들은 대량학살로 무참하게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심히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죽음이 생생하게 보도되는 현장을 보면서 그들의 가슴에 꼭 쥐고 있는 우리의 죄성과 그 잔혹스러움을 보았다. 그들은 인간의 죄를 지고 저렇게 한 세상을 떠나가고 있었다. 그 기나긴 죽음의 행렬을 보고 흐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는 실로 한 생명에게 죽음을 가하는 것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정당한 논리와 이데올로기는 없다. 인간에게 생명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생명의 주격이 아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 눈 앞에 생생하게 벌어지는 참상 앞에서 진정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참으로 실감하게 된다.
인종이나 국가나 모든 제도는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생명을 위하여 존재하는, 생명을 떠받쳐주는 문명의 자연적 조건이나 보완적 기제일 지언정,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근본적인 조건과 기제는 아니다. 다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 인종을 위해서 개인을 희생한다. 제도를 위하여 구성원은 희생한다는 논리는 자칫하면 가장 소중한 가치를 도외시한 채 행하는 이성의 착시인 것이다.
인종을 위하여 개인을 처참하게 살해하는 것, 그리고 국제평화를 위하여, 혹은 한 국가의 은밀한 가치체계를 끈질기게 관철하기 위하여 맞불을 지르는 것, 어쩌면 이는 모두 그칠 수 없는 과부화된 문명의 기형적인 속도를 갖고 있기에 오리 모두는 죽음을 향한 전차에 한 몸을 타고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모든 이성을 동원하여 오늘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추상화시킨다면, 문명과 전체가 전쟁의 뜨거운 톱니바퀴에 찢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자연은 눈 하나 끄떡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자연에 문명이 등장한 때는 24시간에서 막판 3분 전에 태어난 미숙한 존재이기 대문이다. 침착하지만 사려 깊은 친구는 싸늘하게 내뱉는다. "그래. 이 참에 다 죽어버리자." 그렇다. 문명에 대한 자연의 책략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처방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멈출 수 없이 가속화 되어버린 인간 욕망의 과부화를 어떻게 단절시켜야 하는가? 개인의 보조적 근거인 인종, 개인을 보조하는 기제인 국가가 오히려 개인의 소중한 자리를 대체하고,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집단적 인격성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지탱해 나아가는 프랑켄슈타인이 되어버렸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사이의 기본적이고도 건강한 조화와 협력의 폭 마저도 상실되어버린 이 절박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꿈꾸어야 하나. 오늘의 역사 속에 우리가 받아들이고 고백해야 할 실타래같은 그 카이로스적 사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일요일, 기쁜 부활절, 예수는 오늘의 죄와 어두움과 전쟁의 공포를 박차고 홀연히 부활하셨다. 그가 죽기까지 흘리신 피와 눈물의 고귀한 댓가로 그는 영원의 커다란 대지를 향해 자신의 생명을 잇대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맞이하여 모든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간절히 희구한 그 교황의 간절한 외침은, 더욱 크게 터지는 전쟁의 포고 속에 자취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생명의 핏자욱에 그 가느다란 울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셔서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하루빨리 전쟁과 기근과 갈등이 없는 평화의 은총을 나누었으면 하는 바램이 너무나도 간절하다. 하지만 그는 이 어둠과 죄악으로 점철된 세상에 발을 떼셨고 부활하셨다. 그의 빈 자리가 너무나도 크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무나도 예수가 아쉽다. 오히려 그는 더욱 혹독하게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 자신이 몸소 이 땅의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세상의 죄를 지라고. 세상의 죄를 우리 자신의 지라고. 세상의 십자가를 각자 지고 죽음 마저도 두려워하지말고 그 좁은 길을 능히 걸어가라고 말을 건네신다.
어디론가 갈 곳이 없이 그저 걸어만가는 코소보 난민의 그 기나긴 행렬 속에는 문명의 묘연한 처절함이 있다. 아스라히 생명을 마감한 수많은 주검의 심장에 우리의 죄와 욕심이 가시로 박혀 있다. 그래서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 슬픔과 어둠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진 이 현실에서, 어떻게 예수의 제자로서 첫 발짜욱을 떼어야 할 지를 모르겠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그립고, 세상이 두려울 따름이다.
며칠전 아침조간 신문에 우연히 비추어진 이 고통스럽고 가슴아픈 장면을 보면서 나는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쪼록 하루 빨리 이 땅의 눈물이 거두워지고 하나님의 평화와 은총이 우리 사이에 흐르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성금요일을 넘어
예수의 부활을 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