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6/06 (15:45) from 203.252.17.174' of 203.252.17.174'	Article Number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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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형주 선생님의 죽음 앞에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 故 정형주 선생님의 죽음 앞에서 일주일 전 월요일이었다. 서울의 학원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수원에서 스쿨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연히 정형주 목사님과 같이 자리를 하게 되었고, 차에서 내려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백주 대낮의 열기와는 달리 찬 바람을 맞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기나긴 대화가 오고가던 중 불현듯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묘한 말씀을 하셨다. "영어를 쓰지 않으니, 자꾸 영어를 잊어버리게 되네." 그 특유하고 편안한 억양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셨다. 그것은 결코 기억력의 상실에 기인하여 영어를 망각하는 선생님의 한 개인사적인 편력이나 경험담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문명의 유유한 현실과 같은 '망각'의 의미를 더욱 더 강렬하게 묻게 만들었다. 나는 다시 말을 건네었다. "정처없이 흐르는 저 정신사를 바라보면 그 놀라운 천재들의 반짝이는 정신과 학문도, 후대에 온전히 전승되지 못하고 가련한 운명과 같은 죽음 앞에서 아스라히 사라지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인 것 같아요. 학문은 바로 과거의 정신사의 찬란한 전통에 한 줌 벽돌을 성실하게 쌓는 과정인데, 이런 의미에서는 매우 안타깝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찌 보면 참 학문이 공허하다는 느낌을 나도 받아. 그저 다시 망각하고, 또 다시 그 망각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무엇인가를 상기하고 말이지." 거의 기숙사를 다 도착할 즈음에 나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그 공허함은, 단지 학문에서 뿐만이 아니라, 종교에서도 느낄 때가 있을 꺼야. 나도 가끔씩 그 스산함을 느껴." 적지 않게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한 줌 글과 언어와 학문이 단단한 세상 앞에 무기력하고, 자신이 걸어가는 삶 앞에 전혀 친화력을 지닐 수 없을 때 커다란 회의와 좌절, 그리고 학문의 그 공허함을 읊곤 한다. 이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혼과 닿아있는 학문하는 자의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안전핀의 역할을 수행한다. 나 또한 그 학문의 공허함과 망각앞에 선 인류의 무상함을 가슴 깊이 느꼈기 때문에 선생님께 나의 고백을 건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신념과 종교적 삶에 대한 회의와 낯선 성찰은, 마치 종교적 타부를 건들면 죽음의 강을 건너게 되듯이, 나에게는 거의 부재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종교는 나에게는 강제의 대상이지, 의심과 회의의 대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의 정체성을 지키는 가냘픈 선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종교에 대한 회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하염없는 회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묘한 무의식의 책략이었을까? 한 없이 잔잔했던 나의 마음을 휑하니 건들고 간 그 날 선생님의 한 마디는, 나의 머리에서 깊은 울림을 일으키며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일 주일이 지난 토요일 아침 그저 무심코 황구지천을 바라보고 있다가, 옆에서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 후배와 아침 인사를 하던 중, 그 후배로부터 정형주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예상 가능한 의미의 컨텍스트 위를 운위하는 텍스트의 울림이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 후배의 한 마디는 아무런 뜻을 얻지 못한 '소리'에 불과할 뿐 나에게 어떠한 공감과 의미를 얻지 못하였었다. 심지어, 검은 라인에 둘러 쌓인 선생님의 영정과, 낡은 병원건물 벽에 "故 정형주 목사 빈소"라고 박혀 있는 글자를 토요일 오후 전주 예수병원에서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온 지금까지도, 나에겐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내가 선생님을 만나게 된 인연은 3년 전 "구조주의와 구조주의적 성서해석"이라는 논문을 준비할 때였다. 선생님은 영국 쉐필드 대학에서 구약성서에 관한 구조주의와 기호학을 공부하고 돌아오셨다. 선생님께서는 그 논문에 관련한 아이디어와 풍부한 자료, 그리고 논문의 목차까지도 세심하게 챙겨 주셨다. 나는 선생님과의 학문적인,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서, 구조주의와 구조주의적 비평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얻게 되었고, 논문도 마무리하고 학술제 논문 발표도 별 탈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구약성서문학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서, 매우 큰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책에 그저 꽂혀 있는 저 구조주의 논문은 이후의 수많은 논의와 접붙여지기를 간절히 원하였고, 그 소망을 무심코 지나쳐버린 나 자신의 게으름은 때로는 자책으로, 때로는 장일선 선생님, 홍경원 선생님, 양권석 선생님, 정형주 선생님의 글에 대한 탐독으로 어스름하게 대체되곤 하였다. 한참의 공백기간이 지속된 후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고, 다행히 대학원 과정 가운데서 선생님의 수업이 열려서 별다른 고민 없이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실로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삶의 큰 행복이다. 그 행복에 겨운 소리를 수강신청을 하는 기간에 대학원 복도에서 만난 선생님께 건네드렸다. "선생님, 저 이번에 선생님 세미나 들어요. 많이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께서는 그 특유의 구수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아이구, 나 실력 없어. 별 이야기 없으니, 듣지 말어." 하셨다. 나는 무척 난감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나는 한참 부족한 학생들에게 저런 이야기를 하실 수 있는 그 소탈함과 진솔함에 감동하였다. 어쩌면 선생님은 정신의 깊은 단계인, 자기 자신의 모습 마저도 초극하여 볼 수 있는 그 놀라운 겸손과 성찰을 그 안에 갖고 계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1999년 봄 학기 선생님의 세미나를 같이 참여하는 우리 남중이, 재훈이 형, 대호 형, 동희 형, 은혜, 그리고 나는 서로 열심히 듣고, 새로운 이야기에 놀라워하고, 토론하였다. 우리들의 별볼일 없는 억지춘향의 논리마저도, 선생님께서는 끊어버리지 않고 우리들의 그 뒤틀린 논리를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볼 수 있도록 정말 끊임없이, 혹은 정말 넉넉하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받아주셨고, 위로해 주셨다. 선생님은 결코 우유부단한 분이 아니시다. 또한 선생님은 지적으로도 결코 아둔한 분이 아니시다. 선생님의 말의 어눌함의 이면에는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고 단단하며 열정적인 생각의 편린들의 사유의 공간에서 마그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떤 신학과 타자의 논리에 젖줄을 대지 않고서도 자신이 직접 성서의 무한한 깊이를 향해 온 몸을 가열차게 던진다는 것은 크나큰 용기와 힘과 지성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결코 불가능한 과정인 것이다. 실로 우리는 선생님이 세상을 바라보시고 성서를 바라보시는 그 구체적이고도 적나라한 시선과 풍경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놓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미나가 끝나면 같이 밥을 먹으면서 선생님과 가슴과 가슴으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우리 선생님은 문학을 진실로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강의 첫날 우리에게 문학이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정신을 "인간애"로 고백하셨다. 또한 인간에 대한 애정은 바로 성경의 기본 정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아, 그렇구나. 인간을 따스하게 바라보시는 저 시선은 문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에서 피어오른 결실이었구나.' 나는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선생님의 세상을 보는 따스한 시선은 문학에 대한 열정의 또 다른 면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정말, 진실하셨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그림자(Shadow)를 두려워한 나머지 타자에 비추인 자신의 그림자에 거의 본능적으로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인간은 타인에게 자신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 보다 밝은 면을 드러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자신의 그림자를 자신이 고백해 버리는, 그래서 그림자가 드리워질 처소 마저도 그저 훌훌 털어내어 버리시는 분이시다. 어느 누가 자신의 인생의 실수와 실패와 부족한 점을 그렇게 쉽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림자를 그림자로 남겨둘 수 없는 그 투명한 삶의 자세, 또한 타인의 그림자를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시는, 그래서 타인이 스스로 자신의 그림자를 새롭게 직시하게 하는, 실로 인간의 영혼을 아는 선생님이셨다. 학자와 선생은 다르다. 학자는 제자나 문명을 향해 지식을 전문적으로 해명하는 일련의 그룹이라 한다면, 선생은 제자나 문명을 향해 자신의 가능성과 새로운 운명을 창출하게 하는 사건을 만드는 이들이다. 학자는 사건을 해명하지만 선생은 사건을 만든다. 나는 정형주 선생님을 통하여 한신의 수많은 제자들이 그들의 꿈과 가능성을 발견하였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렇게 선생님은 많은 사랑의 언어와 희망의 언어를 그 마음 안에 품고 계셨고, 우리들에게 한 아름씩 나누어주셨다. 우리들은 실로 선생님의 사랑에 빚진 제자들이었다. 어쩌면 아침이슬과 같은 가련한 인생의 운명을 일찌감치 직증하고 계셨을까. 그렇게 길쌈하고 수고하는 수많은 이들의 삶의 소중함과 깊은 공허함을 선생님은 알고 계셨을까. 선생님의 가난의 힘은 인생의 운명을 아는 자에게만 허락된 하늘의 선물이었을까. 시끄럽게 사는 우리네의 삶의 치열함과는 끊임없이 대극적인 자리에 서고 사셨던 선생님은 우리 제자들의 마음 안에 고여 있는 그 슬픔과 갈등과 컴플랙스에 더 이상 침윤 당하지 않고 슬프고 고단하고 짧은 삶,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아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셨을까.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Schonheit wird die Welt erlosen)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그 정신을 벗삼아 우리를 그렇게 만나셨던 것일까. 나에게 뼈 속 깊이 사무친 선생님에 대한 인상은 바로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이셨던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화두, 즉 종교는 치유의 논리이고 문학은 새로운 인간상의 구현의 논리임을 가슴으로 조금씩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묻는다. 선생님은 왜 우리를 훌쩍 떠나셨을까. 그렇게 착하고 좋으신 분이 한 마디 말도 없이 우리 옆에서 홀연히 떠나셨을까. 군대라는 음울한 사각지대에서 국어사전을 통째로 암기했다던 젊은 작가 김소진이 몇년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때 그렇게도 마음이 아팠다. 그가 돌아간 지 며칠 후 아침에는 몇 년전 종로서적 문학 파트를 스쳐 지나가다 우연이 만난 박재삼의 시들이 햐얗게 떠올랐다. 뼈끝까지 가난하였던 시인 박재삼씨가 별세하였다는 기사가 그날 신문의 하얀 여백에 검은 잉크로 찍혀 있다. 실로 세인의 죽음과는 달리 문학하는 이들의 죽음은, 사뭇 잊고 살았던 삶의 근원적 의미를 채근하게 한다. 자명하게만 다가왔던 우리네 삶이 어느 순간 한없이 낫설어진다. 문학의 언어가 자명한 사물을 교란시키듯이, 문학을 사랑하는 자의 죽음은 아무도 물음표를 던지지 않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교란시킨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은 모든 존재가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와해되는 서글픔이 아니라, 마치 그토록 가고싶어 했던 본향으로의 황홀한 귀환과 같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서 암울한 현실은 언제나 면역 결핍의 영역이다. 오히려 그들의 고향은 삶 저편의 신성한 숲일런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 쉘러는, 순수한 정신은 세계에 침투해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한다. 바로 하늘의 문화가 숨쉬는 이들의 정신에 있어, 오히려 세계는 잔혹한 여정이었을 것이고, 죽음은 오히려 곱게 다가오는 구원의 빛일런지도 모른다. 나는 정형주 선생님도 우리가 쉽게 포기하고 말았던 그 순수의 세계로 다시 귀환하셨다고 믿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의 고비를 많이 넘긴 나에게 '죽음'은 진실로 서럽고, 무섭고, 끔찍하고, 나를 끊임없이 광활한 물음의 대지로 밀어내는 잔혹한 언어이자 나의 운명이다. 심지어 석사학위 논문에까지 달라붙어 있는 나의 신학적 사유의 악성 종양이다. 그러나 왜 이렇게도 우리 선생님의 죽음 앞에서는 모든 감각을 거세당한 오체불만족의 인간으로 서 있을까. 아니 왜 이렇게도 선생님의 죽음이 우리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을까. 여전히 선생님은 우리 귓가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말을 계속 건네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 선생님의 죽음을 아파하기 전에, 선생님의 가난한 삶과, 가슴아픈 죽음에 암묵적으로 가세한, 썩어 문들어진 강사착취의 대학사회에 커다란 돌을 먼저 던져야 한다는 당위 때문일까. 아니면 지나친 교권에 사로잡혀 있는 신학계에 냉소를 뱉어내야 한다는 우리 신학도의 지나친 강박관념 때문일까. 그것만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선생님을 통하여 내리받은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크게 남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인 것이다. 선생님의 부재 앞에서, 우리에게 남아있고 우리 가슴에 숨쉬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는 이렇게 놀랍게 발견하는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가져가지만, 우리의 사랑은 죽음을 넘어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남는 것은 사랑 밖에 없는 것이다. 선생님의 사랑은 선생님의 죽음을 넘어서서 우리의 심장을 타고 우리의 혈액에 그렇게도 깊이 수혈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죽음은 한 없이 서럽지만, 선생님의 사랑은 우리의 가슴 안에 이렇게 꿈틀거리고 있다.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 부끄럼 없는 우리 제자들이 되기 위해서,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선생님의 사랑을 망각하지 않고, 선생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종교의 스산함에 대하여 생각하고, 선생님의 죽음에 서러워하고,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눈물을 흘려도 늦지 않으리라. 유독 선생님이 돌아가신 어제부터,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1999년 6월 6일 일요일 오후 "하나님은 사람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 아, 우리 인생의 모든 날은 순식간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은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年數가 칠십이요 또 건강하면 팔십이라 할 지라도, 그 年數의 자랑은 단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나니, 우리는 날아가나이다." (시편 90:3, 9-10)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지옥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가서 8:6) 홈페이지메인 전철논문 한국논문 사물의질서 연구실 방패와창 꼬람데오 新자연신학 엽서한장 토론광장 추천사이트 방명록보기 신학동네메뉴